닥터 노먼 베쑨
장춘희
우연한 기회에 [닥터 노먼 베쑨]을 읽게 되었다.
번역문은 우리나라 작품만큼 문장의 감칠맛을 음미 할 수 없어 아무리 베스트셀러라 하더라도 별로 읽고 싶은 충동을 갖지 않지만 닥터라는 활자가 나로 하여금 책을 펴보게 했다.
서문에, 질병을 돌보되 사람을 돌보지 못하는 의사를 작은 의사라 하고, 사람은 돌보되 시회를 돌보지 못하는 의사를 보통 의사라 하며, 질병과 사람 사회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그 모두를 고치는 의사를 큰 의사라 한다.
이 책은 세균이든 사회체제이든 인류의 건강과 생명을 좀먹는 것이라면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온몸으로 맞섰던 진정한 큰 의사 노먼 베쑨의 전기이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한 노먼 베쑨은 외과 의사를 훨씬 뛰어넘는 사람이다. 고통받는 인류에 대한 지극한 열정 때문에 스스로를 위험속으로 던져 넣은 그는 깊은 존경과 사랑속에 중국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가 되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과 열정을 쏟고 있는 주인공의 삶을 읽어가는 동안 나의 아버지가 오버랩 되어 애절한 그리움이 전류처럼 가슴에 전해오며 눈시울을 흐리게 한다.
아버지는 베쑨보다 15년쯤 뒤에 평북 용천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맛 형의 장남과 2살 아래로 서울대학의 전신인 경성제대 의학부를 2년 터울로 졸업 한 후 내가 태어난 진남포에서 조카와 삼촌이 함께 병원을 개원하였다.
오라버니는 외과를 아버지는 내과를 전공했는데, 수술실과 X-Ray 촬영실을 갖춘 개인 병원 중 큰 병원이었다. 아버지의 의술은 죽을 사람도 살린다는 명의로 소문이 났고, 병원 간판도 '장 내과'병원이라고 명명했다. 병원으로 오는 환자도 많고 멀리 도서지방으로 왕진도 자주 가야해 가족과 오붓한 시간은 별로 가져보지 못하였다. 가족이 아파도 우선순위가 되지 못하고 저녁식사 이후에야 면담이 되었다.
섬으로 왕진 갔다 풍랑이 일면 하늘이 내게 일을 시킨다고 몇 일 이라도 그곳에서 의료봉사를 하셨다. 아버지는 형편이 어려운 젊은이들을 집에 기숙시키며 약제사, 간호사의 기술을 습득하게 했다.
몇 년 전 서울에서 매년 열리는 진남포 시민의 날에 꼭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 처음으로 운동장에 갔다. 장 내과 병원 따님을 찾는다는 방송을 듣고 본부석에 갔더니 머리가 희끗한 노신사분과 나보다 훨씬 연상의 할머니가 나를 한참 바라보다 "춘희?" 라고 반문한다. 나는 전혀 기억이 없는데 유치원에 다녀오는 나를 병원으로 불러 과자를 사주면서 노래와 무용을 시켰노라고, 손을 잡으며 반겼다. 할머니는 간호사로 있었고 노신사는 어려서부터 잔심부름을 하며 조제일을 배워 약제사로 있었다고, 피난와서는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로 무의촌에 정착해서 의사행세하며 병원을 차렸다고 한다. 삼남매 모두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다고 원장님에게서 배운 은혜가 하해와 같다며 공손히 나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내 어릴 적 명절에 여유있는 집 딸들은 설빔으로 예쁜 꽃무늬가 있는 일본 옷을 입고 자랑을 하였다. 유난히 샘이 많던 나는 울며불며 엄마에게 졸랐고 엄마의 빽이 소용없는 것을 알고는 내 비장의 무기인 며칠 동안 밥을 않먹는 시위로 겁을 줬지만, 아버지는 요지부동 일본사람 딸이냐고 크게 꾸짖으셨다.
베쑨은 포탄속에서도 수많은 병사를 수술해 생명을 구해준 유능한 의사이지만, 정작 자신에게 닥친 병마에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처럼 아버지도 당신 가족의 병에는 명의의 역활을 하지 못하였다. 큰 오빠가 명문중학교에 입학한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장티프스로 별안간 돌아가자 어머니의 상심은 아버지에 대한 큰 원망으로 꽂혔고, 해방 직후 어머니마저 그 흔한 전염병을 이기지 못하고 소문난 명의의 가슴에 쓰린 상혼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광복의 혼란스런 세파 속에서 허망하게 잃은 젊은 아내의 죽음에 넋을 놓을 겨를이 없었다.
