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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獨行 常獨步 達者同遊涅槃路 調古神淸風自高 貌悴骨剛人不顧窮釋子 口稱貧 實是身貧道不貧 貧則身常被縷褐 道則心藏無價珍無價珍 用無盡 利物應時終不恡
證道歌 제 7강
반갑습니다.
3월 2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상독행常獨行 상독보常獨步하야 달자동유達者同遊열반로涅槃路라 하는 구절부터 공부할 차례입니다.
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휴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일 금요일 본래는 강의를 해야되는데 2월에도 그랬듯이
청림회 강의시간이 우리 염화실 방송강의 시간하고 겹쳐져서 첫 금요일은 늘 그렇습니다. 월 첫 금요일은 청림회 강의 때문에 염화실 강의는 휴강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토요일 일요일 연달아 휴강이네요.
염화실에 나오시는 학생들 3일 연달아 휴강이 돼나서 아주
즐거우시겠습니다 (웃음)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학생이 되면은 노는 날이 아주 즐겁죠. 일종의 보너스입니다.
상독행常獨行 상독보常獨步하야 달자동유達者同遊 열반로涅槃路라
그랬어요
여기서 항상 홀로 행하고 항상 홀로 걸어다닌다
얼핏 보기에는 뭐 당신과 벗할 사람이 없다 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는데 물론 그렇기도 합니다. 큰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이 벗 삼을 만한 사람이 그렇게 많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의 어떤 사고와 그 생활이 전혀 이 사람과 그 동떨어지죠, 일상생활 뭐 먹고 자는 건 똑같다하더라도 그래도 그 생각하는 바가 영 다르니까 정말 홀로 사는 그런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 또 이 대목에서 해석하기를 어떤 세상사와 벗하지 않는다 짝하지 않는다 이런 뜻으로 많이 해석을 하지요.
홀로 다니고 홀로 걷는다 라고 하는 말은
어떤 세상사와 더불어 짝하지 않는다
우리들 보통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뭐 벗이 많죠. 사람도 벗이 많고 세상에 짝할 사람도 짝할 일도 많습니다.짝할 사람도 많고 짝할 일도 많습니다. 관심가는 데 내가 즐거운 데 아직도 미련 몬 끊고 뭐 이것저것 기웃거리고요 또 해보면 즐겁고 많죠 아직은.
더불어서 우리가 어떤 계기에 즐기긴 하더라도 빠지진 말라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좋은 자세죠.
세상에 처해 살면서 그 어떤 세상사와 또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서 같이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빠질 정도까지는 되어서는 안된다는 거죠.
여기서는 어떤 속된 일, 또 세상의 일, 또는 번뇌, 뭐 망상, 불필요한 것들 이런 것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는다
상독행 常獨行 상독보常獨步 그런 뜻으로 보면 이게 아주 훨씬 더 멋있죠. 도인이 돼서 함께 도반할 사람이 없다 이런 의미는 좀 협소한 뜻으로 우리가 해석을 하지요
그렇습니다.정말 뛰어나 있다. 세상사에 뛰어나 있고 속된 일과 뛰어나 있다. 그래 달자동유達者同遊 열반로涅槃路라
통달한 사람끼리는 열반의 길에서 동유한다. 같이 노닌다
그랬습니다. 달자동유達者同遊열반로涅槃路라 통달한 사람끼리 열반의 길에서 함께 노닌다
참 멋있죠.
그러니까 영가스님의 관심사는 어떤 속된 일. 세속적인 일, 무가치한 일 이런 데 관심사가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열반의 길, 세속의 길이 아니라 열반의 길, 깨달음의 길, 진리의 길, 이것이 자신의 관심사고 또 그러한 그 어떤 가치관이 같은 사람들끼리 함께 거기서 노닌다 그랬습니다.
유유상종이라 그러죠.
