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 인터뷰]
13세기 한반도에 귀화한 베트남 리(Ly) 왕조의 후손으로 화산 이씨 종친회 운영위원을 맡고 있는 이상준 브릿지증권 사장. 최근 브릿지증권을 인수, 대표이사로 취임한 그는 베트남시장을 증권업계의 ‘블루오션’이라 여긴다. 1000여 개 사업체가 베트남에 진출해 있지만, 한국 금융자본의 진출은 전무한 실정이기 때문. “베트남과 한국은 글로벌 시대의 이상적 동반자 관계”라고 말하는 이상준 사장의 베트남 교류기. 이 사장은 대표이사 취임사에서 “그동안 골든브릿지를 통해 축적한 경험과 노하우를 브릿지증권에 접목해 기업금융(Industrial Bank)·해외투자(International Bank)·투자은행(Investment Bank)으로 특화된 ‘3IB 증권사’를 만들겠다”며 “베트남, 중국 등지의 해외자원 개발을 위한 실물 펀드도 선보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사장은 이날 공식석상에서 자신이 고려 고종 때인 1226년 한반도에 귀화한 베트남 리(Ly) 왕조의 후손인 화산(花山) 이씨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가 언급한 한 줄의 멘트에는 베트남에 대한 진한 애정이 깃들어 있다. 부계는 베트남인의 피가 흐르고 모계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그는 자신을 “한국인의 얼굴을 한 베트남인”이라고 표현한다. 최근에는 급속도로 부상하는 동아시아 시장에 주목해, 베트남과 한국이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양국의 가교(架橋)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블루오션 전략과 시장 개척이 절실한 한국시장. ‘한국형 풀뿌리 투자은행’을 세우는 것이 꿈이라는 이상준 사장은 브릿지증권을 인수함으로써 한국형 투자은행의 모델 완성에 한 발짝 다가섰다. 국내에서 성공한 비즈니스 모델을 베트남에 옮겨 심겠다는 야심 찬 계획도 세우고 있다.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왕자, 이용상 -한국에서 김씨 다음으로 흔한 성씨가 이씨고, 이씨는 본관 수만 해도 237본에 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화산 이씨는 어떤 성씨입니까. “화산 이씨의 시조는, 베트남에 첫 독립국가를 세운 리 왕조(1009~1226)의 9대 왕 혜종의 숙부이자 왕자 신분의 군 총수인 이용상(李龍祥)입니다. 리 왕조가 트란 왕조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왕족이 몰살당하는 난국에 이용상 왕자는 배를 타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했습니다. 계절풍을 타고 망망대해를 떠돌다 닿은 곳이 한반도 서해안의 옹진반도 화산(지금은 북한 땅)이었다고 합니다. 베트남 최초의 ‘보트피플’이지요.” 3600여 km(비행기로 5시간이 걸리는 거리다)나 떨어진 곳에 새 삶의 터전을 꾸린 이용상 왕자는 고려에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섬사람들과 힘을 모아 침략자들을 물리쳤다. 사연을 전해 들은 고려 고종은 그를 ‘화산군’으로 봉하고 일대의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했다. 문명교류사 연구로 유명한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에 의하면, 지금도 황해도 옹진군 화산 인근에는 이용상 왕자의 행적을 전하는 유적이 있다고 한다. 몽골군의 침입을 막고자 쌓았다는 안남토성과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찾아가 고국쪽을 향해 통곡했다는 망국단, 리씨 왕조의 시조 이름을 딴 남평리와 당시 베트남의 나라 이름을 본뜬 교지리 마을이 그것이다. 귀화한 이용상 왕자 일가는 걸출한 인물도 여럿 배출했다. 장남은 예문관 대제학을 제수받고 차남은 안동부사를 지냈으며, 6세손 맹운은 공민왕 때 호조전서를 역임하다 국운이 기울자 고향에 은거하면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충절을 지켰다고 한다. -자라면서 리 왕조 가문에 대해 들은 얘기가 있습니까. “저는 화산 이씨 36대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현재 브릿지증권이 자리잡은 서울 명동 입구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이 부근 인쇄골목에서 인쇄소를 하셨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 돌아가셨는데 술에 취하면 ‘너는 베트콩이다’ ‘베트콩의 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애들이 ‘나 어디서 태어났어?’ 물으면 어른들이 ‘다리 밑에서 주워왔지’ 하고 놀리잖아요. 처음엔 심각하게 반응하지만 자라면서 농담이라는 것을 알고 흘려듣는 것처럼, 저도 아버지의 말씀을 별 뜻 없이 받아들였어요. 이씨 하면 전주 이씨가 많아서 화산 이씨를 전주 이씨 방계쯤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다 2001년인가, 한 방송사에서 ‘850년 만의 귀향’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영했어요. 