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애나 목사의 생애는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 여러 가지가 있다. 1958년 7월에 그의 양부되는 염재로 장로가 재건창원교회의 사택에서 86세의 일기로 소천하셨는데 사망신고를 하기 위하여 호적지인 마산시청을 찾아가서 그의 호적등본을 떼어보니 본적은 경남 마산시 중성동 10번지에 주소를 두고 있었고 염재로(廉在魯)의 양녀 애나(愛拿)로 되어 있었다.
그 당시 필자는 결혼을 해서 아내와 함께 두 어른을 모시고 교회 사택에서 함께 살고 있을 때여서 사망신고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의 출생에 관해서 틈이 있을 때마다 물어보았다. 그는 우리 부부에게 주민등록증과 인장을 보여 주셨다. 거기에는 본적이 경남 함양군 안의면으로 되어 있었으며 부 김용석(金龍石)과 모 박대악(朴大岳)에서 태어난 김달대(金達大)로 명기되어 있었으며 생년월일도 1910년 9월4일이었다. 그리고 평소에 사용하는 도장도 염애나가 아닌 김달대였다.
필자가 직접들은 그의 출생과 소녀시절의 이야기는 훨씬 후에 출간된 [韓國基督敎女性百年史(대한기독교출판사, 1985년, p.308)에 수록되어 있는 사실과는 약간 차이점이 없지는 않다. 출생시에 그의 부모는 독실한 장로교인이었던 같으며 6세시에 그의 어머니가 별세하여 부친이 재혼을 해야 할 처지에 이르자 거창 미선교부(居昌 美宣敎部)의 서영수 댁으로 보내져서 한 1년 가량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집에서도 무슨 연유가 있었는지 모르나 마산 미선교부의 매서인(賣書人)으로 종사하던 염재로 조사의 양녀로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 친아버지가 업고 마산에 와서 "이제는 여기가 네 집이고 저 분들이 네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돌아가셨는데 이것이 생부를 본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염조사는 경남의 각처를 다니면서 성경을 팔면서 전도하는 것이 직업이었기 때문에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교회는 마산 문창교회에 다녔었고, 집이 넓어서 어머니가 하숙을 쳤기 때문에 집에는 사람의 출입이 많았었다. 어머니는 배태도 못해본 분이었으나 너무나 자상하고 정이 많은 분이었다.
8세에 마산 의신학교에 들어가서 3학년 때에 박순천(朴順天) 선생을 만나게 되는데 이 때가 바로 1919년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던 해로 마산에서도 문창교회와 의신학교, 창신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만세 시위를 했고 박순천 선생은 어느 남정네보다도 더 용감하게 대열에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1960년대 대통령 선거 때나 국회의원 선거 때에 박순천 여사는 민주당의 최고위원으로 여러 번 창원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유세한 적이 있다. 연설을 들으시고 "3.1운동 때나 지금이나 그 기개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술회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염조사는 매서인을 그만 두고 창원군 진동교회의 전도사로 가게 되었을 때에는 염애나 소녀도 함께 이사해서 진동초등학교에 전학을 하게 되었다. 마산의 집을 처분하여 그곳에서 쌀가게를 차렸는데 아마도 전도사의 봉급으로 생활이 어려워서 부업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린 소녀의 기억으로는 장사가 너무 잘 되었다고 한다. 쌀을 사러오는 사람들이 장날이면 줄을 서다시피 했으나 3년이 못 가서 문을 닫게 되었는데 되질을 할 줄 몰라 가마니마다 손해가 나니 집을 팔아서 가져온 돈은 모두 바닥나 버리고 빈 손들고 진동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진동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하셨고, 김봉재(金奉才)라는 국회의원이 동창생이라는 말이 기억나서 작년도 11월에 필자가 직접 졸업자의 명부를 살펴보았으나 그의 이름을 찾을 길은 없었다.
여기에서 옮겨간 곳이 창원군 북면 월백교회이다. 먼 훗날 창원교회에 시무하고 월백에 살면서 창원시장까지 20리 길을 걸어 북면 고개를 넘어 다니면서 물건을 사서 날랐다는 고생담을 이야기하셨다. 월백리에서는 얼마동안 사셨는지, 또 왜 떠나게 되었는지는 듣지 못했다.
그 다음에 상당 세월을 살게된 곳이 김해군 진영읍 교회이다. 진영교회의 김영수는 천석군의 부자여서 진영군 철하의 땅을 주면서 그 땅을 개간해서 감나무를 심고 집은 무상으로 주면서 교회를 돌보라는 좋은 조건 때문에 옮긴 것으로 추측된다. 염조사 가족이 진영교회로 옮긴 것이 정확하게 몇 년도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의 진영교회의 당회장이었던 알렌(Allen) 목사였다는 것과 염애나 소녀가 약관 19세의 처녀로 진영교회의 집사가 되어 봉사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17세 경이 아니었나 짐작이 된다. 그들은 진영의 야산을 개간하여 단감나무를 심고 그 곳을 개간하면서 오래된 무덤에서 발굴했다는 빗살무늬의 토기(밥그릇 하나, 국그릇 하나, 숟가락)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일본 순사가 와서 세 개 중에 하나만 달라고 졸라서 숟가락을 주고 나머지는 6.25사변 후에 창원으로 이사와서 까지도 소지하고 있었으나 여러 번 옮겨다니는 북새통에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알렌 목사는 독신 선교사로 한국 학생들을 돕기 위하여 근검절약하는 분이었다. 진영교회에 순회차 오셔서 주무시는 것을 보면 걸레에 가까운 담요 조각을 여러 개 포개어 깔고 그 위에 담요 한 장을 씌우고 그것을 침대 삼아 주무셨다. 그러면서도 어려운 한국 학생들을 10여명이나 학비를 대어 공부를 시켰는데 그가 후일에 심장병으로 마산 제비산 선교사 사택에서 소천했을 때 도움을 받던 학생들이 와서 목놓아 통곡하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감격하여 울었다고 전한다.
염애나 소녀는 알렌 목사의 소개로 호주 선교부의 태매시 선교사를 알게 되었고, 그에게서 장학금을 받아 진주에 있는 성경학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 때에 경남노회장이던 최상림 목사와 최덕지 선생이 이 학원의 선생이었으니 그들의 신앙감화를 많이 받았다 할 것이다.
2. 형제 상봉과 교역의 출발
진주성경학교는 5학년 졸업이었는데 서부 경남 쪽의 학생들이 많았던 것 같다. 1년에 봄가을 두 학기를 공부하였는데 2학년이 되는 봄학기에 함양 안의에서 왔다는 부인 학생이 이런 말을 건넸다.
"염 선생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우리교회 백집사 부인과 너무 닮았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귀가 번쩍 뜨였다.
"그렇다면 가을 학기에 오면서 그 부인을 한번 데리고 오시오" 라는 부탁까지 하였다. 어렸을 때의 일들이 어렴풋이 떠올라 뭔가 자기의 출생의 관해서 알아보아야겠다는 호기심마저 들었던 것이다.
가을 학기에 진주에서 만난 부인은 바로 위의 언니였고 그 위에 오빠와 언니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어머니가 일찍 별세하셔서 자기가 업고 키웠으나 아버지가 새 장가를 가게 되어 부득이 양녀로 보내게 되었으며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오빠는 일본에 가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오빠에게서는 서신과 사진까지 왕래가 있었고 형제들도 간간이 진주에서 만나기도 했지만 이 사연을 양부모에게는 비밀로 했다. 이유는 자녀없이 자기만 의지하고 사시는 노부모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숨기려해도 비밀유지는 한계가 있었다. 책 속에 숨겨 두었던 오빠의 사진과 편지가 염조사에게 발각되어 야단벼락이 떨어졌다. 사실대로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는 만나거나 편지 왕래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아버지는 노를 푸셨다.
세월은 너무 빨리 흘러 졸업 년도가 되었다. 이 해에는 학생회장으로 피선되어 중요한 사안을 해결해 보고자 애쓰기도 했다. 당시의 장로교 여신학원은 평양에 있었는지라 영남 쪽의 부녀들은 멀리 평야까지 가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경남에도 여신학원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임상빈이 쓴 [기독교 여성들의 현재적 증언]에 의하면 이 운동에 호응을 얻어 순전히 학생들만의 기금으로 655원이 모금되었다고는 하나 그 뒷 이야기는 알 수가 없다.