우리 불자들도 뭐 불자들끼리 아무래도 편하죠. 이야기가 통하고 또 불자라 하더라도 사람들 근기와 인연에 따라서 아주 각양각색입니다. 참 다양하죠.그러니까 뭐 기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또 기도하는 데로 함께하고요 또 어떤 주문이나 무슨 진언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또 그쪽으로 함께 하고
여기 염화실은 성인의 가르침을 이렇게 가까이 하면서 그 분들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깨우쳐 가는 거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이렇게 모여서 이 시간에 우리가 강의를 하고 강의를 듣습니다.
다 이게 유유상종인데 영가스님도 그럴 것입니다.
달자동유達者同遊 열반로涅槃路라
통달한 사람들끼리 함께 이렇게 노닌다
또 노니는 세계는 앞에서 말했던 어떤 세속적인 것 이런 것과는 다른 어떤 세계에 노닌다. 이렇게 이제 두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조고신청 調古神淸 풍자고風自高요 모췌골강貌悴骨剛 인불고人不顧 라
그래서 이런 도인의 삶은 그 곡조가 옛스럽고, 아주 전통이 있다 하는 거죠 조고調古라고 하는 것은.
조調는 여기서 곡조曲調라는 말이지만은 아주 뭡니까, 운율이 삶의 운율이죠. 노래 곡조가 아니라 삶의 운율이 아주 옛스럽다 어떤 정신의 운율이죠.
그리고 여기 신청神淸하는 것은 정신은 뭐라고 할까 아주 맑다 이거죠.곡조는 옛스럽고 정신은 맑다 이런 것들은 뭐
정신은 맑다하는 것은 이해 되겠지만은 조고調古 곡조는 옛스럽다. 격조格調라고도 하고 뭐 조격調格이라고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그건 옛스러운 전통이 있는 것이고 정신은 아주 맑고
풍자고風自高그랬어요. 도풍 道風이라고 하겠죠.뭐 법풍法風이란 말도 쓰고, 도풍道風이란 말도 쓰고, 가풍家風이란 말도 씁니다.
그 가풍家風은 스스로 높다. 아주 높은 가풍을 가지고 있다 그랬습니다.
이것이 영가스님 자신을 이야기하는데 뭐 당당히 깨달은 사람으로서 또 육조스님에게 가서 당당히 인가를 받았구요 이제 거칠 것이 없습니다. 뭐 천불이 출세해서 덤빈다 하더라도 하나도 겁날 것도 없고 아주 당당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말도 스스럼없이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모췌골강 貌悴骨剛 인불고人不顧라 그랬습니다.
얼굴은 초췌하고요 뺨은 아주 깡말라 앙상하게 돼서 뭐 얼핏 보기에 영 사람같지 않아서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는다
모췌골강貌悴骨剛 인불고人不顧라
모貌는 췌悴하고 골骨은 강剛해 그래서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는다 얼굴은 초췌하고 뼈는 깡말라서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더라.
얼마나 그 깨달음의 문제에 고심했으면 이렇겠습니까. 또
이런 구절을 우리가 읽으면은 부처님 고행상이 떠오르시죠.
부처님 고행상, 정말 힘줄이 다 드러나고요 혈관이라 할까 뼈가 그대로 다 드러나는 피골이 상접한 그 부처님의 열반상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영가스님도 깨달음의 문제에 얼마나 골몰했기에 이런 모습을 하셨을까 이런 것도 우리가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는 모습 외형적인 그런 어떤 삶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참 형편없지요. 그러나 수행자가 또 도를 통하는 사람이 뭐 그런 데 그렇게 연연하고 그런 걸 문제 삼을 까닭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궁석자 구칭빈窮釋子 口稱貧이나
실시신빈實是身貧도불빈道不貧이라 아주 좋은 말이죠.
이것은 물론 출가 수행한 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말씀을 귀에 담고 본받아야 될 그런 이야기입니다.
궁窮한 석자釋子가 말하자면 궁색한 그러니까 물질적으로 아주 궁색하게 사는 석자釋子, 석자釋子하면은 석가모니의 제자 그 부처님의 제자들 뭐 이런 뜻이죠. 석자釋子 뭐 여기에 사부대중이 다 해당된다고 할 수가 있어요. 꼭 출가수행자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죠. 왜냐 이것은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불교를 좋아하고 깨달은 그 어떤 경지가 참으로 우리가 수긍이 가고 거기에 소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 그런 어떤 삶의 가치관이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힌 사람이라면은 이 범주 속에 안들 까닭이 없죠.
