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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 인간의 출현(
『이타적 인간의 출현 – 게임이론으로 푸는 인간 본성 진화의 수수께끼』,
좌파이면서 동시에 다윈주의를 뼛속까지 받아들이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나는 Peter Singer와 Herbert Gintis(그리고 그의 동료들) 밖에 모른다.
극좌파이면서 동시에 지독한 다윈주의자인 나는 Peter Singer가 쓴 『다윈의 대답 1 -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Darwinian Left: Politics, Evolution and Cooperation, 1999)』의 내용에 대체로 공감한다.
『이타적 인간의 출현』을 쓴
하지만 책을 읽고 난 다음에는 별로였다. 이 글에서 내가 왜 별로라고 생각했는지에 대해 쓸 것이다.
침이 나가면서 자신의 내장을 모두 파괴하기 때문에 침을 쏜 벌은 고통 끝에 죽게 된다. (62쪽)
나는 벌의 통증 메커니즘에 대해 얼마나 연구가 이루어졌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아직도 우리는 이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침을 쏜 벌이 고통을 느끼는지 아니면
희열 속에서 죽는지 아니면 별다른 느낌 없이 죽는지 여부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이다.
박쥐 집단의 대부분이 친인척관계로 구성되어 있더라도 그들 중 일부는 전혀 친족관계가 아닌 외부에서 유입된 이민자 박쥐들이었는데, 친인척관계가 아니라고 해서 피를 덜 공유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86쪽)
흡혈 박쥐들이 피를 나누는 사례들 중 대부분은 친족 사이에서 벌어진다. 즉 친인척 관계가 아니면 피를 덜 공유한다. 물론 흡혈 박쥐들이 친족이 아닌 경우에도 피를 공유하는데 이것을 일종의 친구 관계라고 볼 수 있으며 호혜적 이타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영양은] 마치 “나 여기 있으니 와서 잡아보렴.”이라고 하듯 수직으로 50~60센티미터를 껑충껑충 뛴다. (155쪽)
50센티미터는 나도 뛸 수 있다. 숫자 상의 착오가 있는 듯하다.
어린 아이들은 경제이론대로 움직였으며, 상대방을 징계한다는 관념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아이들에게서만 발견되었다. 이 실험은 공평성 및 강한 호혜성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배워지는 것이라는 견해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Murnighan and Saxon, 1994 참조). (233쪽)
2차 성징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아이들에게서만 발견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2차 성징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공평성 및 강한
소위 동아시아 국가들(한국 및 일본)은 서구의 국가들에 비해 평등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 성격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이들 국가들에서 강한 호혜성의 원리는 더 강하게 나타날까? (239쪽)
한국이 서구에 비해 평등주의적이라는 것은 말도 안된다. 1987년까지만해도 한국에는 사실상 선거권이 없었다. 즉 정치적으로 매우 불평등했다. 다른 면에서도 한국이 서구에 비해 더 평등하다는 근거는 없다. 예컨대 한국의 여성들과 동성애자들은 대체로 서구에 비해 더 차별받는다.
사람들이 너무나 동질적인 경우 그 사회는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생각하는 것도 똑같고 하는 짓도 똑 같은 사람들을 모아 놓은 사회라면 거기서 창조적인 사고가 나올 리 만무하고, 다양한 경제적 활동을 추구함으로써 얻는 다양성의 이득을 얻기도 힘들 것이다.
…
따라서 부분적 유유상종은 이타적인 성향의 전파에 도움을 주지만, 끼리끼리 어울림을 부추김으로써 이질성으로부터 오는 다양성의 이득을 얻은 데에는 실패할 수 있다. (150쪽)
여기에서는 모두가 이타적인 경우를 말한다. 즉 모두가 인간성이 좋은 경우를 말한다. 인간성과 창조성은 서로 별로 상관이 없다. 따라서 이타적인 사람만 있는 집단이 이기적인 사람도 섞인 집단에 비해 덜 창조적이라고 볼 이유는 없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테마는 인간이 보이는 과도한(?) 이타성이다. 다른 말로 하면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과 대비되는 호혜적 인간(Homo Reciprocan)이다. 호혜적 인간은 얼핏 보면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렇다면 여행하는 길에 들른 레스토랑(즉 내 평생 다시는 올 것 같지 않은)에서 식사를 하고 팁을 남기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은 무얼까? (115쪽)
낯선 도시에서 다시는 볼 것 같지 않은 음식점 종업원에게 팁을 주는 것은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낯선 도시에서 다시는 볼 것 같지 않은 할머니를 돕는 것도 마찬가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실험으로도 입증되었다. 반복되지-않는-게임 실험에서도 사람들이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첫째,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대부분의 경우는 대학생들이 실험 대상으로 참가했다) 반복되지 않는 공공재 게임(단 한 차례만 진행되는)에서도 상당 부분을 기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19쪽)
이 실험에서 제안자들은 평균적으로 37%에 해당하는 몫을 응답자에게 건네주었고, 50%를 제안한 사람들의 수가 가장 많았다(21명의 제안자 중 7명이 50%를 제안했다). 또한 응답자들은 자신들에게 제안된 몫이 총 금액의 30%를 넘지 않으면 제안을 거부했다. (224쪽, Ultimatum game에 대해서는 http://en.wikipedia.org/wiki/Ultimatum_game를 참조하시오)
이런 실험이 경제학계와 심리학계를 뒤집어 놓았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냥 상식을 실험적으로 입증한 것일 뿐인데 말이다. 우리는 인간이 대체로 낯선 도시에서 만난 할머니를 돕는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처벌에도 비용이 든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시 만날 가능성이 없더라도 상대방이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이탈하는 경우 사람들은 종종 이에 대해 보복을 한다. (138쪽)
