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보공 휘 알지 탄강계림 유허비명
신라에 역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세상 사람이 역사를 읽지 아니함에 있는 것이다. 신라가 박석김(朴昔金) 3성이 나라를 세운 지 1000년이 되었고 계림은 알지가 탄생한 땅이니 지금의 영남지방인 경주부에 속하여 있으며 세상에서 김으로 성을 삼은 사람은 모두 다 알지로서 시조를 삼으니 지금의 그 땅에 전하여 그 세차와 연혁이 역사책에 기재된 것이 상세치 아니하나 이제 그 비문을 자료로 하여 대게 알게 된 것이다. 처음에 탈해왕시대에 시림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금궤를 얻어 열어보아 어린아이가있음을 살펴보고 거두어 길러서 이름을 알지라 하고 성은 김씨라 하며, 시림을 계림으로 고치었다. 7세손 미추에 이르러 조분왕의 사위가 되었는데 조분왕이 아들이 없어서 미추가 대를 이어 왕이 되어 이사금이라 칭호하였다. 미추로부터 내물과 미추를 지나 눌지에 이르러 이사금을 마립간(麻立干)으로 칭호하고 백성의 의복제도와 우차의 사용법을 가르치었다. 눌지가 훙(왕 제후의 서거를 말함)하고 아들인 자비가 마립간이 되었다. 자비가 훙하고 아들 소지(炤智)가 마립간이 되어 비로서 시장을 개설하고 전방(지금의 상점)을 두게 하여 사방의 물화가 서로 통하게 하였다.소지가 훙하고 아들 지증(智證)이 마립간이 되어 사람의 순장(殉葬)(죽은 사람을 위하여 살아 있는 사람을 따라 매장시킴)을 금하고 주(州).군(郡)에 명하여 농사를 권장하고 비로서 소를 사용하여 전답을 갈게 하고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방언을 고치게 하며, 왕호를 이사금이라 호칭하는 것과 마립간이라 호칭하던 것을 왕이라 호칭하게 하였고, 상복을 제정하였다. 왕이 훙하니 시호를 지증이라 하니 시법(사후에 별로 정하는 호)이 이때부터 시행되었다. 지증와의 아들 법흥왕이 법률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고, 연호를 건원(建元)이라 하였다. 진흥과 진지를 지나 진평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어서 선덕여주가 왕위에 나아가 귀족의 자제를 당나라에 파견하여 국학에 입학을 청원하여 유학케 하였다. 선덕여주가 훙하고 진덕여주가 즉위하니 진평왕의 모제(외숙)인 국반의 딸이다. 처음으로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고 관복을 만들었고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백제를 파한 것을 보고하였으며, 왕이 스스로 태평송을 지어 바치니 당 고종이 가상히 생각하였다 하며 중국의 연호를 비로서 행하였다. 진덕여주가 훙하고 태종무열왕이 왕위에 나가니 진지왕의 손자이며 인문이 당장(唐將)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멸하였다.무열왕이 훙하고 아들 문무왕이 즉위하여 부녀자에게 명령하여 중국의 의상(저고리 치마)를 입게 하고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멸하였으며, 역법(월력 또는 일력의 법)을 반포하고 모든 관인을 주조하였으며, 문무왕이 훙하고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사신을 당나라에 들어가 예전(禮典)과 사장(詞章)을 청하니 칙천후(則天后)가 명령하여 길흉요례(吉凶要禮)를 문사(文詞)에서 고르고 규계에서 거친 것 50여권을 부지런히 만들어서 사하시었다. 신문왕으로브터 효성왕을 지나 성덕왕에 이르러 비로서 누각(물시계)을 만들었고, 효성왕을 지나 경덕왕. 혜공왕을 거쳐 선덕왕을 지나 원성왕에 이르러 독서출신(글을 읽어야 벼슬을 할 수 있는 법)을 정하고, 원성왕으로부터 소성왕, 애장왕,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헌강왕, 진성왕, 효공왕을 지나 경순왕에 이르러 고려에 양여할새 왕자가 불가하다 하니 왕이 이르시기를 과인이 외롭고 위태하여 형세가 완전치 아니하니 죄없는 백성을 비참하게 죽게 함을 내 차마 못하리라 하시고, 시낭 김봉휴를 고려에 보내어 상서하여, 국조(國祚:나라의 지위)가 드디어 끊어지니 김씨가 38대에 무릇 588년을 지남이라. 대개 박씨, 석씨를 계승하여 왕위에 오른 후 나라를 누림이 길고 대략 예악과 문물이 신라로부터 일어남이라. 