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를 버린 남자 ------------------------------------------------- 문숭리
지천명을 한두 해 넘기고 있는 우식이라는 한 중년 남자는 사업상 서울에서 내려와 경남 진주에 머무르던 어느 날 저녁 9시 뉴스를 보다가 그로서는 납득이 잘 안 되는 뉴스를 하 나 접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렇잖아도 경기도 안 좋고 자의 반, 타의 반 실업자가 350만 명이 넘는다는 둥, 내년에는 플러스 성장도 아닌 마이너스 성장에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낮은 마이너스 4% 성장을 할 것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발표가 있은 지도 얼마 안 되는데 또 이건 무슨 아닌 밤중 에 홍두깨 같은 소리란 말인가? 대한민국에서 최고 일류재벌이라고 일컫는 S기업의 후계자이자 황태자가 이혼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만드는 제품이 세계에서 1, 2위를 차지하는것 까지는 좋은데 뭐 그리 좋은 일이라고 세계에서 이혼율까지도 1등을 하고야 말겠다는 심사가 아니고야. 보통사람에게 결혼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보여주어도 될까 말까 하는 상류층마저도 이혼이 마치 감기에 걸리면 감기약을 사먹으면 되는 처방정도로 생각한다니 정말 알 수가 없는 세상 일세~ 물론 재벌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이혼을 하지 말라는 철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혼이 애들 장난도 아닌데 뉴스를 안 본 것만 못한 날이라는 생각을 우 식이는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뉴스가 연이어 나오고 있는데 우 식이는 자신도 모르게 찜질방 한편에 손님도 없는 식당에 혼자 들어가 병맥주 세병을 시켜놓고 새우깡 한 봉지와 더불어 손수 맥주를 잔에 따라 홀짝 홀짝 어느새 세병을 게 눈 감추듯 다 비워버린 것이었다. 하기야 돈 많은 놈들이야 이혼을 해도 먹고 살 걱정을 안 해도 되고 불나방이 저 죽을지 모르고 불빛을 보고 달려들 듯 재산을 보고 이 남자 저 여자가 달려들 테니까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것도 식은 죽 먹기나 다름이 없겠지.
"하지만 그들이 나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정을 알기나 하겠어. 이혼,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하나. 제기랄! 오늘따라 맥주가 왜 이리 더 쓴단 말이냐?"
우식이는 혼잣말로 중얼거려 본다. 그래 어떤 식이든 결론을 내야하는데.............
우 식이는 남들처럼 이혼을 한 부부도 아닌데 여러 해 이렇게 집을 나와서 홀아비나 다름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은 서로가 법적인 부부라는 이유와 더불어 자식들을 아내가 돌보고 있다는 명목으로 매월 얼마간의 생활비를 무통장 온라인으로 송금해 주면서 서울 집을 가뭄에 콩 나듯이 일 년 에 한 달도 채 안되게 다녀오지만 아내와 포장마차에 앉아서 단둘이 소주 한잔을 주거니 받거니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한 적이 기억에 없다. 그렇다고 젊은날 결혼초기처럼 하루 밤에도 몇 번을 서로 껴 안어 본지도 오래 되었다. 그냥 오래 간만에 남녀가 만났으니까 잠시 숨을 몰아 쉬어 볼 정도이지 이제 육체적 사랑에 대한 의미가 사라진지 오래였다. 상경했다가도 서로 눈빛 한 번 제대로 안 맞추고 내려오는 날도 많았다. 그냥 조석이라고 차려주는 밥상이니 가족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면서 대화라고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애들에게 잘하고 있느냐고 물어볼 정도가 전부였다. 그렇다고 자식들이 먼저 나서서 아버지가 오래간만에 집에 왔다고 지난 자신들의 이야기를 소상하게 들려주지도 않을뿐더러 평상시 아내도 안부 전화를 해도 밥을 먹었느냐? 정도이지 통 집안에서 돌아가는 이야기를 금기라도 된다는 듯 억지로 물어보기 전에는 먼저 해 주는 법이 없었다. 그냥 우 식이는 생활비를 벌어다 주는 돈 버는 기계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아오면서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는 그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꾹 참고 그래도 어쩌다 집이라고 다녀가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런 생활도 정리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우 식이는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거자일소(去者日疏)라고 서로 떨어져 있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부부라고는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서로가 마음이 이미 멀어져 있다는 것도 또한 알고 있었다. 누가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좋은 문장은 늘 살아서 움직이면서 우리 생활에 교훈을 준다고 하더니만 우식이가 고등학교 영어시간에 배운 Out of sight, Out of mind! 가 먼 훗날 자신을 두고 한 말이 될 줄을 어찌 알았을까? 그렇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을 머리로만 이해했지 실제 몸으로 이해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서로가 떨어져 생활하는 날이 많다보니 남자친구가 생겼는지 혹은 남편에게 다른 여자 친구가 있는지 조차도 서로는 관심이 없다 못해 서로의 휴대폰이 울려도 신경을 쓰지 않은지도 오래다. 서로가 믿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믿고 맡기는 것이지 서로가 떨어져 있는데 설령 각자 이성 친구를 사귀고 있고 우연히 서로가 상대편의 이성친구와 다정하게 이야기 하는 광경을 목격한다고 해서 날마다 함께 생활하는 처지도 아니면서 어찌한다는 것도 또한 우스운 일이기에 설령 보게 되는 경우라도 서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못 본 것으로 해야 하 는 성숙한 의식이 가지고 있어야 할 각자의 처지였다. 당장 서로가 부부라는 인연을 청산하고 서로 남남으로 살아가려는 확고한 의지가 없는 한 말이다.
