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망간이라는 짧은 시간의 표현이 9개월이나 되는 긴 시간이 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제가 현재 군복무 중이란 外部的요인도 있지만
궁극에는 저의 게으름이란 內部的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지만 작년 7월 이후에 있었던 몇 번의 외박기간마다
친구들과 놀면서도 (조망간에 글을 쓰겠다는)
내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번에도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대신 1차 휴가 때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를 내실 있게 쓰리라.."
라고 마음먹는 걸로 자위(自慰)를 하곤 했었습니다.
그러한 자위 속에서 어떠한 주제로 글을 쓰면 좋을 지에 대해
깊게 깊게 고민하다가 떠오른 것이
"그냥 편하게 文玉堂 선생의 사상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밝혀 보자"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의 생각을 말해보겠습니다~
※. 이 글의 제목이 문옥당학 외전인 이유
우선 제 생각을 본격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이 글의 제목을 "문옥당학 외전(外傳)"으로 정한 이유에 대해
소략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外傳 곧, "밖에서 해석한다"는 뜻은
그 사상이나 텍스트에 구애 없이 자유롭게 뜻을 푼다는 의미로
한문(漢文)고전에 보면 여러 외전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주역에 대한 외전인 『周易外傳』같은 책자가 있는 것과 같이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문옥당사상에 대해 어떤 명리학적 학문체계에 입각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 상관없이 저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말하려고 하기에
다른 어떤 제목보다 외전(外傳)이란 제목이 걸맞는 듯하여 차용하게 된 것입니다.
아울러 외전의 대상이 되는 文玉堂學에 대해 말씀 드리자면,
이 문옥당학은 아직까지 어떠한 치밀한 논리적 흐름 위에 있다고 보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문옥당선생이 1989년 입산하여 공부를 시작한 이래
지금 까지 얻은 모든 학식(學識) 및 생각...
그에 따른 그의 행동과 언행으로 표현된 총체를
문옥당학(文玉堂學)이라고 일단 규정하고 시작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문옥당학의 내용이 어떤 텍스트로서 구체화되기 힘든것이 많으며,
또 궁극적으로 문옥당 선생 개인의 가치관과 깊게 연관되어 표현되는 학문임으로
그의 개인적 가치관 부분을 따로 분리하여
순수한 학문의 바운더리(Boundary)만을 설정,
그것을 문옥당학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넌센스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존의 명리학이나 역학이란 표현을 배제하고
문옥당학이란 새로운 이름을 쓰려는 의도는,
그의 사상체계가 기존의 그것과는 확연히 드러나는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그 차이점에 관한 것이 이 글의 주요 내용이 될 터이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만 설명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근 몇 년간
간화경과 같은 書物로써 그의 사상이 표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최근에는 싸이버상에 문옥당학교가 열려 여러 방향으로써
그의 사상이 교육됨으로 그러한 문옥당학에도
모종의 혁신을 꾀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에 온 것임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이 변화의 시점에 저의 글이
그 방향을 제시하는 작은 등불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하네요 ^^
각설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론부터는 글 쓰기의 편의를 위해 평어로 말하겠습니다.)
※. 문옥당학은 黃老之學이라는 뉴사이언스의 패러다임에서 출발한다
문옥당학은
기본적으로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주역팔괘(周易八卦)라는
漢代에 성립했다고 보여지는 뉴사이언스의 패러다임 위에 서있다.
이것은 현재 문옥당학교에 입학 후 기초적으로 배워야만 하는
커리큘럼의 과정에서도 들어 나는 사실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 패러다임의 정체를
黃老之學(黃老之術, 黃老思想등으로 불리움)이라고 말한다.