신라가 비로서 당나라와 서로 우호국이 됨에 중국의 사관의 법이 마련함이 이미 오래되었으나 동국이 떨어지고 고루하여 사적은 많으나 문장이 없어서 전하지 못한 것이 많더니 고려의 김부식이 신라사를 지었으나 그것이 거의 드믈어서 군자들이 크게 두려워 하던 바, 남공철(南公轍)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 참봉 김성걸(金成杰)이 경주에 와서 계림의 기적(紀蹟)의 글을 청하니 잘하는 일이로다. 근본을 추앙함을 멀리 하니 이 땅에 전하려니와 이 땅에서 이 일이 또한 큰 것이라 어찌 써 주지 않으리오! 공자께서 주나라에서 탄생하시었으되 구(丘)는 은나라 사람이라 스스로 미자(微子)의 자손이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하(夏)나라의 예는 가히 말하거니와 기 (杞: 주나라 시대의 국명. 하나라 우왕의 자손의 영토는 현금의 기현:杞縣) 나라는 족히 고증을 하지 못하며 은나라의 예는 능히 말할수 있으나 송(미자가 세운 나라로써 하남성 남구현)나라는 족히 고증치 못하는 것은 문헌이 부족한 때문이라 하셨으니 이제 김씨가 사방에 헤어져 사는 것이 무려 12100여호가 되며 신러로써 다 시조를 삼으니, 공자께서 은라라에 있는거나 다름이 없음이라. 뒤에 이 비문을 잘 읽으면서 거의 취하여 사기에 궐(闕)함을 보충함이 있으리라. 명(銘)에 가로되, 저 무성한 계림은 왕업을 일의킨 터전이로다. 누가 감히 공경치 아니 하리오! 나의 이 명문을! 준조계해 2월 가의대부경상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 대구대도호부사 규장각직제학 지제(知製) 교(敎) 의령(宜寧) 남공철(南公轍) 근선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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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림비각기
옛 신라국 월성 아름다운 숲속에 비각이 우뚝 솟아 있는데 사방팔면이 우아하고 아름다움은 이를 데가 없다. 그 안에는 3자 크기의 작은 빗돌이 세워져 있다. 빗돌에는 전자체로 " 계림 김씨가 탄생한 유허지"라고 새겨져 았다. 이곳은 계림이고 비각 북쪽에는 옛부터 한 표석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계림김씨의 시조가 탄강한 곳이 이곳이라는 사실에 접하여 사적을 찾는 이들에게는 금궤 위에서 닭이 울던 곳을 상상 볼 만한 일이다. 아! 천지간에 융롱한 정기가 어려 형상을 이룬 것이 태초에 사람이 생기는 길이라 하였건만 이같이 닭이 곁에서 홰를 치며 울어 사람에게 알린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닭은 축시에 우는데 축시는 곧 동이 틀 때다. 박씨, 석씨 114년을 다스려 나라의 기틀이 정해졌고, 김씨가 나라를 이어받아 38왕에 문물이 점점 갖추어짐으로써 동방이 밝아오니 이것은 하늘이 진인을 내려보내 인물을 밝히고져 신계를 놓아 그 징조를 알림이 아니냐! 김씨는 알지로 시조를 삼는데 알지는 을축년에 탄강했으니 이 또한 이상한 일이다. 을축년으로부터 성조 임술년 1828년간에 소슬한 옛 자취가 어제인 듯 완연하니 김씨가 이곳을 지날 때 주(周)의 평림과 한(漢)의 대택(大澤)같이 사모하고 공경하여 생민을 위해 마련한 자취가 소멸될까 염려하여 의논끝에 재물을 모아 빗돌을 세워 연유를 기록하니 그 감회가 더욱 깊도다. 우리 대왕 대비는 요순같은 임금으로 주렴을 느리고 정사를 듣고 보살펴 억만년 종사를 굳혔고 신성한 왕손이 또한 을축년에 탄강해서 여러 해 뒤에 보갑을 마쳤으니 위로 따져보면 시조의 생년이 30년 을축이다. 금궤의 상서를 알린 것이 을축이니 동국에 정숙한 기운이 이 터에 나타나 종종 징험함이 나타나니 마땅이 김씨가 서로 보존해서 오늘에 이른 것은 하늘과 뜻이 함께 한 때문이 아닌가! 그 명을 지은이는 순창공 남철이요, 그 명을 쓴이는 부윤 최헌충이요, 전자를 쓴 이는 족손 단양군수 김희주요, 명과 글을 감독한 이는 전참봉 성걸이었다. 성걸이 이르되 " 비석에 각이 없으면 비바람에 마멸될 염려가 있다"하여 이에 참봉 창적과 전참봉 택려와 사인 영규가 힘을 모아 임술년 10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준ㄱ송하였으니 모두가 조상을 빛내는 보람찬 일이다. 이에 위해서 기문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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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순왕 신도비명(神道碑銘)