그렇다고 앞으로도 이렇게 의미도 없는 결혼생활을 하면서 법적으로 부부라는 명목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가 말이다. 이혼을 한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우식이라는 한 남자는 이미 자신의 아내에게 돌아가기에는 결혼생활은 물론 부부라는 그 자체가 갖는 고정관념을 포기하고 고사목 같은 남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부부란 어느 한편의 잘못으로만 파경을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식이 부부는 좀 더 결혼에 대해 심사숙고를 해야 했던 부부였다.
처음부터 삶의 목표가 같았거나 애정이 넘쳐 사랑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남녀가 혼전에 이성행위에 따른 책임의식이 당연히 결혼으로 이어진 어설픈 결혼이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서로가 젊어서는 저녁마다 애정을 확인해 보는 과정이 있고 자식을 낳아서 육아에 20여년 세월을 몰두하다 보니 삶의 목표나 결혼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볼 여유가 없이 그냥 그렇게 살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성년이 되고 그들의 품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들 부부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고 공허한 마음뿐이라는 것을 서로가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가정을 가진 중년 부부들이 새로운 이성에 눈을 돌려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잠시 가정이 아닌 근사한 식당에 가서 외식을 하는 기분정도이지 그것이 영원한 행복의 길로 다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고 불륜이라는 명목으로 다시 한 번 가정과 결혼과 삶에 회의를 느끼고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스프링을 적당히 잡아 당겼다 놓아야 원상회복이 되는데 있는 힘을 다해 잡아 늘여 보다가 영 스프링이 망가져 스프링 기능을 상실하는 것처럼 가정이 파탄이 나고 이혼을 하고 때로는 그 상대방과 새 출발을 해 보기도 하지만 이혼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70%이상이 다시 이혼을 하게 되고 전 남편과 아내와의 이혼을 후회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정작 행복을 느끼는 재혼은 놀랍게도 3%도 안 되고 재혼에 성공한 부부도 97%는 다시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인생으로 전락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죽는 날까지 서로 견원지간처럼 살지언정 이혼을 하지 말고 그냥 살다 보면 세월이 다 보상해 주고 그러다 보면 부부 중 한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죽 어서도 같은 무덤에 묻히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가 이미 이혼 선진국이 된지도 오래고 그것도 결혼 후 3년 이내 초기 이혼과 더불어 중년이후 황혼이혼이 급증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거의 팔순 가까이 된 노인부부가 재산이 아닌 성격차이를 들어 이혼을 한 사실이 언젠가 한국사회에 결혼에 대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이유 인즉 노인 남자의 아내 되는 부인이 평생을 살면서 남편으로부터 아내 대접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사람대접을 한 번도 못 받아보았다는 것이었다. 단 하루를 살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느 누구의 아내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존귀하게 살다가 죽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러니까 결혼 후 자녀를 낳은 부부는 그 자녀가 성장하는 동안에는 자녀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고 양육 책임을 다하려고 부부로서의 성격차이나 삶의 목표나 이상이 달라도 그냥 경제적인 버팀목으로 서로 살아간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우 식이는 그 경제적 버팀목도 어느 시점에서 그의 아내에게서 존재의 의미가 사라진지 오래고 그렇다고 매일 애정을 갈구하는 나이도 사그라지고 있다는데 더 이 상 죽기 살기로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는지라 얼마간이라도 생활비를 벌어다 주면 고마 운 것이었다. 그리고 우식이 아내 자신도 그간 우식이가 길거리 작업복 장사로 나서는 동안 자신만의 기반을 구축했고 이제는 한두 달 생활비를 우식이가 안 갖다 주어도 아니 더 이상 갖다 주지 않아도 될 만큼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또한 딸이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젊은 결혼 초기 남편이 벌어다 줄 수 있는 정도의 월급을 딸이 보충할 수도 있으니 남편 마음을 떠나서 딸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자녀들은 날마다 스물 네 시간 자기 엄마와 생활을 같이 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자신의 아버지는 모른 척 해도 엄마의 존재를 무시하고 모르는 체 하는 자식들이 적다는 것이다. 