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제 C.A로 인하여 연이어 두 시간 수업을 해야하는 날이었다.
수업을 진행하려 하는데 중간에 앉아 있는 한 학생의 머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분명 금색머리를 하고 수업에 임했던 것이다.
나는 그 학생을 못 본 척 지나칠 수 없어 손으로 지적하며 이 시간이 끝나는 즉시 머리에 금색을 씻어낼 것을 강요했다.
수업이 끝나 10분 동안 휴식을 취하고 다시 그 반으로 들어가 수업을 하려 하는데 그 금색머리를 한 학생이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머리를 만진 흔적도 찾아 볼 수 없기에 나는 다시 그를 지적해야 했다.
나의 연이은 발언이 그의 심사를 건드렸는지 그는 몹시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오른손으로 책상을 세차게 쳤고 에이 시팔 이라는 욕설까지 나에게 퍼부었다.
그 당시에 나는 교직생활 15년의 언덕을 넘고 있을 때였다.
나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그에게 체벌을 가해야 하겠다는 생각보다 냉정을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수업을 잠시 중단하고 그를 앞으로 나오라 한 후 체벌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일단 무릎을 꿇기고 침착하게 수업을 진행하였다.
수업을 간신히 끝내고 나는 그를 불러 한적한 체육실로 데리고 가 진술서를 쓰라고 하였다.
그가 쓴 진술서의 내용을 읽어보니까 나를 가장 곤욕스럽게 했던 에이 시팔 부분에서 시팔이라는 단어는 빼고 에이 씨라고만 적어 놓았다.
나는 그 진술서를 가지고 교무실로 올라가 교감선생님께 수업시간에 있었던 내용을 설명하며 그 학생에게 징계를 주어야 하겠다고 하였다.
내 말을 들으신 교감선생님은 나에게 빈정거리는 투로 진술서를 자세히 읽어보니까 김 선생이 문제시한 에이 시팔이라는 단어가 아니고 에이 씨 라로 한 걸 가지고 뭘 그렇게 부선을 떠느냐는 것이었다.
그 까짓 일로 학생을 징계를 줘서야 되겠느냐며 오히려 나를 훈계하며 그 학생을 감싸고도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이 학교가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나는 수업이 모두 끝난 상태였기에 그 반의 반장과 체육부장을 불러 그 학생이 수업시간에 교사에게 불경스러운 행동을 한 것에 대해 경위서를 쓰라고 하였다.
영리한 반장은 그 학생이 처벌을 받을 것 같아서인지 에이 씨라고 했었다 라고 썼고 정직한 체육부장은 그 학생이 에이 시팔이라고 하였다는 사실 그대로를 써서 나에게 제출했다.
나는 다시 교감선생님께 이렇듯 학생이 교사에게 망언을 하였는데 못 들은 척 스치고 지나가서야 되겠느냐고 했더니 교감선생님은 강 건너 불 본 듯 창 밖을 바라보며 학생부장에게 가보라는 것이었다.
학생부장에게 다가가 수업시간에 있었던 내용을 얘기했더니 그제서야 그 학생을 불러 진상파악을 확인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며칠이 지나도 그 학생에 대한 아무런 제재가 없기에 나는 다시 교감선생님께 그 학생에 대한 진위를 물어보아야 했다.
교감선생님은 학생부장이 알아서 처리 할 것이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수업에 임하라는 것이었다.
학생에게 그것도 수업시간에 언어 폭행을 당한 나는 다시 학생부장에게 가서 어찌되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학생부장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사건을 무혐의 처리하여 담임에게 일임했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교권이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뼈저린 가슴으로 실감했다.
수업시간에 50여명의 학생이 보는 앞에서 교사가 그릇된 학생을 지도하다가 폭언의 수모를 당했는데도 자신의 일이 아니라며 슬며시 덮어 버리려는 처사를 보고 나는 그 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즉시 교장실로 들어가 교장선생님께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보고했다. 그리고 교권이 침해당했음에도 교감선생님과 학생부장이 직무를 태만히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 가운데 교육청에서 전화가 빗발치듯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중등계장이었고 내가 자리에 없어서 전화를 못 받으니까 교감선생님을 통해 나보고 직접 전화를 걸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고 나의 전화를 받은 중등계장님은 문제를 일으킨 학생의 이름을 대면서 도대체 그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위압적인 음성으로 나에게 사건에 대한 경위를 말하라는 것이었다.
그 분께서 하신 말의 취지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감정이 앞 설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중등계장님께서 저희 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의 내용을 알고 싶으시다면 전화로 내용을 들으시려 하지 마시고 직접 저희 학교를 방문해 주시기 바란다고 하였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중등계장은 나보고 즉시 교육청으로 들어오라고 언성을 높이시는 것이었다.
