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VANK @ BUSANJIN 원문보기 글쓴이: 김유리
학교홈페이지에 올리고
우리가 댓글달아 해석한 기사 정리겸 올리는 고에욤^^
(포트폴리오...흐흐..)
흐흐흐...ㅎㅎ
<기사원문>
The islands began appearing last fall, detailed in pleasing shades of blue on the plastic bags that drape the city’s dry cleaning. Busy New Yorkers fetching their shirts might have glanced at the picture — of an ocean and a rocky isle — and taken it for a travel ad, perhaps for an Italian island like Capri, or Phuket in Thailand.
Those who looked closer saw a manifesto.
“Dokdo Island is Korean territory,” the ad declared. “The Japanese government must acknowledge this fact.” To understand the message on the bag is to go back more than a century, to the beginning of an emotional land dispute between Japan and Korea.
The conflict is over a cluster of barely inhabitable islets and reefs in the sea between the countries — called Dokdo in South Korea and Takeshima in Japan — and much more, especially the legacy of Japan’s colonial occupation of Korea.
Foreign arguments like these often persist in New York City, where more than a third of the population is foreign-born and memories of home are kept close, from soccer allegiances to shared experiences of oppression. While some of those conflicts regularly make headlines in the city, others, like the tug of war over the islets are barely noticed.
That is, until last year, when Chang-Duck Jeon, president of the Korean Dry Cleaners Association, assumed the role of publicist: He ordered 250,000 “Dokdo bags” from a South Korean manufacturer and solicited orders from the approximately 3,000 Korean-owned dry cleaners in the city. About 100 of them ended up stocking the bags.
“It was a way to speak out,” Mr. Jeon reasoned. “What’s ours is ours.”
It was not the first effort by Koreans to argue their case in the United States, but it might be the most ambitious. “This is the first attempt I’ve heard of to commercialize this,” said Alexis Dudden, a professor of modern Japanese and Korean history at the University of Connecticut who follows the Dokdo-Takeshima debate closely.
In the past, she said, a few Koreans had pursued an ad-hoc campaign. A freelance publicist for South Korean causes placed advertisements in American newspapers. A radio station in Queens printed binoculars on camouflage T-shirts and a slogan on the back: “Together we can protect Dokdo.”
A few years ago, the “Dokdo Riders,” a group of young South Korean college graduates, toured several countries on motorcycles, collecting signatures, looking for free food and spreading the Dokdo word. But the real action lies elsewhere. Protesters in South Korea have cut off their fingers, stabbed themselves and, in a particularly inventive move, burned large cardboard effigies of the Japanese Ministry of Education (to protest Japan’s teaching of its version of the dispute).
Japanese-Americans have, for the most part, stayed out of the fray, for a variety of reasons. Third- and fourth-generation Japanese-Americans often have a distant relationship with Japan, Ms. Dudden said, pointing out that the dispute over the islets raised uncomfortable questions about the ways Japan portrays its colonization of Korea.
Gary S. Moriwaki, the president of the Japanese American Association of New York, said the Japanese community in the city was small, made up mostly of people born in Japan, and not very politically active, at least on the question of the islets. “The conflict doesn’t really come up,” he said.
A spokeswoman for the Japanese Embassy in Washington said she was having a hard time finding someone to comment on the dispute, and she referred a reporter to the Web site of the Japanese Foreign Ministry. There, “Japan’s Inalterable Position on the Status of Takeshima” is spelled out in 10 languages. Mr. Jeon recounted his path to action last week as a different kind of tension mounted between Japan and South Korea:
In San Diego, teams from the two countries were set to face off on Tuesday in the World Baseball Classic (Korea won, 4-1; when the teams met again on Thursday, Japan was the winner, 6-2).He came up with the idea in July, during one of the semiregular flare-ups over the islands, which are now administered by South Korea.
Mr. Jeon could not remember exactly what had set him off, but that month, the Japanese Education Ministry asked teachers and textbook publishers to make sure Japanese students understood their country’s claim to the islets. Also that month, the United States Board of Geographic Names changed the islands’ status from “South Korean” to “undesignated sovereignty.” Enough was enough;
Mr. Jeon ordered his bags, from a distributor he works with in New Jersey.
Some of his fellow Korean New Yorkers have said they might start pushing homeland issues with more force. A group of parents is planning to lobby the city’s Department of Education next week to change textbook references to the Sea of Japan — Koreans call it the East Sea — and the local Korean-American Association has just started a Dokdo committee to plan ever-more ambitious campaigns.
