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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5강
최소한도 이 차원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근기가 안맞는 사람에게 “참회하지 마라” 그렇게 권해놓으면 나만 죽일 놈 되는 거니까
도에 장애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불필사량이니 思量怖畏(사량포외)하면 卽障道矣(즉장도의)리라
도의 차원에서는 그런 것입니다. <서장> 어차피 공부했을 바에는 이걸 달리 해석해서는 안되는 거죠.
但於諸佛前(단어제불전)에 發大誓願(발대서원)호대 願此心(원차심)이 堅固(견고)하야 永不退失(영불퇴실)하고 仗諸佛加被(장제불가피)하야 一言之下(일언지하)에 頓亡生死(돈망생사)하고
그 다음에 서원 세우라고 하는 이야기, 다만 모든 부처님 전에 發大誓願(발대서원)호대, 큰 서원을 발하되 원컨대 이 마음이 견고해서 영원히 퇴실하지 않고
諸佛加被(제불가피)를, 모든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서 의지해서 또 선지식을 만나고 그리고 선지식을 만나서 일언지하에 頓亡生死(돈망생사)라, 한 마디 말 척 던지는데 저 앞에 대혜스님도 있었고 과거에 깨달은 이들이 바로 그런 말씀 한 마디에 그 부풀었던 의심 덩어리가 터져 버리는 거죠. 그건 부풀지 않으면 팔만대장경을 다 쏟아부어도 안터지고, 잘 부풀어 있으면 “중이 죽어서 소가 되어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면 괜찮단다!” 하는 이 소리에도 터질 수가 있고, 눈 길 가다가 터질 수도 있고, 울력 하다가 돌이 뚜루루~ 굴러 가서 대나무에 툭- 부딪히는 소리에 터질 수도 있고, 영물도하- 영물스님같이 봄에 복숭아 꽃이 척~ 피어 있는 모습을 맨날 보는 거지만 새삼 이렇게 쳐다보는 그 순간에 툭 터지기도 하고, 공부가 깊이 돼서 부풀어만 있으면 뭐~ . 그러니까 부풀어만 있으면 그 옷만 슬쩍 스쳐서도 툭 터지잖아요. 요는 공부가 그렇게 부풀어 오를 정도로 공부를 해야지, 덮어놓고 좋은 구절 쏟아 붓고 한다고 해서 그게 터지는게 아니라구요. 그래 대개 보면 그것이 좋은 조건이 되니까 일언지하에 법어라는게 一言之下(일언지하)에 頓亡生死(돈망생사)라, 몰록 生死를 다 없애버리고
悟證無上正等菩提(오증무상정등보리)하야 續佛慧命(속불혜명)하야 以報諸佛莫大之恩(이보제불막대지은)하야지이다하라
悟證無上正等菩提(오증무상정등보리)라, 正等菩提(무상정등보리) 최상의 정등보리 바르고 평등한 보리를 깨달아 정득해
續佛慧命(속불혜명), 부처님의 지혜의 생명을 이어가고
그래서 以報諸佛莫大之恩(이보제불막대지은), 부처님의 막대한 은혜를 갚아지이다 라고 이렇게 원력을 세워라.
<참선하는 사람도 이런 서원을 세우는 것은 잊지 말라>고 처음 편지를 서로 주고 받으면서 아주 중요한 사항들을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若如此則久久(약여차즉구구)하면 無有不悟之理(무유불오지리)하리라
若如此則久久(약여차즉구구)하면, 만약 이와 같이 오래오래 할 것 같으면
無有不悟之理(무유불오지리)하리라, 깨닫지 못할 이치가 없어.
여기까지 가르친게 간단하지만 이렇게만 해나간다면 못깨달을 사람이 없다 이거야. 인생사, 세상사 허망한 줄 알고 다시는 거기에 연연해 하거나 미련 갖지 말고, 또 과거에 살아온 어떤 일이든지 과거에 대해서 생각할 것도 없고 두려워 할 것도 없고, 뭐 잘 살았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오직 그저 화두 하나 집중해서 참구하면 그러면 깨달음은 문제가 없다 이거야.
그 다음에 선재동자 이야기, 화엄경의 선재동자 이야기인데
이건 상당히 저거해요. 그렇지만 죽~ 내가 간단하게 그냥 긴 설명 안하고 넘어 갈테니까, 요 내용은 <一念眞實> 여기 써놓았죠? 일념진실을 중요시여기는 그런 대목입니다.