궁색한 부처님의 제자, 입으로는 가난하다고 하지만은 그 말입니다. 입으로는 가난하다고 하지만은
실시신빈實是身貧 도불빈道不貧이라.
실은 이 몸이 이 육신이 처하는 어떤 상황들 이것이 가난하지 도가 가난한 것은 아니다.
실시신빈實是身貧 도불빈道不貧 참 이렇게 돼야 되는데
스님들은 석자釋子라고 여기 했듯이 성이 세속에서 쓰던 성을 쓰지 않고 전부 이 석가모니釋迦牟尼 석釋자를 쓰죠
이건 도안법사라고 동진시대 도안법사라고 서기 한 300년경에 계셨던 스님인데 그 스님이 그걸 주장하셨어요. 그래서 그 후로 전부 이 동양권에서는 전부 이제 석무비 뭐 석누구… 이렇게 이제 성을 굳이 쓸라면은 불명 앞에다가 석釋자를 썼습니다. 전부 석씨가 된다는거죠 부처님의 제자니까. 그래 석씨가 된다 그랬는데
아주 웃지 못할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전에 청담스님이 그 스님 성이 이씨거든요 이청담 이청담 이제 그랬는데 명함을 이청담이라고 이제 찍어가지고 그때 대만에선가요 불교도 대회가 있었는데 명함을 이청담이라 이렇게 내밀었어요.
근데 모습은 아주 그 스님은 육환장도 짚고 다니시고 또 누구보다도 아주 모범이시고 종정까지 지냈고 총무원장도 두번이나 지내시고 대단한 이론가시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뭐 형색도 항상 가사장삼을 수하고 다니시고 육환장 짚고 다니시구요 거 택시 타고 버스타고 하는데 얼마나 가사장삼이 번거롭습니까 곧곧에 걸리적지고 그리고 육환장이 얼마나 번거롭습니까, 택시에 들어가지도 않구요 그런데도 기어이 형색을 그렇게 하고 다니셨습니다.
그만치 어떤 승행이라고 할까 모양을 중시했던 스님이죠.
그런데 그런 모양을 하고 그 대만불교도대회에 갔었는데 명함을 그렇게 이청담이라고 찍어가지고 내밀어 주니까 모양을 보고 스님들 좌석에 앉히려고 하다가 명함을 보고는 이 안내하는 사람들이 그만 저 밑에 처사들 거사들이 앉는 자리에 앉혔다는 것입니다.
그래 항의를 하니까 이청담 아니냐고 석청담 같으면은 스님들 자리에 앉히지만은 아 이씨를 쓰니까 이건 아직도 출가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 앉혔다 라고 하는 그런 그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그런 그 일이 있었구요.
그만치 이 동양권에서는 출가한 스님들은 반드시 성을 쓸 때 석씨를 써야된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죠.
그 속성을 그렇게 쓰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직 속물이 덜 떨어졌다 이렇게 이제 볼 수가 있고 어딘지 모르게 하옇든 그 세속을 연연해 하고 좋아하는 그런 그 어떤 마음씨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궁석자窮釋子 구청빈口稱貧
실시신빈實是身貧 도불빈道不貧이라
참 이런 구절은 우리가 부끄럽기도 하고 참 반성할 점도 많고 그런데 요즘은 사실 이 몸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 몸은 부자고 도가 부자라야 되는데 도가 오히려 가난하고 반대가 됐죠. 딱.모든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은 요즘 스님들의 대다수가 실로 몸은 부자고 도는 가난하다 글자를 그렇게 바꿔야 될 그런 상황입니다.
뭐 세상이 부자가 됐죠. 우리 어릴 때 50년대 후반이나 60년대 초에 막 새마을 운동 일어날려고 할 그 무렵에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습니까, 그 때 생각하면 지금은 몇 백 배 우리 국가가 부자가 됐고, 따라서 국민이 부자가 됐고, 그러다 보니 따라서 이제 스님들도 이제 저절로 부자가 돼서 수용이 아주 그 넉넉한 그런 상황입니다. 몇 백 배 부자가 됐죠. 아마 우리나라가 그때 60년대초 60년 61년 62년 그 무렵에 비교를 해본다면.