26세에 성경학교를 졸업하여 마산 미순회(미국인 순회선교기관)에서 전도사로 최덕지, 이술연, 이복순, 박경애 등의 신앙선배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고 후에는 문창교회 전도부인 김영숙, 한상동 목사의 부인도 함께 일하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미순회 마산지구 산하의 함안군, 창원군, 김해군, 의령군 일대에 산재해 있는 83개 교회를 순회하면서
① 불신자에게는 복음을 전하고,
②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 교육시키고
③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을 모아 교육을 시켰다. 당시에는 학교에 못 가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각 교회에 임시학교를 만들어 일주일 내내 한글과 수학, 노래들을 가르쳤고, 여름에는 여름성경학교를 도맡아 봉사했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이 분들이 돌보던 지역에 많은 재건교회가 섰고, 그 때의 어린 주일학교 학생들이 성장해서 장로가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헌신 봉사하고 있다.
1년 동안 미순회에서 염애나 전도사는 평양의 여신학원에 입학하게 된다. 경남에서 올라간 학생은 몇 사람되지 않았고, 말씨나 생활습관이 다른 이북학생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한 학기를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사용해도 몇 마디의 인사도 교환하기 어려웠다고 회고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객지에서 외로운 중에서도 위안이 되는 것은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는 산정현 교회에 나가서 주일예배에 참석하여 은혜받는 일이었다. 주목사는 마산 문창교회에 시무할 때부터 아는 분이었고, 오정모 사모는 의신학교 선생이었는지라 안면이 두터운 사이였다. 두고 떠난 노부모님들의 걱정도 되었고, 또 돌보던 교회의 어린이들의 모습도 그리웠으나 한 학기의 성경공부는 그가 일생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를 궁금하게 하는 것은 왜 그가 결혼을 포기했느냐 하는 점이다. 임상빈에게 그가 진술한 바에 의하면
"20세가 되었을 때 나는 결혼하지 않고 주의 일을 하는데 바치기로 결심했다. 이유는 결혼을 하게 되면 양부모를 돌보아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 아버지는 진영교회를 사면하고 아무런 소득없이 내가 미순회에서 받아오는 봉급만 바라고 계셨는데 내가 시집가면 누가 그 분을 봉양하겠는가? 어린 나를 데려와서 키워 주셨는데 그 은혜를 도저히 져버릴 수가 없었다. 다른 이유는 그 당시만 해도 연애결혼이란 생각도 못할 일이었고, 더러 교인들을 통해서 중신이 들어왔으나 부모들은 서둘러 성사시키려 들지 않고 차단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정을 들여 키운 딸을 내주기가 섭섭해서 그랬겠지"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급박하게 몰아치는 교회의 핍박이 있었기에 영원히 그 기회를 앗아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3. 신앙 박해와 신사불참배 운동
당시의 한국기독교의 상황은 일제가 1932년 평양에서 만주사변 전몰장병 위령제인 춘기황령제에 각종학교 참여를 요구한데서부터 한국교회에 대한 박해를 시작했다.
제 2단계로는 신사참배를 각 기독교 학교에게 강요했고, 제 3단계로는 각 교회에까지 강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염애나 전도사는 여신학원의 1년 봄 학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미순회 일을 하다가 가을 학기에 다시 평양에 올라갈 참이었는데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학교들이 폐쇄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각 교회를 순회하며 신사불참배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마산경찰서 유치장과 부산형무소에서 한때나마 같이 수감생활을 한 김두석 씨가 쓴 [두 감나무 고목에 활짝 핀 무궁화](김두석 지음, 예음사, 1985년)에 의하면 1940년 4월에 평양 여신학교에 갔더니 이미 학교는 문을 닫았고 지하실에서 30여명의 학생들이 은밀히 공부하고 있었다고 하는 증언과, 1937년 10월 23일 북장로교 선교부가 긴급 특별회를 열어 숭실전문학교 등 평양의 3개교의 폐쇄를 결정한 것을 보면 염애나 전도사가 공부한 것은 1937년 봄 학기로 추정된다.
이들의 신사불참배운동은 최덕지 전도사가 중심이었고, 이술연, 이복순, 박경애, 염애나 등 미순회에서 함께 일하던 전도사들이 단결하여 경남 일대를 순회하며 시작되었다. 그 배후에는 호주인 선교사 태매시(太邁施)가 있었고, 부단히 연락하며 이 운동에 동참한 분으로는 한상동 목사, 이인제 전도사, 이찬수 전도사 등이 있었다. 그들이 가서 예배를 드리는 곳마다 신사참배가 1계명을 범하는 우상숭배죄라는 설교를 했고, 신사참배를 결의한 총회와 목사들을 비난했으며 그리스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질 때라고 외쳤다.
1차적으로 이들의 운동을 방해한 것은 왜경이 아니라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 측이었다. 저들은 각 교회에 통보하여 "미순회의 여전도인들이 가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지시했고, 목사들은 "여자들이 주도하는 부흥회에는 남자들은 참석하지 말라"고 까지 하면서 훼방했다.
그래도 여전도사들은 "은혜를 받는데도 남자와 여자가 구별되느냐? 장로나 영수들은 교인들을 가가호호를 심방하여 온 교인이 다 모이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시간을 허비할 수 없으니 철수하겠다"고 하자 남자들도 다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사흘이고 닷새고 금식하며 집회를 인도했다. 가는 곳마다 신앙의 열기로 은혜가 넘쳤고 청중들의 마음 속에 신사참배는 명확한 우상숭배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각 지방에 흩어져 나가서 1주일이고 열흘이고 집회를 인도하고 난 뒤 마산의 태매시 선교사의 집에 돌아와 각 지방이나 교회의 신앙정보를 교환하고 3∼5일 씩 모여 준비 기도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재충전한 뒤 다시 각 교회로 나갔던 것이다.
당시 이 전도사들과 뜻을 같이 하여 동참한 남성들로는 마산 문창교회를 시무하다 신사참배 문제로 사면한 한상동 목사와 경찰서에 잡혀가 고문으로 죽게 될 즈음에 석방된 이찬수 조사와 유인배 조사 등이었다. 한상동 목사는 고향인 밀양에 거주하면서 지교회의 교역자들을 상대로 신사 불참배운동을 폈으며 여전도사들이 모이는 기도회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평양지방법원 판사 鎌田 가 작성한 예심종결서(豫審終結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염애나 전도사도 사교부장에 피선되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이들의 불참배운동은 일사불란하며 비교적 조직적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중심에는 한상동 목사와 최덕지 선생이 있었다. 주기철 목사는 이미 옥중에 수감되어 있었고, 경남 일원에서 활동하던 이들과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반대자들과의 연결은 이인제 전도사가 맡아 해왔다.
해방 후에 이 땅에 신앙 재건이 전개되었을 때 이 두 사람은 한 길로 가지 못하고 한상동 목사를 따르던 이인제, 황철도, 주남선, 이찬수, 이약신 목사들과 조수옥, 박인순, 김두석 등은 고신파의 주축을 이루었고 최덕지 선생을 따르던 염애나, 김영숙, 이순련, 조복희, 김야모, 박열순, 강판례 씨들은 재건파를 형성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 기나긴 인고의 수감생활
이렇듯 중부 경남의 각 교회들은 순회하면서 신사참배 불복운동에 앞장섰던 염애나 전도사에게도 올 것은 오고야 말았다.
1939년 8월 몹시 무더운 여름날 함안 지방의 한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를 끝내고 점심상을 받고 있을 때 황급히 달려온 주일학교 한 학생으로부터 일본 순사가 선생님을 잡으러 온다는 전갈을 해 왔다.
잡혀갈 것을 이미 각오한지 오래지만 어리고 겁 많은 시골교인들 앞에서 묶여 가는 것은 저들의 신앙을 위해서도 유익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수저를 놓고 눈을 감은 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더니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즉각 응답하여 주셨고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천둥 번개를 치며 소나기가 쏟아져 앞이 안보일 정도로 한 시간 가량이나 쏟아지다가 비는 멈추고 하늘은 청명해졌으나 마을 앞의 시냇물이 불어 일본 순사는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집회를 무사히 마치고 그날밤에 진영읍 부곡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니 노부모는 수심에 찬 얼굴로
"네가 나간 뒤로 순사들이 매일 같이 너를 잡으러 왔으니 빨리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서 수감준비를 시작했다.