不見(불견)가 善財童子(선재동자)- 從文殊發心(종문수발심)하야 漸次南行(점차남행)호대 過一百一十城(과일백일십성)하야 參五十三善知識(참오십삼선지식)하고 末後於彌勒一彈指頃(말후어미륵일탄지경)에
보지 못했는가? 선재 동자가 문수로 조차 발심해서- 중이 되었다면 최소한도 화엄경 한 번은 읽어야지. 화엄경, 천하의 그 좋은 화엄경을, 화엄경에 다 있는 이야기죠.- 문수로부터 발심해서 漸次南行(점차남행)호대 일백일십성을 지나서 53선지식을 참례하고 末後(말후)에 미륵 보살을 만났죠.
末後에 彌勒一彈指頃(미륵일탄지경)을 손가락을 이렇게 튕기는 거죠.이렇게 탁-! 이렇게 하는 겁니다. 전번에 한번 가르쳐 드렸나? 일탄지경에
頓亡前來諸善知識(돈망전래제선지식)의 所得法門(소득법문)하고 復衣彌勒敎(부의미륵교)하야 思欲奉覲文殊(사욕봉근문수)한대
頓亡前來諸善知識(돈망전래제선지식)의 所得法門(소득법문)이라, 앞에서 많은 선지식을 친견하고 거기서 얻은 법문을 다 잊어버렸다 이거야. 돈망- 한꺼번에 다 잊어버렸다. 그래 다 잊어버렸으니까 어떡해.
그러니까 復衣彌勒敎(부의미륵교)하야, 다시 미륵 보살이 그 사실을 알고는 “아, 네가 처음에 누굴 만났지?” “문수보살을 만났습니다” “그래? 그럼 문수보살에게 가서 다시 밟아 와. 53명을.” 이렇게 했다구요. 이러니까 이 착한 선재 동자는 꾀 피우는 생각도 없고, 후회하는 생각도 없고, 원망하는 생각도 없고, “예, 가겠습니다” 하고 또 문수보살, 처음부터 다 잊어버렸으니까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다시 지금까지 수십 명 밟아온 그 길을 다시 가려고 돌아 서는 거죠.
思欲奉覲文殊(사욕봉근문수)라, 문수를 받들어서 친견하려고 하는데
於是(어시)에 文殊(문수)_遙伸右手(요신우수)하고 過一百一十由旬(과일백일십유순)하야 按善財頂曰(안선재정왈) 善哉善哉(선재선재)라 善男子(선남자)야 若離信根(약리신근)이런들 心劣憂悔(심열우회)하야 功行(공행)이 不具(불구)하고 退失精勤(퇴실정근)하야
그 때 문수가 그 사실을 알고 遙伸右手(요신우수)하야,
멀리 오른쪽 손을 펴서 過一百一十由旬(과일백일십유순)이라, 일 유순이 14.4km이예요. 일백일십유순이야, 그럼 얼마야? -을 뻗어서 선재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善哉善哉(선재선재)라 善男子(선남자)야” 若離信根(약리신근) 참 기특하잖아요? 얼마나 기특합니까? 그런 마음을 낸다는게. 불굴의 의지라는게 바로 그런 거죠. 만약에 믿음을 갖지 않았던들 떠났든들
心劣憂悔(심열우회)하야, 마음이 용렬하고 근심하고 후회해서
功行(공행)이 不具(불구), 그리되면 또 닦은 행이 온전치 못하죠. 온전치 못해서 退失精勤(퇴실정근)이라, 정근에서 퇴실해서
於一善根(어일선근)에 心生住着(심생주착)하며 於少功德(어소공덕)에 便以爲足(갱이위족)하야 不能善巧(불능선교)로 發起行願(발기행원)하며
한 선근에, 一善根(일선근)에 心生住着(심생주착)이라, 아~ 내가 53명 비록 잊어버렸지만 법문 다 잊어버렸지만 “그 친견한 공덕이야 있겠지!” 하고 그런 생각을 할거란 말이야.
