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제의 제기
2. 부흥운동의 신학적 성격 : 복음주의
3. 부흥운동의 정치적 배경 : 한국 근대 민족주의
4. 부흥운동의 전개와 한국개신교 성격 형성
5. 신사참배 거부 : 정치적 투쟁인가? 종교적 항쟁인가?
6. 맺음말
1. 문제의 제기
韓國敎會의 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교 선교사 하디에 의해 시작되어 감리교회 선교 주요지역에 영향을 미치고, 뒤이어 평양 대부흥운동은 1907년 1월에 평양 제일의 장로교회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되어 강력한 힘으로 평양의 교회들을 압도하고 기독교 학교들과 신학교를 거쳐 원산, 목포, 서울, 전국의 모든 지역과 교파를 망라하여 파급된 전국적인 신앙 운동이었다. 그리고 百萬人救靈運動은 한일합방 기간인 1910년을 전후로 진행된 부흥운동이었다. 이 초기 부흥운동으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큰 변화의 모습을 보인다.
특히 평양 대부흥운동을 전후로 하여 한국교회는 깊고도 광범한 변화의 흐름이 나타난다.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은 한국교회의 주류의 신앙형태가 형성되었다는 것과 뒤이어 교회가 전국적 조직과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內面的 信仰形態의 變化와 具體的 교회의 組織 構成에 따른 리더십의 형성은 그후 한국교회의 역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게된 특성들이 형성되게 되었다.
그러나 1905년 乙巳保護條約을 전후로 하여 일어난 이 부흥운동은 그 운동이 지향한 순수한 宗敎性 指向 때문에 민족의 政治的 독립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던 民族主義的 基督敎 系列과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부흥운동이 가지는 정치적 함의의 문제는 해방 전 일제하 한국 기독교회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논쟁의 시발점이 되어왔다. 식민치하의 한국에서 민족 독립은 가장 중요한 역사적 과제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민족주의운동을 통한 民族獨立은 일제하 모든 사회적 운동들의 하나의 大前提를 형성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순수한 신앙운동인 부흥운동과 그것을 이끈 基督敎 指導者들과 宣敎師들이 가졌던 非政治的 태도로 인하여 한국교회사에서 부흥운동에 대한 평가는 韓國敎會의 非政治化의 과정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러한 비정치화는 非民族化라는 도식적인 연결선상에서 부흥운동은 줄곧 批判의 對象이 되곤 하였다. 그러나 과연 純粹한 信仰運動을 지향했던 復興運動이 일제하 기독교 역사에서 비민족적 성격을 띤 운동이었던가 하는 문제은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신앙운동으로서의 부흥운동이 비민족적이었던 것이라면 기독교 信仰의 本質的인 側面 중에 어떤 부분이 인간의 社會的, 歷史的 실체들과 遊離된 非歷史的이고 단지 기독교가 종교적 想像의 작용에만 머문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운동으로서의 부흥운동의 역사적 실체성을 밝히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특히 民族이라는 실체는 한국교회사에서 基督敎와 關聯된 가장 具體的인 歷史的 實體이므로 이 民族과 信仰과의 關係를 밝힐 필요가 있다.