동경(경주)에 경순왕의 전(殿)이 있은 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제때에 향사를 모시고 모든 범절은 다 갖추어 졌으나 다만 글을 각하여 오래도록 전할 비가 없었다. 왕의 후손 재명(再鳴)이 세계(世系)와 사적을 적어 가지고 나에게 명(銘)을 청하는 지라 . 나는 경주 김씨와는 비록 적(관)은 다르지만 시조는 같은데 어떻게 그리 졸하다 하여 사양하겠는가?삼가 서(序)도 쓰고 명도 짓는바이다. 서하여 가로되 왕의 휘는 부(傅)인데 신라 사람이다. 시조는 알지이니 탈해왕 9년 을축에 시림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고 금궤속에서 아이 하나를 얻었다. 왕이 거두어 기르며 알지라 이름하고 김씨로 사성하였으니 이것이 득성의 유래이다. 2세는 세한이오. 3세는 아도요, 4세는 수류요, 5세는 욱보요, 6세는 구도요, 7세는 말구이니 미추의 아우이다. 미추가 첨해왕(석씨)을 이어 서니 김씨가 여기에서 나라를 갖게 되었다. 8세는 냇물왕이요, 9세는 복호요, 10세는 습보로 아울러 갈문왕에 추봉되니 갈문왕이란 당시에 추존(追尊)일컬음이다. 11세 지증왕 원년 경진(庚辰)은 곧 제(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동혼후(東昏候)영원(永元)2년에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처음으로 왕이라 칭하였으며 상제(喪制)를 반포하고 순장(殉葬)을 금하였으니 지증은 그의 시호이다. 12세는 진종이요, 13세는 흠운이요, 14세는 마차요, 15세는 법선이니 현성왕으로 추숭(追崇)되고 16세는 의관이니 신영왕으로 추??되었으며 17세는 위문이니 흥평왕으로 추숭되었다. 18세 효양이니 명덕왕으로 추숭되고 19세는 원성왕이니 처음으로 독서출신과를 두었다. 20세는 예영이요, 21세는 균정이니 성덕왕으로 추숭되고 22세는 신무왕이요, 23세는 문성왕이요, 24세는 안(安)이오, 25세는 민공요, 26세는 실흥이니 의흥왕으로 추숭되고 27세는 효종이니 신흥왕으로 추숭되고 28세가 경순왕이다. 왕은 경애왕(박씨)를 이어 서니 이해 정해(丁亥)는 ㅣ곧 후당(중국의 5대때)명종 천성(天成 2년)이다. 9년이 지난 을미년에 천명이 이미 바뀌었음을 알고 나라를 고려에게 물려 주니 왕자가 간하기를 "마땅히 충신 의사와 더불어 죽음으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 그만둘 일이 옵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나는 무고한 백성들이 피흘리고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하고 그를 써서 고려 태조에게 보내어 양국을 하니 고려 태조가 손님의 예로 대하고 관광 순화 낙랑왕(觀光 順化 樂浪王)으로 봉하였으며 장녀인 신란공주(神鸞公主)를 아내로 맞게 하니 송나라 태종의 흥국 3년이오, 고려 경종 (무인: 3년 978)에 훙하니 시호는 경순이라 하였다. 릉은 장단부 고량진의 성거산 계좌(癸坐)에 있었는데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격다 보니 오랫동안 실전을 하였다가 영묘조(英廟朝)하였다가 무진에 이르러 지석을 얻어 나라에 알리니 계축을 특명하고 제사를 지내주었으며 수졸(守卒) 5인을 두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도(故都)의 인사들이 왕의 백성들에게 인해로웠던 덕을 기리러 사당을 지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왔는데 천개(천개: 명나라 희종의 연호) 정묘(인조 5년)에 사당을 동천촌(東泉村) 으로 옮겼고 인조조에 김시양(金時讓)의 장청(狀請)에 의하여 묘우를 새로 짓고 김씨 성을 갖은 이로 참봉을 삼고 쌀을 내렸으며 노비와 전답을 두게하였다. 현묘조에는 또 연신(筵臣: 경연관)의 주청에 따라 "경순왕전'이란 묘호를 내리고 유생(儒生)과 수호군(守護軍)과 전졸(殿卒)을 두고 호세(戶稅)를 면제하여 주기를 숭인전, 숭의전, 숭덕전과 똑같은 예로 하였다. 선대왕(정조인 듯) 갑인년에는 전(전)뒷산에 사태가 날 염려가 있어 도신(道臣)이 진계(陳啓)하여 이건공비(移建工費)를 특사하여 사당을 경주부 남쪽 수리되는 봉황대 앞으로 옮겼으니 곧 미추왕릉의 아래로 계림에서 백무(한발걷는 거리)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곳이다. 