옷에는 고름을 떼어내고 단추를 달고 늙으신 부모님들의 옷도 세탁하여 챙겨두었다. 하지만 내가 들어가고 나면 누가 돌보아 줄 것인가를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며칠동안 집안의 설거지를 해 놓고, 마지막으로 진영교회 교우들의 가정을 심방하고 밤늦게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4시경에 집으로 찾아온 일본 순사들에게 연행되어 수감되었는데 그 때가 염애나 전도사가 29세가 되는 가을이었다. 진영파출소에서 바로 마산경찰서 유치장으로 보내졌는지 아니면 김해경찰서를 경유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의 활동 영역이 마산지방이었기 때문에 마산경찰서의 고등계 형사들이 진영에 잠복해 있다가 검거해 연행한 것으로 추측할 따름이다.
마산경찰서 유치장에는 평양여신학원의 선배로 태매시 선교사댁에서 함께 기도했고, 마산 문창교회 전도부인이었던 김영숙 선생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첫 날 조사를 받던 중 들고 간 성경 속에서 발견된 무궁화 꽃이 수놓인 책갈피가 문제가 되었다.
"이게 무슨 꽃이냐?"
"예 그건 조선 국화인 무궁화 꽃입니다."
"누가 너에게 가르쳐 주더냐?"
"어려서부터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일경은 그에게 교회를 이용해서 독립정신을 선동하는 사상범으로 몰기 위해 문초를 가했다.
"나는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사람이고, 신사참배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죄가 되기 때문에 안하는 것이지 다른 의사는 없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수긍하려 않고 그의 취조기록에는 사상범의 물적 증거라며 책갈피를 달아두었다. 그는 심문을 받으면서 최덕지 선생과 한상동 목사가 2개월 전에 구속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이복순 씨와 김두석 선생도 들어왔다. 마산경찰서 감방 안은 온통 미순회 전도부인들의 집합소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잡혀온 이튿날부터 5∼6일 동안 구타를 당하고 문초를 받으면서 심문하는 내용은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교인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가? 한상동, 최덕지 등과 모여서 무엇을 모의했으며 무슨 지령을 받았는가? 를 캐물었고 모의한 것이나 지령받은 것이 없다고 하면 지령받은 것을 말하라고 때리고, 바른말을 하면 거짓말이라고 때렸다.
거대한 결사단체를 만들어 전국적인 조직망을 이루고 그 지령에 따라 활동하는 것으로 사전 각본을 짜놓고 그 주동자가 누구냐고 심문했다. 일경은 조선 민족의 독립운동 차원에서 대답을 들으려 했고, 그는 기독교 신앙적 차원에서만 대답했기 때문에 상호간에 의사 소통이 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감방에는 신앙선배인 김영숙 선생과 동지들이 있었기에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저녁이 되면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엎드려서 기도하다 꿈을 자주 꾸었다. 그래서 김영숙 선생은 염애나를 보고 {요셉}이라는 별명도 지어 이름 대신에 부르기도 했다.
필자는 30여 년을 한 집에서 살면서 많은 꿈 이야기를 들었으나 한 가지만 소개하려고 한다.
"무궁화가 피어있는 조선 반도의 지도가 나타나더니 얼마 뒤에 큰 구렁이가 기어 나와 그 지도를 완전히 감아 버렸고, 그 다음에는 예리한 낫이 나타나 감고 있던 구렁이를 일직선으로 잘라버리니 순식간에 여러 개의 토막이 되어 떨어져 버리고 다시 조선 반도의 지도가 선명하게 나타나더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선명하고 인상적이어서 옆에 누워 있는 김영숙 선생에게 이야기했더니,
"우리나라도 독립이 될 것인가?" 하시고는 돌아 누워버렸다.
김두석 선생은 보기 드문 미성가(美聲家)이었다. 감방 안에서 찬송가를 부르면 모든 사람이 그 노래에 매료되었고 심지어는 간수들까지도 "김두석 씨 노래 불러라"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문제를 일으켰다. 감방 안은 물이 귀했고 마실 물도 부족한데 씻을 물이 어디 있겠는가? 수감 이후로 목욕은 고사하고 세수도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고 식수로 받은 것을 한 모금 남겨서 얼굴에 바르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온 몸이 땀과 때로 도배를 한 것 같은 형편이었다. 간수들의 입에 붙어있는 말이 "썩어 죽어라"이다.
김선생은 하룻밤 꿈을 꾸니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포수를 맞아 온 몸이 깨끗이 되는 광경을 보았다. 잠에서 깨어보니 몸에서 때 가루가 떨어져서 쓸어모으니 물통에 반쯤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너무 황홀해서 입고 있던 때묻은 옷을 훨훨 벗어 버렸다. 그리고 무슨 곡인지도 모를 노래를 24시간 쉬지 않고 불러대어 온 감방 안이 발칵 뒤집히고 김두석이가 미쳤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경찰은 그의 어머니와 이은상 시인의 아버지 되는 이순필 장로를 오게 하여 강제로 석방을 시켰는데 그것이 1940년 11월이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성탄절을 마산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내는데 바깥에서 성탄축하 찬송이 들려왔다. 얼마 전에 출옥한 김두석 선생과 그의 오빠가 부르는 노래였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는 찬송이 울릴 때 너무 감동적이어서 감방 안의 성도들도 함께 불렀고 그 새벽의 감격은 잊을 수 없었다며 해방 후에도 자주 말씀하셨다.
김선생은 그 후에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았고 말년에는 제주도에 살았는데 1980년대에 창원에 계시던 염애나 목사님을 찾아와서 자기의 재판 기록이 보관되어 있지 않아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을 수 없으니 함께 재판을 받고 부산형무소에서 복역한 염선생이 증인을 서 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필자는 당시에 광주 중앙교회에 시무하고 있었던 관계로 뒤에 들었는데
"그것 해 가지고 무엇에 쓰려느냐?" 묻자
"나는 늙어 혜택을 볼 일도 없지만 유공자로 인정받으면 애들이 학교에서 등록금도 면제되고 또 취직도 우선적으로 알선 받는다" 고 했다.
"나는 해방 후에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복역관계를 신고해 달라는 공문을 몇 번 받았으나 하지 않았다. 예수님 때문에 옥에 갔지, 나라를 위해서 고생한 것이 아닌데! 상을 받아도 예수님께 받아야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식을 위해 멀리 제주도에서 왔나보다 하는 생각을 하니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도장을 찍어 줬다고 술회하는 것을 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부산형무소에서 출감한 성도들 중에서는 유일한 생존자 같아서 한 번 만나 보려고 구은순 전도사를 통해서 몇 차례 시도해 보았으나 끝내 만날 수는 없었다.
다시 마산 경찰서 유치장으로 돌아가 보자. 박경애 씨는 몇 날을 고문에 견디지 못하고 동방요배를 시인하고 풀려나가고, 김영숙, 염애나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해가 지나고 갇힌 지도 8개월에 접어들었다. 염애나 전도사는 평소에 눈이 나쁜데다가 맞아서 눈병이 도졌고 이빨이 부어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했다. 치료를 받을 수도 없고, 약을 구할 수도 없으니 잇몸까지 탈이 나서 음식을 씹을 수가 없었다. 경찰도 어떻게 묘안을 찾지 못했던지 석방을 허락했다. 마산에 거처가 있는 김영숙 선생도 함께 풀어주며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리 오래 있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평양검찰국에 출두하라는 호출장을 대구경찰서로부터 받게 되었다. 이찬수 전도사의 친척이 검찰청 서기로 재직하고 있어서 물어 보았더니 그 곳은 주로 사상범 전환 업무를 담당하는 곳인데 어떤 사람은 고문에 못 이겨 미치기까지 했다며 어딘가에 피하라고 귓뜀해 주었다.
한 일 주일을 산에 가서 기도하며 지나 보았으나 마음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교인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싸우라고 설교하면서 나는 십자가를 피해서 도망쳐야 되겠는가?"
그 길로 진영 집으로 돌아와 뒷산에서 5일간을 철야기도하고 평양으로 향하여 주기철 목사님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저녁이 되자 오정모 사모는 사모대로,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기도자리에 앉아서 밤새워 기도했다. 기도시간은 길었으나 내용은 아주 짧고 간단했다.
"하나님이여 주목사는 제물로 받으시고 방장로는 교회를 위하여 풀어주소서"
그 기도소리에는 쇳덩어리도 녹아날 정도였기에 그도 함께 밤을 세우며 기도했다.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이기게 하소서"
무슨 말이 필요하며 무엇을 달리 구하겠는가? 다음 날 검찰국에 출두하니 담당 경찰은 간단한 인적 신문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였다.
