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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65세, 시작은 반이고, 끝은 곧 새로 시작하는 것! (경기 수원 00중학교 부설 방송통신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에) 0 0 0
나는 구기자의 고향 충남 청양에서 3남 2녀 중 맏딸로 태어나 가난한 농촌에서 어렵게 살다가 10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때는 남에 논과 받을 조금 지어서 타작을 했는데 농사지을 때마다 나는 항상 밥하고 아기 보고 농사 일손 돕느라고 학교를 가는 날보다 빠지는 날이 더 많았다.
그렇게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고 4학년 올라가니까 어머니가 학교를 가지 말라는 것이다
생활도 어렵고 계집애가 많이 배워야 아무소용 없다며 그때 이웃에 친척 할머니가 서울에 다니며 사람도 소개해주고 여러 가지 농산물도 팔기도 했다. 어머니는 나보고 그 할머니 따라가 밥이라도 얻어먹고 돈 한 푼이라도 벌어 오라며 그 할머니 따라 가라고 서울에 어느 가정집 가정부로 보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14살 어린나이에 그 할머니 따라 서울로 가서 온갖 설음과 많은 고통 학대 천대 받으며 연탄가스 마시고 쓰러져 죽을 뻔 한일도 많았고 명절 때 다른 사람은 다 고향 가는데 나는 그리운 고향에도 못가고 일만 하면서 집에 가고 싶다고 하면 주인아주머니는 아무거나 가지고 무조건 때려서 온 몸은 멍투성이 그럴 때마다 나는 고향생각 하며 부모 형제가 너무 보고 싶고 생각나서 밤하늘에 별을 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아무리 가난하고 없어도 부모형제와 같이 사는게 제일 부러웠다.
스무살이 다 되도록 그렇게 살다 충주로 오게 되었다 충주에서 결혼을 하고 살면서도 늘 배우지 못한 한과 서러움에 학교 앞을 지날 때마다 책가방 메고 학교 다니는 학생을 보면 너무 부러웠다 나는 언제한번 책가방 메고 저렇게 학교를 다닐 수 있을까 하면서 늘 한숨 지곤 했다 어느 날 60대 할머니가 TV방송에 나와서 서울에 있는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공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당장가고 싶었지만 여러 형편 때문에 갈수가 없었고 또 어느 날 서울 무슨 주부학교 다니는 사람도 나와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 가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그러다가 또 어느 날 길을 지나다가 전봇대 검정고시시험 보는 무료 야간학교 광고 가 붙어 있어 그것을 보고 가서 내 나이 50대 후반에 초등 3학년 과정부터 6학년 과정까지 낮에는 집안일을 하고 밤에 공부를 하여 청주에 가서 시험을 보고 합격하여 중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 전 과목 합격 증서를 2008년 05월 29일 받았다.
그리고 5년 후인 2013년에 L마트 문화센터에서 하모니카를 배우는 중에 하모니카 선생님이 금년부터 어린 시절 여러 가지 형편으로 인하여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어른을 위한 방송 통신 중학교가 대구, 광주에 한 학교씩 생겼다는 것이다. 한 달에 두 번 일요일 출석 수업과 집에서 인터넷으로 공부를 하면 되고, 또한 검정고시를 위한 시험공부가 아닌 어린 학생들처럼 정규 중학교에서 과목별 지도 선생님들과 함께 공부도 하고, 동아리 활동도 한다는 것이었다. 어른 중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아직도 4~50년을 더 살아야 하는데 그래 내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라도 이제 시작해서 방송대학교까지 나와도 70살 전후인데 한번 해 보는 거야. 이런 좋은 기회가 어디 또 있고 수업료 전액을 국가에서 부담을 한다니 어린 시절 배움에 대한 한도 풀 수 있고 노후에 나도 무엇인가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방송 중학교 생긴 첫해 4월 중순이었다. 이미 입학기간이 지났기에 그 해는 아쉬움만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가 다음해인 2014년에는 기필코 그 선생님 말대로 대구까지 한 달에 두 번 다녀오는 한이 있더라도 나도 방송통신 중학교를 다녀서 배우지 못한 한을 풀어보리다 마음을 먹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현실이 되어 대구도 아니고 광주도 아닌 충주에서도 일요일 아침 첫차만 타면 다닐 수 있는 대전, 수원에도 창원, 의정부와 더불어 추가로 그 지역 기존 중학교에 부설 방송통신 중학교가 문은 연 것이었다. 입학원서를 내는 기간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첫날에 수원 제일중학고 부설 방송통신 중학교와 대전 봉명중학교 두 군데 모두 입학서류를 접수하고 왔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발표 날이 돌아왔다 2014년 2월 19일, 휴대폰으로 문자 메시지로 오전 10시를 전후해서 약속이라도 한 듯이 두 학교로부터 다 합격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뒤늦게 학교 가는 것이 창피해서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내 스스로 대전으로 가려고 했는데 남편이 수원으로 가라고 했다 왜냐하면 수원에는 아들이 거기 사니까 토요일 날 가서 자고 일요일 날 학교로 같다 오라고 하면서 남편이 아들과 며느리 한태 전화를 해서 수원으로 가게 되었다.