황해도 옹진반도의 화산리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화산 이씨가 고향인 베트남 하노이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것을 보고 ‘어! 진짜네’ 하게 됐습니다.” 이상준 사장이 초등학생이던 1960년대 한국은 베트남전에 사상 최초의 대규모 해외파병을 단행한다. 1964년 8월, 1개 의무중대 파견을 시작으로 이듬해에 맹호, 청룡의 2개 전투사단, 1966년에는 백마부대를 파견해 5만 병력을 베트남에 보냈다. 그런데 베트콩이 승리하면서 베트남은 베트콩과 같은 단어로 인식되었다. 남한에 1350명, 초미니 종친회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조되던 시절이라 이 사장은 부친이 “너는 베트콩이다” 했을 때 놀리는 말쯤으로 생각했다.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말라서 학창 시절엔 가끔 친구들에게서도 “베트콩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면 “베트콩이 나만큼 생겼으면 정말 잘생긴 것”이라고 대꾸하곤 했다. -화산 이씨에 대한 내력을 제대로 듣게 된 것은 언제입니까. “TV를 본 후 종친회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가서 상세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당시는 골든브릿지를 창업한 초창기여서 정신없이 바빠 시간을 내지 못했어요. 조금 여유가 생겨 인터넷을 뒤지니 웹사이트도 없고, 신문기사를 찾아봐도 연락처가 없어서 종친회를 찾기가 힘들었어요. 2003년 가을 한 베트남 여행 관련 사이트 운영자와 비즈니스를 논의하다가 시삽에게서 화산 이씨 종친회 사무실이 인천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6·25전쟁이 나고 국토가 분단되면서 황해도 사람들이 인천으로 대거 건너와 ‘바다 건너 저쪽이 내 고향인데…’ 하며 살고 있는데, 화산 이씨들도 그렇다는 거예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화산 이씨의 주류는 화산에 근거지를 뒀고, 한 선조가 안동부사를 지낸 것을 보면 할아버지 한 분이 안동 쪽으로 내려가 안동과 봉화 지역에 본가를 두게 된 것 같다. 여기서 일부는 충청도로 간 것으로 보인다. 화산에 살던 주류 집성촌은 북한 땅에 계속 남아 있거나, 일부가 전쟁 후 남하해 인천에 무리를 지어 살게 됐다고 한다. 이상준 사장은 “부친의 고향이 대구인 것으로 봐서 나는 봉화파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남한에 있는 화산 이씨도 두 부류라고 합니다. 하나는 레드 콤플렉스가 있어서 ‘이 나라에서 베트남 왕족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해봤자 소외당할 뿐’이라며 밝히기를 꺼리는 파(派)이고, ‘혈통을 유지하는 것뿐 아니라, 고향도 방문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파가 있지요. 적극파는 1960년대 이후부터 베트남을 방문했고, 사이공이 함락되고 공산화 통일이 이뤄진 뒤부터는 방문이 끊겼다고 합니다.” 한국과 베트남의 외교관계를 살펴보면 1950년에는 베트남이 북한과 단독으로 수교했고, 한국과는 1992년 12월 대사급 외교관계가 수립됐다. 베트남에서 볼 때 한국은 중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에 이은 5위의 교역 상대국이다. 한국의 대(對)베트남 수출은 2002년 큰 폭의 증가세를 보이며 20억달러 시대로 진입했고, 2003년에는 25억6000만달러를 기록했다. 2000년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한에 살고 있는 화산 이씨는 1350명으로, 지금은 늘어봤자 1400여명일 것이라고 한다. 풍토가 맞지 않아서인지 화산 이씨는 자손이 귀한 편으로, 이상준 사장도 5대 독자다. 우리나라 인구 4829만명 중 1350명은 너무도 미미한 숫자다. 종친회를 찾아가보니, 규모도 작고 종친회 재산도 900만원에 불과했다. 초미니 종친회이지만, 족보를 잘 보존하고 대통을 지키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존경받는 리 왕조 -화산 이씨의 존재가 한국에서는 미미해도 베트남에서는 VIP 대접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1995년 화산 이씨 종친회 간부들이 선조가 한국으로 망명한 지 780년 만에 베트남을 찾았는데, 당시 도 무오이 당서기장 겸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이 모두 나와 환대했을 정도입니다. 요즘도 베트남대사관에서 주한교민 모임이 있을 때는 화산 이씨도 교민으로 간주하고 초대합니다. 화산 이씨가 베트남에서 살기를 희망할 경우 출입국관리, 세금, 사업권 등에서 베트남 사람과 똑같이 대우해주고요. 베트남 정부는 해마다 리 왕조가 출범한 음력 3월15일이면 종친회장을 비롯한 종친회 간부들을 왕조 출범 기념식에 초청해 내 가족, 내 혈족으로 환대합니다.”