5. 재 검속과 경남도경 유치장 생활
평양에서 돌아온 그는 신사참배를 시인한 목사가 주도하는 교회에 가지 않기 위해서 저들의 교훈을 따르지 않는 교인들을 모아놓고 가정예배를 드렸다. 다행히 마을과는 떨어진 외딴 과수원 속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남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줄 알았는데 왜경이 갑자기 들이 닥쳐 붙잡아 갔다. 뒤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진영의 모 목사가 주일날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교인들의 뒷조사를 해서 밀고했다고 한다.
염애나 전도사는 그 날로 김해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취조는 도경 고등계에서 형사가 와서 물었는데, 그 취조 내용이나 대답하는 알맹이는 1차 검속 때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지만 전번에는 위협만 해서 놓아주는 방식이었다고 하면 이번에는 올가미를 씌워 잡아넣으려는 의도인 듯 훨씬 가혹하고 철저했다.
때려도 보고, 달래기를 수일을 계속하더니 다음에 올 때는 몇 사람 데리고 와서 빨가벗겨 비행기를 테울테니 두고 보라며 가버렸다. 매맞는 것도 몸서리가 치는데 처녀인 나를 옷을 벗겨 수치심을 자극하고 거꾸로 매달아 비행기를 돌리면 똥물까지 토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본심은 아니라 하더라도 고문에 못 이겨 항복이라도 하는 날에는 어떻게 할꼬?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니 잠이 오지를 않았다.
밤이 되면 치마를 뒤집어쓰고 꿇어 엎드려 하나님께 매달렸다. 내 힘으로는 이길 수 없으니 주님이 붙들어 달라고 생떼를 써는 가운데 며칠이 지났는데 하룻밤은 기도 중에 "시편 21편을 보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간수에게 부탁하여 성경을 읽으니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시 21:2)를 얻고는 큰 힘을 갖고 계속해서 10여 일을 밤새워 기도하다가 마지막 밤에 "가시관을 쓰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환상"을 보게 되었고 그 새벽에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주님 감사합니다. 무죄하신 주님도 나를 위하여 알몸이 되셨고 멸시의 가시관을 쓰셨는데 나같은 죄인이 주님을 위하여 온 몸이 드러나면 어떻고, 거꾸로 매달리면 어떻습니까? 내 마음, 내 육체 모든 것 주께 드리오니 영광받아 주소서"
하면서 작정하고 기도하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이제는 신앙무장이 다 되었으니 사탄아 덤빌려면 덤벼 보아라 나는 죽을지언정 예수님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도경의 형사가 한 달이 되어도 오지 않았지만 또 한 가지 시험이 닥쳐왔다.
김해경찰서 감방에 갇힌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육순을 훨씬 넘긴 양부 염재로 전도사가 잡혀와서 남감방에 수감된 일은 자신이 잡혀온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틈을 타서 알아보았더니 딸이 수감된 후에도 주변의 몇몇 교인들을 자기 집에 모아놓고 주일예배를 드렸는데 갑자기 모 목사가 형사를 데리고 와서 덮치는 바람에 방에 있던 9명이 모두 잡혀 진영 지서에 끌려갔다가 교인들은 다시 모이지 않겠다는 시말서를 쓰고 풀려났으나 노전도사는 주모자라고 해서 경찰서까지 연행된 것이었다.
더더욱 가관인 것은 형사가 문을 열면서 "다 모였는가?"하고 물은 즉 목사는 수효를 세어보고 "몇 사람 빠졌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기 신앙이라도 지키려는 신도들을 왜경을 끌고 다니면서 잡아주는 이리같은 거짓 목자가 있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사건이었다.
염애나 전도사는 이 때부터 기도내용을 180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문제는 뒤로 제쳐두고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무리 여름철이라도 보리밥을 먹고 나면 배가 끓고 설사를 하셨기 때문에 보리밥을 드시지 못하는데 감방의 꽁보리밥을 먹더니 며칠이 못 되어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또 집에 계신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두 세살 연상으로 벌써 70 노인인 데다가 건강하지도 못한 어머니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이 어려운 시기에 누가 먹을 것을 주겠는가를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밤마다 하나님께 매달리며 아버지를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생떼를 썼다.
"하나님 나는 동지들이 갇혀있는 도 감방으로 보내주시고 연로하신 아버지는 집으로 보내주소서"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수감된 지 두 달만에 너무 연로하고 병약하다는 이유로 방면되어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던 아버지였으나 딸을 두고 나가시면서 목이 메여 입을 열지도 못하셨다.
교회 일에 손을 놓은 지는 이미 오래 되었고 딸이 갖다 주는 미순회 전도사 봉급으로 살아오셨고 일가친척이 하나도 없는 처지라 누가 늙은이들을 돌보아 줄 것인가를 생각하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출옥한 뒤에 이 분들이 살아온 내력을 듣고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근심하고 걱정한 것을 자복하고 감사했다고 한다.
염조사님은 집에서는 모이지 못하고 주일이면 아침에 일찍이 걸어서 낙동강 강변에 있던 유등의 윤집사 댁으로 가서 11시가 되면 집사님 집 뒤에 있는 대나무 숲에서 근방의 수진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그 때 국민학생이던 신종구는 강둑에 나가 형사들이 오는지 망을 보았고 어른들은 예배를 드렸다.
염조사는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를 하셨고 해가 져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교인들이 정성껏 모은 보리쌀 몇 되박과 헌금 몇 십전을 받아와서 해방이 되기까지 연명을 하였다. 때로는 이 교인들이 돈을 모아서 도감방에 고생하는 염애나 전도사에게 사식도 넣어주고, 공판날이면 새벽에 진영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와서 용수를 쓰고 재판받으러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6. 경남 도경 감방 안에서의 신앙투쟁
김해경찰서에 갇힌 지 두 달만에 경남도 경찰국 감방으로 이송되었다. 김두석 씨가 쓴 자서전에 의하면 1942년 9월 하순경에 자기는 부산경찰서에서 도경으로 이감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염전도사의 이감도 이 무렵이라고 추측된다.
당시 도경 감방에 수감되어 있던 성도들은 최덕지, 김영숙, 염애나, 김두석, 강판례, 이술련, 김야모 씨 등이었고, 남자로는 최달석, 송명복 전도사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서 변호사 부인 박열순, 최봉석 목사의 부인 서고분 씨도 수감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제까지는 개개인이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었으나 신앙의 동지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으니 이것 하나만 해도 저들에게는 힘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다. 또 경찰서에서 심문을 받아 저들의 죄목이 들어나 있는 상태여서 특별한 가혹행위가 가해지지 않는 것도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다.
도경 감방은 그 구조부터가 경찰서와 차이가 있었다. 경찰서 유치장은 거의가 일직선으로 감방이 나열되어 있기 때문에 옆방에 누가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고, 출입할 때에 얼굴 대면하는 일도 드물었다. 그러나 도경 감방은 구조가 타원형으로 되어 있어서 옆방의 동태를 엿볼 수도 있었고 음성도 잘 들려서 좋았다.
신앙대장 최덕지 선생은 1감방(혹은 2감방이라고도 함)에 있었는데 감방 정면의 기둥 사이로 바깥이 잘 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하고 앉아 계셨다. 한 다리는 세우고 한 다리는 꿇은 채로 두 손을 합장하고 계시면서 늘 기도하고 각 방의 신앙의 부하들의 동태를 살피시는 것 같았고 금식으로 모든 시련을 이겨 나갔다. 아침의 궁성요배나 정오의 순국 선열에 대한 묵도를 금식으로 이겨 나갔다. 뜻이 관철될 때까지 21일간도 금식하셨다. 하루 네 번씩 최덕지 선생의 주도하에 예배를 드렸다. 태매시 선교사의 댁에서 가졌던 기도회와 같이 예배 형식을 갖춘 기도회였는데 찬송도 크게 불렀다.