그런데 사람들이 느끼는 어떤 그 삶의 질을 생각해 볼 때는
그렇게 좋아졌다 이렇게 자신있게 말 할 수가 없어요. 어떤 경제적인 풍요는 몇 백 배가 좋아졌습니다. 뭐 수출 같은 것은 통계상으로 보면은 뭐 3000배, 60년대 초에 비교 한다면 뭐 3000배나 그렇게 불어났다 그러죠.
그때 뭐 천만불 수출했다고 뭐 야단법석을 떤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뭐 얼만지도 모를 정도죠. 그런 것들을 우리가 한 번 뭐 지나간 일이라 하더라도 현실하고 비교를 하면서
우리가 정말 어떻게 사는 게 바람직한 삶인가, 또 우리가 그 가치있다고 하는 그런 것들이 과연 가치있는가, 그것이 정말 우리 삶에 정말 가치있는 것인가, 이런 것들도 한 번 그 과거 삶과 연관시켜서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은 뭐 부족한 게 좀 있더라도 마음이 넉넉해지실 것이고 다른 문제들이 많이 해소 될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할 줄 알면은 현재 우리가 당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많이 해소가 되리라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스님들도 참 세상이 부자가 되다 보니까 스님들 생활도 부자가 되고 도道가 부자가 되어야 되는데 몸이 부자가 되니 이게 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일입니다.
여기에 이제 빈즉신상貧則身常피누갈被縷褐이요 도즉심장道則心藏무가진無價珍이라
그랬습니다. 가난한 입장으로는 몸에 항상 누갈縷褐을 입었고 누갈縷褐은 이제 누더기죠. 누더기를 입었고 도의 입장으로서는 마음에 무가진보無價珍寶를 감추고 있다
참 이래 돼야 되는데 그 반대 현상이 너무 많죠
정말 누더기 속에 도가 있어야 되죠.
또 웃지 못할 일은 그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승복이 전부 광목이었습니다. 나이롱이라고 하는 것이 나오기 전이었거든요. 그래서 광목을 가지고 뭐 사철 다 입었는데 광목옷을 가지고 사철 다 입었는데 그러다 보니까 한 두 벌, 많아야 세 벌, 가지고 입었는데 잘 떨어지죠, 광목이 참 잘 떨어집니다.
그래서 많이 기워 입었어요. 기워 입고 또 양말도 기워서 신고요. 그래서 양말 아주 두껍게 기워 신기 때문에 아주 신기는 아주 푹신하고 좋죠, 근데 한 번씩 빨아 놓으면 그게 며칠 말라야 다 마를 정도로 그렇게 잘 마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양말을 깁는, 기울 때 뭐 전구 아주 튼튼한 전구가 있으면 그걸 애지중지하면서 가지고 다니면서 양말 기울 때 쓰기도 하구요, 그담에 그보다 더 먼저 생긴 것은 노장스님들이 발 같이 나무를 깎아 가지고 그 가지고 있습니다. 어지간히 이제 알뜰하게 사시는 노장스님들 보면 의례히 그게 있어요. 그래서 목형 발에다가 양말을 씌워 놓고 기워요. 그러면 아주 잘 기워지죠. 그런 것들도 우리는 많이 보았습니다. 사용도 해 봤구요.