그것을 미리 계산에 넣고 그랬었는지 우 식이는 그의 딸, 아들의 생각 저변에는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서 돈을 벌어 오려고 집을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 새로운 길을 도모하고자 가정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동안에도 돈을 벌어온 것 보다 안 벌어온 날들이 더 많고 오직 자기들 엄마가 고생을 해서 생활이고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 식이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 아내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하면 한 푼이라도 생활비를 더 집으로 송금해 줄까? 하면서 서울에 있는 집에 상경도 안하고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무엇인가 잘 못 되었다고 실마리를 잡은 것은 그가 십여 년 전국 농촌을 돌아 다 니던 중 6년째 접어들고 있을 어느 해 6월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승합차에 옷을 실고 농어촌을 돌아다녀도 과장, 부장 월급은 부럽지 않게 자신의 기본 경비를 써 가면서도 수백만 원씩 온라인 무통장으로 매월 송금을 할 수 있었다. 장사가 되니 안 되니 해도 기본 생활비는 그렇게 궁색하지 않으리만큼 벌어다 주고 있다는 생각을 우 식이는 하고 있었다. 그러던 날에 아내 통장으로 정확히 5개월 만에 1500만 원 이상은 송금을 했고 아내는 아내대로 고정 월급을 받고 있었기에 필요하다면 일, 이백 만원을 자다가도 가까운 365일 은행창구를 통해서 다시 역송금도 가능하리라 우 식이 는 믿고 있었다. 그러던 날에 갑자기 장사가 덜 된다 싶어 대전 인근에서 돌아다니다가 장사가 잘 될 성싶은 참외가 한 창 수확중인 성주로 내려가 보기로 하고 경부고속국도에 들어섰다. 이미 여름의 시작이라 날씨가 무덥고 비가 자주 내리고 있었던 나날들이었다. 특히나 성주는 대구와 인접하여 초여름에도 한여름에 입는 여름 작업복이 필요한 곳이었다. 하지만 아직 봄옷이 많이 남아있어 옷을 교체하지 않으면 성주로 옷을 팔러가나 마나한 곳이었다. 일단 급한 대로 백만 원을 보내라고 해서 구색만 갖추고 들어가서 장사를 하면서 더 구입을 할 생각이었다.
"여보, 난데 지금 경북 칠곡 휴게소에 와 있는데 내일 모레 왜관을 거쳐 성주로 가려고 하는데 옷을 더 떼야 하니까 백 만 원만 내 통장으로 보내줘."
'알았어, 이따가 저녁에 집에 가서 전화를 할께 지금 바쁘거든."
우 식이 아내는 우식이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래 오늘 밤에 물건을 보내라고 할 것이니까 저녁에 송금을 해 주면 내일 아침에 평화시장 옷가게에 송금해 주면 되는 것이지. 하루, 이틀 거래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을 안 주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평화시장에서도 내일 아침에 옷을 보내주고 정오는 되어서 가게 문을 닫고 들어가니까 상관없지. 그래 비도 오는데 어차피 휴게소 안에 있는 찜질방에서 하루 밤 지내고 내일 아침에 나가기로 하고 기사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차안에서 우 식이는 그 의 아내로부터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저녁 8시에 직장이 끝나니까 집으로 가면서 전화를 하고 365일 은행창구에서 계좌이체를 시키면 9시 전후면 찜질방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T. V를 보다가 잠을 자면 되겠다 싶었다.
밤 10시가 되어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 혹시 잠시나마 깜박한 것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전화가 꺼져 있었다. 집 전화를 해도 전화는 아무도 받지 않았다. 딸은 학교에서 아직 안 왔나보고 아들은 도서실에 다닌다고 했으니 그 시간에 도서실에 있을 것이니 역시나 전화를 받을 사람이 그의 아내 말고는 없는데 역시나 몇 분, 아니 십 여분 이상 전화 신호는 가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다시 연결을 해 보아도 역시나 전화가 꺼져 있어서 받을 수 없고 메시지를 남기려면 삐~ 하는 소리가 난후 녹음을 하라는 소리가 들려 나올 뿐이었다. 그리고도 하루를 더 기다려 보았다. 무슨 사유인지 돈이 집에 없으면 한남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자신의 오빠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면 백만 원을 빌려다 송금을 할 수도 있으니까 말 이다. 비는 다음 날도 우식이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루 종일 내리고 있었다. 다음 날 밤이 다 가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전화를 안 받는 것은 아내 휴대폰이나 집 전화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인가 이것은 아니다 싶어 왜관 나 들 목을 나와 서울로 상경하기로 했다.