한 달에 두 번씩 주말에 가는데 토요일에 가면 아들이 터미널로 태우러오고 일요일 날은 학교로 데려다 주고 끝나면 터미널로 또 데려다 주고 며느리는 도시락도 싸주고 해서 아들 며느리한테 미안하기도 하지만 며느리가 착해서 실은 내색도 하지 않고 잘해주었다 지금까지 학교에 잘 다닐 수 있었던 것도 나를 인도 해주신 하나님과 아들 며느리와 남편, 그리고 하모니카 선생님덕분이었다.
지금 이 내 나이에 영어수학도 이해도 안 되고 금방 들어도 잊어버리고 머릿속에 안 들어 가지만 학교에서 롤링 페이퍼도 하고 체육 시간에 제기차기, 훌라후프, 배드민턴, 여러 가지 게임도하고 소풍도 가고 즐거운 반 친구들이 맛있는 것도 많이 싸와서 나누어 먹기도 하고 같이 동아리 활동도 하고 그런 것이 너무 재미있고 즐거웠다.
1학년 때 대전 가서 합창대회에서 2등을 해가지고 은메달도 받았고, 2학년에는 장려상을, 3학년 때에는 대상을 받았다. 모름지기 합창단 은상, 동상, 대상이 내 인생에서 타 본 상의 전부였다. 아니 격주 출석 수업이었지만 충주에서 수원까지 가장 멀리서 다닌다는 학생인 내가 개근상도 받았다.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모르면 너무 답답하고 눈뜬장님인데 이제부터 더 한 걸음씩 하나하나 배워가며 나의 빈 가슴을 채울 것이다
나는 서예를 조금 했는데 붓글씨로 이런 내용을 써서 액자를 만들었다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말 하지 말라, 금년에 배우지 않고 내년이 있다고 말 하지 말라 가는 세월은 나를 늦추어주지 않는다.(주희의 말)”
또, 이런 내용도 있다
“네 시작은 미약 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성경 욥기 8장 7절)”
끝가지 가 보기로 했다.
[後記]그리하여 2017. 1. 8일 꿈에 그리던 중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그 무엇보다도 3년 동안 개근을 했다는 것과 3년 평균 성적이 85점 이상이 내 자신을 내가 놀라게 한다. 그리고 하모니카 선생님이 대학을 두 번 다니도록 일생에 100점 만점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는데 나는 여러 과목에서 100점 만점이 열 손가락이나 된다. 졸업식 날 중학교 졸업장을 받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중학교 졸업장 위에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울지 않으리라. 그래 또 다시 도전이다. 내 남편이 충주 00학교를 졸업했고, 내 아들도 그 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내 남편과 아들이 다녔던 그 고등학교 부설 방송고등학교에 입학하기로 했다. 중학교 과정과 마찬가지로 한 달에 일요일 격주 2번 출석수업과 인터넷 강의로 학습을 하면 된다.
수원은 먼 곳이라 아직 운전이 미숙하여 버스 를 타고 다녔지만 충주는 내가 수십 년 간 살아온 곳이고 교통도 복잡하지 않기에 충주에서만큼은 이제 직접운전을 해서 고등학교를 다닐 것이다. 그리고 대학은 욕심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모니카 선생님이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불혹이 넘어 다시 한 번 다녔다는 방송대에도 할 수 만 있다면 도전해 보고 싶다.
내 나이가 어때서~ 라는 노래를 현실로 만들어 보고 싶다. 단 하루를 다녔을 지라도 고졸을 넘어 내 남편이 늘 나를 못 배웠다고 서운하게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언젠가는 남편보다 정신적으로 우뚝 서고 싶다. 이래 뵈도 당신은 고등학교 밖에 못나왔지만 나는 이래 뵈도 대퇴라고 말이다. 아니 더 나아가 나도 대학을 나왔노라고 대학을 졸업하는 날에 남편과 주변 사람들을 말할 것도 없고 충주에서 제일 높은 산에 올라 외치고 싶다. 비록 칠순이 넘어 조금 늦었지만 “저도 대학을 나왔습니다.”라고 ... 감사합니다.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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