1감방에서 최선생이 "예배 시간입니다"하고 선언되면 각 방에서는 자리를 정돈하고 무릎꿇고 앉아 사도신경을 봉송했다. 예배 전에는 북쪽을 향한 감방 뒷벽 창문을 열어 놓았다. 다니엘과 히브리 세 청년의 기도회를 본받은 행동이었다. 감방이란 본시 정면에는 문이 없고 10m정도의 간격을 두고 나무 각목을 세워놓은 형태인지라 뒷문을 열어놓으면 찬바람이 몰아쳐서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찬송이 끝나고 나면 각 방에서 한 사람씩 성구 한 절씩을 암송하는데 여감방이 먼저 시작하여 끝이 나면 남 감방에서도 최달석 집사가 요절을 암송했는데 매가 무서워 찬송을 부르지는 못했지만 성경 말씀은 잘 외웠다. 그러다가 간수에게 불려나와 구타도 당하고 욕도 먹었다.
"최달석이는 남자가 되어서 계집들의 하는대로 따라 다닌다…"
그리고 나면 기나긴 기도가 시작되는데 처음 입감한 사람이 있으면 최선생은 꼭 그 사람을 기도하게 하여 기도로 통하여 바깥의 사정을 듣게 되었고 그 사람의 기도를 따라 아무개 목사는 어느 곳에 수감되었는데 승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그것이 그 다음부터는 모든 사람들의 기도의 제목이 되었다.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최상림 목사, 주기철 목사, 주남선 목사, 이인제 전도사 등으로부터 시작하여 청주, 대구, 부산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주의 종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나면 두 시간도 좋았고 매일 네 차례씩 같은 기도를 되풀이 하다보니 간수들도 기도의 내용을 외울 정도였다.
"얼씨구 평양의 주기철을 돌아 보옵시고, 청주의 손양원을 돌아 보옵시고" 이렇게 간수들이 앞질러서 기도문을 외우면서 조롱했다.
한 번은 기도를 시작하니 미나미(南)라는 일본인 간수와 이가라는 한인 간수가 번갈아 물통을 들고 와서 감방에다 퍼부었는데 얼마나 갔다 부었는지는 모르지만 감방 안은 온통 물바다가 되었고, 기도를 마친 강판례 씨가 그 물에다 빨래를 하면서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씻음 받기를 원하네 내 죄를 씻으신 주 이름 찬송합시다"를 불러댔다.
이 광경을 보고 함께 당한 여종들도 웃었지만 간수들도 어이가 없었든지 숨소리만 씩씩거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개월이 지난 어느 주일 아침에 하판락 부장과 강형사가 나타나더니 최덕지 선생과 송명복 전도사를 불러내어 오늘 기차 편으로 두 분을 평양형무소로 옮긴다는 것이었다. 최선생은 소리쳤다.
"다른 날도 많은 데 왜 하필이면 주일에 데려갈려 하오? 오늘은 갈 수 없으니 내일 가도록 합시다"
형사들과 최선생 사이에 시비가 일어나면서 최선생은 나가지 않으려고 감방 문을 붙들고 버티었지만 형사들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수갑을 채우고 개 끌듯이 끌고 나갔다. 이것이 경남도경 감방에서의 마지막 헤어짐이었다. 해방 후에 최선생에게서 직접들은 이야기는 신발도 벗겨진 채로 포승줄로 묶어서 부산역까지 와서 기차를 탔는데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선 채로 저녁 무렵에 평양역에 내렸다고 한다.
한 편 신앙의 대장을 잃고 난 잔류자들은 너무나 외롭고 허전하였다. 최선생이 계실 때에는 매사에 그가 앞장섰고 따라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누가 대신 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기우에 불과했다. 최선생은 자기가 떠난 다음 일을 모두 처리해 놓고 떠나셨던 것이다.
한 달 전부터 다른 방에 있던 김영숙 선생을 자기 방에 옮겨 달라고 간수들에게 졸라댔다. 간수들이 청을 들어 주지 않으니 최선생은 금식을 시작하는데 날짜를 정해 놓고 하는 금식이 아니라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버티는 금식이었다. 13일째가 되니 경찰당국도 이기지 못하고 그를 같은 방으로 옮겨준 것이다.
김영숙 선생은 동향인이요 동갑이었고, 자기가 전도하여 예수를 믿었을 뿐 아니라 평양여신학원도 함께 다녔으니 마치 형제 이상의 신앙동지였다.
평양으로 이감될 것을 미리 예감했던지 경남도경 감방교회의 후임자를 세워놓고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리하여 최선생이 떠난 후로 김영숙 선생이 인도하는 하루 네 번식의 예배는 부산형무소 미결감방으로 옮겨지기까지 약 8개월간 계속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러는 중 간수들의 공갈과 협박은 날로 거칠어졌고 일본인 간수들보다 말이 통하는 한인 간수가 더 추하고 더럽고 앙칼졌다. 저들의 저주대로 썩어서 뼈만 나가게 된다 해도 원통한 것은 없으나 끝없는 싸움 속에 육신도 신앙도 쇠약해져 행여나 저들에게 굴복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은 솔직히 세월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더해 갔다. 돌보아 줄 사람이 없어 연로하신 부모님들이 문전걸식하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도 감방 안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는 일이 있었다.
하루는 설가라는 한인 간수가 비웃음 조의 말을 지껄였다.
"너희들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느냐? 묘하고 꼭 알맞은 별명을 우리가 만들었다고…, 자세히 들어봐라 얼마나 재미있노…"
우리가 귀를 기울이자 그는 엄숙하게 어조를 높여 선언하듯 뇌까리기 시작했다.
"문둥이 같은 강판례, 찰떡 김두석, 붕어빵 김영숙, 대추 같은 염애나, 동탱주 할망구 이술련, 사자 김야모…"
그 다음 사람들에 대한 별명은 기억이 희미하다고 하셨다.
"용케도 붙였구나!"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았고 뇌리에 깊히 박혀서 맴돌았다.
"문둥이 같은 강판례" 더럽다고 붙인 별명이 아니라 저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는지도 모른다. 그는 해운대 교회를 시무하는 구전도사의 사모님이며 애를 넷이나 가진 어머니였다. 남편은 신사참배해서 편안히 살고 있는대도 이 속에 들어와 썩고 있으니 저들의 눈에 정상인으로 비쳤겠는가?
"찰떡 김두석" 그는 용모도 예쁘고 교육도 받은 신식 여성이다. 동래의 일신 여중을 나왔고, 빼어난 성대를 가진 미혼으로 애교도 있었기에 때로는 간수가 찬송가를 청하여 부르게도 하였다. 그래서 찰떡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손색이 없는 규수였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대추 같은 염애나" 라고 했을까? 몸집이 작다고 그랬을까? 아니면 세인들이 말하는 대추의 특성 때문에 그랬을까? 대추가 혼례상이나 제사상에 오르는 것은 대추나무는 열매가 많이 열리기 때문에 자손이 흥왕하라는 뜻이라 했고, 밤을 올리는 것은 나무가 성장해서 가지에 밤송이가 달려야 땅 속에 있는 씨앗 밤이 썩는다해서 후대가 끊어지지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뭔가?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아닌가? 그렇다면 육신의 자손보다는 신앙의 자손을 많이 영글게 하는 대추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구나! 이렇게 아전인수(我田引水)식의 해석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사자 같은 김야모" 그는 전도사도 아니고 집사도 아닌 순수한 교인이다. 환경도 남편도, 자녀들도 아무도 믿지 않는 신앙의 외톨박이였다. 그래도 다른 수감성도들에게는 믿는 형제들이나 섬기던 교회의 신도들이 면회와서 옷도 철에 따라 넣어 주었고 사식도 차입해 주었으나 김야모에게는 누구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여름에 잡혀올 때 입은 모시 치마 저고리를 찬바람이 부는 가을철까지 입고 있었다. 때와 땀으로 얼룩진 옷이 삭아서 떨어져 나갔다. 집에서는 안 믿는 남편이 가정과 애들도 돌보지 않는 지독한 여자라고 해서 한 번도 면회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그의 믿음은 바위 같이 요동하지 않았고 누구 앞에서나 사자 같이 담대했다. 하루는 간수가 들어오더니 나에게 물었다.
"김야모 전도부인 했나?"
"아닌데요"
"그러면 교회 집사 했나?"
"아니요, 평교인인데요"
"그런 여자가 우째 그렇게 똑똑하게 대답하냐?"
우리도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예수하고 천황폐하하고 누가 높은가?"
"그거야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이 제일 높고, 일본 나라에서는 천황이 높지요" 치조하던 형사가 이 신기한 대답에 기가 막혀 붓을 놓고 멍하게 김야모를 쳐다보고 있더라는 것이다. 우리도 간수의 전하는 말을 듣고 감탄을 했다. 성경을 배운 적도 없는 분이 어떻게 저런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참으로 사자 같은 신앙가였다.