그래서 이미 제사를 지내 영령을 위로하고 또 영정을 새로 개모하여 예조에 명하여 유생과 전졸은 90여인으로 수호군은 100여인으로하여 호세 5결식을 면제하여 주도록 식례(式禮)를 정하고 참봉은 이조에서 첩지(帖紙)를 내리게 하였으니 열성조의 숭보(崇報)하는 의전이 비로소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대게 삼한시대에는 국사가 갖추어져 있지 않고 문헌도 무징(無徵)하니 왕의 9년 동안 재유(在宥:무위로 다스림, 곧 다스림)한 가모(嘉謀)와 선정은 바록 ?y어볼수 없지만 그 왕자에게 답한 말씀은 정령(丁靈: 친절함)하고 칙달(가엾게 여겨 슬퍼함)하여 덕의가 넘쳐 있으니 촉주(蜀主)와 북지왕(北地王)의 일과 견주어 보면 그 현우(賢愚), 명암(밝고 어둠)이 과연 어떻한가? 저 송나라의 오월(吳越)은 아주적은 나라로 대대로 제후의 법도를 지켜온 처지에 여러 진영이 차차 깍이고 평정에 다다름에 머리 숙이고 명을 청하였으나 그 후에 수신이 오히려 극 공덕을 낱낱이 들어 돌에 새겨 세웠는데, 생각건데 경순왕은 오래된 서업(緖業)을 이어 부강한 국력을 가졌으니 금탕(金湯)은 험함을 믿을만 하고 병갑(군사의 무기)은 족히 적을 막아낼만 하였으나 다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천승(千乘)을 버리기를 페사(헌신짝)처럼 하였으니 어느 사람보다 어짐이 큰 것이다. 후세에 평판하는 선비가 잘한 일이라고 찬양하는 사람이 많았음은 지당한 일이나 전사(全史: 완전한 사기)와 패승(작은 사기)이 없었으니 중간에 그런 것을 쓰지 ?附티? 그렇게 되었을까? 혹 이따가 실전되었는가? 하여간 슬픈일이다. 왕의 묘정에 비를 세우기를 여러 사람이 청하여 선조에 이미 윤허를 받았으나 모든 준비가 덜 되어 이제야 비로소 각하기를 경영하니 바로 후손들의 보본하는 정성에서 이룩된 것으로 왕의 여운이 영해간 (嶺海間)에 애연(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양)히 덮혀 씌워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성하도다. 왕의 전비(前妃)는 박씨니 아들 셋, 딸 하나를 두었고 후비 왕씨는 아들 다섯, 딸 하나를 두?Z으니 태자와 차자(次子)와 영분공자(永芬公子)와 은열, 석, 건, 선, 추요장녀는 이금서(이금서)에게, 차녀는 황경(黃瓊)에게 출가하였다. 왕의 자손이 그수효가 억도 넘지만(많다는 뜻) 경주로 본을 한 집이 넷이 있으니 영분공자의 후손과 시중시랑공의 후손과 태사공의 후손과 판도판서공의 후손들이다. 명하여 가로되 계림의 오른쪽, 봉황대 남쪽에 영전이 그윽한이 단청도 빛나여라 유상(遺像)이 엄연하니 곤룡포(袞龍袍)에 수치마라 그 누구를 모시는가? 거룩하신 경순왕님 왕이 양국하실 적에 어진말씀 나타났다. 그와 같이 후덕하심 그 후손이 창성하네, 우뚝 솟은 용의머리 묘우 곁에 세웠도다 이 명시를 지었으니 영원토록 빛나리라. 정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경연 춘추 관사 홍문관 제학 강릉 김계락(金啓洛) 찬(찬) 하고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 겸 동지경영성균관사 김노경(金魯敬)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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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순왕 왕릉 비문(碑文)
경순왕은 신라 제56대 왕으로 후당천성(後唐天成)2년 무자에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셨고 청태(淸泰) 을미에 고려에 양국하셨고 송태평흥국무인 (서기 978년) 고려경종 3년 4월 4일에 훙사하시거늘 시호를 경순이라 하고 왕례로서 장단고부남(長湍古府南) 8리 계좌지원(癸坐之原)에 장사하였다. 지극하신 행실이요, 순진하신 덕이시라 영명(英明)하신 모법(謨法)이 굳세고 빛나리라. 성상(聖上:영조) 23년 정묘(서기 1747년) 4월 4일에 개립(改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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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혜전의 창시(創始)와 연혁(沿革)