황노지학은 전통적으로 이해되었던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절충주의적(eclectic)사상체계로써,
漢代의 중국인들이 세계(인간)를 바라보았던 틀 그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황노지학(명리학과 문옥당학 등 포함)이
방임주의적 치술(治術)이나 무슨 미신적 잡학(雜學)으로 오해되었던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황노지학이 하나의 독립된 사상체계로 인식되고
철학조류 속에서 개념화하기 시작한 것은
모두 20세기의 일이고 보면,
20세기를 지배한 뉴사이언스의 패러다임은
서구라파문명권의 독특한 문화현상이었던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이라는 것이었다는
비교문화론적 시각이 반드시 상기되고 거론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구라파 문명에서 잉태되어
인류를 그 막강한 힘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자연과학의 충격적 세뇌 속에서는 자연과학 이외의 모든 사이언스의 체계는
하루 아침에 그 정당한 평가를 받을 기회를 상실한 채 미신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러한 전락은 우리가 과거역사를 해석하는 눈에서
그 해석의 대상을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력을 빼앗아 가버렸다.
그것이 미신이든 아니든...
그것이 바로 자연과학이 우리의 삶의 공간 속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그 삶이 영위되는 바탕인 우주를 규정한 엄연한 체계라는
매우 소박한 사실을 못 보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황노지학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도
그것이 그 당대의 과학의 총체였다는 엄연한 사실,
그리고 그것 위에 한(漢)제국이라는
막강한 엠파이어의 문명이 성립했다는 소박한 사실을 볼 수가 없었다.
마치 한 대의 사람들이
요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과학문화에 해당되는 삶의 공간에 있어서는
그것에 상응하는 어떤 유치한 문화를 갖고 있었고
그것은 황노지학과 같은 것은
어떤 잡스러운 미신의 체계로서
한인들에게 동떨어진 존재 그 무엇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 문옥당학은 반드시 과학적 방법론의 바탕 위에서 료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과 미신이라는
오늘날의 이분적 사유의 구획화를
그렇게 구획화 될 수 없는
고대 문명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오류를 무의식적으로 저질렀다.
사실 이런 식의 구획화는
문옥당학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문옥당학에서 말하는 3원 9운(三元九運)의 원리를
고등학교 물리시간에 배운
열역학 제1법칙(the first law of thermodynamics;熱力學第一法則)과 같은
자세로 바라보는지는 스스로에게 한번 던져 보아야할 질문이다.
바로 여기서 난 문옥당학에 있어서
문옥당학은 반드시
과학적 방법론의 바탕 위에서 료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에 문옥당학에 존재하는 모든 개념의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나는 본다.
실례로 문옥당홈페이지 중 "아는 것이 힘"이란 코너에 다음과 같은 글이 써있습니다.
『서양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우리 인간의 구조가 몸(육신)과 마음(정신)의 이원론적 구조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구조는 몸과 마음 그리고 운(運) 이라는 삼원론적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 따르면
문옥당학은 데카르트가 제시한
육신(corpus)이란 개념의 "몸"과
정신(mens)으로서의 "마음"이란 개념을 그대로 차용하고
그 위에 문옥당학 만의 특별 아이템인 "운(運)"이란 것이 첨가된 형태로 묘사되고 있다.
나의 생각으로 이것은 명백하고도 엄청난 오류이다.
데카르트가 말했던 육신과 정신이란
각 각 서로 독립된 하나의 실체(substantia) 로써,
이 양자는 따로 노는 것이지만
송과선(松果腺, pineal gland)이라고 하는 솔방울처럼 생겼으면서
뒷목근처 어딘가에 붙어 있는 생물학적 기관을 통해
상호 소통한다는 황당무계한 하나의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도데체 문옥당사상과 그 내용이 달라도 한참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설명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것인가??
문옥당학은
지금까지 이야기했듯이 한나라 시대에 본격적으로 성립한
황노지학이란 또다른 뉴사이언스 패러다임의 기반 위에 있고
이 황노지학이란 패러다임은
근세 서구라파의 자연과학이란 패러다임에
엑셀레이터를 밟게 해준 데카르트의 철학체계와는 그 설정자체가 너무나도 다른 것이다.
