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눈 안 뜨셨어요?' '허허허허 까딱 했으면 봉사 눈 뜰뻔 했지.' '눈뜨면 큰일 날테니 눈 꼭 감고 계세요.' 비례대표 8번으로 발표가 난 후 필자와 나눈 농담이다.
봉사(奉事)란 조선시대 종8품 관직명으로 시각장애인들도 할 수 있었던 벼슬이다. 어느 분의 분류를 보니 국회의원은 조선시대로 치자면 판서에 해당되는 정2품이란다.
정화원(鄭和元 56) 그는 진양 정씨인데 고향이 경북 상주군 외서면 우산리이다. 우산리에는 우산서원이 있다. 우산서원은 조선 명종 때 서애 유성룡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후에 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냈던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가 말년에 은거하여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우복선생은 불천위(不遷位 : 나라에 끼친 큰 공훈으로 사당에 영구히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로 정화원 그는 우복선생의 14세손이다.
할아버지 정용진은 딸 하나 아들 둘을 두었는데 딸 정희는 퇴계 이항 가문의 종부로 시집을 갔고 큰 아들 정환은 양반가문과 혼반(婚班 :서로 '혼인할 만한 양반의 지체'를 이르던 말)을 맺으려는 밀양의 만석꾼 허섭과 연이 닿아 김천고등학교 3학년 때 그의 큰 딸 허수와 혼인을 하였다.
정환은 경북대학교에 진학을 하여 아내 허수와 대구에 살았는데 1948년 7월 아들 정화원을 낳았다. 아들이 세살 나던 해 즉 1950년 6.25가 일어났고 아버지 정환은 학도병으로 출정하였다. 남편은 출정하고 전쟁은 더욱 치열하여 죽어도 고향에 가서 죽어야 한다면서 어머니는 어린 아들과 하인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고 어렵사리 군용 트럭을 얻어 타고 고향 상주로 가는 길에 폭격을 맞았다.
구사일생으로 목숨만은 건져서 고향에 당도하니 때는 수확 철이라 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부둥켜안고 '이 모를 환이가 심었는데 환이는 어디 가고 나락은 누가 거두느냐?'며 통곡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아들에게 눈병이 났다. 눈은 짓무르고 늘상 눈꼽이 끼었다. 아마도 피난길에 폭격을 맞으면서 눈에 파편을 맞은 모양이었다. 전쟁 중이었고 이렇다 할 약도 없었다.
전쟁이 끝났으나 아버지 정환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사통지서도 없는 행방불명이었다. 그는 보훈가족이 되기는 했으나 아버지가 행불이었으므로 80년대까지도 형사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의 어머니 허수(76)씨는 남편을 잃은 슬픔보다도 아들의 눈이 더 큰일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전국 방방곡곡을 아들을 데리고 다녔다. 여느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이 병원이나 약방을 아무리 전전해도 낫지를 않았고 무당을 불러 굿도 하는 등 별의별 짓을 다했지만 눈은 점점 나빠졌다.
나이가 들어 외서초등학교에 입학은 하였으나 칠판글씨가 보이지도 않았고 공부에는 아예 흥미가 없었다. 학교에 갈 때는 종을 앞세워 나귀를 타고 갔고 학교에서는 마음대로 돌아 다녔다. 선생이 숙제를 내 주면 숙제도 종이 다 했다.
그는 지체 높은 양반가문의 종손이라 선생들도 그에게는 야단도 못 치고 그가 하자는 대로 했다. 소풍가자면 소풍을 갔고 공차기하자면 공차기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가 소풍을 가자고 졸라서 봄소풍을 두 번이나 간 적도 있었단다.
전쟁이 끝난 후 가세는 기울었으나 외할아버지가 갑부였으므로 치료비는 외할아버지가 다 대 주었다. 그의 눈이 점점 나빠지자 외할아버지는 딸을 앉혀보고 '너는 양반가문의 종부이니 절대로 재가 할 생각은 말고 아들 치료에나 힘쓰라'며 대구에 집을 얻어 주었다.
그 때 어머니의 나이는 28살이었고 앞을 보지 못하는 아들과 살길이 막연하였다. 그 무렵 눈먼 아들과 홀로 사는 아름다운 비운의 청상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는 결국 눈먼 아들을 위해 가문을 버렸다.
어머니는 눈먼 아들을 데리고 그 사람과 대구를 떠나 부산으로 내려왔다. 시가에서나 친가에서나 그런 어머니와는 의절하였다. 때문에 어머니는 시아버지나 친정아버지의 상에도 참여를 못하였다. 물론 종손자리는 작은아버지의 아들인 사촌동생에게로 넘어 갔고 그가 시의원이 된 후 처음으로 종가에 가 볼 수가 있었다.