신라 경순왕이 나라를 양국한 후에 옛 도읍의 유민들이 왕께서 백성에게 베푼 덕의를 사모하여 월성에 사당을 세워 영정을 모시고 매양 명절에는 고을의 아전이 삼반관속(三班官屬)을 이끌고 제향을 올렸으니, 이는 초나라 사람들이 일간모옥(띠로 지붕을 이은집)에서 초나라 소왕(昭王)에게 제사지낸 의에서 나온 것이다. 불행히 임진왜란에 묘우가 불탔으며 그후부터는 제향올리는 의식을 화상(畵像)으로서 하지 아니하고 나무로 만든 위패로서 봉행하였다. 천계(天啓) 7년(인조5년 1672년) 정묘에 후손 김시양이 경주부윤으로서 본부에 이르러 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인하여 중건하기를 계청(임금에게 아뢰어 청함)하였으며 본부의 유생 김성원 등으로 더불어 경주부의 동쪽 5리쯤 되는 금학산 아래 동천촌에 터를 잡고 사당을 옮겨 일신하게 중건하였다. 그리고 참봉 1인을 두어 제향을 받들게 하였고(예조에서 차출하였음) 또 노비의 전지를 설치했으며, 제전(祭奠)은 관에서 담당하여 변. 두(대와 나무로 만든 제기) 각 7기로 한정하였다. 그후 97년째 되는 경종 3년(1723년) 계묘에 본도감사 조태억(趙泰億)이 순행하다가 본부에 이르러 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인하여 장계(임금에게 올리는 글)로서 청원하여 특히 경순왕 전호(殿號)의 선액(임금이 내린 선호)을 받았으며 요미(料米)와 말먹이는 콩도 모두 일정한 수량이 있었고 유생51인과 수호군 20인과 전졸 6명을 두었다. 정조 18년(1794년) 갑인에 정전 후면에 사태가 떨어지는 환난으로서 참봉 김건항(金健恒)이 궐문에 호소하였고 도신(道臣)이 장계를 올림으로써 특히 이건(李建)하라는 분부를 받들어 본도 감사 조진택(趙鎭宅)으로 하여금 터를 잡아 계문(啓聞:임금에게 아룀)하게 하였으며(곧 황남성) 본부윤 송전은 기일에 어긋날까 두려워하였다. 또 장수승(長水丞) 이명기(李命基)에게 분부를 내려 왕의 화상을 다시 본뜨게 하였다. (왕이 일찍이 영천 불당의 후면 감실(위패나 영정을 모시는 방)에 간직했다가 본전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그후 17년 만에 본전을 이건하였고 화상도 연구세심(年久歲深)하여 빛깔이 변했으므로 이분부가 있게 되었다. 5월 18일 역사를제시작하여 3개월 만에 낙성하여 [ 묘우(廟宇)가 오가삼간(五架三間)이요 내외 신문(神門)이 각 3칸이며 동서재가 각 4칸이요 가관방(假官房)이 삼칸이며 제기고(祭器庫)와 주장고(酒醬庫)가 각 1칸이요 고사(庫舍)가 2칸이며 공수(公須)가 2칸이요 주(廚)가 1칸이며 대문이 1칸이요 좌우내문이 2칸이며 마구(馬廐)가 2칸이었다.] 준공을 고하매 임금께서 친히 축문을 짓고 향을 내렸으며 8월초 10일 황남전에 봉안하였다. (위판은 정당의 당중에 모시고 영정은 정당의 후벽 감실에 모셨음.) 다시 예조에 분부를 내려 규식(規式)을 정하게 했으니, 유생과 전졸은 각각 90여인이요 수호군 1백여명과 양정(良丁) 20명과 하전(下典) 60명을 두었으며 호세는 오결(일결은 열 묶음)을 면제하게 하였고 참봉은 이조로부터 직첩을 내렸다.(또 가관 1인을 두어 참봉이 유고할 때에는 분향을 대행하게 하였음.) 요미는 날마다 일석14두요 마태(馬太)는 10두이며 또 백미 262석을 하사하여 공장의 식량 및 공역의 용도에 충당하게 하였고(공장의 식량이 43석이요 공역의 용도가 219석이었음.) 무릇 공비(公費)가 10만8천6전 남짓하였다.(성손이 4만3천6백전을 기증하였고 참봉 김성휴가 만전을 희사하여 공역을 준공하여음.) 정조 4년(1780년) 경자에 부윤 김효대(金孝大)가 동천전에 비석을 세우는 일로서 소청(疏請)하여 곧 윤허(임금이 허락하심)는 얻었으나 공역을 갖추지 못한 때문에 분부가 내린 후 35년째되는 갑술년(순조14년 1814년)에 이르러 황남전 정문 밖에신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순조 3년(1803년) 계해년에 계림에 유허비를 세웠다. 신도비각은 1동 8면으로 되어 심히 치려하고 웅장했으며, 유허비각도 또한 이 제도를 모방했으나 규모가 작았다. 고종 24젼(1887년) 정해년 정언 김만제가 미추왕과 경순왕을 병향(幷享)하는 일과 전호를 소청하였고, 판부사 김홍집이 경연(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문무왕을 병향하는 일로서 진청하여 윤허를 받앗다. 이에 특히 본부윤 김철회에게 분부하여 묘우를 중건했으니, 오가오간(五架五間)이요 (동서재와 방과 곳간은 모두 잉구하였고 별달리 향축실 1칸을 사당 좌편에 건조하였음) 숭혜전의 선액(宣額)을 내렸으며 3왕의 위패를 만들고 경순왕의 영정을 다시 본떠서 무자년 8월초 10일을 택하여 변 8기와 두(豆) 8기를 갖추고 향과 축문과 폐백을 내려보내어 고유하고 봉안하였다. (영정의 감실은 본묘내 동벽 아래에 별달리 마련하였음.) 