一善根(일선근)에 心生住着(심생주착),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
於少功德(어소공덕)에, 작은 공덕에
便以爲足(편이위족)이라, 곧 만족함을 삼아서
不能善巧(불능선교)로 發起行願(발기행원)하며, 능히 선교, 선교 방편 아주 익숙하고 능숙하고 좋은 방편으로서 행원을 행과 원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不爲善知識之所攝護(불위선지식지소섭호)하며 乃至不能了知如是法性(내지불능료지여시법성)과 如是理趣(여시이취)와 如是法門(여시법문)과 如是所行(여시소행)과 如是境界(여시경계)하리며
또 不爲善知識之所攝護(불위선지식지소섭호)하며, 선지식이 포섭하고 보호해 주는 것도 받지를 못할 것이고
내지 불능, 능히 요지하지 못할 것이다. 깨달아 알지 못할 것이다. 무엇을? 如是法性(여시법성)과 진리의 성품, 또 이와 같은 이치와, 如是法門(여시법문)과 그 53선지식을 親近(친근)하면서 얻어온 모든 것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와 같은 所行과 이와 같은 境界 이런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若周徧知(약주변지)와 若種種知(약종종지)와 若盡源底(약진원저)와 若解了(약해료)와 若趣入(약취입)과 若解說(약해설)과 若分別(약분별)과 若證知(약증지)와 若獲得(약획득)을 皆悉不能(개실불능)일러니라
그리고 周徧知(주변지)-두루두루 아는 것,
種種知(종종지)-가지가지를 아는 것,
若盡源底(약진원저)-철저히 끝까지 아는 것,
든지- 若 자는 그런 뜻이예요 ~든지.
또 解了(해료)-밝게 아는 것이라든지,
趣入(취입)-또 그 속에 푸욱 깊이 체험하는 것, 들어가서 체험하는 거라든지
解說(해설)-설명을 잘 하는 거라든지,
分別(분별)하는 거라든지,
證知(증지)-증득해서 아는 것,
獲得(획득) 이런 것을 悉不能(실불능)이라- 능히 다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 못했을 것이다.
文殊(문수)_如是宣示善財(여시선시선재)하신대 善財(선재)_於言下(어언하)에 成就阿僧기法門(성취아승기법문)하야 具足無量大智光明(구족무량대지광명)하며
文殊(문수)가 如是宣示善財(여시선시선재)하신대 善財(선재)가於言下(어언하)에, 문수가 참 기특해서 거기서 법문을 이런 것을 일러주고 나니까
善財(선재)가 於言下(어언하)에 成就阿僧기法門(성취아승기법문)이라, 아승기법문을 그 순간에 다 성취하는거야. 잃어버렸던 몇천배의 법문을 거기서 성취하게 된다. 그런 말이죠.
具足無量大智光明(구족무량대지광명)하며, 그래서 無量大智光明(무량대지광명)을 구족했어.
入普賢門(입보현문)하야 於一念中(어일념중)에 悉見三千大千世界微塵數諸善知識(실견삼천대천세계미진수제선지식)하고 悉皆親近(실개친근)하며 恭敬承事(공경승사)하고 受行其敎(수행기교)하야 得不忘念智莊嚴藏解脫(득불망념지장엄장해탈)하며
보현의 문에 들어가서 한 순간에 悉見三千大千世界微塵數諸善知識(실견삼천대천세계미진수제선지식)을 모두 다 봤어. 그 동안은 53선지식만 봤는데 미륵보살이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그 사이에 다 잊어버리고 다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는 그 성심성의에, 그 일념진실에, 일념진실이죠 53선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삼천대천세계미진수제선지식, 삼천대천세계미진수 할 때 어떻게 계산을 하는가 하면요, 삼천대천세계를 부숴가지고 작은 먼지를 만들었을 때, 티끌이라고 번역하면 틀려요. 이 미진 할 때 자꾸 티끌, 티끌, 티끌...수 라고 하는데 티끌이 아니예요. 먼지지. 먼지하고 티끌하고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데. 티끌은 큰 거예요. 눈에 보이는 육안으로 보이는 것을 티끌이라 그러고, 먼지는 육안으로 안보이는 거예요. 티끌이라고 번역하지 마세요. 번역 잘못된 거예요. 먼지. 그것도 작은 먼지. 삼천대천세계를 지구라고 합시다. 이 지구를 갈아가지고 아주 작은 먼지로 만들었을 때 그 먼지의 숫자와 같은 선지식이라는 말입니다. 삼천대천세계미진이라고 하면. 그와 같은 숫자의 선지식을 다 친견해서 悉皆親近(실개친근), 친히 가까이 친견, 친근 다 뜻이 같습니다.