아니 그런데 나 들 목을 나오면서 요금을 내려 하는데 차를 옆에다 세우고 사무실에 가서 요금을 내라는 것이었다. 아니 여기서 내면 되지 사무실에 왜 들어가느냐고 했더니 손님은 고속국도 체류시간이 4시간인데 48시간이나 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유서를 쓰고 요금을 더 내야한다는 것이었다. 어쩌거나 사무실로 들어갔더니 1만원도 안 나오는 통행료를 8만원을 내라는 것이었다. 서울 부산 왕복에 춘천까지 왕복하는 요금을 계산해서 두 배로 과태료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로공사 법규에 그렇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휴게소에서 머무르다 나왔다는 식사를 하고 우연히 주머니 속에 넣어둔 식당 영수증을 제시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냥 요금 내기를 거절하고 상경을 했다. 내가 법대 출신이니 법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 돈 8만원을 안내서 붙들어 가면 핑계 삼아 며칠 공짜 밥을 얻어먹고 그렇잖아도 장사도 시 원치 않은데 휴가를 간 셈 댄다고 말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하도 터무니없는 돈을 내라고 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내 질렀던 것이었다.. 하여간 도로공사 직원하고 한 바탕 언성을 높이고 요금을 안 내고 상경을 했다. 저녁이 되어 아내가 집에 들어왔다. 나는 웃는 낯으로 당신이 쓰고 있을 가계부를 좀 보았으면 한다고 했다.
순간이었다.
아내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문을 열고 어디론가 급히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밤새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는지 아이들은 엄마가 안 보이는데 걱정하는 눈빛이 아니었고 우 식이에게도 그 이유를 묻지 않고 자신들이 밥을 손수 차려 먹고는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우 식이는 그 이후로 집을 나와 1년간 가족하고 소식 없이 혼자서 세월과 투쟁을 했다.
그때가 그의 딸이 고2였는데 수능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돈은 어느 정도 그 시점까지는 그런대로 벌어다 주었으니 내년 수능 볼 때까지는 생활비 때문에 걱정하지 않을 거라는 계산을 하고 가정불화를 일으켜 딸이 공부하는데 방해를 하느니 당분간 딸이 수능시험을 마치는 날까지는 집에 들어가지 않기로 하고 다시 전국을 내집삼아 돌아다녔다.
물론 1년 동안 우 식이는 충주 본가에 노모가 살아계시기에 큰 집을 들락거렸지만 아내하고는 일 년 동안 전화 통화를 하지 않고 남남처럼 지냈다. 물론 우 식이 아내는 시댁을 다녀가지 않았고 우식이도 한남동 그의 처가에 그림자도 비칠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우 식이는 그의 결혼생활이 실질적으로는 그가 마흔 여섯 살이 되던 해에 끝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후로 어떻게 그의 가정생활과 아내와 관계가 전개될지 모르지만 이미 그 시점으로 더 이상 서로에게 신뢰를 회복할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 식이는 두 자녀 교육보험이 정상적으로 들어가고 있고 약관대출을 받아쓴 금액에 따른 이자도 잘 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2년째 미납상태이고 신문대급이 거의 1년 6개월 밀려 있었고 심지어 한 달에 몇 만원 하는 전기요금조차 석 달이 밀리어 전기 공급을 중단하겠다는 한전으로부터 경고 엽서를 확인하고 집을 나선 상태였다.
이미 다 끝난 것인데 하고 우 식이는 어서 빨리 딸과 아들이 최소한 고등학교는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그날까지만 운명이 있다면 운명에 맡겨보기로 하고 그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조용히 기다려 보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마음이나 영혼이 순수한 면이 많이 남아있는 충청도에서 올라온 산다는 것에 쓰디 쓴 인생경험이 없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사업이 실패로 돌아간다고 아우성을 치니까 큰집에서 땅을 팔아서 수천만 원을 막아주기도 했지만 스스로 자생 능력을 잃은 사업에는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식이었는지라 다 무위로 돌아가고 이제는 더 이상 큰집인 본가에서도 손을 떼고 나서 스스로 자구책을 찾은 것이 법대출신이라는 것을 한강에 내던져 버리고 승합차를 끌고 이동의류 판매로 길을 나선 것이었다.
그가 1년을 번민하던 날에 중대한 결심을 하러 어느 기독교 신앙훈련 단체에서 3박 4일간 실시하는 산상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날이 딸 수능시험을 끝나는 날이었다. 그 이전 며칠 전에 시험을 잘 보라고 딸 책상위에 떡을 사 놓고 기도원 입소를 하기는 했었지만 딸의 얼굴은 직접 대면하지 않고 산에 올라갔던 것이었다.