그러다가 뭐 갑자기 그냥 나이롱이 나오고 그래서 이제 나이롱 옷을 입고 싶어하고 그 나이롱 옷을 입은 사람들은 나이롱 중 나이롱 중 하고 이렇게 놀리기도 하고 그 번쩍번쩍하고 질기고 그게 사실 지금 보면 그렇게 천할 수가 없는데 그게 그렇게 아주 좋게 보이고 부러워 보이기도 하고 그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뭐 잠깐이었죠. 그 나이롱이라고 하는 것이, 나이롱 양말이든지 나이롱 천 이런 것이 잠깐이었는데 그담에 이제 화학섬유가 나와가지고 뭐 모직하고 몇 퍼센트 이렇게 섞이어서 나오는 그런 것들도 있고 이제 그렇게 해서 옷이 잘 안떨어졌죠. 그런 옷을, 광목옷을 입다가 그런 옷을 입으면서 부터 옷이 잘 안떨어졌는데 그 전에 광목옷을 입을 때 떨어진 옷을 입기 시작해서 누더기를 많이 이제 스님들이 어쩔 수 없이 옷이 누더기가 돼서 누더기를 기워 입었는데 그 뒤 시대부터는 그 누더기는 옷이 누더기는 되지 않고 또 누더기는 입고 싶고 그래서 떨어진 옷을 입고 뭔가 구참이라고 하는 그런 자랑을 하고 싶어서 일부러 이제 옷을 누덕누덕 기워입기도 하고 천을 짤라가지고 공연한 새 천을 짤라가지고 이제 여러 조각을 만들어서 누더기를 만들기도 하고 멀쩡한 옷에다가 그 천들을 주워가지고요 이렇게 누덕누덕 붙이기도 하고 그래 아주 새 옷에다가 그런 그 천조각을 여기저기 붙여가지고 너덜너덜 해서 입고 다니는 그런 것도 상당히 오랜 기간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거의 잘 안보이죠.
천 조각을 여러 조각으로 대서 옷을 만든 것은 간혹 보이는데 누더기처럼 그래 만들어서 입고 다니는 옷은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만치 세상이 빨리 변하고 상황이 이제 달라지고 그렇습니다. 참 그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새 옷에다가 일부러 천조각을 누덕누덕 기워가지고 입고 다니는 것 참 그 볼썽사납고 참 역겹게 생각이 드는데 또 그게 좋다고 또 입고 다니는 그런 골 빈 사람들이 또 적지가 않았었어요. 뭐 그런 거 저런 거 옛이야기를 우리가 이렇게 굽어보고 한 번 되뇌이면 또 재밌는 추억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빈즉신상貧則身常피누갈被縷褐이요
도즉심장道則心藏무가진無價珍이라
가난한 입장으로는 떨어진 누더기를 입었고 항상,
도의 입장으로서는 마음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무궁무진無窮無盡한 그런 보배를 감추고 있다.
삶의 가치관이 이래 돼야 되는 거죠. 정말 자기 어떤 진리에 대한 소신, 불법에 대한 소신이 확고한 사람은 뭐 외양적인 어떤 그 삶에 의식주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문제 삼지를 않는데, 보면은 너무 요즘은 참 의식주 문제에 신경을 많이 쓰는 그런 그 폐단들이 있지요.
뭐 일반인들이야 당연한 것이지만은 명색이 스님이라고 하면서 의식주 문제, 뭐 절을 너무 화려하게 고급스럽게 할려고 한다든지 그걸 뭐 또 자랑스럽게 생각 부끄럽게 생각하지 못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든지 이런 그 폐단들 그 참 뭔가 본분을 망각한 그런 처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뭐 이런 이야기도 지금 우리 염화실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 아무데서나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는 또 그런, 말도 이젠 맘대로 할 수 없는 그런 처지가 되었습니다.
무가진無價珍용무진用無盡하니
이물利物응시應時종불린終不恡이라
무가진보無價珍寶 마음의 어떤 그 불법이라고 하는 거 또 진정한 그 인생의 가치, 그게 마음의 문제가 됐든지, 그걸 도 道라고 했든지 그나름대로 저 앞에서 일과원광색비색 一顆圓光色非色이라고 하는 그 어떤 구슬, 한덩어리의 구슬 마니주라고도 하고 그랬죠, 마니주라고 하는 그 구슬에 대한 어떤 그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죠.