恭敬承事(공경승사), 공경하고 승사하고. 이 선지식을 친견하는데 네 가지가 선행되어야 돼요. 첫째, 공경, 공양 그 다음 존중, 찬탄이야. 여기는 생략이 되었는데 이 네 가지가 따라야 돼요. 누굴 좋아한다 존경한다 선지식이다 부처님이다 이럴 때 공경, 공양, 존중, 찬탄 이 네 가지가 갖춰져야 그것이 제대로 선지식을 위하는 길이 된다라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恭敬承事(공경승사)하고, 받들어 섬기고
受行其敎(수행기교)하라, 그 가르침을 받아 행해서
得不忘念智莊嚴藏解脫(득불망념지장엄장해탈)하며, 불망념지 잊어버리지 않는, 잘 기억하는 사람을 佛家에서는 흔히 “不忘念智를 얻었다” 그래요. 잊어버리지 않는 그런 지혜의 장엄장해탈을 얻어서
以至入普賢毛孔刹(이지입보현모공찰)하야 於一毛孔(어일모공)에 行一步(행일보)호대 過不可說不可說佛刹微塵數世界(과불가설불가설불찰미진수세계)하야
普賢(보현)의 毛孔刹(모공찰)에 들어가서 一毛孔(일모공)에 一步(일보)를 행하되 不可說不可說佛刹微塵數世界(불가설불가설불찰미진수세계)를 지나서
與普賢等(여보현등)하고 諸佛等(제불등)하며 及解脫自在悉皆同等(급해탈자재실개동등)하고 無二無別(무이무별)하니
보현으로 더불어 동등하고, 모든 부처님과 동등하고, 그 선재동자의 세계도 똑 같고, 선재동자의 行도 그들과 똑같아서 행등 찰등 그 해탈과 자재가 悉皆同等(실개동등)이라, 전부 깨달은 부처님과 전부 똑같이 되버렸다. 그래서 無二無別(무이무별)이라 둘도 없고 다름도 없어.
當恁麽時(당임마시)하야 時能回三毒(시능회삼독)하야 爲三聚 淨戒(위삼취정계)하며 回六識(회육식)하야 爲六神通(위육신통)하며 回煩惱(회번뇌)하야 爲菩提(위보리)하며 回無明(회무명)하야 爲大智(위대지)하라니
當恁麽時(당임마시)하야, 이러한 때를 당해서
時能回三毒(시능회삼독)하야, 비로소 능히 삼독을 돌이켜서
三聚淨戒(삼취정계)를 삼고,
또 六識(육식)을 돌이켜서 六神通(육신통)을 삼고 육신통이 돼.
煩惱(번뇌)를 돌이켜서 菩提(보리)가 돼.
三聚淨戒(삼취정계)하고 三毒(삼독)하고 둘이 아니예요. 육식과 육신통이 둘이 아니고, 煩惱와 菩提도 둘이 아니고, 無明과 大智도 둘이 아냐.
回無明(회무명)하야 爲大智(위대지)하리라.
如上遮一絡索(여상자일락색)은 只在當人(지재당인)의 末後一念眞實而已(말후일념진실이이)라
如上遮一絡索(여상자일락색)은, 위와 같은 한꾸러미 이하의 한 줄기 한꾸러미 선재동자의 이야기는 뭐냐? 只在當人(지재당인)의 末後一念眞實(말후일념진실), 내가 여기에 표시했죠?
이 이야기는 당사자, 다만 當人의 최후까지 진실한 것, 최후까지 공부에 진실한 생각 진실한 그것을 따름이다. 而已(이이)라, 一念眞實而已(일념진실이이)라, 요게 ‘말이을 而 자’ 하고 ‘말 이 자’ 여기에 하나 더 붙이면 익 자 까지 붙이면 아주 완전 확인 사살이 되어버려요. 저번에 한 번 말씀드렸나?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만나니까, 양나라 혜왕이 있다가 “노인이 천리를 멀다 않고 이렇게 오셨는데 우리나라에 무슨 이익을 주려 하십니까?” 그러니까 “역장 이익이 웃고있다” 그러니까 하필 而已(이이)릿고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역유인의이익이리다” 그럴 때 仁과 義가 있을 뿐이다. 나에게는 이익 말하지 말라 왜 왕들은 걸핏하면 이익 이를 말하는가?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하필왈 이이릿고?” 역유-인-의-이익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다 허사예요. 근데 이게 다 하나하나 그냥 놓여진게 아니라 인과 의를 아주 강조하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도 일념진실을 이 두 글자가 들어가가지고 일념진실이 너무너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그런 뜻이 있어요. 그러니까 왜 이익만 이야기하느냐? 나는 어디 가도 인과 의를 주창한다. 나는 오직 인과 의만 선전하고 다니지 그 외 나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에 그 형식을 그대로 가져 왔어요. 이런 글자도 천하의 대혜 스님께서 글자 한 자 헛놓은게 아니죠. 그래서 그런걸 좀 우리가 이해해주는 것도 후손들의 의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善財(선재)_於彌勒彈指之間(어미륵탄지지간)에 尙能頓亡諸善知識(상능돈망제선지식)의 所證三昧(소증삼매)온 況無始虛僞惡業習氣耶(황무시허위악업습기야)아따녀
善財(선재)가 於彌勒彈指之間(어미륵탄지지간)에, 미륵이 손가락 튕기는 그 사이에
尙能頓亡諸善知識(상능돈망제선지식)의 所證三昧(소증삼매)온, 오히려 능히 앞의 모든 53선지식에게서 증득한 바 얻은 삼매를 돈망- 다 잊어버렸다. 그런데 況無始虛僞惡業習氣耶(황무시허위악업습기야)료, 아따녀 무슨 뜻인지 아따녀라고 이렇게 옛날 ??스님이 달아났단 말이여. -료, -라료. 하물며 無始-시작없는 예부터 허망하고 허망한 악업습기가 있을 수 있겠는가? 아~ 좋은 것도 다 없어져버렸는데 악업습기가 붙어있을 까닭이 있느냐 이 말이여. 그러니까 선재동자가 다 법문 잊어버렸는데 따라서 악업습기까지도 다 일체 업까지도 일체 죄보까지도 싹 다 따라서 없어져 버렸다.