결론은 이혼으로 결정을 하고 하산을 하려 하는데 처음에는 각자 신앙훈련에 참석을 했던 사람들이 남남인줄 알았는데 예외로 부부들이 많았다. 그때 가슴속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그래도 참아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집에 들려 수능 시험을 치른 딸을 밖으로 나오라고 해서 불고기로 저녁을 사주는데 그의 아내가 따라 왔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우식이가 때려죽이고 싶은 울분이 확! 치밀어 올라왔지만 그래도 한 번 참아 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 같아서 저녁 먹는데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된다는 심정으로 저녁을 같이 먹고 소주도 한잔 했기에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자고 또 길을 나섰다. 아직도 우 식이는 경제적으로 자신이 얼마라도 더 벌어야 아들이 아직 수능 시험을 치르기 전이었고 딸이 이제 대학생활 시작이니 부부간의 관계를 떠나서 그들에게 최소한의 아버지 노릇을 해 주어야 할 책임이 남아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 년 동안 모은 돈을 나누어 딸, 아들 통장에 입금을 해주고 그 후에도 최소한 그들이 학업을 하는데 지장이 없을 만큼은 입금을 해 주기로 하고 세상을 향해 또 다시 생과의 투쟁에 나선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딸은 중국과 일본을 교환학생으로 다녀오기까지 하면서 대학졸업을 하게 되었고 아들은 2년 과정 전문대를 1년 다니다가 군대를 가서 이제 전역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언젠가 상경하였다가 휴가를 나온 아들이 귀가하는 날 그가 근무하고 있는 전라도 어느 부대까지 데려다 주고 면회는 우 식이 혼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이 함께 가 보지는 않았다. 우 식이 자신이 젊은 날 군대생활을 하던 것과는 달리 매월 휴가를 다녀가다 시피 하는 것이 요즈음 군대이다 보니 굳이 면회를 가지 않아도 될 만큼 집에 와서 우 식이는 못 보지 만 자기 엄마와 누나를 수시로 보는데 면회를 가는 의미가 퇴색을 하여 안 가본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로서 추억을 남겨주기 위해서라도 한 번 가주어야 하는데 혼자 가야 한다는 것이 서글픈 일이었다.
이번에도 딸 졸업식에 올라가서 먼 훗날 그래도 아버지가 딸 졸업식을 참석하러 올라왔다는 추억이자 기억이라도 남겨주려고 상경을 했는데 아내는 아내대로 딸은 딸대로 아버지 몰골을 보고 다른 사람이 다소 실망을 할지도 모르니까 졸업식장에는 나타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이미 아침에 그의 아내가 본의 아니게 전화통화를 하는 것을 듣고 있었는데 처갓집 식구들이 왕창 우식이 딸 졸업식에 오는데 어디서 몇 시에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우 식이 아내는 간다 온다는 말도 없이 그의 딸 졸업식장을 가 버린 것이었다. 이미 그의 딸은 먼저 졸업식 시간에 맞추어 가느냐고 집을 나간 후였고 그의 아내도 곧 집을 나서면서 우 식이에게는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슬며시 집을 나간 것이었다. 우 식이는 아내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왜 그리 오래 있나? 하고 화장실 문을 열어 본 순간 아내가 이미 집을 나선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의 풍랑을 잠재우며 택시를 타고 그의 딸 졸업식장에 가서 혹시나 자기 딸이 어디에 있나 눈여겨 보았다. 물론 휴대폰으로 자신이 와 있다는 것을 알릴 수도 있었다.
들어오면서 1만원짜리 꽃다발을 한 개 사들고 혹시 식장에 앉아 있지 않을까? 졸업식장에도 가 보았다. 태평양에서 바늘 찾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여 그냥 포기를 해야만 했다.
물론 그의 아내도 학교 어디엔가 있지만 우 식이는 전화를 하고 싶지 않았고 그의 아내로부터 전화도 없었다. 이미 집을 나오면서 좋으나 싫으나 아빠인데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며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는데 전화가 올 리가 없었다. 아내는 자기 친정 식구들과 마주칠 것을 염려해서 일부러 피할 정도인데 우식이가 나도 왔다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사정할 그도 아니었다. 그래 딸 수능 시험 보기 전에 떡을 책상위에 놓아주고 산을 올라갔던 것처럼 집에 꽃다발을 갖다놓고 다시 진주로 내려가자는 생각을 하고 운동장을 나와 서성거리는데 그의 딸이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사이 우연히 마주 친 것이었다. 다소 그의 딸이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우 식이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꽃다발을 주고 얼른 지나가는 누군가에게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는데 운명이 그렇게 사진을 남기지 말라고 했는지 사진이 저장되지 않고 무위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마침 그때 그의 아내가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의 딸이 자기 엄마를 찾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안 왔으면 하는 자신의 아버지를 마주친 것이었다.
우 식이는 그의 아내를 본 척도 하지 않고 그의 딸 졸업식장을 빠져 나왔다. 더 이상 그의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이며 할말도 없는데 말이다.
한참을 택시를 잡으려고 교문앞에서 서성거리는데 그의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지금 어디 있는지 사진이라도 한 장 다시 찍게 오라는 것이었다. 우식이는 집에 다 왔다고 하고 그냥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곧장 집을 들러 진주로 내려올까 하다가 인근에 오랜 지기 사무실이 있어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내려가려고 그 지기 사무실에 연락도 없이 들려보았다. 마침 그가 사무실에 있었고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쓸쓸한 재회와 더불어 그간 서로의 간단한 안부와 더불어 똑똑하고 영리한 그의 딸 안부를 물어오는 것이었다.
