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천년 왕국 속으로
작년 (2006) 가을에 2박 3일로 경주를 방문한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아쉬움이 있어서, 신라 관련 책들을 읽어보았다. 알 수 없는 그리움이랄까, 신비스러움이랄까 하는 것이 나의 가슴을 채워왔다. 다시 한 번 더 방문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천년 전에 망한 천년 역사의 이 왕국, 도대체 어떤 나라였을까...지금 남아 있는 유물로나마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
이번에는 4박 5일로 좀 넉넉하게 시간을 잡았다. 이만하면 보고싶은 것은 빼놓지 않고 다 볼 수 있으려니 생각했다.
2월 3일 오후 1시에 도착하여, 곧바로 답사에 들어갔다. 첫날은 주로 남산의 동북쪽에 위치한 탑골과 부처곡을 답사하였다. 지난 가을에 이은 재탐방이다.
1 탑골 감실부처(보물)...영묘사에서 발견된 신라 여인의 모습으로 신라인의 얼굴이 오늘날에 전해지는 유일한 것이다. 일부 학자는 선덕여왕의 얼굴이라고도 한다.
2 탑골 부처바위(보몰)..황룡사 9층석탐의 모습이 거대한 바위면에 조각되어 있다. 황룡사의 모습을 모형으로나마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3 보리사 석불좌상(보물)...경주남산에서 가장 완벽하게 그 자태를 간직하고 있으며 내가 본 석불 중에서는 가장 그 모습이 인자하고 명상적이다. 석불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에서 평화와 자비의 감정이 솟구친다.
2월 4일, 주로 남산 서쪽 삼릉골의 석불들을 찾아보았다.
1, 삼불사
2, 삼릉골 입석삼불(보물)... 시시각각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고 한다. 지금은 보호각이 씌어져 있어서 그 신비로움을 볼 수 없었다.
3, 망원사
4, 상선암 마애 석불조상...삼릉골 거의 정상부분의 거대한 바위에 조각된 조상으로 그 신비스러움과 엄숙함이 가히 놀랄만했다. 신라인들의 천재성을 절실히 느끼게 했다.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얼얼하게 내 뇌리에 남아 있다. 신라인들은 어떻게 저런 부처의 모습을 상상해 내서 저 높은 산의 바위 위에 조각할 수 있었을까.(경북 유형문화재)
5, 삼릉골 마애선각 육존불상(경북유형문화재)
6, 삼릉골 마애 관음 보살상(지방 유형문화재)
7, 삼릉골 목없는 석불 보살상
8, 삼릉(8대 아달라왕,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무덤으로, 주로 박씨 계열 왕들의 무덤이다.)
9, 오릉(1대 혁거세, 부인 알영부인,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무덤이다)
10,무렬왕릉(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보고 처음 다시 보았다.)...29대 무열왕으루 부터 36대 효공왕 때까지 8 대 13 여년간이 무열왕 계열의 집권기이다. 그후부터 무열왕 계도 족강되어 진골로 되고 이윽고 6두품으로 강하된다. 37대 신무왕이 무열 계에게 양위하려 하였으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하고 신무왕을 옹립한 상대등 김경신에게 반격을 받았다. 김경신이 즉위하니 그가 신라 38대 원성왕이다. 신라의 세로운 위계질서가 잡힌 것이다. 무열왕과 김유신 계열이 사라지고, 원성왕 계열로 나라가 다스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성계도 인겸 계와 예영계로 갈라지고, 예영계가 다시 제륭계와 균정계로 갈라져 죽고 죽이는 처참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진다. 이들은 실권파들은 자신들의 파벌을 강화하기 위해 무열계와 유신 계 그리고 박혁거세 계열을 이용하는 경우는 있어도 이들은 이미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후였다.