若以前所作底罪(약이전소작저죄)로 爲實則現今目前境界(위실즉현금목전경계)- 皆爲實有(개위실유)며
若以前所作底罪(약이전소작저죄)로, 만약에 당신처럼 과거에 살아오면서 과거하고 혼인하고 벼슬하면서 지은 그런 죄로서 爲實則(위실즉), 실재하는 것이라고 아까 존재의 허와 실 실다은 것이라고 실재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여긴다면
現今目前境界(현금목전경계)가 皆爲實有(개위실유)라, 지금 눈 앞에 있는 모든 경계가 다 실로 있는 것이 된다. 있는 것이 된다. 목전경계가 다 있는 것이 된다. 그러면 반야심경은 다 말짱 거짓말이 돼요.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전부 없다고 했는데 목전경계 이게 전부 목전경계 아니예요? 전부 실로 있는게 될거 아니냐 이거지.
乃至官職當貴恩愛(내지관직당귀은애)도 悉皆是實(실개시실)이리니 旣是實則地獄天堂(기시실즉지옥천당)도 亦實(역실)이며 煩惱無明(번뇌무명)도 亦實(역실)이며 作業者(작업자)도 亦實(역실)이며 受報者(수보자)도 亦實(역실)이며 所證底法門(소증저법문)도 亦實(역실)이라
그럼 부귀 내지 관직하고 부귀하고 은혜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 悉皆是實(실개시실)이다, 그것도 다 실재하는 것일 것이다.
旣是實則地獄天堂(기시실즉지옥천당)도 또한 실재하는 것이고,
煩惱無明(번뇌무명)도 역시 실재할 것이고,
作業者(작업자)도 亦實(역실)이고,
作業者(작업자)도 과보를 받는 사람도 또한 실재하는 것이고, 증득한바 법문도 뭐 실답게 하나씩 하나씩 좌악 앞에 진열하고 이렇게 될게 아니냐 이거지.
참 대혜스님의 견해와 논리가 아주 뛰어나요. 목전경계가 전부 있는게 된다. 과거 지은 업도 <천수경> 수준만 해도 이런 것 다 이해하죠.
우리 <천수경>에 뭐지? 罪無自性從心起(죄무자성종심기) 心若滅時罪亦亡(심약멸시죄역망) 罪亡心滅兩俱空(죄망심멸양구공) 是卽名爲眞懺悔(시즉명위진참회). 百劫積集罪(백겁적집죄) 一念頓蕩除(일념돈탕제)가 어떻게 가능하냐 이거야. 어째서 일념돈탕제가 되느냐? 罪無自性從心起(죄무자성종심기)이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거예요. 안그러면 一念頓蕩除(일념돈탕제)가 될 수가 없죠. 百劫積集罪(백겁적집죄)가. 如火焚枯草(여화분고초) 滅盡無有餘(멸진무유여), 우리가 얼마나 신바람나게 목탁 두드리면서 외웁니까? 그거. 그 대목 차~암 신난다구요. 罪無自性從心起(죄무자성종심기) 心若滅時罪亦亡(심약멸시죄역망) 그동안 내~ 기죽어 있다가 거기가면 신바람 나. 왜냐? 罪無自性從心起(죄무자성종심기)니까. 心若滅時罪亦亡(심약멸시죄역망)이야. 罪亡心滅兩俱空(죄망심멸양구공) 是卽名爲眞懺悔(시즉명위진참회)라 요 그대로 같은 맥락 아닙니까? 여기 대혜스님 법문하고 똑 같애. 깨달은 사람이 견해가 다르면 제대로 깨달은 사람이 아니죠. 똑 같잖아요. 목전경계가 실로 있는게 아니다 이거야.