필자는 김야모 장로님의 전기를 쓰려고 마산교회에 다방면으로 알아보았으나 불신자들의 향방도 알 수 없었고, 교회의 기록에서도 그 분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7. 부산형무소 미결감으로
1943년 3월 초순 경 우리 일행은 경남 도경 유치장에서 부산형무소 미결수 감방으로 송치되었다. 작년 9월에 들어와서 해가 바뀐 셈이니 7∼8개월의 세월이 몇 년 같이 느껴지는 나날을 보낸 것 같다. 앞으로 닥칠 시련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환경이 바꿔지는데 대한 기대감도 없지는 않았다.
우리 동지들은 트럭에 화물처럼 취급을 받으며 몸을 싣고 차 위에 부는 찬 공기로 심호흡을 하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김두석씨는 자기가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 좋은 낙원 이르니 그 쾌락 내 쾌락일세
이 세상 추운 일기가 화창한 춘일되도다
영화롭다 낙원이여 그 산악에서 보오니
먼바다 건너있는 집 주 예비하신 궁일세
그 화려하게 지은 것 영원한 내집이로다"
아미동에 있는 도경과 대신동에 있는 형무소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지만 차가 도착하기까지 몇 번이고 이 노래를 되풀이하는 중 차가 형무소 정문에 이르렀다. 차에서 내리자 일본 간수부장이 한복을 벗기고 청색 미결수복으로 갈아입게 하고는 감방으로 끌고 가 두 세 명씩 분리하여 각 방에 수감하고 꿇어앉게 하더니 간수의 제 일성이 떨어졌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이 안에서는 인간 성명이 없어지고 짐승과 같이 번호를 부른다"
"염애나, 너는 0014번이다"
"김두석, 너는 1342번이다"
방안에서는 일본사람들이 정좌(正座)라고 하는 꿇어앉는 생활이 아침에 눈을 뜨면 저녁에 잠자리에 눕기까지 계속했다. 저들은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어있어 부담이 안되는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다리가 저려서 피가 통하지 않을 때가 있었고, 남의 다리 같이 감각이 없어져서 혼자 서 있지도 못할 때도 있었다.
저녁이 되니 소위 8등식이라는 가장 적은 양의 콩보리 밥이 나왔다. 눈물을 머금으면서 "먹어야 한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억지로라도 목구멍으로 넘겨 놓아야 한다"고 하며 먹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형무소의 첫 날이 밝았다. 감방 안에 있는 죄수들에게 줄을 지어 앉게 하더니 간수가 구령을 질렀다.
"큐죠오하이 사이게이레-"(宮城遙拜 最敬禮)
우리는 동방요배, 혹은 궁성요배를 하지 않으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왜 머리를 숙이겠는가? 한 방안에 잡범들은 다 절을 했으나 우리는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 날 아침에 저들에게 발각된 우리 일행은 한 번 더 기회를 준다는 뜻으로 형무소 뜰에 동쪽을 향하여 일렬로 세워졌다. 더 큰 목소리로 간수의 구령이 울려 퍼졌다.
"宮城遙拜 最敬禮"
그래도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사람은 김영숙, 염애나, 이술련, 김야모, 김두석 다섯 사람이었다. 간수부장은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살아계신 천황폐하에게 절을 하지 않느냐?"
차고 있던 긴 칼자루로 어깨를 찌르고 치더니 다시 돌아오며 뺨을 갈겼다. 감방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손목에는 쇠고랑이 채워졌다. 처음 몇 시간은 견딜 수 있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어깨가 무거워지고 손목이 부어 올랐다. 더구나 장대하고 손목이 굵은 김두석은 피가 잘 통하지 않아 손등이 부어 올랐다. 식사 때가 되어도 그 수갑은 풀어주지 않았고 우리들은 두 손으로 알루미늄 밥통을 들고 개 같이 밥통에 입을 파묻어 밥을 먹어야 했다.
이러한 고통이 3일간 계속되면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전에 경찰서에서나 도경에서 고문을 당할 때도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지금은 그것이 더 절실하게 느껴지면서 죽음도 마음대로 하는 자유마저 빼앗긴 신세를 가슴아프게 생각하는데 오자끼 여간수가 들어와 수갑을 풀어주면서 앙칼진 소리를 뇌까려댔다.
"너희들이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궁성요배를 하지 않을 경우에는 밥 대신에 죽을 주겠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맨 물만 줄 터이니 알아서 처신해라"
아무리 배가 고프지만 이런 수모의 말을 듣고도 밥알이 목구멍을 넘어가겠는가? 우리는 너무도 억울하고 분해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는데 김영숙 선생과 김두석은 눈물만 흘렸다고 출옥 후에 진술했다.
이 때의 우리는 예비금속이 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예비금속이란 사상이 불온하여 치안유지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되는 자는 형행범이 아니더라도 일단 구속해 놓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재판도 없이 미결수로 썩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 일행은 언제 재판이 열려진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 석방된다는 기약도 없었다. 치안유지법 위반, 불경죄, 보안법 위반 등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이 곳에 수감된 지가 벌써 수개월이 되었건만 검사 앞에 한 번도 불려나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도감에서는 함께 온 신앙동지들 중에서 박열순, 김의순, 서고분, 조복희, 강판례, 송복덕, 최달석, 김인식, 고재만 등은 풀려 나갔다. 아마도 매에 못 이겨 궁성요배는 승인하고 출감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아있는 우리 다섯 사람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모진 학대가 가해졌다.
가네야마(金山)라는 한국인 부장이 동정하는 듯한 어조로 우리를 타이르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신사 앞에 절하지 않는 것은 신앙문제라 친다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살아계신 임금에게 절하지 않는 의도는 용납할 수가 없다. 이것은 신앙문제가 아니라 사상문제다. 그러니 한번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처신하기 바란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제의를 제일 먼저 받아들인 것은 김두석 선생으로 그가 의신학교 선생으로 재직할 때 주기철 목사도 자녀들의 학부모로서 학교 행사에 참석하여 궁성요배를 한 것이 생각이 나서 시인을 한 것 같다. 그리하여 그의 손에서 맨 먼저 수갑이 풀려졌고 이어서 네 사람의 수갑도 풀려졌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서 환난이 가신 것은 아니었다.
미결수들은 자기가 지원하지 않는 한 일을 시키지 않는데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저녁에 자리에 눕기까지 세 끼 식사하는 일 말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매맞는 것만큼의 고통이요, 그렇다고 눕거나 다리를 뻗을 수도 없고 함부로 일어날 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말을 못하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고, 밤에 자리에 누우면 일어나 앉아 있어도 처벌을 받았으니 이러한 무료함을 몇 달이고 계속한다는 것은 사람을 돌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계호과장(戒護課長)이라는 자는 느닷없이 나타나서 약을 올린다.
"너희 조센진들은 게으름뱅이가 되어서 일하려 하지 않는다. 산에는 나무 하나 심지도 않고 베어만 내니 벌거숭이가 되지 않는가? 우리 일본인들이 식목하지 않았다면 홍수 때문에 조선 반도는 떠내려갔을 것이다."
그의 말이 일부분이 타당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일이 하기 싫어서 여기 들어와 있는가? 아니면 일자리가 없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가? 속에서 울분이 치밀어 올라와도 우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묵살했다. 그러나 단순한 김두석 선생은 그 말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과장님, 내가 내일부터 일하겠습니다."
계호과장은 김두석의 제의에 미소를 지었는지 모르나 옆에서 듣고 있던 우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주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도경 감방과 같이 함께 예배는 드리지 못했지만 하루 종일 앉아서 기도하는 시간은 충분하다. 그리고 그 자유는 빼앗지 못했는데 하루 종일 공장에 나가서 일하게 되면 시간은 잘 가겠지만 기도시간을 빼앗기게 되고, 또 주일에도 일하러 나가야 하니 그 시험을 사서 당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이제 남은 사람은 네 사람뿐이다. 김영숙, 이술련, 김야모, 염애나, 간수들의 눈에는 참으로 얄미운 존재들이었다. 담당 여간수의 입에서는 우리 감방을 지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욕이 쏟아져 들어왔다.
"야! 니꾸라이시, 이야라시!"
더럽고 추한 짐승을 보았을 때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를 대했다.