# 부산맹학교의 음치 밴드부장
어머니는 집안에 많은 하인과 머슴을 거느리고 대접받던 종부였으나 낯선 부산으로 내려와보니 살길이 막막하였다. 처음 부산 수정동 셋방에 살면서 의붓아버지는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살림은 늘 궁색하였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 학교에 갈 수도 없었고 치료도 포기 한 채 몇년을 빈둥거리며 동네 골목대장 노릇을 하다가 보통의 아이들이 중학교를 다닐 나이인 15살 때 부산맹아학교 초등부 1학년에 입학하였다.
그 무렵 아버지는 영도에서 조그만 가내공업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희미하게 볼 수는 있었기에 영도에서 송도에 있는 학교까지는 혼자서 버스를 타고 다녔다. 학교에서는 이름표를 달아 주었는데 어머니는 한사코 맹학교 이름표를 못 달게 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학교에 음악선생이 새로 왔다. 그 때는 맹아(盲啞)학교라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이 한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새로 오신 주창길 음악선생은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이 함께 하는 밴드를 구상하였다. 보지 못하는 아이들과 듣지 못하는 아이들로 구성 된 악단이라니. 보통의 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을 주선생은 추진했던 것이다.
당시 부산맹아학교에 고등부는 없었고 중등부라고 해 봤자 한반에 10여명이었으니 학생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밴드를 만드는데도 음악에 소질이 있고 없고를 불문하고 거의 모든 학생들이 단원이었다.
청각장애인에게는 탬버린 실로폰 북 등 타악기를 가르쳤고 시각장애인들에게는 관악기를 가르쳤는데 그에게 배당된 것은 테너섹스폰이었다.
그에게는 평생에 한이 되는 것이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눈 감은 것이고 둘째는 노래를 못한다는 것이란다. 음악선생도 '너 같은 음치는 세상에 처음 본다'면서도 테너섹스폰을 볼어 낼 사람이 없었기에 그에게 맹훈련을 시켰고 그는 매일 얻어 맞았음에도 밴드부장이었다.
첫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언론이 극찬을 했고 이곳저곳에서 초청을 받아 순회공연에 나섰다. 서울 한양대학을 비롯하여 동양TV 삼일당 이화여대 진명여고 등에서도 공연을 했다. 하기 싫은 공부를 안해도 좋았고 가는 곳마다 우뢰같은 박수소리와 여학생들의 팬레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이 났던 것은 순회공연에 나서면 맛있는 것을 잘 먹을 수가 있었다. 모두가 배가 고픈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열성적으로 가르쳤던 음악선생은 임시교사라 그만두게 되었고 그의 눈도 점점 나빠져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의사는 그 이유를 힘든 테너색스폰 때문이라고 했다.
여름 방학에는 합숙을 하고 하루종일 연습을 했는데 연습이 끝나면 송도 바닷가로 내달렸다. 담치 멍게 해삼 등 닥치는 대로 끌어 모았고 송도 파출소옆 자주 가는 술집으로 가져가서 그것을 안주 삼아 밤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셨다. 하루종일 고된 연습에다 날마다 술이니 몸이 배겨 날리가 없었던 것이다. 연주곡들도 장난감교향곡 영광의 탈출 평화의 나팔소리 등 쉽지 않은 곡들이었던 것이다.
새로 온 음악선생은 장애인에 대한 애정과 열의가 없었고 그도 어머니가 더 이상 섹스폰을 못하게 하는 등 세계공연까지 계획했던 맹아학교 밴드부는 흐지부지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는 섹스폰을 불었고 트럼펫을 불었던 김원경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도 그처럼 점점 눈이 나빠지고 있었다. 그들은 날마다 술을 마시며 눈 감은 것에 대한 신세한탄을 했다. 송도 바다에서는 같이 죽자며 무작정 헤엄쳐 나갔다가 해경에게 붙잡혀 오기도 했다.
어느 날은 후배들과 함께 외출을 나갔다가 복음병원 근처 언덕에서 깡소주를 마시며 신세한탄을 했다. '우리 이래 살면 뭐하겠노' '그라믄 죽을래' '어무이 아부지는 와 나를 이래 낳아 갖고.' '신은 무신 신이고''하나님이 어데 있노' 그들의 신세타령은 부모님에 대한 원망에서 신에 대한 부정까지 천방지축으로 날뛰었다. 그러자 후배 하나가 '나는 죽을끼다'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언덕을 굴렀다. 그곳이 어디쯤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언덕에서 떨어지면 죽을 것 같았다. 죽을끼다. 안된다. 서로 부둥켜안고 그렇게 옥신각신 하고 있는데 난데없는 싸이렌소리가 들리더니 '손들어!'라고 했다.
깜깜한 밤중에 술취한 남자들-중학생이었지만 거의가 스무살 무렵이었다-이 죽네 사네하고 고함을 질러대니 인근주택가에서 경찰에 간첩신고를 했던 것이다. 학교에서는 무릎끓고 빌고빌어 온갖 벌을 다 받았는데 그래도 퇴학을 당하지 않은 것은 잊지 못할 강위영 박사 덕분이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맹학교로 유학을 갔다. 파란만장했던 서울 맹학교 고등부를 마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 왔다.
