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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의 부족한 삶을 보고 '어떻게 회심하게 되고, 어떻게 신학교 가게 되었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최대한 소상히 작성해 놓은 글이 있어서 올려놓습니다. 부족한 삶을 통해 주님의 능력과 주님 말씀의 힘이 드러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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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과거, 현재, 미래.
- 대학생활의 혼란에서 구해 준 ‘말씀’의 힘
전 합 수 (가브리엘) 신부
1. 나는 1961. 9. 18 일 충청남도 홍성의 한 병원에서 태어났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성서적’으로 태어난 것 같다. 형과 나는 쌍둥이로 태어났고, 이후 여러 가지 모습에서 창세기에 나오는 에사오와 야곱을 닮은 삶을 살게 된 것이다.
2. 부모님께서는 결혼하자마자 경기도 평택으로 올라와 신혼살림을 하셨는데, 당시에는 사회전체가 가난하기도 했고, 부모님도 거의 자수성가(自手成家)를 시작하는 마당이어서 어렵게 신혼살림을 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셋방을 사는데 주인 댁이 북한에서부터 천주교를 믿었던 분이었고, 아주 독실한 신앙을 지니신 분들이었고 저녁이면 가족이 모여서 저녁기도와 묵주기도를 바치셨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그 모습과 소리가 너무나 부럽고 좋아서 주인댁 할머니에게 나와 같은 사람도 아주머니가 믿는 그런 교를 믿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고 할머니는 교리책을 주면서 당시 365조목을 잘 외우고 찰고를 받으면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어린 우리 형제를 한손에 잡고 한손으로 업고 밥을 지으시면서까지 교리책을 외워서 1963년 1월 눈이 많이 오던 때에 영세를 하셨고, 우리 형제도 세 살의 나이로 이 때 영세를 하게 되었다. 하얀 소복을 입으신 어머니 옆에 아주 귀여운 아이들 둘이 손잡고 있는 영세사진은 정말 아주 인상적이다. 이후 우리형제는 어머니의 열심한 신앙생활의 영향으로 거의 교회 안에서 성장하다시피했다.
3. 초등부 주일학교, 복사단 생활을 거쳐 서울로 전학와서도 혜화동 성당에서 중고등부 주일학교와 고등부 레지오 활동을 하였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주는 상도 많이 타고, 고등부 1년 때는 서울 대교구 중고등부 교리 경시대회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형제)는 교리나 성서 지식에서 무척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스스로 우쭐한 마음으로 성당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외적인 자신감이었고, 진정으로 복음적인 마음상태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정말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복음의 힘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재수생활을 거쳐 대학교에 들어가서 한참의 혼란과 방황을 겪은 다음에야 이루어졌다.
4. 내가 재수생활을 거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에 들어갔을 때의 대학생활은 고등학교 때 생각하였던 바와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대학에 진학하였을 1981년의 사회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특별히 캠퍼스의 분위기는 더욱 그러하였다. 나는 대학 선배들을 따라 사회과학 즉 이념(理念) 및 한국 경제와 민족사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그동안 학습했던 고등학교 교육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배우게 되었고 그럴수록 사회과학 공부 및 학생운동에 열중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권이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것이 아니고 심각하게 퇴보시켰으며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나, 미국이 우리의 우방으로서 무조건 좋은 영향만을 끼친 것이 아니고, 분단을 고착화시키고 우리 경제를 식민지 경제 또는 자본주의의 종속경제로 만드는 영향을 끼쳤다는 점들에 대하여 깊이 있게 공부하면서 현재 남한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잘못된 정치 사회의식들과 이로 인한 많은 사람들의 피해 사례 등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농민이나 노동자, 그리고 철거민 등 이른바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파악하고 접근하는 훈련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사회과학 공부라는 것이고 소위 운동권 공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신앙과도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던 사회과학 공부가 이론과 이념 쪽으로 점점 깊어지면서 신앙과 어긋나는 점이 보이게 되었다. 단순하게 나라 경제를 연구하고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빈부격차를 어떻게 좁힐 것인가라든지 미국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 경제가 식민지 경제로 종속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연구하는데서 나아가서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단순히 일부 구조를 바꾸는 것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다고 하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되는 데 그것이 곧 노동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다라는 식의 논리로 확대되어 나갈 때는 내 자신의 신앙과 양심이 이 논리를 수용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공산주의 혁명론을 공부하면서 흔히 사람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사람을 가르며 가진 자는 부르죠아로 무조건 죄악시되고 단죄된다는 점이 너무나 큰 모순점으로 보였다. 특별히 나 자신이나 함께 하는 사람들의 행동들에서 여러 가지 모순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외적으로는 정의와 평화 균등한 분배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주위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상식이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할 때도 있었다. 부유한 사람들을 무조건 적대시한다거나 부자의 것은 설사 그것이 남의 것이라고 해도 그냥 가지고 와도 괜찮다는 식의 생각, 또는 학생운동이나 데모를 하기 위해서는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더라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식의 생각 등은 정상적인 신앙을 갖고 사는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들이었다.