참봉은 전조(이조를 말함)로부터 별달리 지벌(地閥)과 문식이 있는 자를 택하여 차정하고 임기(50삭)가 차면 6품에 승진하였다. 전우(殿宇)의 수즙비(修葺費)는 규례에 의하여 마련하였고 호세 80결을 면제하기로 획정했으며 각 능소에 비석을 세웠고 병오년에 장예원으로부터 분부를 받들고 예관 김영래(金永來)를 보내어 전.릉의 경계를 사방 백보로 정하였다. 아! 경술년(융희4년 1910년) 이후에 제향의 경비를 춘추에 걸쳐 90원씩 관부?觀壙? 의례 지출하였고, 병인년(1926년)에 비로소 축현릉 참봉을 두어 춘분과 추분에 석채례(釋菜禮)로 거행하고 제향의 경비 1백20원씩 의례 지출했으며 각 능마다 수호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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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의태자 김공일 유사(麻衣太子 金公鎰 遺事)
경순왕의 장자로서 역사에그 이름이 전하지 아니하나 혹은 전이라 하고 대안군 은열의 묘지에는 일(鎰)이라 하였다. 삼국사에 이르되 경순왕이 전국토를 남에게양도하려하니 나라의 힘이 약하고 형세가 고립되어 스스로의 국가를 보존할 수 없음에서이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국가를 고려에 귀속코저 어떤 이는 찬성하고 어떤 이는 반대하는 중 태자가 말하기를 "나라가 존속하고 망함은 반드시 천명이 있을지니 다만 충신과 의사로 더불어 민심을 수합하여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양도해도 되거늘 어찌 가히 천년의 오랜 사직을 가벼이 남에게 넘길 수 있으리요 한대 왕은 "형세가 이와같이 위태로워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면 무고한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당하게 함은 내 참아 견딜수 없는 일이라"하고 시낭 김봉휴로 하여금 강서(降書)를 들려 고려에 보내거늘 태자는 통곡하면서 왕을 이별하고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가 바위를 의지하고 베옷을 입고 풀을 캐어 먹으면서 살다가 일생을 마치었다. 금강산 마가연사적(摩訶衍事蹟)에 이르되 태자께서 금강산에 든 후에 베옷을 입고 풀을 캐어 먹으면서 일생을 마치었으므로 후세에 마의태자(麻衣太子)라 일컬으게 되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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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문 본기(金仁問 本記)
김인문의 자는 인수(仁壽)로 신라 제29대 태종대왕(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서 유가의 책과 아울러 장노부도(莊老浮屠)의 학설까지 많이 읽었고, 또 예서 사어향락(射御鄕樂)도 잘 하고 예능도 숙달하였고, 그 식견과 도량이 크고 넓었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진딕왕 5년(651,당 고종영징 2년)에 인문은 23세로서 왕의 명령을 받고 당나라의 숙위로 들어갔는데, 당고종은 멀리 바다를 건너 내조하였다고 말하며 그 충위를 가상하며 특히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의 벼슬을 주었다. 당고종은 4년, 그의 귀국을 허락하였는데 태종대왕는 그를 압독주(押督州)(경산) 총관으로 삼았다. 이에 인문은 장산성(울산)에 요새를 설치하고 국방을 견고히 하였으므로 왕은 그 공록으로 식읍 3백호를 주었다. 이때 신라는 번번이 백제의 침공을 받았으므로 왕은 당병의 원조를 얻어 그 수치를 씻으려고 인문을 당에 들여보내어 원병을 청하였다. 마침 당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官)으로 삼고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되었는데, 당고종은 인문을 불러 백제를 치는데 도로의 험이(險易)함과 거취의 현의여부를 물으므로 인문은 인문은 이에 대하여 아주 상세하게 알리니 고종은 크게 기뻐하고 신구도부대총관(神丘道副大摠官)의 벼슬을 주어 당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김인문은 드디어 소정방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적덕도)에 이르렀다. 