These include teaching younger Korean-Americans about the claim to Dokdo. Misun Chang, the general manager of WWRU (1660 AM), a Korean-language radio station, often talks about the conflict on her morning program, hoping to reach that audience.
“The first generation — we know Dokdo is ours,” she said, adding that as people her age set up new lives in the United States, they had sometimes been too busy to teach their children about the issue. Kevin Kim, 38, a City Council candidate from Queens, said that he really started thinking about the islet dispute only when he got to college, but that Korean-Americans young and old were becoming more politically active.
The resolution by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in 2007 calling on Japan to acknowledge and apologize for its wartime sex-slavery, was a milestone, he said. “The community rallied around pressuring the house to pass the resolution,” he said. “That was considered a huge success, and they felt more empowered.”
It is not clear what Mr. Jeon thought would happen when his dry-cleaning bags hit the streets of New York. The association’s previous activism had centered on matters central to the business, like the rise in the prices of hangers import!!ed from China, and donating leftover clothes to charity. Still, he worked with what he knew.
“The whole world lives together in New York,” he said. “And we use a lot of poly bags.”
<해석>
그 도시의 세탁소의 비닐봉지에 있는 기분을 좋게 하는 푸른색조를 띈 그 섬은 작년 가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셔츠를 찾아오는 바쁜 뉴욕사람들은 바다와 바위섬이 있는 그림을 힐끗 봤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을 카프리섬 같은 이탈리아의 섬이나 타이에 있는 푸켓같은 섬의 여행광고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은 "독도는 한국의 영토다". 라고 선언하는 광고 선언문을 보았다 "일본인 정부는 이 사실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이 가방에 있는 메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한국의 감정적인 영토분쟁의 시작인 100년도 전의 때로 돌아가야 한다.
그 분쟁은 거의 살아갈 수 없는 작은 섬 들의 무리와 나라 사이에 있는 바다의 암초 에 있다. 그 섬은 남한에서는 독도라고 불리고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고 불린다. 그 밖에 더 심한 것은, 특히 일본의 한국 식민지 점령에 대한 잔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외교 논쟁은 1/3 이상의 인구가 외국에서 태어났고, 그리고 그들의 고향의 기억이 축구의 헌신(축구에 대한 열정)에서 부터, 탄압의 공유된 경험(식민통치)까지 고향에 대한 기억이 가까운 뉴욕에서 종종 존속된다. 도시에서 몇몇의 분쟁이 계속해서 대서특필 될지라도, 다른 사람들은 섬을 두고 하는 격렬한 다툼을 거의 알지 못한다.
즉, 작년 까지, 한국 드라이 클리닝 협회 전창덕 회장은 정치 평론가 역할을 맡았었다: 그는 250,000독도가방들을 남한 제조공장에 주문하고 도시에 있는 대략 3,000명의 한국인 소유 드라이 클리닝업자들로부터 주문을 부추겼다. 그들 중 약100명은 가방 사들였다. 전회장은 “이것은 말하기위한 방법이었다.” “우리의 것은 우리의 것 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한국인이 미국에서 이를 주장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으나, 이것이 가장 야심찼을 것이다. "내가 들은바로는 이 주장을 상품화하는 시도는 처음이다," 독도-다케시마 논쟁을 자세히 아는 코네티컷 대학의 현대 일본과 한국역사전문가인 Alexis Dudden은 말했다.
과거에 그녀는 몇명의 한국사람들이 특정목적캠페인을 추구했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정치평론프리랜서는 미국신문에 광고를 내었다. 퀸즈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은 위장군티셔츠에 쌍안경, 뒤에는 '함께라면 우리는 독도를 지킬 수 있다'는 구호를 인쇄했다.
몇 년 전, 대학을 졸업한 젊은 한국인들의 모임인 “독도 라이더”는 오토바이로 몇 개국을 순회했고 서명을 수집하고 무료 음식을 찾고 그리고 독도라는 단어를 퍼트리고 있다. 그러나 실제(실질적인) 행동은 다른 곳에 있다. 한국의 시위대들은 그들의 손가락들을 잘랐고, 특히 독창적인 운동으로 그들 스스로를 찔렀고(자결을 뜻함.), 그리고 일본의 교육부의 큰 종이 조각상을 불태웠다.(분쟁하고 있는 일본의 교육 버전에 대항하기위하여)
대부분의 경우에 일본인 미국인들은 많은 이유로 분쟁에 휘말리려 하지 않는다. 3세대 4세대의 일본인 미국인들은 대부분 일본과는 거리감 있는 관계이다. 미즈 더든씨가 말하길 섬들에 관해 논쟁하는 것은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화를 표현한 방식에 대해 불편한 문제들을 키운다고 지적했다.