이상준 사장이 베트남을 처음 방문한 것은 2003년 가을. 베트남 투자자들과 함께 10일간 투어를 하며 고향을 방문했는데 첫인상이 아주 강렬했다고 한다. “베트남은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습니다. 해안이 길고 물산이 풍부한 데다 중국이 남쪽으로 진출하는 통로여서 항상 중국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베트남은 대양으로, 남쪽으로 진출하는 관문이어서 늘 싸워 이겨야 자주성이 유지되는 나라였습니다. 가까스로 승리했다 해도 중국에 패하면 다시 물러나야 해 20~30년 이상 지속된 왕조가 없을 정도입니다. 거의 한 세대마다 왕조가 바뀌었는데 리씨 왕조는 1010년 창건자인 리공운이 하노이를 수도로 정하며 베트남 역사상 최초로 중국의 속국에서 독립국가가 됐고, 무려 250년간 지속됐습니다. 중국으로부터 자주성을 유지하면서 태평성대를 누린 유일한 왕조였기에 베트남인에게는 그에 대한 자긍심과 향수가 남아 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건조하고 매캐한 열대성 기후 특유의 냄새와 소박한 거리 풍경에서 1970년대 초반의 한국을 떠올렸다는 이 사장은 첫 방문에서 시장, 상점, 식당, 학교 등지에서 만난 베트남인 모두가 리 왕조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그 자신도 베트남 역사에서 250년간 자주성을 유지한 유일한 왕족의 후예라는 사실에 커다란 자부심을 갖게 됐다. “그들은 리 왕조가 망해서 한국으로 건너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 리 왕조의 후손인 한국의 화산 이씨다’ 했더니 ‘진짜냐?’ 하고 궁금해하더군요. ‘화산 이씨가 몇 명이나 되냐, 어떻게 사느냐…’ 등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된 이용상 왕자의 일대기는 2002년 12월 베트남 하노이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됐다. 당시 리 왕조는 중국계인 진씨 왕족에 의해 멸망해, 탈출한 이용상 왕자만이 살아남고 다른 왕족 72명은 모두 생매장당해 왕조의 뿌리가 없어졌다. 하지만 베트남인들 사이에서는 언젠가 리 왕조가 복원돼 베트남의 중흥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믿음이 전설처럼 퍼져 있기도 하다. 노동운동가에서 CEO로 이상준 사장은 베트남 방문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깨닫게 됐다고 한다. 이상준 사장은 운동권 출신이다. 1978년 서울대 자원공학과에 입학해 운동권 서클에 가담하며 사화과학 서적에 심취했고, 현장 활동의 필요성을 느껴 공장에 위장 취업하기도 했다. 의식화 작업, 노조조직, 노동상담소 설립, 노동 연구 활동 등에 적극 참여하며 수배 생활을 이어오다가 1996년에야 대학을 졸업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저를 바꾼 두 번의 계기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운동권 서클에 들어간 것이고, 두 번째는 ‘내게 베트남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며 동시에 자랑스러운 베트남 왕손으로서 두 가지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제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사람인 것과 베트남 사람인 것이 상충하는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시너지 효과가 더 많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부와 남지나해 연안에 있는 베트남은 반도이며 중국 접경 지역이란 점에서 한국과 여러 가지로 유사하다”고 말한다. 베트남은 중국과 동남아시아 제국 사이에 자리잡은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해 동서 해양교역의 연결망이 되면서 무수히 외침(外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래서 베트남은 오랜 기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고, 1859년부터 약 100년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기도 했으며, 프랑스를 몰아낸 후에는 미국과 해방전쟁을 치렀다. 이데올로기로 인해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도 비슷하다. “두 나라 모두 외침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베트남인이 볼 때 한국은 삼한사온과 사계절이 있고 금수강산이라 할 만큼 빼어나지만, 면적이 9만9461㎢로 좁고 산맥이 많아 침입자들이 먹고 사는 데 문제가 됐다는 겁니다. 점령비용이 많이 들었기에 침략국이 직접 지배하기 보다는 간접 지배 형태를 택했다는 거지요. 반면 베트남은 날씨는 덥지만 면적이 33만2501㎢로 남한 면적의 약 3.3배에 이르고 넓은 들판에서 나는 물산이 풍부해 먹고 살기가 좋았습니다. 점령비용이 들지 않기에 침략국이 베트남을 직접 지배하면서 자원을 강탈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베트남과 한국은 한자와 유교문화를 공유하는 동일 문화권에 속해 공감대의 폭이 크다고 한다. 베트남인의 대부분은 몽고반점을 갖고 태어나는 몽골족의 후예로 외모도 한국인과 비슷하다는 것. ‘반성 모르는 국민은 존경 못 받아” -3월15일 리 왕조 출범 기념식에 다녀오는 등 베트남을 수차례 방문한 것으로 압니다. 서울을 방문한 베트남 총리실 차관, 문화부 차관 등 베트남 고위관계자들을 만나기도 했고요. 베트남인은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우리는 승리한 나라’라는 자부심이 막강합니다.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이다. 그런데 우리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겼다. 그러므로 우린 최고다’ 하는 식으로 자존심, 민족성, 독립심이 대단합니다.