오늘 졸업식에 다녀오는 길이고 이미 대기업에 정규직 사원으로 출근을 했다며 겉으로는 은근히 자신의 딸 자랑을 했다. 오늘 졸업식장에 가서 가족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 이야기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있는데 그의 딸로부터 휴대폰으로 문자 메시지가 왔다. 갈 때 가더라도 자기에게 저녁을 사주고 가라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그의 아내가 아빠가 엄마에 대한 감정을 확인해 보라고 했던 모양이었다. 실제는 아니지만 오늘 서초동 가정법원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가 그냥 왔지만 조만간 다시 서울에 오면 엄마에게 필요한 서류구비를 해 주고 아빠는 본가로 주소 이전과 더블어 더 이상 가져가 짐이 없지만 자신이 대학시절 4년간 쓴 일기 가방이 하나 집에 있으니까 가지러 들려갈지도 모른다고 했다. 딸과 저녁을 먹으면서 소주 한 병을 나누어 마시면서 아내에게 최후 통첩을 딸을 통하여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이전에 그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이 집을 나갔는지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는 우식이 휴대폰으로 세 번의 위치 확인을 하는 것을 우 식이는 자신이 들고 있는 휴대폰으로 확인이 되었다. 그의 딸과 30년 동안 그의 아내와도 하지 못했던 소주를 허심탄 하게 마시면서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하고 딸에게 아빠는 이제 기억 속에 인물로 남겨도 좋으니 행복하라고 했다. 결혼식에 초대할 일도 없겠지만 더 이상 초라한 아빠 모습에 괴로워 하지 말고 근사한 아빠가 필요하면 대역을 해주는 아빠는 일당 10만원이면 고급 승용차에 양복을 입고 한 두시간 사진촬영 내지 식사를 함께 해주는 대행업체도 있으니 아빼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네 인생을 살라는 부탁을 하고 더 이상 같이 있으면 마음이 저려 올까봐 우 식이는 딸에게 어서 집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의 집에서 멀지 않는 한식집에서 이별 아닌 이별을 고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진주로 내려온 것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 그의 딸과 아내로부터 전화가 오지 않았고 우 식이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마음이 정리되어 휴대전화를 다시 바꾸는 여유가 생기면 우 식이는 우선 휴대 전화를 자신의 명의로 다시 개설하고 그의 아내 명의로 되어 있는 전화는 추억 속에 유품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물론 이 후로는 생활비나 돈을 가져다 줄 생각이 없기에 이제는 자신의 전화요금은 자신이 내야 할 것이기에 말이다.
우 식이는 남들이 들으면 변명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최소한 주일에 교회에 같이 나가서 주일성수를 하면서 가정의 행복을 되찾아 보려고도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가 두 번 실행을 하고 세 번째 되는 주에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서 새벽예배로 주일 예배를 대신하고 있던 일이 무위로 끝나고 각자 자신의 신앙에 따라 교회에 나가고 안 나가고는 자유의지에 맡기기로 하였다. 우 식이가 가만히 되돌아 보건데 이미 그의 아내는 더 이상 자신과 결혼에 따른 가정생활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고 돈이 필요한 것이지 남편이자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저 버리고 그 역할에서 자신이 중간에서 아이들과 아버지 사이를 막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아이들이 성년이 되었고 아들만 대학을 졸업하는 일만 남아있다. 그의 딸과 얼마 전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에게 그의 딸이 부탁한 것도 자신의 동생이 대학 졸업 때까지만 아버지로서 다소나마 경제적으로 그래도 필요하다는 말을 자신의 엄마 생각을 전달하고 있었다. 우 식이는 쓴 소주잔에 비치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할 수 있는 한 그 문제는 인륜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크게 기대는 하지 않더라도 전혀 모르는 체 할 아버지가 어디 있겠냐? 며 일단 그의 아들이자 딸 동생이 제대를 하려면 다소 몇 개월의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생각을 하자는 말을 남기고 떠나왔었다.