Gary.S.Moriwaki, 뉴욕에 있는 미일협회의 의장은 도시 안에 있는 일본인 사회가 대부분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적어도 그 작은 섬 문제에 관해 매우 활발한 정치적 활동은 없다고 말했다. "그 문제는 실제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는 말했다.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의 여성 대변인은 그 분쟁에 대해 의견을 말할 사람을 찾는 게 힘들었다고 말하며 기자에게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를 조회하도록 했다. 거기에는 "다케시마의 자격에 대한 바꿀 수 없는 일본의 태도"가 10개국의 언어로 적혀 있었다. 전 씨는 지난 주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불거진 다른 종류의 긴장감에 대해 열거 했다.
San Diego에서, 2개국으로부터 온 팀들이 World Baseball Classis 경기를 화요일에 시합을 했다.(한국이 4대 1로 이겼다: 팀들이 목요일에 다시 만났을 때는 일본이 6대 2로 이겼다.) 그는 7월에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독도에 대한 번쩍하는 생각 중 하나였고, 이 아이디어는 지금은 한국에 의해 시행되어 진다.
전씨는 그를 유발한 것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달에 일본교육부는 선생님과 교과서 출판사에 일본학생들이 일본의 그 섬에 대한 권리(주장)를 꼭 알도록 요구했다. 또 그 달에, 미국 지명 위원회는 그 섬의 지위를 한국에서 지정되지 않은 주권으로 바꾸었다. 이정도면 됐다.(이제는 그만해야한다.)
전씨는 New Jersey에서 함께 일하는 조업자를 통해 비닐봉지를 주문했다. 뉴욕에 사는 몇몇 활동자들은 말했다 , 미국에 좀더 압력을 가해야 한다. 한 학부모 모임은 일본해로 표기한 교과서 내용을 바꿔 달라고 로비를 벌일 계획이다 뉴욕 교육부에 다음주에-한국은 이 바다를 동해로 부른다-게다가 현지 재미한국인 협회는 독도 위원회를 시작으로 야심찬 캠페인을 계획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과 미국의 어린이들에게 독도에 대한 권리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을 포함한다. 한국라디오국WWPU의 총매니저인 장미선은 자주 그녀의 아침프로그램에서 독도문제에 대해 논쟁하곤 한다. 그녀의 라디오 청취자에게 영향을 주길 바라며.
그녀가 말하길, 첫 세대인 우리는 독도가 우리 것임을 알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사람들이 미국에서 새로운 삶에 정착하느라 너무 바빠서 자신의 아들들에게 그 문제에 대해 가르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퀸스 시의회 후보인 38세인 케빈 킴은 말하길 그는 그가 겨우 대학에 들어갔을 때 독도의 분쟁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한국계 미국의 젊은이와 연로자들이 점점 더 정치적으로 활동적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 결의안은 대표자 (법률가 대표자)의 집에서 2007년에 일본이 전쟁 중 위안부인 획기적 사건을 승인하고 사과하라고 말했다 그는 말했다 “압력을 가하려 집 주위에 결의안을 통과하려는 공동체들이 모아졌다 ” 그는 말했다 “그것은 고심한 끝의 거대한 성공이다 그리고 그들은 더 절실히 권력을 부여 받았다 ”
그의 드라이클리닝 가방이 뉴욕의 거리를 강타할 때, 전씨의 생각이 현실로 일어나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그 협회의 과거 행동지침은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옷걸이의 가격인상이나, 남은 옷들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등의 주요한 문제들에 집중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아는 것을 실천했다. "전 세계가 뉴욕에서 함께 산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양의 폴리백을 사용한다" 그가 말했다.
첫댓글 우리 이거 오바마도 하지 않았었어?ㅋㅋㅋㅋㅋㅋ 아 글구 올릴때~ 이런식으로 올리지 말고 그 우리 막 순서 번갈아 한것처럼 단락 끊어서 올리는 건 어떰?.? 제목을 릴레이 해석하기 이런걸로 달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