생각을 해보시라!
문옥당학의 기본 중에 기본은
"인간은 4柱에 따른 여덟글자를 통해 하나의 자연에 모습으로 비유될 수 있다"
란 명제이다.
(私見으로, 이 명제가 가장 문옥당학다운 명제라고 생각한다) "
어느 겨울날의 그윽하고 아득한 밤하늘에 영롱하게 빛나는 별하나..
그 아래로 흐르는 강과 탁트인 산야..
또 그곳에 우거진 나무들.."
자! 여기 어디에다 서로 독립된 실체를 설정할 것인가??
사람이 몸따로 마음따로 운따로로 구성되 있다면,
(나의 생각으로 문옥당학은 철저한 1원론이다. 사실 여기서 1원론이니 3원론이니 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겠으나 문옥당 선생이 주장하는 3원론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난 문옥당학은 1원론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대한 설명은 차후에 기회가 되면 할 터이지만 사람이란 하나의 자연의 집약체란 것을 생각하면 그 이유가 쉽게 짐작가리라 본다)
그리고 또 다른 설명에 따라,
사람은 자연의 모습이라고 했을 때 이 두 가지 설명을 합쳐보자.
자! 이 자연의 모습어디에 따로따로 각자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있을 것인가??
밤하늘에 별이 빛나기에 그 아래 강이 더욱 멋스러운 것이고
물을 내는 산과 그 속에 나무가 있기에 강이 흐르는 것이 아닌가??
산이 있기에 나무가 있고 산에 나무가 있기에 강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대지 가 있기에 하늘이 있고 그 하늘이 있기에 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대자연은
그 하나 하나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태어나기도 하고(相生)
사라지기도 하는(相剋) 모습인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독립적 실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다면 문옥당선생은 왜 이런 오류를 범한 것인가??
슬픈 현실은 이런 명백한 잘못을 문옥당선생께서 모르고 저지르셨다는데에 있다.
그에게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구분 짓는 것이 일반화된 상식(?)으로 받아들여 졌을테고,
그의 공부가 진전을 맛봄에 따라 운의 실체를 알게되어
기존의 상식에 새로운 운이란 개념을 더한 것 그뿐이다.
즉, 문옥당선생은 데카르트가 말한 몸과 마음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그야말로 그냥 자기의 이론을 위해 가져다 쓴 것 그 뿐인 것이다.
that"s all~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나이다!!(누가 23:32∼42)"
※. 문옥당학을 하는데 있어서의 방법론(후학에게 고한다)
사실 문옥당선생의 공부 과정을 되짚어 봤을 때
위와 같은 실수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하나의 직장에서 그 전문성을 인정받아
나름의 촉망을 받던 사람이(놀라지 마시라, 문옥당이기 이전의 盧선생님은 saudi국영 telecom에서 인정받는 기술자였다. 그 이유로 요즘에도 전화·전기관련해서는 녹슬지 않은 기술을 보여주곤 한다)
그와는 180°다른 공부를 시작하여
오늘날에 하나의 일가(一家)를 이루기까지
서양철학과 같은 제도권 내의 공부는 본격적으로 시도할 餘力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현재 문옥당선생 자신에게 있어서도
문옥당학에 있어서도 그
에 따라 나타나는 여러 오류를 정당화하는데 핑계로써 말해질 순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학문이란 엄밀하고 철저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사람의 인생을 논하는 학문에 있어서랴! (위에서 예로든 데카르트운운하는 실수 이외에도 내가 아는 한 적지 않은 개념상의 오류 위에 문옥당학은 현재 서있다. 나는 이들의 비평과 더불어 앞으로 이들 오류의 수정에 힘쓸 것임을 아울러 약속한다)
따라서 문옥당학을 배우려는 후학들은
이러한 문옥당선생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단순히 기계적으로 문옥당선생이 말하는 문옥당학만을 해서는 안된다!!