5. 나 또한 운동권공부를 하면서 가족 안에서 불화를 일으키는 경우도 많았고, 나 스스로의 행동에 절제력을 잃고 방황을 할 때는 자칫하면 폐인(廢人)의 지경에까지 갈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될 정도였다. 나는 아무리 지식을 많이 쌓아도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고, 또 입으로 외치는 내용과 실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면 그것 또한 소용이 없는 일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부조화를 나 자신 안에 겪으면서 내가 배운 신앙과 나 자신의 행동이 일치하기를 희구하며 또한 지식으로 배운 여러 가지 좋은 가치관을 실제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게 되기를 갈구했다. 그러나 그럴 수록 내 안의 어둠은 짙어갔고 삶의 괴리감은 더 커져만 갔다. 아무리 화를 내지 말자고 해도 특별한 이유 없이 집에서 화를 자주 내고 오늘은 담배나 술을 먹지 말고 공부를 하자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내 안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상과 그렇지 않고 습관적으로 타성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내가 원하지 않는 인간상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분열되어 있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신앙적으로 맞지 않는 나의 삶을 개선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특별히 개인적인 양심에서 어긋나는 일들, 남을 함부로 비판하는 일들에서 벗어나고 신앙에서 요구하는 정결을 지켜나가며, 함부로 성내고 화를 내는 것을 자제하는 것, 삶을 규칙적으로 살아가는 것 등을 회복하고자 무척 노력하였다. 그러나 삶이 한번 무절제한 상태 즉 내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는 상태에 빠지니까 아무리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것을 체험하였다. 아무리 담배 등을 절제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고,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절제된 시간을 가지고 공부에 집중하려고 해도 이 역시 잘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일시적이며 습관적이며 형식적인 기도나 고해성사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까운 성당에 가서 내 마음에 어긋나는 일들, 양심이 괴로운 일들, 무엇보다 내가 추구하는 인간성과 현실에 나타나고 있는 내가 원하지 않는 인간성 사이에 부조화에 대하여 상담하고 고해성사를 보곤 했으나 고해신부님의 말씀은 언제나 피상적인 것으로 들렸고 내가 요구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생각이 되었다. 어느날 나는 비오는 날 귀가하면서 길을 걸으며 진지하게 나의 장래의 모습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현재 나의 어깨에는 일류대학 뺏지가 빛나고 있으나 장차 나는 사회에 무슨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때 내가 한 생각은 현재의 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나는 아무 쓸모없는 페인(廢人)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열중해있던 사회과학공부 소위 운동권 공부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6. 나는 신앙과 행동의 부조화, 앎과 삶의 부조화의 병에서 벗어나고자 무진 노력했으나 결과적으로 잘 되지 않았다. 대학 1 년을 마치게 되었을 때 지금은 예수회원이 되어 있는 친구가 같은 단과대학에 있으면서 함께 가톨릭 학생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데모나 운동권 공부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고 성서와 묵상 그리고 기도하는 쪽으로 노력하던 친구였다. 그 친구는 전부터 나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내가 내면에서 깊은 방황을 하는 것을 보고 나에게 이번 겨울에 성서공부를 해보지 않겠냐고 권고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친구의 말을 무시했지만, 내면에서 지칠대로 지치고 무엇인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마침내 그 친구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성서공부를 하는 한 공동체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 찾아간 집은 흑석동의 한 선배집이었는데 그 집에 가보니 나와 비슷한 또래의 대학생 10 여명이 리더하는 선배를 중심으로 모여 앉아 성서를 읽고 함께 묵상을 나누고 기도하고 또 성가를 부르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 집에 들어가자마자 어떤 알 수 없는 힘과 위로를 느끼며 마침내 내가 와야 할 곳에 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 동료들이 함께 부르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는 데모나 운동권에서 술을 마시면서 부르던 한숨과 결의와 투쟁을 다짐하는 노래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마치 어머니 품속에 잠기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였다. 