그래서 그것을 무가진보無價珍寶라 그렇게 합니다 값으로 매길수 없는 진보珍寶 그런데 그것은 그 사용이 끝날 때가 없어요 무궁무진합니다. 아무리 쓰고 뭐 쓸수록 어쩌면 빛이 더 나는 거죠. 세상의 보배나 재물은 어떻습니까, 쓰면 쓴 만치 줄지요. 다하죠. 그래서 결국은 아무리 많아도 그게 이제 다 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그 보배에 대한 이해, 그 보배에 대한 깨달음, 또 그 보배에 대한 어떤 자기만의 아주 확고한 소신 이런 것이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이물응시利物應時 종불린終不恡이라 물物 중생들을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때를 이롭게 한다.
응시應時할 때 응기應機 근기라고 하는 기機자로 된 본도 있어요. 그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닌데 저는 어릴 때 이물응기종불린利物應機終不恡이라 이렇게 이제 외웠었는데 여긴 또 이물응시利物應時 때에 이제 맞춰서 때에 사람들을 맞춰준다. 그래서 마침내 아끼지 않는다.
이물응시利物應時 종불린終不恡
물物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을 말하는 거죠.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때를 맞춰주는 데 있어서 마침내 아끼지 아니한다.
이 마음에 대한 그런 자기 확신과 자기 안목과 자기 깨달음이 있을 때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설명해주고 베풀어주고 한다면 그건 뭐 끝날 날이 있겠습니까. 쓰면 쓸 수록 더 빛나지요. 더 이제 자기 확신이 서는 거고 더 아주 뚜렷이 자기에게로 아마 다가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초발심자경문 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에 있는 말이죠.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 一朝塵이라
저가 이제 출가할 때 이 구절 하나 소개받으면서 출가의 동기가 됐는데, 절에 가서 처음 이제 우리 수행자들이 공부하는 첫 경전이 바로 초발심자경문이죠.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그다음에 자경문自警文 이 세가지가 이제 한데 합해져 있는 그런 그 책인데 그 자경문이라는 책에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 一朝塵이라
초발심자경문 중에서 한구절을 선택하라면 당연 이 구절을 이제 선택을 합니다.
삼일간 마음을 닦은 것은 천년의 보배가 되고
백년 동안 물질을 탐해봐야 그것은 결국 하루 아침의 먼지가 되고 만다.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유한한 것이고요.
또 마음의 문제는 무한한 것이고 하기때문에 그렇고.
또 이것은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정말 어떤 우리는 이 몸뚱이를 가지고 살면서 당장에 뭐 어떤 세속적인 부를 버릴 수는 없지요.
가지고 살아야 되죠. 당연히 가지고 살아야 되지만은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 그것 말고도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
그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이라는 것
거기에 대한 그 이해가 깊어질수록 어쩌면 뭐 부도 더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그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무가진無價珍용무진用無盡이라
이 무가진보無價珍寶는 사용함에 있어서 다함이 없으니
중생을 이롭게 하고 때에 응해주는데 마침내 아끼지 아니함이라 아낌이 없다 시절에 맞춘다는 거죠. 시절에 맞추어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데 아낌이 없다.
삼신사지三身四智체중원體中圓이요
팔해육통八解六通심지인心地印이라
그랬습니다. 삼신사지三身四智는 체중원 體中圓이요
삼신三身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神이라고 그러죠 법신 보신 화신. 이것은 뭐 부처님에게 모두 세 가지 몸이 있으니 해서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神이다 이렇게 하는데
우리 보통 사람들도 다 법신 法身 보신 報身 화신 化神이 있습니다. 그게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신 보신 화신과 차이가 있겠죠.
뭐 차이가 없는 것은 법신法身입니다마는 마음자리입니다만은 보신報身이라는 것은 그 영향력이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차이가 나기 시작합니다. 법신자리, 마음의 근본자리는 차이가 없는데 보신報身 과보의 몸 이러죠. 그건 이제 덕화이기도 하고 영향력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얼마나 유루복有漏福이라도 많이 짓고 살았느냐 온갖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면서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전혀 이제 다릅니다.
그래 비유를 할 때 그래요, 달이 이제 하늘에 떠 있는 달은 똑같은데 그건 이제 모든 사람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어떤 경우의 사람도 똑같은 것이고 그다음에 달이 하늘에 있긴 있지만은 구름에 가려 버리면은 그게 이제 안 비치죠 전혀 빛이 안나죠.