# 봉사침쟁이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시만 해도 시각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삐이익 삐이익 안마피리를 불며 골목길을 누비다가 손님이 부르면 안마를 해주고 몇 푼 사례비를 받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죽어도 안마피리를 불기는 싫었다. 아버지는 사업이 망해서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했고 두 동생들 공부도 시켜야 했다. 그를 길러주신 아버지는 몇해전 돌아 가셨다.
그는 학교 공부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으나 이료(理療)과목 만큼은 열심히 배웠었다. 어머니에게 침을 놓겠다고 하니 이웃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 왔다. 며칠 침을 놓으니 환자들이 나아서 어느 새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다리가 아프다는 한 아가씨가 찾아 왔다. 몇년동안이나 유명한 병원은 안 가본 곳이 없었다고 했다. 더구나 그녀는 기독교 집안이었는데 귀신이 들렸다고 굿을 했을 정도였고 그를 찾아 왔을 때는 거의 포기 상태였다. 다리가 아프다고 했는데 진맥을 해보니 척추전방위증이었다. 두달쯤 치료를 하니 다 나았다. 그녀의 오빠가 고맙다며 찾아오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가씨를 며느리 삼고 싶어했다. 그도 별로 싫지는 않았기에 좋다고 했다. 그 아가씨가 그의 아내가 된 이희숙(52)씨다.
그가 환자를 고쳐서 결혼을 했다는 소문은 전설처럼 퍼져 나갔다. '괴정에 용한 봉사 침쟁이가 있는데 앉은뱅이를 나사갖꼬 결혼을 했단다.' '죽어 가는 사람도 살렸단다.' 온갖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괴정의 봉사 침쟁이'를 찾는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돈이 모이자 땅을 사기 시작했는데 눈감은 한계인지 때로는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자 불법 침술이라고 신고가 들어가는지 경찰서나 보건소에서 빈번하게 찾아 왔고 그때마다 손님을 둔 채 경찰서나 검찰로 불려 갔다. 그의 아내는 양복 입은 사람만 들어오면 가슴이 철렁해서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참다못한 그가 서울로 가서 동료들을 모았다. 학교에서는 이료과목이 있어서 해부생리 한방침구 등에 관한 이론과 실기를 2000여시간이나 배운다. 문교부에서 인정하는 교과목을 보사부에서는 왜 인정받지 못하는가. 이렇게 시작된 맹인침사합법화 운동은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적극 참여하여 1981년 '한국맹인침사협회'를 발족하고 그는 부산경남지부장을 맡아 투쟁하였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장애인복지운동에 뛰어 들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지식과 정보라는 생각에 1983년 자비를 들여 동구 수정동에 조그마한 사무실을 마련하고 부산맹인점자도서관을 개관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985년 이름뿐인 맹인복지회 사무실을 마련하였으며, 1991년 10월에는 구포에 부산맹인복지관을 개관하였다.
이렇게 맹인복지운동을 해 나가면서 시각장애인들만으로는 법적 제도적 불이익을 타개한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전체 장애인들이 합심하여 장애인의 권익을 향상시키고자 1987년 12월 12일 '장애인의 권익은 스스로 찾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국에서 처음으로 부산장애인연합회(부산장총)를 출범시켰다.
부산장총에서는 장애인고용촉진등에관한법률 제정에서부터 수많은 장애인관련 제도나 정책을 건의 개선하였다. 보철용차량에 대한 각종 세제혜택 전화료 유료도로통행료 수도료 등이 감면 내지 할인되었다.
자신의 돈을 은행에 맡겨도 이용할 때마다 푸대접과 냉대를 받는 장애인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1990년 4월 20일 부산장애인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부산장총에서 1종 운전면허 취득 투쟁을 할 때 그는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잘 안다. 눈감은 내가 운전면허를 준다고 해서 운전을 하겠는가' 1994년 많은 장애인들이 꿈에도 그리던 1종 운전면허가 허용되었다.
부산장총 설립이 시각장애인의 한계에서 벗어나듯이 전체장애인의 권익을 위해서는 지역연대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1993년 광주장애인연합회와 교류를 시작하였고 현재는 서울에 거대단체가 두개나 설립되었으니 청출어람이랄까.
'우리도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면서 선거 때마다 장애인정책이나 공약을 요구하며 선거참여를 독려하는 가운데 1998년 부산광역시의회에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입성하였다. 그리고 이번 제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것이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독서다. 그러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녹음도서가 쌓여 있다. 그리고 낚시와 친구들과 잡담하면서 술마시는 것을 즐긴다. 국회의원이 되면 이 세가지 취미를 제대로 못 누릴까봐 벌써부터 걱정이란다.
그는 20여년동안 장애인복지운동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모두 그가 혼자서 한 것은 아니다. 부산의 40만 장애인 나아가 전국의 장애인들이 힘을 모아 주었기 때문이다. '완전참여 완전평등'을 위해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데 함께 이루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 주어야 할 것이다. gktkr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