는 사실도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우리의 관심을 인간 사회로 돌리는 순간 협조적 행위는 훨씬 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된다. 왜냐하면 수천 명, 아니 수만 명 혹은 그 이상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도 우리는 종종 협조적인 행동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44쪽)
즉 반복-
우리는 혈연선택 이론으로 자식 돌보기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중간에 심리적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자식을 돌보기 위해서는 우선 자식을 알아보아야 한다. 즉 혈연 선택에 대한 수학적 모델과 실제 동물의 행동 사이에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자식 알아보기 메커니즘은 100% 잘 작동할 수 없다. 생물들이 직접 유전자를 확인해 볼 수 없기 때문에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뻐꾸기가 성공할 수 있는 이유다.
인간의 식욕은 과거 환경에 맞추어 조율되어 있다. 그래서 현대에는 설탕, 지방, 소금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적은 운동량 때문에 비만이 되기 쉽다. 인간은 자신이 먹는 음식의 칼로리를 정밀 계산하고 운동량을 정밀 계산하여 자신의 음식 섭취를 통제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음식 섭취를 통제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은 과거에는 그럭저럭 잘 작동했지만 환경이 급격히 변한 현대에는 잘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즉 인간은 부적응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낯선 도시에서 할머니를 돕거나 팁을 주는 행위도 비슷한 부적응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은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설탕, 지방, 소금에 과도하게 집착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음식이 현대처럼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과도하게 이타적으로 행동하도록 설계되었다. 과거에 할머니를 도왔다면 그것은 같은 부족의 할머니일 것이다. 따라서 그 할머니가 은혜를 갚을 기회는 많이 있었을 것이다. 기력이 없어서 그 할머니가 은혜를 직접적으로 갚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 할머니는 자신을 도운 사람이 얼마나 착한지에 대해 소문을 내 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과거에는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여행이 불가능했다. 또한 현대처럼 익명 사회가 아니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상당히 정밀하게 감시당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였다. 이런 사회에서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매우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다.
포르노 사진을 임신시킬 수 없다는 것을 남자들은 잘 안다. 이것은 의식적 지식이다. 반면 그래도 남자들은 포르노 사진을 보면 성적으로 흥분한다. 이것은 무의식적, 자동적 메커니즘이다. 자동적 메커니즘이 의식적 지식을 압도하는 것이다. 낯선 도시의 할머니를 돕은 것도 비슷하다. 그 할머니가 나중에 자신에게 별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안다. 그럼에도 그 사람들의 무의식적, 자동적 메커니즘은 “할머니를 도와라”라고 말한다.
나는 『현대인의 비적응적 행동들』에서 환경변화에 따른 비적응에 대해 다루었다. 그런데 그 글에서는 공교롭게도 과도한(?) 이타성에 대해서 다루는 것을 까먹었다.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집단선택의 과정이 작용할 여지가 상당히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184쪽)
집단선택설이 별 가망없는 가설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집단선택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어떤 집단이든 그 집단이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집단의 유대를 해치는 행위를 징계할 수 있는 수단을 가져야 한다. 때로는 사회적 규범을 어긴 사람에 대한 징계가 집단으로부터의 퇴출(혹은 추방)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149쪽)
추방하는 이유가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기적인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에도 추방을 고려할 수 있다. 무임승차자를 추방하면 자신이 손해를 덜 본다. 굳이 집단선택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추방이라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고대 원시부족 간의 분쟁은 아주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사율이 높았다. 즉 부족 간의 전쟁은 대부분의 경우 패배한 부족의 말살로 이어지곤 했다(Keeley, 1996). 그만큼 집단선택이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184쪽)
부족 간의 전쟁에 맨 앞에 서서 용맹하게 싸우는 것, 사회의 규범을 솔선해서 지켜내고 이를 어기는 사람을 앞장서서 응징하는 것 등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자질을 보여줄 수 있는 값비싼 신호가 될 수 있다. (167쪽)
핸디캡 이론으로 용맹함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사자 앞에서 높이 뛰기를 해서 자신의 달리기 실력을 과시하듯이 적 앞에서 용맹하게 싸움으로써 짝짓기 시장에서의 인기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더 나은 설명이 있다. 야노마뫼족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전쟁에서 용맹하게 싸운 사람들은 전리품인 여자를 아내로 더 많이 취할 수 있다. 집단선택이 아니더라도 전쟁에서의 용맹함을 설명할 수 있다.