우 식이는 그래도 한, 두해 전까지만 해도 이혼은 하나님이 맺어준 가정이기에 절대 있을 수도, 해서는 안 되는 이혼 불가지론자였다. 하물며 그가 자신의 아내와 이혼이 아닌 버린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그 정도의 심성을 가진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만히 지난날의 결혼 이전부터 되돌아 보건데 자신이 마치 삼손과 들릴라 이야기처럼 그가 서울에 왔다가 한 여인에게 아리따움과 외로움에 마음과 영혼을 빼앗겨 어느 날 삼손처럼 영원히 비밀로 간직해야야 힘의 원천인 그의 머리카락이 들릴라 부족들 남성에게 다 깍힌채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눈이 뽑히고 연좌맷돌을 돌리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신세나 마찬가지가 된 것이었다. 우 식이가 마지막 기도를 하던 날에 최종으로 그의 아내 마음을 확실하게 간파한 것은 지난 추석이후 그녀가 시댁을 내려오지 않을대 부터였다. 90세를 맞이하는 시어머니 생신에 안 내려오고, 그녀의 시아버지가 기일도 그냥 지나치고, 고유 명절인 구정조차도 내려오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아내도 무언의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통보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들 부부가 가정사로 마추치는 것은 그들의 딸 대학 졸업식을 마지막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우식이는 염두에 두고 상경을 했던 것이었다. 교회에서 청년회장 부회장으로 만나 담임목사의 주례로 한 가정을 이루었으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이상 신앙적으로도 믿음을 나누기에 보시기에 안 좋은 지라 그런 확신을 딸과 아내를 통하여 보여주신 것이라 믿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감사하는 것이 각자의 신앙에 따라 기도를 하겠지만 그래도 그들 부부에게는 각자 그들이 믿는 예수가 있어 다소 마음의 고통으로 오랜 세월 잠을 잘 못 이루겠지만 다 세월이 가면 잊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 다행일지도 모른다. 결혼 전 교회에서 청년회장 부회장을 토요일 젊은이 들이 성경공부 반 이성교제 반 교제를 하던 날에 이미 그들은 혼전 성관계로 타인의 의심을 받아가며 마침내는 결혼으로 이어졌지만 그런 날에 영원히 불륜으로 끝나서 다른 시험을 당해야 했던 것을 이렇게 끝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를 해야 한다고 우식 이는 아침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경건의 시간에 기도를 하면서 그래도 처자식과 자신에게 따스한 눈빛 한 번 제대로 주지 못했던 처가 식구들을 위해 기도를 해 줄 수 있으니 그것이 예수를 믿는 마음이라고 날마다 스스로를 위로해 보는 것이다. 삼손의 마지막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어서 한때 나마 사랑에 빠져 그의 모든 힘의 비밀과 영혼을 주었던 그를 파멸로 이끈 들릴라 부족에게 마지막 사사로서의 직분을 수행할 수 있게 했다면 이제 우 식이에게도 그와 같이 그의 아내를 버림으로써 다시 서을을 탈출할 수 있고 그의 이상과 꿈을 향해 마지막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믿고 이제 그의 아내를 그의 기억과 추억에서 놓아주기로 한 것이다. 이혼이나 버리는 것이나 놓아주는 것이나 언어유희에 불과할지 모르나 그의 아내가 그를 버렸듯이 이제는 그가 그의 아내를 버리기로 한 것이다. 세상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심판에 앞서 우 식이에게 그래도 네가 잘 못한 것이 더 많고 참아 보지 그랬느냐고 질문을 한다면 그저 아무 변명도 하지 않기로 그는 혀를 깨 물었다. 이미 하나님 당신이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다 들여다보고 게셨는데 더 이상 인간이 저 자신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라고 우식이는 변명자체도 무의미 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그랬다. 초우라는 카페회원이 쓴 복수라는 단편소설속에 나오는 두 남자의 아내가 불륜으로 가정을 뛰쳐나간 후 다시 화합하면서 아내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만큼 사랑해 주고 용서해 주는 것이 가장 큰 복수라고 하면서 복수가 이혼지경에 이른 가정을 위한 마지막 출구이지 희망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 식이에게는 그의 아내를 용서할 만한 그런 힘도 없지만 서로가 용서 받을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아니기에 용서를 해주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것이었다. 애초 그들은 그들이 만난 지 30년을 살아오면서 서로가 결혼에 따른 가정을 이루면서 삶의 목표가 없었기에 용서로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 부부는 잘 알고 있었기에 해결책 내지는 출구가 없는 것이었다. 그 카페회원이 다른 카페에 남긴 다른 어디에선가 퍼온 글에서 그 해답이 있었다. 서로를 자신들의 기억 속에서 마음속에서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우식이 부부가 결혼 전 교회에서 토요일 마다 청년회 모임을 가지면서 그 시간 교재가 행복으로 초대라는 성경 중심의 교재였다. 