이 말을 듣고 태종대왕은 태자에게 명령하여 장군 김유신, 진주(眞珠), 천존(天存) 등과 더불어 거함1백쌍에 군사를 싣고 덕물도(적덕도)로 나가서 당군을 맞아 전략을 세우고 수륙 양면으로 공격하게 되었다. 당군은 수로로 웅주구(공주)에 이르니 백제군은 강에 연하여 진을 치고 막았으나, 이를 격파하고 연달아 그 서울로 쳐들어가 드디어 백제를 멸망시키고, 소정방은 의자왕 및 태자효(太子孝), 앙자태(王子泰) 등을 포로로 하여 당으로 잡아갔다(서기 660). 태종대왕은 백제공멸에 있어서 인문의 공업을 가상하여 파진찬의 벼슬을 주었다가 또 벼슬을 각간으로 높였다. 그후 김인문은 여저너히 당에 들어가 있었는데, 문무왕원년(661, 당 용삭원년)에 당고종은 인문을 불러 말하기를 "이미 백제를 멸망시켜 그대 나라의 우환을 제거하엿으나, 지금 고구려는 예맥과 함께 포악무도하여 사대의 예의를 어르러뜨리니 이는 이웃나라와 좋아지내려는 의리를 저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짐은 군사를 일으켜 이를 정벌하려고 하는 것이니, 그대는 돌아가서 국왕에게 이를 알리고 함께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공벌하도록 하자" 하므로 인문은 곧 귀국하여 왕에게 당고종의 뜻을 알리니 왕은 인문으로 하여금 유신 등과 함께 군사를 훈련시켜 시기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드디어 당고종은 영국공소정방에게 명하여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6군을 거느리고 멀리 쳐들어가서 고구려군을 패강(浿江:대동강)에서 격파하고 드디어는 평양성(지금 평양)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굳게 지키는 까닭으로 능히 이기지 못하고 군마가 많이 사상되었고 양도가 이어 들어오지 못하여 곤경에 빠졌다. 이때 김인문은 유진 유인원(留鎭劉仁願)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쌀 4천석과 조 2만여곡(斛)을 당영으로 수송하였으므로 당군은 식량을 얻어먹게 되었다. 그러나 큰 눈이 오고 추위가 심하므로 포위를 풀고 군사를 돌렸다. 이에 신라군도 군사를 돌리려하였는데, 고구려에서는 꾀로서 신라군을 공격하여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김인문은 김유신과 더불어 꾀로써 밤에 위험한 곳을 빠져나오니, 고구려군은 그 다음날에 이를 발각하고 추격하였으나, 김인문 등은 이를 역격하여 크게 파하고 1만여명을 참살하고 5천여명을 사로잡아가지고 돌아왔다. 김인문은 또 당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문무왕 6년(666, 당 건봉원년)에 김인문은 당고종을 따라 봉태산에 올랐는데 고종은 그에게 우효위대장군(우효위대장군)의 벼슬을 주고 식읍 4백호를 주었다. 문무왕 8년(668, 총장원년)에 당고종은 영국공 이적(李勣)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려하고, 또 김인문을 귀국시켜 군사를 징발하게 하므로, 문무대왕은 인문과 더불어 20만명의 군사를 내어 거느리고 북한산성(지금 서울)에 이르러 왕은 그대로 머무르고 먼저 인문등을 파견하니 그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당군과 만나 합세하여 평양을 공격하여 월여 만에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보장왕을 잡았는데 인문은 보장왕을 영국공 이적 (英國公李勣)의 앞에 끓어앉히고 그 죄를 산스리니, 보장왕은 재배하고 영국공 이적은 답례하고 곧 보장왕 및 남산(南産), 남건(南建), 남생(南生)등을 데리고 군사를 돌렸다. 문무대왕은 인문의 지략과 용맹이 남보다 특이하게 뛰어난 까닭으로 대탁각간(大琢角干)을 사하고 식읍 5백호를 주었다. 당 고종도 또한 김인문이 누차 전공이 있음을 알고 말하기르 "조아양장(爪牙良將)이고 문무영재로 제작소봉(制爵疏封)함이 더욱 마땅하다" 하고 기뻐하며 곧 작위를 더하여 식읍 2천호를 주고, 그 뒤로부터 궁중에서 시위하도록 하였으므로 오랜 해를 지나게 되었다. 