언성을 높이시는 중등계장님에게 나도 감정을 억제할 수 없어 같이 언성을 높이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중등계장님은 다시 교감선생님께 전화를 걸었고 교감선생님은 나에게 교육청에 들어가 중등계장님을 만나 언성을 높인데 대해 먼저 사과를 하고 사건 경위를 말하고 올 것을 종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교육청에 들어가지 않고 묵묵히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내가 교육청에 들어가지 않자 중등계장님은 재차 교감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나를 교육청에 들여보내라고 성화를 하였다.
전화를 받은 교감선생님이 불안감을 느끼셨는지 교장실로 황급히 들어가 교장선생님께 사건경위를 보고하였고 사건의 심각성을 느끼신 교장선생님은 나보고 지금 즉시 교육청에 들어가라고 명령을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학생으로부터 그것도 수업시간에 언어 폭행을 당한 교사가 무슨 면목으로 교육청에 들어가야 하느냐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업을 진행하였다.
내가 교육청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자 교장선생님이 직접 교육청으로 발걸음을 향해야 했다.
그 다음 날 나는 교장실에 들어가 교장선생님께 어제는 감정이 격해 교육청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는데 오늘 교육청에 들어가 중등계장을 만나야 하겠다고 하였더니 교장선생님은 중등계장님을 만나 자신이 얘기를 잘하고 왔으니 나에게 수업이나 잘하라는 것이었다.
그러시면서 그 학생을 꼭 징계를 주어야 하겠느냐고 오히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에게 질문을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40만 교사의 사활을 걸고 경징계라도 주어야 하겠다고 하였다.
내 말을 심각히 들으신 교장선생님은 나에게 관내에 있는 S중학교로 전근을 가면 어떻겠느냐고 하시기에 나는 이 학교에 온지 1년도 안되었기에 전근을 갈 수가 없다고 하자 그것은 자신과 교육청이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S중학교로 전근을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갈 때 가더라도 나에게 욕설을 한 그 학생을 교사의 명예를 걸고 교칙에 의거 징계를 주고 가겠다고 하였다.
강경한 나의 태도에 당황한 담임이 나를 찾아와서 학생에 대한 변호와 그 부모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하였다.
아버지는 J라는 은행에 이사라고 하였고 어머니는 화정지구에서 부동산 중계업을 하고 있다며 나에게 은근히 실력행사를 하는 것이었다.
내가 먼저 교사로서의 사활이 걸렸다고 말을 건네자 담임 자신도 자기 반 학생이 징계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 수치스러운 일이기에 교사로서 사활이 걸렸노라며 나에게 용서해 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처음 사건이 발생했을 때 뒷짐을 지고 자기 반 학생을 옹호하며 나를 무시하던 담임이 내가 하도 강경하게 나오니까 얼굴의 혈색이 노래가지고 선처를 바라고 있으니 오히려 나의 기가 막힐 일이었다.
애를 쓴 담임도 설득이 불가능해 지자 그 학생의 아버지까지 모셔와 나를 만나려 하였지만 나는 기꺼이 거절하였다.
그렇게 몇 주일을 끌다가 마지못해 징계위원회는 열리고 그 학생은 봉사활동 3일의 징계를 받았다.
그것도 수업을 다 받고 난 다음 몇 시간 복도에 설치한 신발장을 청소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가 며칠동안 반성하는 표정으로 신발장의 먼지를 닦아내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나는 확인을 해야 했다.
학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무조건 감싸주고 옹호해 주는 것이 교사로서의 도리란 말인가.
벌을 주겠다는 교사는 인정머리 없는 매정한 교사이고 학생으로부터 치명적인 수모를 당했어도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는 교사는 덕망 있는 교사란 말인가.
나는 교직생활 15년을 하면서 처음으로 어처구니없이 당한 일 이었고 그 순간 나는 학생에게 느닷없이 얼굴을 주먹으로 맞아 교직을 떠나야 했던 친구의 서글픈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교직에 첫발을 내디딘 나는 83년 강화도 호국교육원에서 일주일 동안 연수를 받았다.
연수원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동기를 만나 이야기를 하던 중 내가 몸살이나 몹시 몸을 아파하니까 그 친구가 한적한 운동장 스탠드로 데리고 가 나에게 병이 나을 수 있도록 안수기도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라 하는 그의 뜻에 따라 그의 손이 내 머리에 얹어 젓고 엉겁결에 기도를 받고 난 나는 그에게 어찌되어 목사처럼 방언과 더불어 안수 기도를 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하였다.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 그는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얘기 할 수 없었다며 나에게 비밀이야기라도 하듯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 날로부터 2 년 전 고등학교에 발령을 받아 수업을 하던 중 평소에 흡연도 하고 수업태도가 몹시 불량한 학생을 수업시간에 혼을 내주어도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교사로서 자존심이 몹시 상해 따라 오라 한 후 교내에 창고 같은 곳이 있어 그 곳에서 주의를 주는데 그 학생의 주먹이 느닷없이 날라 오더라는 것이었다.