한국은 ‘달러 벌이’ 때문에 남의 나라에서 전쟁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는데, 일본은 아직도 신사참배를 하고 반성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계 시민이 될 자격이 없다는 정서를 갖고 있어요.” ‘반성하지 않는 국민은 존경받을 수 없다’는 것이 베트남인의 지배적인 사고이며, 한국에 대해서는 ‘옛날 일은 옛날 일, 과거를 이해하므로 이제는 미래를 향하자’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 이렇듯 베트남인은 대국적이고 철학적인 마인드를 지니고 있다는 게 이 사장의 시각이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인 동시에 시장경제를 도입한 나라다. 석유, 석탄 등의 광물 자원과 수산 자원이 풍부한 것도 큰 매력이지만, 시장경제가 정착되고 있는 나라여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최근 경제전망 보고서를 통해 베트남은 올해와 내년에 평균 7.6%대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측했다. -베트남과 한국, 두 나라가 진정한 포괄적 동반자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견지에서 개인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나갈 생각입니까. “베트남은 자본주의 시장화 정책이 진전되고 있지만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면서 경제개발 및 개방정책을 추진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요. 베트남 정부는 ‘우리가 리 왕조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정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나라 모두 국제관계에서 불안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동병상련의 처지라 양국은 필히 경제적으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야 합니다. 리 왕조의 후손으로서 그 가교 구실을 하고 싶습니다.” 포괄적 동반자 관계 그는 한국사회에 대해 “현재 노령화의 역삼각형 구조로 가고 있으며 돈은 넘치지만 빌려줄 데가 없고 금리는 낮은데다 성장 동력의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라고 지적한다. 반면 베트남은 자본은 부족하지만 8200만 인구 중 4800만이 30세 이하로 에너지가 넘치는 ‘청년의 나라’라는 것. 자본 초과 상태의 한국과 자본 부족 상태의 베트남이 장단점을 보완해 포괄적인 동반자 관계가 되면 서로 성장 동력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다. 머리가 좋고 근면하고 손재주가 뛰어나고 학구열이 뜨겁고 유학에 대한 열정이 있다는 점에서 두 나라의 국민은 닮은꼴이라고 그는 말한다. “학창 시절,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도 컸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지금 박정희 시대와 같은 신(新)성장 동력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베트남은 한국의 경제모델을 그대로 벤치마킹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한쪽은 초고속 압축 성장의 시행착오를 줄이도록 조언해줄 수 있고, 한쪽은 국가 에너지를 높이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한국의 학생 운동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한 주류가 학생운동→사회운동→정치운동으로 노선을 잡아갔다면, 다른 한 주류는 아래로부터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견지하면서 사회의 바닥인 공장에 위장취업하거나 지하조직을 결성해 현장의 의식을 바꾸는 쪽으로 노선을 잡아갔다. 이상준 사장은 후자에 속했다. 인천의 후지카, 금형공장 등에 취업해 의식화 운동을 실천했고 가투(街鬪)나 노동탄압철폐투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1986년에는 구로공단에서 ‘전태일 노동자료연구집’을 만들었다. 1989년에는 노총을 민주화하기 위해 제도권으로 들어가 보험노동조합 연맹의 홍보부장으로 일했고,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이하 사무노련)이 탄생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1991년 보험노련 위원장선거를 끝으로 ‘물러나도 되겠다’ 싶어 노조 일에서 물러난 그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후 다른 길을 걷는다.