<증도가>에 <유마경>에 있는 말이지만 <유마경> 주에 있던가 그렇지 사실은. 보흥인가 하고 누가 두 사람이 큰 죄를 지었는데 우바리 존자에게 갔다가 불통참회라 해서 다시 유마거사에게 갔죠. 유마 거사에게 가서 사실을 고백하니까, 그래 지금 그렇게 기가 죽어있는데 “기가 그렇게 죽을 정도로 지은 그 죄를 가져와 봐라” 그러니까 착한 수좌들이라 그렇게 죄를 찾는다고 자기 자신 목을 조이던 죄의식, 정말 하늘이 무너내려와서 자기 자신의 목을 조르는 듯한 그런 무거운 죄의식 때문에 정말 숨도 못쉬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걸 찾으라고 하니까 가져오라 하니까 당장에 찾을 것 같거든. 그냥 손에 잡힐 듯 했단 말이야. 안그렇겠어요? 살인을 했지, 강간을 했지 두 사람이 그랬거든. 그러니까 또 우바리 존자에게 가니까 “불통참회라 지옥이나 가지 달리 더 이상 너희들이 살 길이 없다” 이랬다고요.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그러면 유마거사에게 가보자 해서 유마거사에게 가서 그런 상황을 만나지 않습니까? “죄를 가져와 봐라.” 그렇게 네가 숨도 못 쉴 정도로 무거운 죄의식 속에서 사는데 그러면 쉽게 찾아올게 아니냐? 쉽게 나에게 내보일 수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 착한 수좌들이 야! 우리가 숨도 못 쉴 정도로 목을 조여오던 그 죄의식을 찾는거야. 그 순간 앉아가지고. 끙끙대고 찾는거지. 끙끙대고 찾는데 찾을 길이 없어요. 찾을 길이 없으니까 마지막에는 몇 시간 앉아서 끙끙대다가 나중에는 “아무리 찾으래야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 찾을 길이 없으면 참회를 마쳤느니라.” 참회 끝났어. 그래 그 순간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죠. 그러니까 <波離螢光 增罪結 바리형광 증죄결>이라고 우바리 존자의 반딧불 같은 그런 지혜는 죄의 매듭만 더 굳게 만들어서 사람 더 구렁텅이로 빠트려 넣는 일이고, <維摩大士頓除疑 還同赫日消霜雪 유마대사돈제의 환동혁일소상설>이라 유마대사가 한꺼번에 의심을 화~악 풀어줘버렸거든. 죄를 싹- 소멸해준거야. 유유혈혈이 소상절이라, 마치 작열하는 태양이 서리나 눈을 녹이는 것같이 그렇게 시원하게 됐다는 그런 아주, 그래서 영가스님은 만고에 아주 명작 선시를 그렇게 남겨서 그런 구절 때문에 더 <증도가>가 빛나죠.
그런 표현이 있듯이 여기 보십시오. 이게 우리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불교인은 불교 공부한다고 하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자기 확신이 있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 첫 편지에 이런 이야기를 쓴 이유가 바로 그런데 있어요. 상당히 우리가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입니다. 뭐 좋은 일도 마찬가지요, 악업뿐만 아니라 좋은 일도. 그래서 백겁적집죄가 일념에 돈탕제하고 여화분고초 멸진무유여가 되려면 그야말로 죄무자성종심기야. 죄무자성종심기가 안되면 그게 그렇게 될 수가 없어. 여기 보면 전부 같은 뜻으로 해석이 되어 있습니다.