해방되기 전에 도시 하늘에 B-29 은빛 비행기가 자주 보이자 아버지께서는 진남포 병원을 정리하고 의과대학에서 운영하는 평강 결핵환자 요양원에 부원장으로 왔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 원장이 쫓겨가자 그 요양을 맡게 되었고 38선이 막히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일체의 운영비가 조달되지 않아 아버지의 사재로 그 많은 직원들의 월급과 운영비를 지급하였다.
우리나라 전역에 신탁통치반대 운동이 불길처럼 번지던 때 그 지역 유지로서 지도자 입장이 되었다. 아버지는 사상이나 정치와는 무관한 의사이므로 그곳에 주둔한 소련군 사령관에게 순수한 시민운동임을 강조하며 선두에서 반탁운동을 지휘하였다.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던 밤 어린 두 남매를 돌아보며 내무서원의 총부리에 밀려 광란하는 눈발속으로 사라진 그 무서운 밤이 아버지와 마지막 이별일 줄이야!
당시 의과대학생으로 요양원에서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던 사촌 오빠가 우리 남매를 할아버지 댁에 데려다 주었다.
이듬해 신의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둘째 댁 오라버니에게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왔다.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주도한 26명의 사람들이 소련 하바로프스키 감옥에 수감되어 강제 노동에 동원되는데, 아버지는 그곳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어 고생은 덜 하지만 몹시 춥고 배가 고프시다며 두꺼운 내복과 미숫가루를 보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 남매를 어떤 경우에라도 공부 시킬 것을 신신당부하셨다.
할아버지 댁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신의주에서 영변농업학교 교장으로 전근하는 사촌 오빠를 따라 가게 되어 우리 남매가 헤어지게 되었고, 6.25때 사촌 오빠 따라 월남한 이후 반세기 넘는 긴 세월을 서로 생사도 알 길 없이 이산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버지를 만날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5월1일 노동절에 죄수들을 시가행진 시킬 때 길 옆 약방에 들어가 주인을 설득하여 편지를 부칠 수 있었던 아버지의 기지를 믿었음으로......
피난지 진해에서 꿈 많은 여고시절에도, 결혼 후 두 아이 엄마로 종종 걸음 할 때도 늘 아버지를 만나는 상상을 했다. 소련 여의사의 헌신적 사랑이 아버지를 서방세계로 탈출시키고..... 김포공항에서 아버지와 극적으로 만나 포옹하는 환희의 장면이 영화의 필름처럼 늘 뇌리에서 맴돌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1990년 10월 일간지에'북한 반탁 운동인 소련에서 25시 인생 45년' 이라는 놀라운 기사가 실렸다. 반탁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소련으로 끌려간 뒤 징역 5년 강제노동 7년을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되어, 쟘블시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는 이들이 남한땅에서 뼈를 묻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며 가족과 친지를 찾는 기사였다.
나는 급히 신문사로 찾아가 그 기사를 쓴 기자를 만났다. 그 당시는 소련과 교류가 없던 때여서, 중앙아시아로 취재 떠나는 기자를 통해 나의 긴 사연을 보냈고 몇 달 후 그 분에게서 답신을 받았다. 아버지는 형기를 마치고 북한으로 들어가 신의주 도립병원에서 근무한다는 소식을 보낸 이후 연락이 없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아버지와 함께 수감되었던 박 재욱 선생이 평남민보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 분에게서 아버지의 그곳에서의 수감 생활을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반탁운동한 사람들을 소련에 감금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여러 번 항명하여 형기가 2년 연장 되었고, 수감자들의 강제노동을 면하게 하려고 백방으로 애쓰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의사이기 때문에 특별대우를 받아 어느정도 외부출입이 허용되었다. 마가단 도립병원에 파견근무 할 때 아무리 험난한 곳이라도 교포 환자가 있는 곳이면 언제 어디라도, 찾아가 헌신적으로 치료해 주어 그곳 교민들은 아버지를 성인으로 추앙했다고 한다, 평양에서 중학생의 신분으로 반탁운동에 끼었다가 수감된 나의 오빠와 동 년배인 박 선생은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의지했고, 서로 부자지간의 정을 나누며 지냈다. 아버지의 민족애를 널리 알리려고 한국에 왔노라고 아버지에게 바치는 '냉동지에 피어난 무궁화 꽃'이라는 헌시를 써왔다.
머지 않아 아버지를 뵈올 때 내 삶의 흔적을 한점 한점 엮어 놓은나의 수필집을 보이며 부족한대로 당신의 딸로 옳 곧게 살았노라는 인정을 받고 싶다.
어려서부터 까다롭고 섬세한 감성이라 상처받을 일 많은 내 가슴에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리하여 내 삶을 바쳐준 아버지! 지금까지 외로움을 딛고 꾿꾿하게 내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해준 힘은 언제나 아버지였습니다.
오! 닥터 노면 베쑨 나의 아버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