어느 주일 오후에 오자끼 여간수는 우리 네 사람의 이름을 불러 일어서게 하고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게 오후 네 시가 되도록 그 자리에 부동자세로 세워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식사로 나오는 밥을 빼앗아 자기 옷에 풀을 먹이는 것이 아닌가, 감방에서 배고픈 사람들의 심정을 체험해 보지 않으면 아무도 이 때의 심정을 모를 것이다.
간수들의 구두만 보아도 저것도 쇠가죽으로 만든 것이니 물에 삶아서 한 그릇 먹었으면 배가 부를 것이란 환상에 사로잡힌다는데 하루에 세 번 나오는 밥덩이를 빼앗아 옷에 풀을 먹이는 저 심보는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는 억울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했지만 냉가슴을 앓으면서도 그 광경을 보고 서 있노라면 마음만은 편했다. 주님을 위해서 매도 맞았고, 후욕도 당했으며 이번에는 밥도 빼앗겼는데 앞으로는 또 어떤 고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런데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두석 선생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고 한다.
밥을 빼앗기고 벌을 서고 있는 고난받는 성도들의 대열에 자기도 동참해야 하는데 주일에 작업을 하면서 주일을 지키려고 고난받는 성도들을 쳐다볼 때 자기 혼자 상급에서 떨어지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8. 기소, 언도, 복역에서 해방까지
1943년 11월 초순, 미결감방에 입소한 지 7개월만에 검사 앞에 서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기나긴 세월이며 형극의 길이었다. 1차 검속되어 마산경찰서 유치장에서 약 8개월, 2차 검속되어 김해경찰서에서 아버지와 딸이 함께 2개월, 경남도경 감방에서 약 8개월, 그리고 부산형무소 미결수 감방에서 7개월, 햇수로 치면 3년의 세월이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르자"하고 함께 고난의 길에 동참했던 신앙동지들도 도중에서 낙오자가 되어 버렸고, 오늘 함께 검사국에 출두하게 된 사람은 다섯밖에 남지 않았다.
환난의 바람이 처음 불어왔을 때에는 태매시 선교사가 우리를 붙들어 주고 감싸주었고 밤새워 기도하던 동지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으며, 도경 감방에서는 최덕지라는 대장이 앞장서서 이끌어주었기에 우리들은 든든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외톨박이로 태매시 선교사는 본국으로 추방되었고, 최덕지 선생은 평양형무소로 옮겨간 후로는 생사조차 알 길이 없었으며 바깥 사람을 만난지도 벌써 오래 되었다. 부산형무소는 담 밖이 인가라 애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부엌에서 누룽지 긁는 소리까지 들렸다고 한다. 그럴 때면 "우리가 사는 바깥에도 딴 세상이 있는가 보다"라고 느낄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머리에는 용수를 쓰고 밧줄로 허리와 팔을 묶인 채로 검찰국으로 향하면서 푸른 하늘 속에 있는 맛이 아주 다른 공기를 뱃속 깊이까지 심호흡하면서 아직도 살아있는 나 자신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용수를 쓰고 수갑을 차고, 밧줄에 묶여 매일같이 형무소와 검사국을 왕래하였는데 검사 앞에 나가기 전에 대기실이라는 독방에 들어가서 검사의 호출을 기다렸지만 어떤 날은 심문을 받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오기도 했다.
우리 일행이 검찰국에 불려 나간다는 이야기가 누구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었는지 함안 지방, 창원과 마산 지방의 교우들이 얼굴이라도 본다며 몰려들었다. 새벽 4시에 마산역을 출발하는 통근 열차를 타고 부산에 와서 검찰국 뜰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푸른 죄수복에다 용수를 쓰고 있으니 누가 누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우리는 그래도 쉽게 알아볼 수가 있어서 손을 들어도 보고, 고개를 끄덕여 아는 체를 했다.
진영, 유등, 가술, 모산 등지에서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격려해 주던 성도들을 잊을 수가 없다고 그 이름들을 열거하며 고마워 하던 모습을 필자는 여러 번 보았다. 말을 건넬 수 있는 기회가 순간이라도 있으면 연로하신 부모님을 부탁했다고 한다.
아침 9시면 한 줄에 묶여서 형무소에서 경찰국에 가고, 저녁이면 형무소로 돌아오는 일을 무려 10개월을 계속하다가 1944년 9월 20일, 부산 지방법원 재판부는 우리에게 준엄한 유죄 언도를 내렸다.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 혹은 불경죄를 적용해서 3년의 징역에 처한다고 판결했다. 오늘날과 같이 미결 통산이 된다면 잡혀온 지가 두 해가 넘었으니 잔형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가 되겠지만 당시의 사정은 전혀 달라서 사상범에게는 3년이나 10년이나 같다고 했다. 그것은 수형 기간이 만료되면 석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시 검사 앞에서 조사를 받고, 사상 전환이 되어 있지 않으면 청주에 있는 사상전환소에 보내어 죽든지 아니면 가둬 둔다고 하니 형의 기간이 길고 짧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언도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김두석, 이술련, 김야모 등은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고, 김영숙 선생과 염애나 전도사만 부산형무소에 남아 해방을 맞기까지 복역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죄수의 신분이 되어서 옷부터 푸른색의 미결수 복이 붉은 기결수 복으로 바꾸어졌고 날이 새면 작업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여죄수에게 주어지는 작업은 주로 뜨개질이었다. 바깥에서도 해본 일이라 낯설거나 고되지는 않았지만 간수들이 말하는 치수에 틀리지 않게 또 매일의 할당량에 모자라지 않게 날쌔게 손을 놀려 일을 했다. 일에 몰두하다 보면 배고픈 것도 시간이 지루한 것도 잊어버렸다. 일을 잘못해서 간수들에게 "미련하다" "게으르다"는 핀잔을 듣기가 싫었기에 때로는 시간이 나는 대로 간수들의 사물(私物)까지도 짜 주었다.
형무소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빈대와 이, 모기의 공격이다. 저녁이 되면 판자 사이에서 수 천, 수 만의 빈대가 공격해 오고 천정에서는 고공낙하(高空落下)식으로 떨어져 달라 들면 아무리 어려운 짐승 같은 생활이라고 해도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몇 년째 먹지 못해서 피골이 상접해 있는 죄수들의 몸에 남아있는 마지막 피 한 방울도 남겨 놓지 않을 기세로 덤벼드는데다 물이 귀하여 머리를 감을 수가 없어서 머리카락에는 산란한 이의 알이 하얗게 줄을 지어 달라붙어 있었다. 유치장에서나 감방에서는 앉으면 이를 잡기에 많은 시간을 보내었고, 여름에는 땀띠가 나서 쇠가죽 같이 들떠있는 머리 밑은 아무런 감각도 없고 기어다니는 이 때문에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자의로 살아가는 것이 전무한 곳이 감방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고 있을 뿐이었고,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먹고 싶다고 해서 먹을 수 있는 것도 전무한 상태였다.
하룻밤에는 목이 몹시 타는 갈증을 느끼면서 잠이 깨어 보니 입에서는 단쇠 냄새가 나고, 목은 타고 머리가 뜨거워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찬물 한 컵만 먹으면 살 것 같은데 구할 방법이 없고 더러운 방바닥을 닦는 물걸레가 옆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온 얼굴과 손발을 문질렀다. 아마도 옆에 물이 있었다면 그것이 빨래한 꾸중물이라도 실컷 마시고 싶은 상황이었기에 정신이 없이 걸레를 얼굴에 대고 근근히 잠을 청했다.
이 징그러운 싸움은 언제 끝날 것인가? 일본 제국이 망해야 끝날 것인가? 아니면 내 생명이 다해야 끝날 것인가?
1945년이 밝아왔다. 작년 가을부터 미국 비행기의 공습이 잦아졌다. 공습경보 싸이렌이 울리면 모든 작업이 중단되고 감방문의 자물쇠가 끌려지고 폭탄이 떨어지면 속히 대피하라고 한다. 어떤 때에는 하루에 두 세 번 일어나기도 했지만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눈뜨면 작업장에 나가서 일하고, 저녁이면 감방으로 돌아와 빈대, 모기와 싸우는 일과가 끝도 없이 이어져 나갔다. 여름철이 되면 감방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 해의 여름철은 유난히 더웠고 또 우리 육체도 지칠대로 지쳐서 목숨이 붙어있으니 살아있을 뿐이었다.
8월 15일이라고 생각된다. 남자 감방 쪽에서 싸우는 소리 같고 여러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는 것 같은 소리가 여감방까지 들려와서 간수에게 물어 보았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
"남 감방에 미친 자가 들어와서 큰 소동이 벌어졌다."