그가 서양철학을 몰라 위와 같은 실수를 했다면,
우리는 문옥당학을 배우기 위해 서양철학도 배워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음양오행이론에서 말하는 상생(相生)의 원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옥당선생이 우리에게 문옥당학을 가르친다면,
똑같이 우리도 문옥당선생에게 문옥당학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絶對), 말 그대로 대를 절하는
즉, 한 방향으로만 전달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의 상생 속에서만이
이 세계가 원하는 진정한 문옥당학이 재 탄생 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아울러 문옥당학의 재탄생을 위해
선결되어야할 과제 중에 하나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문옥당학에 등장하는 여러 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하는 것이다.
기실 문옥당학에는
여러 주요한 개념들이 등장하여
정확한 의미 정의 없이 쓰여지고 있는데,
이것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철폐해야할 4가지 우상 중에 시장의 우상(Idola tori)이란 개념과 연관 깊다.
이 시장의 우상이란 간단히 말해 말 때문에 생기는 오해이다.
문옥당선생이 말하는 신(神)이란 개념을 듣고
교회 다니는 사람은 하나님(the god)으로 생각할 것이고
절깐에 다니는 사람은 대웅전에 앉아있는 석가모니불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신(神)이란 것에 대한 개념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각각의 사람들은 각각의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고
여기서부터 오해(잘못된 이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옥당학을 이루는 기초 개념들에 대한 명확한 정의 없이
문옥당학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혹자는 이런 나의 주장에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아마도 없겠지만^^;;)
문옥당학의 뿌리는 황노지학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그 대표작인 장자를 봐라 거기엔 물고기를 잡으면 그 그물은 버리라고 했다.
이렇듯 노장사상(≒문옥당학)이란 그 본질을 언어의 논리로써 논할 수 없는 것이다.
노자 도덕경 제일 첫 장이 무엇이냐...!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 도는 늘 그런 도가 아니지 않느냐(道可道, 非常道)??
고로 문옥당학을 하는데 있어서도
그 오묘한 진리만 배우면 되었지 무에 기초개념이고 정의고 따지는가??"
이것은 철저하게 학문을 하기가 귀찮은 소인(小人)의 핑계부럼에 불과하다.
황노지학중 특히 노장사상과 비슷한 불가의 이치에서도 그
것은 논리적이지 않아도 되는 비논리(非論理)가 아니라
엄밀한 논리의 차원을 넘어서는 초논리(超論理)인 것이다.
어찌 abc를 모르고 영어를 논하겠는가?
이제 문옥당학을 배우려는 후학들은 이러한 나의 주장을 흘려듣지 말고
부디 문옥당학의 제반 개념들의 정리에 힘을 쏟아 주었으면 한다.
한나라의 학문적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그 나라의 언어로 된 외국어 사전이 얼마나 많은지를 따져보는 것이 있다.
사전이란 것은 대상언어의 제반 개념들을 모국어로 명확하게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렇기에 이 사전의 성립이란 장기간에 걸친 학업의 성과와
대상언어와 모국어에 대한 해박한 능력이 있을 시에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문옥당학에 있어서도
우리는 꾸준한 노력으로 『문옥당학사전』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주장은 문옥당학을
기존의 명리학(요즘 유행하는 700써비스 같은데서 사주쟁이들이 떠들어대는; 하지만 그들의 주장하는 바가 문옥당학의 내용보다 더 나을 수 있다는 가능성마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첫댓글 우리집안의 10대종손이면서 나의 자랑스런 아들 녀석이 이런 정도로 해박한 동양사상의 지식세계를 가지고 있음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바람직한 아들의 공격과 추격으로부터 추월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수행정진해야 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ㅡㅡ;; 위에 평은 너무나 과찬이시고.. ^^;; 하룻밤사이에 쫘악 써내려간 글이라.. 다시 읽어보니 글이 좀 투박한구석이 많지만.. 의미전달엔 큰 무리가 없는 듯합니다.. 좋은 댓글 부탁드립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