그리고 또 초승달은 설사 구름이 없다 하더라도 그 빛이 미미합니다. 그런데 보름달은 환-하죠. 그와 같이 같은 달인데도, 달, 원달은 변함이 없지만은 세상에 빛을 비치는 데는 그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죠. 그게 이제 보신報身이라고 합니다. 그래 사람이 똑같은 사람인 입장도 있지만은 그 똑같은 데서 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그런 입장도 반드시 있다는 거지요.
사람들이 이웃에 끼치는 영향, 가족에 미치는 영향, 사회에 끼치는 영향 그것도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 하는 거 많이 다릅니다.
그 다음에 이제 화신化神인데요 삼신三神중에 화신化神은 이건 이제 역할이죠. 예를 들어서 뭐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학교에서는 선생님이구요 집에 오면은 아이들에게는 아버지가 되고 아내에게는 남편이 되고 또 친구들에게는 친구가 되고 또 손자에게는 할아버지가 되고 또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되고, 이게 이제 그때그때 상황 따라서 다른 역할들입니다. 그걸 이제 천강유수千江有水 천강월千江月이라 그걸 이제 그렇게 표현을 하는데 강마다 물이 있고 그 물에는 달그림자가, 그림자 달이 비친다 그와 같다는 거죠.
그래서 대개 요즘사람들은 역할이 열 가지 이상은 됩니다. 아무리 뭐 조그맣게 아주 미미하게 살아도 열가지 이상의 역할은 다 하면서 삽니다. 그게 이제 화신化神이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체體 가운데 원만히 갖추었다
그랬어요.
체體는 이제 음 그 도인스님들 따라서 또 경전따라서 그 표현하는 것이 각각 조금씩 다릅니다.
영가스님은 체體자를 잘 써요 체體. 요건 이제 근본 根本이라고도 할 수 있고,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고 자성自性이라고 진여眞如 법신法身 뭐 이렇게 할 수가 있는데 이 영가스님은 보면은 이 체體자를 그렇게 잘 써요. 이 증도가 안에서 일곱 번인가 그렇게 나옵니다.
그 임제스님 같은 경우는 사람 인人자를 잘 썼고요.
육조스님 같은 이들은 육조단경에서 성품 성性자를 또 잘 씁니다. 또 어떤 데는 이제 뭐 마음 심心자를 잘 쓰는 마조스님이라든지 기타 스님들은 마음 심心자를 잘 쓰는 경우도 있고. 같은 뜻입니다.
마음가운데 원만하다 이래도 삼신이 법보가 삼신이 내 마음 가운데 원만히 갖췄다. 이렇게 해도 하나도 틀리지 않죠.
그러나 이제 영가스님은 마음 심心자나 사람 인人자나 이런 말을 쓰지 않고 체體자 몸 체體자를 즐겨 쓰신다는 거 이것도 우리가 눈여겨 둘 필요가 있습니다.
사지四智 라는 것이 이제 네 가지 지혜인데요.
우리들 마음이 이렇게 성인의 가르침을 자꾸 이제 공부해 가고 또 사유하고 그래서 어느날 또 큰 깨달음을 얻고 이렇게 하다 보면은 뭐 네 가지 지혜가 이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그 그릇만치 다 네가지 지혜가 있어요. 설사 깨달음이 완전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완전하지 못한 대로 네가지 지혜가 있고 완전하면 완전한 대로 네가지 지혜가 있고. 깨달음의 그런 그 상태는 사람마다 아주 천차만별일 수가 또 있습니다.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하는데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그런 지혜다, 그다음에 평등성지平等性智다.
대원경大圓鏡이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누구든지 다 가면 다 아주 그 완전한 그런 그 어떤 그 마음의 지혜 이런 입장에서 대원경大圓鏡이라고 그렇게 했고 그것이 이제 누구에게나 다 평등하다. 또 누구든지 다 비출수 있다. 어떤 사물이든지 다 비출수 있다 그래서 평등성지平等性智다,
우리 마음을 지혜의 입장으로 볼 때 이렇게 네 가지로 분류해서 세분화해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묘관찰지妙觀察智 지혜는 어떻습니까 아주 관찰을 잘 하죠. 아주 잘 살핍니다. 잘 살필 줄 아는 게 지혜의 아주 특징이기도 합니다.