우리는 그 소리를 믿었다.
그 외침과 떠드는 것은 다음 날도 계속 되었다. 일인 간수들의 태도가 갑자기 풀이 죽어 보였고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18일에야 여간수가 일본천황이 항복 방송을 했다는 것과 사상범들은 곧 석방된다는 소식을 귀띔해 주었다.
1945년 8월 19일, 드디어 옥문이 열렸다.
간수들의 고개 숙인 대열 속을 당당히 걸어서 출옥하였고, 마산행 열차를 타고 진영역에 내리니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그리운 교우들의 얼굴도 보였고, 지방의 유지들이 나와 있었다.
개찰구를 빠져 나올 때 저들은 큰절을 하며 반겼다. 해방 후에 염애나 일가족은 진영교회에 얼마동안 출석하면서 가정에서 몸을 보양하고 부모님 뒷바라지를 하면서 과수원에서 채소도 가꾸면서 몇 달을 쉬었다. 그러나 어느 주일에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하기를 "주일 아침에 교우 가정에 데리러 갔을 때 형제가 일을 하고 있거든 함께 거들어서 일을 마쳐 놓고 교회에 인도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진영교회에 출석을 끊었다고 한다.
1946년 1월 초순에 부산 절영도에서 열렸던 교역자 수련회에 박인순 씨와 함께 참여하였는데 그 곳에는 최덕지, 김영숙, 조수옥 선생 등 출옥 성도들이 많은 참석을 했으나 손양원 목사의 미온적인 회개의 외침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회개는 고사하고 도리어 항의가 빗발치는 소요 속에서 폐회되었다.
출옥 성도들은 다시 한번 실망하게 되었고 훗날에 경남노회가 분열되는 틈새가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 빌미가 되었을 뿐이다. 정확하게 그 날짜는 알 수가 없으나 만주에서 돌아온 박윤선 목사가 진해에서 신학강좌를 개최했는데 여기에도 상당 기간 동참하여 공부하였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고려신학교가 되었다고 한다.
그 다음에 필자가 들은 바로는 마산 문창교회에서 개최된 경남노회에서 손양원 강도사가 목사 안수를 받은 사건이었다. 당시의 경남노회 임원진들은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인사들이었다.
장립받는 손강도사는 무릎을 꿇고, 신사 앞에 절하며,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목사들은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식전에 손양원 강도사에게
"꼭 이렇게 해서 목사 안수를 받아야 합니까?"고 물었다고 한다.
"염선생, 나도 생각이 있소. 내가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어 부산 초량교회에 부임을 해야 일을 할 수가 있소"
그러나 손양원 목사는 자기의 의도대로 부산에서는 시무하지 못하고, 여수 애양원에서 목회하시다가 6.25사변 시에 순교의 제물이 된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섭리가 어디 있었는지 인간으로는 측량하기 어렵다.
대한예수교 재건교회 총회가 1965년에 출간된 팜플렛에 의하면 1947년 2월의 다만 집회 시에 염애나, 최종규, 두 분이 재건운동에 가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창원 지방의 여러 교회들과 함안 지방의 강명, 부목, 대산교회 등을 순회 시무하셨다.
1951년 9월부터 개최된 재건신학교에서 현역 조사들과 함께 공부했고, 1950년 봄에는 김해군 진영읍의 과수원을 처분하고 창원교회 사택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이 곳에서 재건교회 최초로 1958년 4월 10일 총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으신 염재로 장로님이 1958년 7월에 별세하셨다.
1962년 4월에 재건신학교 제 3회 졸업식이 마산교회에서 거행되었는데 이술련, 최달석, 염애나, 김창효, 박성규, 박은수, 신종구, 이봉선 등 8명이 졸업을 하게 되었고, 1962년 5월 1일 마산교회당에서 회집된 제 19회 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1988년 2월 7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기까지 염애나 목사는 미순회 전도부인으로 재건교회의 조사로, 시무장로로, 목사로, 온 몸이 부스러지기까지 주님을 사랑하셨고 교회와 양떼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셨다.
글을 맺으면서
염애나 목사에게는 여러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1) 그 첫째는 남들은 한 가지만 가지는 것을 그는 두 가지씩 가졌었다. 즉 성(姓)이 두 개요, 이름도 두 개다. 또 호적상의 아버지, 어머니도 두 분씩이다. 본적이 두 곳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아마도 이러한 사례는 천에나 만에 하나가 있을 정도로 희귀한 사례이다.
진해시 웅천에 있는 천자봉 공원묘지에 그의 분묘가 있는데 비석 앞면에는 "出獄聖徒 廉愛拿 牧師之墓"라 쓰여 있으며 뒷면에는 "金達大"라는 本名으로 내력을 밝히고 있다. 어려웠던 시대에 어렵게 살아가신 면을 여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2) 그 두 번째는 그가 겪은 사역의 직분이 화려하다는 점이다. 그는 19세시에 진영교회의 서리집사로 봉사하였다. 진주 여자성경학교를 졸업하고는 호주 선교부 미순회 전도부인으로 신사참배 문제로 감옥에 가기까지 약 4년간 봉직하였다. 해방 후에 재건교회에 몸담고 부터는 지교회의 조사(당시의 헌법상 그렇게 불렀다)로 여러 교회에서 시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자로는 극히 희귀한 장로의 직분도 1958년 4월 10일에 회집된 예수교 재건교회 남한지방회 제 11회 정기총회에서 받았다. 그는 창원교회 시무장로로 봉직하다가 마침내 1962년 5월 1일에 회집된 재건교회 제 19회 총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는다. 그리하여 1988년 2월 7일 소천하기까지 목사로 25년간 전도부인으로 출발해서 49년간 주님의 일을 하다가 이 땅에서의 이중 본적이 아닌 영원한 본적지에 가시게 된 것이다.
이 땅에서는 분명히 이름도 성도 다른 두 아버지가 계셨지만 영원한 한 아버지 하나님 품으로 가셨던 것이다. 이 땅에서는 영원한 고아였고, 독신자였으나 변함 없는 사랑으로 영접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옮겨가신 것이다.
교회의 직분을 논하면 남자는 집사에서 장로로, 전도사에서 목사이고, 여자라면 집사에서 권사로, 아니면 여전도사로 마치게 되어 있으나 염애나 목사는 남녀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직분을 가지고 헌신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3) 세 번째는 그 분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점이다. 음력 9월 4일에 염목사님의 생신이었는데 이 날에는 빠짐없이 찾아오는 멤버들이 있었다. 마산의 조수옥, 부산의 임두연, 박인순, 그리고 안종숙 권사들이다. 때로는 자고 가기도 했고, 만나면 밤새워 이야기꽃을 피우는 저들의 호칭은 형님 동생이었다. 비록 신앙노선은 재건, 고신으로 나눠져 있었으나 신앙동지로서의 정의는 변해 보이지 않았다.
염목사가 백내장이 걸려서 앞을 못 보게 되었을 때 복음병원에 입원시켜 치료비를 전담한 분도 임두연씨의 남편되는 이경석 목사였다. 이목사 부부는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내가 염선생 전도로 예수 믿었고, 또 그의 권면으로 목사가 되었는데 은혜 갚을 기회라 여기고 전액을 부담했다"
라고 안종숙 권사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염목사가 함안 지방, 창원 김해 지방의 시골교회들을 순회하면서 가르친 어린이들 중에는 장성하여 재건교회의 장로가 된 사람들도 10명은 넘을 것이다. 시무 중에 예배당을 다섯 개나 지었다고 함께 목사가 된 박성규 목사가 고별사에서 읽는 것을 들었다.
6.25 사변의 어려운 때에 폐결핵에 걸려 고생하면서 아끼던 재봉틀을 팔아서 간병해 주던 안종숙 권사의 성도 사랑을 잊을 수 없다.
소천하기 몇 년 전부터는 몸이 쇠약해져서 기동을 잘 못하였으나 거의 날마다 번갈아 오셔서 위로해 주던 덕산, 유등, 마산 중부, 함안 지방의 여러 교우들의 뜨거운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외롭게 태어나서 외롭게 사시다가 천국에 가신 고 염애나 목사는 진해의 천자봉 공원묘지에 생전에 형제 같이 지내던 김덕순, 김을수, 장로와 박복순 집사와 나란히 누워 부활의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