문무왕 14년(674, 당 상원원년)에 왕은 고구려의 반중(叛衆)들을 거둬드리고 또 백제의 고지를 차츰 점거하니, 당고종은 크게 노하여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을 삼고 군사를 일으켜 치게 하고 조서로써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때 김인문은 당에서 우효위원외대장군임해군공(右驍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이 되어 당경에 있었는데,당고종은 그를 세워 신라왕으로 삼고 귀국하여 그 형(곧 문무왕)을 대신하라고 영을 내리고 계림주대도독개부의동삼사(鷄林州大都督開府儀同三司)를 삼의므로 김인문은 이를 간절이 사양하였으나 명령을 어길 수 없으므로 드디어는 길을 떠났다. 그러나 때마침 문무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입조하고 또한 사죄하니 당고종은 이를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복구시켰으므로, 김인문은 중도에서 발을 돌려 또다시 당경에 멈물렀다. 문무왕 19년(679,당조로 원년) 김인은 진군대장군행우무위대장군(鎭軍大將軍行右武威大將軍)이 되었고,효소왕4년(694,덩년제원년)초에 보국대장군상주국님해곤개국공좌우림군장군이 되었고 그 해 4월29일에 당경에서 병으로 돌아가셨는데,이때 그 나이가 66세였다. 김인문이 돌아갔다는 부고를 듣자 왕은 크게 애도하여 수의를 내리고 벼슬을 더하고,조산대부행사예사대의서령육원경(朝散大夫行司禮寺大醫署令陸元景)과 판관조산낭직사예사모(判官朝散郎直司禮寺某)등에게 명령하여 영구를 신라에 후송하였다.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의 벼슬을 추증하고 아울러 유사에게 명령하여 그다음해 (695,당연재2년)10월27일에 경도(경주)의 서원에 장사지냈다 김인문은 일곱 번 당으로 들어가서 숙위로 있었는데,그날짜가 무릇 22년동안이나 지냈다.이때 또한 해찬량도는 여섯 번 당에 들어가 있다가 서경에서 죽었는데,그가 행한 사적의 시말을 모두 잃어버려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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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임금이 경순왕 후손에 내린 특전
경순대왕이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어진 정치가 동방삼한에서 총명한 임금이었다. 오랑캐들(만주지방) 풍속을 다 없애고 악인들을 없애버리니 만백성은 대궐뜰에 엎드려 절하였다. 이제야 백성들이 붙좇게 됨을 얻엇고 상하신령이 모두 의뢰하고 큰 호걸이나 작은 교활한 무리들도 우러러 사모하면서 산산이 흩어졌고 대개 동방에 나라가 선 이래 경순왕의 덕택으로 후손들은 군대 복무와 부역 등을 일체 시키지 않았다. 고려의 왕조로부터 조선왕조 태종대왕(조선 제3대왕)에 이르러 전교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경순왕 후손들을 대대로 사랑하고 그 후손에게 녹을 주었으되 비록 신분이 낮더라도 여러 가지 군대 복역과 부역 및 과거 등에 특별히 보아주되 침범하지 못하게 말리도록 간곡히 칙령을 내리노라" 하였고 선조대왕(조선 제14대왕)께서는 전교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대대로 그 자손에게 녹을 주어 등용하고 비록 약질로 생긴 자손이나 천한 서열일망정 천역과 열사를 강(講)하지 못하더라도 건드리지 못하게 말리라고 재삼 칙령으로 깨우치노라" 하였으며, 효종대왕은 (조선 제17대왕)께서는 하교하여 말씀하시기를 " 경순왕 자손의 녹봉과 사랑하는 법전은 이미 국전에 실려 있으니 혹시 범하여 사사로이 노비로 삼는 자가 있으면 본관으로부터 즉시 석방하여 양민으로 돌아가게 하고 군의 복역과 부역을 시키지 말도록 재삼 전교하노라" 하였고, 숙종대왕(조선 제19대왕)께서는 전지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 경순대왕 자손의 녹봉과 사랑하는 법전이 국전에 적혀있어 분명히 상고할 만한 고로 몇해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호패를 내리고 군대와 부역의 의무를 없이하고 열사릉 강하지 못하더라도 건드리지 못하게 말리라고 한 것은 한결같이 선대 제왕들이 고시한 바로 그 성교를 받들어 이에 받아 전하여 시행하는 바이다" 하였으며, 영조대왕(조선 제21대왕)께서 전교하여 말씀하기를 " 경순왕 후예들을 군대와 부역에서 빼어주는 것은 선대 임금때부터 전해오는 전교이니 선조를 따르므로서 금석과 같은 법전이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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