實則現今目前境界(실즉현금목전경계)- 皆爲實有(개위실유)며,當貴恩愛(당귀은애)도 실이고, 地獄天堂(지옥천당)도 실이고, 煩惱無明(번뇌무명)도 실이고, 作業者(작업자)도 실이고, 受報者(수보자)도 실이고, 所證底法門(소증저법문)도 亦實(역실)이라
若作遮般見解則盡未來際(약작자반견해즉진미래제)히 便無有人(갱무유인)이 趣佛承矣(취불승의)리라
만약 이런 견해를 짓는다면 便無有人(갱무유인)이 趣佛承矣(취불승의)며 미래제가 다할 때까지 어떤 놈도 부처될 놈은 없을 것이다.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의 종중방편도 전부 거짓말이다. 첫째 반야심경부터 거짓말이다 이거야.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承(승)호니 公(공)이 發書時(발서시)에 焚香對諸聖(분향대제성)하고 及遙禮庵中而後(급요례암중이후)에 遺(유)이라하니
承(승)호니, 편지를 또 받으니
公(공)이 發書時(발서시)에, 편지를 보낼 때
焚香對諸聖(분향대제성)하고, 향을 편지를 다 써놓고 향을 사르고 부처님께 예배를 하고 그리고 또 멀리 대혜스님이 계시는 암자가 어느 방향이더라하고 그 쪽을 향해서 또 3배를 지극정성으로 한 뒤에 보냈다. 편지도 그렇게 썼거든요.
公(공)의 誠心至切(성심지절)이 如此(여차)라 相去雖不甚遠(상거수불심원)이나 未得面言(미득면언)일새
하니 公(공)의 誠心至切(성심지절)이 如此(여차)라, 그대의 성심- 정성스러운 마음 지극하고 간절한 것이 이와 같다.
相去雖不甚遠(상거수불심원)이나, 우리 서로 그렇게 멀리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未得面言(미득면언)일새, 얼굴 마주 보고 이렇게 우리가 이야기 해본적은 없다 이거야. 서로 본적은 한 번도 없다.
信意信手(신의신수)하야 不覺(불각)에 忉怛如許(도달여허)하노니 雖若繁絮(수약번서)나 亦出誠至之心(역출성지지심)이라
信意信手(신의신수)하야, 그렇지만 우리 믿는 마음과 믿는 손으로 몰란결에 나도 모르게 이렇게 이야기가 길어졌소.
忉怛如許(도달여허), 어지러히 이렇게 되었으니
雖若繁絮(수약번서)나, 비록 번서한 것 같애, 너무 말이 많은 것 같지만
亦出誠至之心(역출성지지심)이라, 이 또한 내가 그 성의가 지극한 데서 나온 그런 마음이다 이거여.
不敢以一言一字(불감이일언일자)로 相欺(상기)니 苟欺公則是(구기공즉시)는 自欺耳(자기이)니라
不敢以一言一字(불감이일언일자)로, 한 마디 한 글자로서 감히 서로 속이지 못한다 이거야. 글자 한 자 그냥 쓴 게 아니다 이거지.
苟欺公則(구기공즉), 진실로 내가 조금이라도 公을 속이는게 있다면
是는 自欺耳(자기이)니라, 그건 내 자신을 속이는 것이지 당신에게는 관계없다 사실은. 사실 그래요 누굴 속일 때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거죠. 그런 말이 있고 또 그 다음에
又記得(우기득)호니 善財(선재)_ 見最寂靜婆羅門(견최적정바라문)하고 得誠語解脫(득성어해탈)하야
又記得(우기득)호니, 선재동자 이야기가 난 김에 좀 더 하는거죠. 역시 이 至誠, 誠心 이 문제하고도 관계가 있어서 最寂靜婆羅門(최적정바라문)을 만났을 때 이야기입니다. 또 기득호니 선재가 최적정바라문을 만나고 誠語解脫(성어해탈)을 얻어서
過去現在未來諸佛菩薩(과거현재미래제불보살)이 於阿耨菩提(어아뇩보리)에 無已退(무이퇴)하며 無現退(무현퇴)하며 無當退(무당퇴)하야
過去現在未來諸佛菩薩(과거현재미래제불보살)의 阿耨菩提(아뇩보리)에 無已退(무이퇴), 이미 물러난 적도 없고, 현재 물러난 적도 없고, 앞으로 물러나지도 않는다. 無已退(무이퇴), 無現退(무현퇴), 無當退(무당퇴)야. 아뇩보리에, 최상의 깨달음에 있어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전혀 물러남이 없다. 이것도 깊은 뜻이 있는데 다 이야기할 겨를은 없고.
지금 이렇게 선지식 만나서 법문 듣는데 무이퇴라는 말이 해당이 안되잖아요? 과거에 물러남이 없다. 이런 모순이 어딨습니까? 세속적인 우리 상식으로는요 불교에는 말이 모순 투성이가 많아요. 모순 투성이. 그런데 이게 또 맞는 말이라.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앞에 “본지” 있었죠? 본지- 본래의 지위, 본 자리. 거기에는 역사가 없기 때문에 언제 발심하고부터, 또 어떤 선지식을 만나고부터 시작된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無已退(무이퇴)라는 말이 여기서 살아납니다. 이미 물러난 적도 없고, 현재는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거야.