이기적인 쥐에 의해 점유된 볏짚에서는 쥐가 두 마리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하자. 이들은 남을 도울 줄 모르기 때문에 서로 먹이와 잠자리를 놓고 치고받고 싸운다. 이러한 환경에서 볏짚은 두 마리가 살기에도 비좁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서 두 마리의 이기적인 쥐가 사는 볏짚에서는 더 이상 쥐의 수가 증가하지 못한다고 가정하자. 반면 이타적인 쥐에 의해 점유된 볏짚에서는, 팔이 굽혀지지 않지만 서로 돕는 사람들처럼 서로 먹이도 나누고 잠자리도 양보하면서 오순도순 살아갈 것이다. 따라서 서로 비좁아도 조금씩 양보하면서 살게 되어, 여기서는 두 마리 이상의 많은 쥐가 태어나서 함께 살 수 있다. (190쪽)
하지만 이기적인 쥐는 무작정 싸우지 않는다. 먹을 것이 충분히 있으면 싸우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왜냐하면 싸움에는 비용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우 큰 비용이 따른다. 싸우다가 죽거나 부상을 당할 수 있다.
인간 사회가 다른 동물 사회와 다른 점은 인간에게는 행위를 규제하는 제도가 있다는 점이다.
…
그렇다면 제도는 왜 문제가 되는가? 그 이유는 제도의 존재가 우리가 방금 얘기했던 개인선택과정의 속도를 늦추고 집단선택과정의 효과를 증폭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에 이타적인 행동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193쪽)
하지만
어떤 거래가 원숭이들의 눈에 공정하지 않다고 보이는 경우, 원숭이들은 그 거래를 거부했던 것이다. (253쪽)
굳이 이런 연구 결과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서열(Hierarchy)을 일종의 제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농담[남이 잡은 큰 사냥감을 얕보는 농담]에는 평등주의적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이 담겨 있다. (198쪽)
평등주의적 질서는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다. 사람들이 사냥 잘하는 사람을
끌어내리려 하는 것의 동기에는 평등주의를 이루겠다는 이타적인 목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시기심 즉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사람도 자식에게는 ‘이타적’이다! (77쪽)
하지만 정신병질(psychopath)에 대한 이론들에서는 정신병질자가 자식에게조차도 이타성을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게임이 높은 확률로 반복되는 경우, TFT 전략이나 방아쇠 전략을 사용하는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에 이기적인 사람이 등장한다면, 그는 살아남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조건부 협조 전략을 사용하는 사람을 만나 1회에는 무임승차의 이득을 얻지만 2회 때부터는 상대의 보복으로 인해 게임이 종료되는 시점까지 계속 0의 보수만을 얻게 되고, 다른 모든 조건부 협조자들은 게임이 종료될 때까지 서로 계속 협조를 함으로써 아주 높은 보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33쪽)
하지만 만약 이기적인 사람이 인구의 소수를 차지한다면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정신병질이 적응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의존하는 수학적 모델이다.
그렇게 보면 이타적인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이타적인 사람들과 어울리고, 이기적인 사람들은 다소 이기적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경향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하다. 이러한 경향을 ‘유유상종’(assortative interaction) 현상이라고 부른다. (147쪽)
이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가정이다. 숙주와 기생충 사이에는 무한군비경쟁이 벌어진다. 숙주가 좀 더 효율적인 방어체제를 갖출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생충이 기생충과 어울리는 유유상종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보통 사람들이 정신병질자에 대한 방어를 더 효율적으로 한다고 해서 정신병질자들이 그들끼리 어울리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기생하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의 더 나은 방어는 유유상종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병질자의 숫자가 감소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다.
첫댓글 솔직히 최정규씨가 번역한 [변하지 않는 인간본성은 있는가] 번역에 좀 실망했습니다. 영어도 어렵지 않는데 군데군데 오역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본문 중간에 저자의 견해를 비판하고 굴드나 르원틴을 소개하는 각주도 있더군요. 과연 이 책을 왜 번역했는지... 좀 답답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회되면 이 책도 번역비판에 포함시켜 보시는게 어떨런지요?
그렇군요. 한국어판을 구하는대로 번역을 검토해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이 책을 어디 기부를 한 상황이라 정확한 페이지를 짚을 수는 없지만, 어느 부분에서 아마
'팃포텟만이 존재하는 집단에서는 무조건 협력하는 전략이 퍼져나가게 된다'와 같은 헛소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번 확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