테마주택타운, 심부름센터, 용역회사, 식자재 납품업 등을 거치며 그는 ‘돈은 거저 벌리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절실히 체험했다. 시장에 대해 담론만 펼치던 자신을 반성하게 됐다고 한다. 특히 1년 반 동안 식자재 납품업을 하며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상인들이 남들 다 자는 시간에 밤잠 안 자고 몸으로 부대끼며 돈 버는 현장을 보면서는 숙연해졌다고 한다. 후배인 김영선 한나라당 의원이 변호사 개업을 할 무렵 사무장을 맡아 도와주다가 부동산 경매를 연구하기도 했다. 철거업과 리모델링업 등에도 진출해 꽤 많은 수익을 거뒀지만, 외환위기 직후 연체금리 37%의 매출채권 회수불능 사태에 빠져 파산하는 뼈아픈 경험도 했다. 그후 김영선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던 그는 외환위기 이후 외국계 자본이 들어와 헐값에 기업을 인수해 막대한 이윤을 챙기고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2000년 골든브릿지를 창업했다. “베트남 금융 선진화 지원” -노동운동가에서 CEO로 변신했고, 브릿지증권 인수로 본격적인 제도권 금융업에 뛰어들었는데 지금까지 이룬 사업적 성과를 베트남에 어떻게 적용할 생각입니까. “순수 한국 자본과 한국인의 힘만으로 만들어진 ‘한국형 풀뿌리 투자은행’을 세우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브릿지증권을 인수해 금융지주회사로 거듭나는데 9부 능선까지 올랐다고 봅니다. 베트남에 현재 1000개 가까운 사업체가 진출해 있습니다. 거기에 금융자본이 따라가야 합니다.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지원해야 합니다. 베트남 금융의 선진화를 지원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한국 기업의 통로 구실을 하고 싶습니다.” 양국 교류 확대의 일환으로, 골든브릿지는 한국에서 공부하는 베트남 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그들이 한국 기업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지난해부터 인턴십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골든브릿지에서 인턴십 과정을 밟는 베트남 유학생은 모두 4명. 국민대 경영대학원에 재학 중인 민짜우(28·여)씨, 진일휘(27)씨, 띵 하이 옌(25·여)씨와 한양대 경영학과 석사과정의 원추프엉(26·여)씨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목표가 뚜렷하고 근면한 한국인의 조직문화가 인상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하노이대 한국어과를 졸업하고, 국민대 경영대학원 기업경영과 3학기에 재학 중인 띵 하이 옌씨는 “베트남에 돌아가면 한국에서 습득한 경험과 MBA 과정을 공부하며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에 기여하는 고급 인력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잃어버린 왕족의 후예’ 이상준 사장은 지금 제2의 도약을 꿈꾼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의 창출’은 기업 운영에서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원칙이다. 그는 ‘따뜻한 자본주의’를 해외에 전파하고자 한다. 국내에서 성공한 비즈니스 모델을 바탕으로 베트남뿐 아니라 중국, 동남아시아 등 한국 산업자본이 진출한 여러 나라로 뻗어나갈 예정이다. 현지에서 무역결제업무 등 상업은행의 기능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해외에 있는 한국 산업자본의 인수합병을 주선하고, 투자 유치를 지원하는 투자은행으로 그 영역을 넓혀갈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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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더골드 www.thegoldnews.co.kr 원문보기 글쓴이: 더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