凡有所求(범유소구)를 莫不成滿(막불성만)은 皆由誠至所及也(개유성지소급야)라
凡有所求(범유소구)를, 무릇 구한바 있는 것을
莫不成滿(막불성만)은, 성만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은
皆由誠至所及也(개유성지소급야)라, 다 정성의 지극한 데서 미친 바를 말미암은 것이다. 정성이 지극해서 그렇다.
公(공)이 旣與竹倚蒲團(기여죽의포단)으로 爲侶(위려)라하니 不異善財(불이선재)-見最寂靜婆羅門(견최적정바라문)이며
公(공)은 旣與竹倚蒲團(기여죽의포단)으로, 이미 죽의포단- 방석으로서 또는 좌복으로서 벗을 삼고 있다하니 不異- 다르지 않다. 선재가 最寂靜婆羅門(최적정바라문)을 친견한 것과 다르지 않다.
又發雲門書(우발운문서)할새 對諸聖(대제성)하야 遙禮而後(요례이후)에 遣(견)은 只要雲門(지요운문)으로 信許(신허)니
또 운문에게-대혜스님을 말하는 거죠- 운문에게 편지를 보낼 때 여러 성인을 대해서 멀리 예배를 드린 후에 보냈다 하는 것은, 다만 요컨대 중요한 것은 운문으로 하여금 믿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다.
此(차)는 誠至之劇也(성지지극야)라 但相廳(단상청)하라 只如此(지여차)히 做工夫將來(주공부장래)하면 於阿耨菩提(어아뇩보리)에 成滿無疑矣(성만무의의)리라
이것 역시 誠至之劇(성지지극)이라, 정성의 지극한 것 중에서도 특히 더 지극한 거다. 이보다 더 정성이 있을 수 없다 이거지.
但相廳(단상청)하라, 다만 들으시오.
只如此(지여차)히 做工夫將來(주공부장래)하면, 다만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간다면
阿耨菩提(아뇩보리)에, 최상의 깨달음에 있어서
成滿無疑矣(성만무의의)리라, 틀림없이 성공할거요.
이로써 만족한데 대해서 의문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첫댓글 _()()()_
只在當人의 末後一念眞實而已이라...당사자의 최후까지 공부에 진실한 생각, 진실한 그것을 따름이라...불퇴지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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悟證無上正等菩提하야 續佛慧命)하야 以報諸佛莫大之恩하야지이다하라...바르고 평등한 보리를 깨달아 정득해 부처님의 지혜의 생명을 이어가고 부처님의 막대한 은혜를 갚아지이다...라고 이렇게 원력을 세워라....불퇴지님, 고맙습니다. _()()()_
善財_於彌勒彈指之間에 尙能頓亡諸善知識의 所證三昧온 況無始虛僞惡業習氣耶아따녀 ... 선재가 미륵이 손가락 튕기는 그 사이에 오히려 능히 앞의 모든 53선지식에게서 증득한 바 얻은 삼매를 다 잊어버렸다. 그런데 하물며 시작 없는 예부터 허망하고 허망한 악업습기가 있을 수 있겠는가... 若以前所作底罪로 爲實則現今目前境界- 皆爲實有며 ... 만약에 당신처럼 과거에 살아오면서 과거하고 혼인하고 벼슬하면서 지은 그런 죄로서 실재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여긴다면, 지금 눈 앞에 있는 모든 경계가 다 실로 있는 것이 된다. ... 불퇴지님! 무더위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_()()()_
以報諸佛莫大之恩(이보제불막대지은)..... 부처님의 막대한 은혜를 갚아지이다.... _()()()_
최상의 깨달음에 있어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전혀 물러 남이 없다.......감사 합니다._()()()_
於阿?菩提(어아뇩보리)에 無已退(무이퇴)하며 無現退(무현퇴)하며 無當退(무당퇴)하야..._()()()_
_()()()_감사합니다.
諸佛前에 發大誓願호대' 願此心이 堅固하야 永不退失하고 仗諸佛加被하야 一言之下에 頓亡生死하고 悟證無上正等菩提하야 續佛慧命하야 以報諸佛莫大之恩하야지이다' 하라. 감사합니다.
^^ 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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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배 올립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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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一念眞實而已. 誠至之劇. 成滿無疑矣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