세상 천지에 교사가 학생에게 코피가 터지도록 맞아야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당한 친구인지라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그 학생을 나무라고 없었던 일로 하였다고 한다.
폭행사건을 둘이서 마무리를 졌지만 교사로서 제자에게 맞았다는 것이 차마 회복할 수 없는 자존심 때문에 도저히 교직에 머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고심하던 가운데 아내와 신중히 의논한 후 S신학교에 학사 편입을 하여 지금은 목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학생을 지도할 때 돌발적인 행동을 조심하라며 나에게 당부를 하고 자신은 신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학교에 머물 예정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 해 겨울방학 나는 컴퓨터 연수를 받으러 일산에 있는 성저초등학교를 갔다.
지능이 여의치 않은 나로서는 64시간 동안 컴퓨터에 앉아 강의를 들으려니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교사로서 컴퓨터를 모른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인지라 몸살 감기로 하여 고열이 나는 가운데서도 포기할 수 없어 애를 쓰고 교육을 받아야 했다.
약속된 기간은 흐르고 마지막 평가하는 날이 다가왔다.
시험 시간에 감독관이 두 분이 들어오는데 그 중 한 분이 중등계장님이 아니신가. 시험지는 앞에서 컴퓨터를 가르친 강사가 나누어주었고 중등계장님은 뒤에 서 있다가 내 옆으로 슬며시 다가와 시종일관 나를 감시하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잘 보지도 못한 시험지를 제출하고 교실에서 나오려하는데 중등계장님이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호명하기에 나는 걸음을 멈춰서야 했다.
잠시 머뭇거리는 나를 향해 중등계장은 지난 가을에 있었던 일들을 들먹이며 따가운 눈총을 보내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당하는 일이라 나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고 한 동안 참고 있던 내가 더 이상 수모를 당할 수 없어 항변을 하려고 인상을 찌푸리자 중등계장님은 계면적은 미소를 띄우며 컴퓨터 연수는 잘 받았느냐고 하시면서 아직 해가 바뀌지 않았으니 교육청에 한 번 들리라는 것이었다.
64시간 동안이나 연수를 같이 받아 친해진 어느 원로 교사는 나를 따라와 무슨 잘못을 하였기에 시험을 보는 장소에서 감독관에게 그렇듯 질책을 당하고 있었느냐고 했다.
초조해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옆 교실로 데리고 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는 것이었다.
원로교사는 중등계장의 남편도 지금 관내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는데 자기와 근무도 같이 했고 지금까지 평교사로 재직하고 있어 자신이 그에게 부탁을 하면 들어줄 것이니 잘못된 사정을 이야기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할말도 없고 해서 아무 일도 아니라며 얼버무리고 돌아서야 했다.
나는 구정을 눈앞에 둔 겨울방학중에 중등계장님을 만나러 교육청에 가야할 것인가를 고민 하다가 굳이 지나 가버린 일들을 들척거릴 필요성이 없기에 끝내 중등계장을 찾아가지 않았다.
직접 찾아오라고 하였는데도 찾아뵙지 않아 혹시 나에게 불이익이라도 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그 해 3월 중등계장님은 애석하게도 나에게서 멀리 떨어진 관외 중학교 교장으로 떠나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나는 교사로서 그 때의 일을 결코 잊지 않으려 한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문제아들을 이해하고 돌보아 주었다고 자부하고 있던 내가 15년 동안 교직에 머물면서 처음으로 용서보다는 문제학생을 징계를 주고자 원했기 때문이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모욕을 당했어도 심지어 학생에게 폭행의 수모를 당했어도 제자를 위해 수백 번이고 용서를 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하지 못한 회한이 가슴의 시린 그늘로 각인되어 있다.
아직도 나는 페스탈로찌가 되려면 억겁의 윤회를 돌아 다시 회향을 한다 해도 그의 그림자도 못 밟을 저질적 교사에 불과하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수업시간마다 그 날의 수치심을 가슴속 깊이 숨겨 둔 채 눈빛 해맑은 영혼들 앞에 감히 서서 제 잘난 척 떠들고 웃는다.
글을 마치며 하찮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진흙 속을 헤매 인 가녀린 물고기가 돌 위에 올라 젖은 비늘을 흐느끼며 말리듯 오늘도 스러지는 저녁 노을을 주름진 나의 이마에 댄다.
첫댓글 선배님 글이 너무도 가슴아파.... 더이상 글을 못 읽을 것 같습니다. 선배님같은 훌륭하신 선생님이 계시기에 아직도 교직이 이만하지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힘들고 속상합니다...
수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