그 내용 속에 행복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부부가 그렇게 매일 성경공부를 하면서 서로가 기도를 해주고 격려를 해주고 사랑을 확인하고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눈에서 멀어지지 않게 같은 방향으로 삶을 목표를 바라다보아야 했는데 서로는 같은 방향이 아니라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기에 서로에게 많은 것만 채워주기를 바라보다가 그렇게 이루어 지지 않자 서로가 결혼에 대한 비전이 남아 있지 않음으로 인한 허탈감이 더 이상의 부부로서의 존재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식이는 얼마전 아프리카 선교사로 나가 있는 K라는 친구에게서 온 이메일이 생각났다. 자신은 다른 것은 몰라도 여호와 이레라고 하나님께서 손수 준비해 두신 아내를 만나 가장 결혼을 잘한 남자라고 자기 아내가 최고라는 말을 한 것이 생각난다. 아프리카 오지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부부이자 친구이자 동역자로서 선교사의 배필로 전혀 손색이 없고 불평 없이 조력해 주는 자신의 아내를 두고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나이라고 말이다. 윤동주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가 예수라고 지칭한 시가 생각이 나곤 했는데 그 보다 더한 행복을 느낀다던 K라는 그 친구도 한때는 20여 년간 결혼을 약속한 여자 소꿉친구가 같은 교회전도사와 결혼하기로 결정을 하고 한동안 방황했던 기억이 새롭다. K라는 친구는 여려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하고 홀 할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교회에서 대학을 마치도록 전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버스요금 몇 백원이 없어서 우 식이 딸이 졸업한 전농동에 위치한 바로 그 대학교에서 한남동 까지 밤새 걸어서 집을 왔었노라고 했던 그 친구가 정말 보내주기가 누가 보아도 다재다능한 여인을 자신이 고아나 다름이 없고 장차 결혼 후에도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고 자신을 떠나서 사회적으로 모든 조건을 다 가지고 있는 정말 외모도 남자답게 생긴 장래가 촉망한 전도사에게 떠나갔을 때 한없는 실의에 빠져 눈물의 기도를 했던 그 친구가 그 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다른 교회에서 정말 목사사모로서는 떠나보낸 여인이상으로 최고의 동역자로서 반려자를 만난 것이다. 부부가 아닌 동역자로서 이기에 부부는 그 다음 차원인지라 삶의 목표와 예수를 향한 비전을 같이 바라다봄으로써 마주보는 부부가 아니라 동반자로서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바로 우식이 부부는 부부로서 마주보고 있어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기를 바랄 뿐 서로 같은 방향을 향하여 동시에 바라다 볼 수 있는 삶에 대한 동일한 비전이 없는 것이 그들이 오늘날 30년의 인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각자의 이상과 꿈을 찾아가라고 서로를 놓아줄 때가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 식이가 먼저 그의 아내를 과감하게 버림으로써 그녀도 다시 한 번 한 남자가 아닌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꿈과 비전을 찾아 여생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 식이는 지난날의 우울했던 기억과 희로애락으로 알록달록하게 물들어 있는 모든 추억을 지난 1월 마지막 날에 태백산 눈꽃산행을 다녀오면서 흰 눈으로 다 덮어버리고 아내를 태백산에 버리고 온 것이다. 그냥 하얀 기억만을 간직한 채 말이다. - 끝 - |
첫댓글 지는 뺑끼일이 천성에 맞읍니더, 붓을 잡으면 아무생각이 없어저요, 빌딩 도색 외줄밧줄을 처음타보니 이밧줄이 끊어짐 죽는다 ,하나님이 밧줄이다 이런 심정으로 주님을 믿어야 하는데 그런생각도 했읍니다.교회도 안가면서 말이죠,지는 인생은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일하다 즐겁게 사는 것이 최고라 생각하는데 예전에는 그리 살지못했죠, 지금도 생각만이겠죠,여하튼 한시대를 같이사는 우식이가 매일 즐거웠음 좋겠읍니다...
우식- 어리석을 우(愚) 알 식(識) - 많이 배우고 똑똑하지만 어리석은 자라는 뜻입니다
주인공은 왜 아내에게 가까이 가지 못했을까요? 태백산 눈 속에 아내와의 추억을 담고 올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그 추억을 꺼내왔으면 어땠을까요? 소설이라기 보다는 자기고백인 것 같아 말씀드려보는건데...
동상이몽! 시작부터가 잘 못된 만남이었다고 할까? 행복한 결혼 생활은 한 사람의 노력으로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지요. 우식이 아내는 삼손과 들릴라의 들릴라내지는 롯의 아내로 남편보다는 자기 부족을 더 사랑하고, 세상을 뒤돌아 보던 날의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의 모습입니다. 우식이 조차 함께 소금 기둥이 될 수 없어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했답니다. 문제는 롯은 자식을 데리고 나왔는데 우식이 아내는 그 자식들을 볼모로 우식이를 경제적 존재로 발목을 잡고 있는데 이제는 그것을 뿌리칠 시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엄마편에 가깝다 보니 더 이상 우식이가 설 곳이 없어진 것이기에 자생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
우 식이는 지난날의 우울했던 기억과 희로애락으로 알록달록하게 물들어 있는 모든 추억을 지난 1월 마지막 날에 태백산 눈꽃산행을 다녀오면서 흰 눈으로 다 덮어버리고 아내를 태백산에 버리고 온 것이다. - 우식이가 여기까지 오는데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정말 잘 하셨네요 이제는 우식이도 자신을 아끼고 가꾸는 일만 남았습니다. 앞으론 가슴앓이 할 일은 없을테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