11,김유신 묘(유신은 자신 흥무대왕으로까지 추존되었으나, 통일신라 기 이후 후손들은 절대왕권의 확립을 위한 비 왕족의 숙청작업으로 결국 진골의 신분을 지키지 못하고 6두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2, 양동마을(회재 이언적의 고가,보물)...차를 대절하였다.
13,관가정(이조판서를 지낸 손중돈의 고가,보물)
14, 이언걸의 고가(겅상감사를 지낸 이언적이 이조판서가 되어 경주를 떠나면서 노모를 모시는 동생 언걸에게 지어준 고가)
15 향단(전형적인 경상도 양반가, 보물)
2월 5일은 경주의 교외 동부동해안 연안을 답사했다. 거리가 멀어 할 수 없이 차를 대절하여 돌았다.
1, 괘릉(원성왕의 능으로, 경주 왕릉 중에서 가장 예술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그러나 찾아오는 관광객이 적어 무료입장으로 방치되고 있어서 안타까웠다.)
2, 감은사 삼층 쌍 석탑(국보)...그렇게도 가보고 싶었던 감은사터, 상상보다는 훨씬 좁았다. 그러나 두 삼층탑의 위용은 대단했다.
3, 문무왕 수중 묘
4, 이견대
5, 기림사( 불국사가 원래는 기림사의 말사였을 정도로 거찰이다. 두 개의 보물이 있다.)
6, 골굴사 마애석불(그 장엄한 모습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 너무나 신비스럽고 장엄하다.)
7,백율사(이차돈의 원찰)
8,굴불사(부처바위가 인상적이다.보물)
9,흥륜사 (진흥왕이 창건한 고찰이지만 너무나 퇴락하여 실망하였다. 옛 모습이 전혀 없었다.)
10, 분황사, 황룡사(어둠이 찾아와 유지의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없었다.
2월 6일...남산 동남 쪽을 마지막으로 답사하였다. 너무나 험한 코스라 몇번이나 주저하였으나 큰 마음으로 결행하였다. 이제 가면 또 언제 올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결행하기로 하였다. 며칠간의 강행군으로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으나 물러설 수 없었다. 다만 동행한 가족은 등반이 어려워 혼자 하였다.
1,서출지
2,남산동 3층 석탑(보물)
3,남산 7불암 마애석불(보물)...너무나 고귀하고 신비스러운 신라인들의 체취를 풍기는 석불 일곱분이 거대한 두 개의 바위에 조각되어 있다. 남산 남동면 아주 높은 바위에 조각되어 있다. 고생 고생하여 찾아간 산 정상의 거대한 바위에 조각되어 있다. 그 신비스러움은 가히 이승의 것이 아니 것 같다.
4, 남산 신선암 마애 석조 보살상(보물)...7불암 바로 위에 위치한 참으로 아득하고 속세가 아닌 불교세계의 마애보살상이다. 나도 나 자신도 모르게 오래 오래 이 보살상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다. 나는 물론 불자가 아니다. 이 바위까지 올라 가는데 너무나 힘이 들어 온 몸이 땀으로 젖은 탓이었을까.
5, 경주박물관...지난 가을에 한 차례 둘러 보았으나, 서적의 지식으로 정돈된 안목으로 다시금 훑어 보았다. 정원의 한 귀퉁이에 서 있는 수몰된 고선사 삼층석탑(국보)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이 눈길을 끌었다.
경주박물관은 크게 세 부분으로 갈라져 있다. 본관은 신라관이고, 북쪽의 안압지관은,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신라의 유물들은 대부분 무덤이나 절간에서 수집되었지만, 그래서 뭔가 일상인 신라인들의 삶의 모습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었지만, 안압지 유물은 안압지 주변의 궁궐들이 무너지면서 그대로 안압지 연못 속으로 쓸려들어간 후 매몰되었기 때문에 당시 궁정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남쪽의 것은 황룡사관과 조각실이 있다.
2월 7일은 마지막 날이다.
1,석굴암...하산 할 때 뻐스길을 택하지 않고, 옛 신라인들이 사용하던 도보길을 선택하여 하산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본존불의 장엄함은 대단했다. 역시 석굴암이었다.