하느님의 섭리로 나는 그해 겨울을 거의 성서(聖書)을 붙들고 살게 되었다. 당시에는 특별한 교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서로 성서를 함께 읽으면서 묵상을 나누고 하면서 삶의 가치관과 철학 특별히 당시에 민주화와 관련된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을 토론하면서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비판적이고 투쟁적인 시각들을 복음적인 시각으로 바꾸어가면서 특별히 찬양과 기도를 집중적으로 하는 그야말로 ‘성령께 인도되는 성서공부’였다. 필요한 경우 개인적인 내적치유의 기도도 병행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과거에 나는 단 한번도 형식적으로 교회에서 이탈해본 적이 없었다. 세 살 때 어머니 옆에 서서 영세를 한후 초 중 고등학교 주일학교, 복사단, 고등부 레지오, 가톨릭 대학생회를 통하여 많은 교리교육이나 피정, 수련회등을 접할 수 있었고 내 나이 또래에서 나는 누구보다 교리나 성서를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성서는 ‘살아있는 말씀’으로서의 성서가 아니었다. 단지 단편적인 지식으로서의 성서였고 ‘죽은 문자’로서의 성서였다. 그러나 이렇게 동료들과 함께 신․구약을 넘나들며 함께 묵상하고 기도하며 성서를 보다보니 성서의 말씀이 정말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어떤 때는 성서 말씀이 살아 움직이며 내 가슴 속에 꽂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고, 머리에서 가슴 깊은 곳까지 깊은 전율과 함께 내게 들리면서 마음에 사무치는 체험을 할 때도 많았다. 어떤 분의 신앙체험을 들으면서 나는 한시간 내내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내 영혼이 개방이 되어 성령과 함께 성서를 읽을 때 성서 말씀은 진정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 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히브리4,12) 사람을 거듭 태어나게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하루에 3-5시간씩 동료들과 함께 성서를 보고 해석하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하는 중에 파괴되고 어지럽혀젔던 내 인성(人性)은 다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본래의 인성(人性)으로 서서히 회복되어갔고 겨울 방학이 끝나가던 어느날 나는 생각과 행동이 일치되지 못하는 영혼의 긴 터널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정말 세상은 다시 보였으며 모든 사물, 만나는 한 사람 한사람, 스쳐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 잎새 하나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었다. 매일 욕설과 비판과 탄식과 울분으로 술과 담배 연기 속에서 지내던 때 암울하게만 보이던 세상이, 이제는 찬란한 햇살이 눈부시게 반사하고 있는 밝고 희망있는 세상으로 보이게 되었다. 나는 비로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실제로 살아계신 분임을 체험할 수 있었다. 아울러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힘과 능력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몸과 마음으로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7. 이후 나는 대학생활을 중단하고 군대에 입대하게 되면서 신학교에 갈 결심을 하게 되었고 사제가 되어 나처럼 젊은 시절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특별히 무엇이 참된 진리이며 참된 삶인지를 몰라서 고민하며 헤메이는 젊은이들에게 내가 찾은 이 복음을 전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군대에서 약 2년 반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나는 거의 매일 성서를 읽었고 말씀을 묵상하며 살았다. 논산 훈련소에서는 조교의 권고를 듣고 밤중에 화장실에서 성서를 읽고 자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 가면 시간을 허송세월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았는데 말씀을 묵상하면서 지낼 때 군대에 있는 시간 시간이 무척 귀중하게 쓰여지고 미래를 위하여 아주 귀중한 보화를 준비하는 시간이 됨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나는 현역군인으로 다시 대입시를 보게되었으며 기묘한 과정을 거쳐서 군인신분으로 신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게 되었고 전역과 동시에 꿈에 그리던 신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기까지 그리고 사제가 되어서는 물론이고 나의 삶의 중심에 항상 ‘말씀’이 살아 움직이실 수 있도록 노력해오고 있다.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가기까지의 그 열렬하고 간절한 마음, 순수한 열정으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지는 의문이고 나 스스로의 안일함으로 하느님의 귀중한 은총을 많이 낭비했다고 고백하고 싶다. 