또 평등한 그런 그 속성을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지요. 그다음
성소작지成所作智라고 하는 게 있는데 하고자 하는 것을 전부 성취하는 지혜 소작을 이루는 지혜 지을 바를 다 이루는 지혜다 그게 이제 성소작지成所作智 네가지 지혜입니다.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
이게 우리들이 평소에는 지혜, 지혜 이렇게 이제 뭉뚱그려서 하고 마는데 그것을 세분화해서 이야기 하면은 대원경지大圓鏡智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이 환하게 비추고 그것은 어떤 평등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은 잘 살핀다 뭐 머리칼 하나도 빠뜨리고 비추는 게 아니죠 그게 묘관찰지妙觀察智, 그리고 이 지혜는 무엇이든지 다 하고자 하는 바를 다 성취시킬수 있다 이게 이제 성소작지成所作智가 되겠습니다.
이런 것도 역시 체중원體中圓이다 체중원 體中圓.본체 가운데 다 있다.근본속에 다 있다.마음속에 다 있다 사람속에 다 있다 자성속에 다 있다 진여속에 다있다 다 갖췄다. 다 해당됩니다. 체중원體中圓이라는 말이
팔해육통八解六通심지인心地印이라
팔해탈八解脫 육신통六神通 이것도 마음 땅의 도장이다. 역시 이제 체體자를 같이 쓸 수가 없어서 같이 써도 좋아요. 그런데 이제 같이 쓰면 글로서 이제 좀 모양이 그렇죠.
그래서 여기는 마음 심心자를 공통적으로 잘 쓰는 마음 심 心자를 썼습니다. 마음 가운데 도장이다.
팔해탈 八解脫육신통六神通
팔해탈八解脫은 뭐 해탈 우리가 언필칭 해탈하면 그걸로 끝이죠 그래서 이제 해탈을 길게 설명하지를 않습니다
설명해봤자 삶과 죽음으로부터의 해탈解脫
뭐든 하나씩 하나씩 해탈해 가다가 궁극에 가서는 삶과 죽음으로 부터의 그 해탈을 이뤄야 그게 진정한 해탈이다. 근데 그걸 이제 또 세분화해서 여덟가지 해탈을 이제 이야기를 하죠.
여덟가지 해탈은
먼저 어떤 대상을 오로지 생각하는 것에 의하여 우리가
개인의 감정을 제거한다. 그것도 하나의 해탈이고요.
또 나아가서 마음을 하나에 집중하여 정신을 통일하는 것
그것도 다른 것으로 부터 다 이제 해탈이 되는 거니까.
다시 또 외경으로부터 마음을 분리한다.
그다음에 몸과 마음이 청정한 경지에 이르게 하고 이 단계에서 이제 주로 무한한 공간을 생각해 가지고
외계의 차별상을 또 없애고
또 그 마음의 작용과 몸이 무한한 경계에 도달한다.
또 그 더 넓은 공간이나 마음의 경계를 이제 초월한 근원자리에 이른다.
또 그 근원이 항상 현실 위에 나타나게 되는 그런 그 경지
뭐 팔해탈을 그렇게 세분해서 이야기를 했을 때 그렇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뭐 그거 그 세분화 한 데 대해서 크게 우리가 마음 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해탈解脫 그것도 우리 마음 가운데 다 이미 있는 것이다
육신통六神通은 이제 잘 아시는 대로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또 뭐 타심통他心通 누진통漏盡通 신족통神足通 이런 것들을 이제 육신통이라 그러죠.
그것도 역시 우리 마음속에 다 있는 것이고
체중원 體中圓이나 심지인心地印 이나 다 같은 의미로 우리 마음속에 다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증도가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 많은 분들이 오셨네요.
이렇게 많은 분들이 동참하셔서 법석을 빛내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리:꽃물들다)
_()()()_ 三身四智 體中圓이요 八解六通 心地印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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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