2, 불국사...서적에서 얻은 지식으로 불국사를 좀 더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남산 마애석불들을 죽 봐온 탓이었을까, 백운교와 청운교 자하문, 연화교 칠보교 안양문과 대웅전 청동여래좌상(국보)과 다보탑(국보)과 석가탑(국보)을 제외한다면 웬지 맥이
빠졌다. 신라시대의 건물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일까.
3,분황사...선덕여왕의 원찰로서, 삼층 전탑이 남아 있어서 충격적이었다.
4,황룡사 유지...허허 벌판을 걸으면서 초석과 본금당, 서금당, 동금당의 초석을 보았다. 세월의 무상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신라유물의 터였다. 그들은 그리고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번 4박 5일의 경주 체류는 단 일분도 허비하지 않고 신라인들과의 만남을 위해 전력투구한 시간이었다. 신라라는 나라는 천여 년 전에 망했지만, 어쩐지 내가 그 나라 속으로 조금은 들어가본 듯한 느낌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골굴사의 마애석불과 남산 7불암 마애 보살상과 삼릉계곡 마애석불조상이다. 하늘처럼 높은 산의 정상에 정교하게 조각되어진 그 석불들의 모습에서 나는 없어진 왕국의 백성들을 보았다. 그들은 저 석불조상을 보고 기도함으로써 나라와 임금을 사랑하고 죽은 후의 윤회를 통한 영원한 삶을 기구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윤회의 결과, 나같은 사람도 이 세상에 태어나 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조성한 김대성도,홀어머니를 모시고 산 아주 가난한 농부였다.유일한 생계수단인 밭 한 뙤기를 분황사에 보시하고서는 가난에 몰려 죽은 후에 제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 윤회 전의 노모를 위해 석굴암을, 윤회 후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지었다고 하지 않나.
신라에 대해 갈증을 어느 정도 푼 것 같지만, 알면 알수록 더욱 더 빠져들어가는 것이 경주인 것같다. 다시 한번 갈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도그 찬란하고 엄숙하며 고고하고 신비스러운 마애석불조상군들의 모습이 가슴과 내 영혼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것만 같다.
경주남산에는 12개의 보물이 있고, 9개의 지방유형문화재가 있다. 숫자로 보아 거의 훑어 본 것만 같다. 그러나 그 내용을 어느 정도 심도 있게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불자가 아닌 내가 이해 했으면 얼마나 이해했겠는가.
4박 5일간, 이상 38점의 주로 불교 유물을 통해 신라인들의 숨결을 접해 보았다. 신라라는 나라가 워낙이 불교를 통해 존재했던 나라인지라 불교유물을 통해서만이 그들을 만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매일 아침 일찍 출발하여 언제나 해가 져서 녹초가 되어 숙소로 돌아왔다. 그 동안의 답사를 가능하게 한 것을 보면 나는 아직은 조금은 건강한 모양이다. 부끄럽지만 자위해 본다. 동행한 가족은 열심히 밥을 해주고 도시락을 챙겨주었다. 지난 가을의 경험으로 남산을 탐방할 때는 적당한 식당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부르짖음이 나의 발걸음을 바쁘게 했다. 해가 바뀌고 한달이 흘렀지만 나는 과연 무엇을 하였는가. 뜻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부르짖음이 나의 목줄기를 조여왔다.
입고 간 옷이 걸레가 되었다. 산과 바위 위를 기고 딩굴었기 때문이다.등산 실력이 좋지 않은 나는 삼릉계곡과 남산동 계곡을 오를 때는 마애조상 앞 난코스에서는 그냥 기어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너무나 난 코스였기 때문이었다.
파 김치가 되어 서울 아파트로 돌아왔으나, 가슴을 채우고 있는 그 마애조상석불들의 모습이 너무나 찬란하여 어딘가 홀린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