사제가 되어 살면서 정말 말할 수 없는 타성, 유혹, 나태함 등에 쉽게 타협하며 가끔은 내가 왜 사제가 되었나를 되물어보곤 할 때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사제로 살지만 그만큼 주님의 말씀을 생명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지 못할 때가 많았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이후 사제 생활을 하면서 성서 말씀을 보다 살아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삶에서 실천한 부분을 서로 나누는 사제 모임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다름아닌 ‘훠꼴라레 사제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서는 말씀의 이론을 논하지 않고 말씀을 실제로 산 것을 서로 나눈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말씀을 산 체험을 나누는 중심에는 항상 ‘예수님의 사랑’이 있고 ‘일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매달 한 번씩 이 모임에 나가면서 나는 사제로 살면서도 타성에 젖지 않고 항상 살아있는 말씀을 지니고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고, 여러 교구의 선배 신부님들과의 만남에서 더욱 그러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8. 이제 나는 개인적으로 너무나 부족함을 느끼지만, 하느님의 크신 은혜 아래 교구의 청년들의 신앙을 성서 즉 말씀을 중심으로 쇄신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청소년국 <청년성서부>의 전담신부로서 중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참으로 기묘한 섭리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임무를 맡겨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최대한 신명을 다하여 임무를 수행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이 임무가 내가 대학교를 포기하고 사제가 되면서까지 하고자 했던 바로 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절실히 체험하는 것은 나의 부족한 신앙, 의지, 인격적인 미숙함 등이다. 그러나 “내게 능력을 주시는 하느님의 힘에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필립4,13)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한 마음으로 당신을 위하면 당신께서도 한 마음으로 위해주십니다”(시편18,25)라는 시편저자의 신앙고백을 나의 신앙으로 고백하면서, 나의 능력보다는 하느님의 섭리와 능력을 믿으면서 교구 젊은이들의 복음화에 매진하고자 한다. 오직 그분의 말씀만이 젊은이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생명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끝>
(이상의 글은 교구 청년성서 전담신부로 재직하던 당시, 대희년을 맞이하여 교구 성서 체험수기 자료집을 만드는데 협조하기 위해 ‘사제의 글’로 작성된 것이고(2000년 가을 작성) 이후 본오동 성당 주임신부 재직시 ‘가톨릭 다이제스트’ 출판사의 요청으로 다시 가다듬어 2004년 6월호에 주요내용이 다시 한번 올려지게 되었다. >
첫댓글 흑석동에서 모여서 성서공부 할 때가 어제 같은데 우리 모두 먼 길을 걸어왔네요. 항상 우리 한사람 한사람과 아주 섬세하고 특별한 방법으로 함께 해주시고 계신 주님은 영원토록 찬미와 흠숭을 받으시길~~~~
신부님, 영적으로 파란만장 하셨던 긴 글 감동에 젖어 마음 깊이 새기며 잘 읽었습니다. 신부님, 힘내세요. 항상 기도응원 하고 있습니다. 홧팅!
장 레오 수녀님 봉사해 주시던 '성서 40주간' 데니스 신부님과 예언서 부분 나누어 강의 하실 때 부분적으로 들었던 내용이었음에도 새로운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 연수시켜 주시던 겨자씨 묵상이 맘 속에 가늘게 남아 있어 주일학교 봉사하라는 수녀님 권유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큰아들 바오로 미니홈피 게시판에 옮겨 읽어보게 해도 될까요? 초등학교 때부터 마리아폴리 데리고 다녔는데 2젠 모임 나가길 어려워해서요. 서강대 '젠의 하루' 도 보냈더니 오전만 있다가 마리아폴리에서 만났던 형들이랑 나와서 놀았다고 해 실망했어요. 어학연수 대신 젠학교를 보내볼까 생각중이예요.
다른 게시판에 옮기지 마시고, 차라리 프린트하여 보여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2젠 모임이 대단한 것이 아니고, 현재 있는 자리에서 평범하게 그리고 내실있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자기 본당 주일학교 미사부터 잘 나가도록 지도해주면 좋을 것 같네요.
옙! 바오로는 본당 중고등부 주일학교 교사 같이해요. 복사 금지 설정돼 있어 프린트하려면 번거롭게 되어 있는데요. 까페 페이지 그대로 출력하면 가장자리가 잘리기도 하고. 인터넷에 있는 글 프린트할 때는 복사해서 한글에 붙인 후 프린트해야 깨끗한데 ~
신부님글을 읽어내려가며 제가 실로암에 처음 참여하였을 때 그리고 그 안에서 느꼈던 주님의 위로와 형제자매들의 모습을 통해 기초를 다졌던 하느님 중심의 삶의 지표들이 생각났습니다. 베풀어 주신 크신 은혜에 감사드릴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