부흥운동에 대한 기존 연구자들의 평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우선 1930년대 金麟瑞는 평양 부흥운동에서부터 한국교회의 지도력이 선교사들에게서 한국인들에게로 이행되었고 이 시기에 더불어 진행된 韓國敎會의 급성장하는 轉換點이 되었기 때문에 韓國敎會의 始發點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한국교회의 正統性이 이러한 復興運動에서 起源하며 그래서 韓國敎會史의 흐름을 復興運動史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는 길선주, 김익두, 주기철 등 부흥운동의 리더들을 한국교회의 중요한 흐름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한국교회의 뿌리를 대부흥운동에서 찾을 만큼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白樂俊은 이 부흥운동이 가져온 결과가 '한국교회의 心靈的 新生의 表迹이 되었다'고 하면서 이 운동을 통해서 韓國敎會 信者만이 가지는 信仰性格이 形成되었던 重要한 事件으로 단정한다. 이 운동은 순수한 정신적 운동으로서 이후 한국교회의 道德的 心靈的 勢力으로 存續하여 왔다고 하며 이 운동 자체는 선교지인 한국에서 改新敎가 순조롭게 定着하는 것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閔庚培는 이 부흥운동이 韓國敎會 信仰 生活의 形態 俱現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단언한다. 그 신앙형태란 이른바 信仰 內燃과 外延 參與의 구조의 형성으로 순수한 신앙이 교회에 내면적으로 충만하게 되면 그것이 자동적으로 외적인 역사 참여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부흥운동은 이러한 信仰의 歷史 參與의 원리가 韓國敎會에 定着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金重基는 韓國敎會의 成長 要因을 分析하는 그의 논문에서 부흥운동이 초기 한국교회에서 강력한 교회성장의 한 계기로서 한국교회 신앙 체험 역사의 한 분수령이라고 하였고 부흥운동이 가지는 교회의 본질적 측면과의 연결성을 고려해 볼 때 신앙의 내연성을 근간으로하는 민경배의 역사 해석이 적절함을 밝히고 있다. 李萬烈은 대부흥운동에 대한 평가를 사회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부흥운동을 이해하고 있다. 그는 부흥운동이 植民地 社會의 不安한 社會 心理를 安定시키는 사회심리적 기능을 행하였다고 본다. 개인적 고독감, 국가적 위기에 처한 불안한 한국인의 심리를 교회가 파악하고 전도에 힘을 기울인 결과라고 보고있다. 그의 견해는 부흥운동의 역할을 사회 심리적인 면으로 축소시켜 부흥운동의 역사적 평가를 제한하였다.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부흥운동에 대한 다른 평가들도 나타난다. 주재용은 부흥운동이 個人的 靈的 更新을 위한 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따라서 이 운동의 성격이 개인의 敬虔만을 强調함으로써 기독교의 政治 社會 文化的 次元이 부흥운동 안에서 度外視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 죄의 회개, 열심 있는 기도는 있었으나, 정치, 사회, 문화 문제에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보다 더 가혹한 비판도 제기 되었다. 박순경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英·美의 復興運動의 延長線上에서 파악하고 있다. 부흥운동은 18-19세기의 앵글로색슨의 文化 現像의 일부로서 韓國敎會의 復興運動은 民族 主體性의 喪失이고 西洋 意識에 기울어진 결과의 산물로서 앵글로색슨의 復興會가 아시아로 팽창한 것, 帝國主義 이데올로기의 감염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경향의 견해로는 노대준이 있다. 그는 1907년도 대부흥운동이 이 시대의 민족적 요구에 전혀 부응하지 않는 韓國敎會를 社會問題와 斷切시키는 沒歷史化의 過程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부흥운동에 대한 극단적이고 대조적인 평가는 주로 부흥운동을 한국교회사 전체의 맥락에서 보지 않고 부흥운동 당시의 상황 속에서만 보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따라서 부흥운동에 대한 적절한 평가는 일제하 한국교회사 전반적 맥락 속에서 부흥운동의 위치를 파악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2. 부흥운동의 신학적 성격 : 복음주의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신학적 典據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초기 한국교회 信仰運動의 神學的 土臺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동시에 한국교회 신앙운동의 內燃의 形成과 그 내용을 밝히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부흥운동의 신학은 무엇보다도 내한 선교사의 신앙과 신학의 영향력 아래서 형성이 되었고 부흥운동 역시 宣敎師들의 指導力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 그리고 그 중심에 잇는 부흥운동의 신학은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과 그들이 파송되던 시대의 美國敎會의 신학적 조류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한국 선교사들의 신학에 대한 연구를 내한 선교사들의 각 敎派別로 구분하여 그들의 신학적 흐름을 체계화하려고 시도한 연구가 이덕주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이 연구는 長老敎, 監理敎, 救世軍과 聖潔敎, 聖公會 宣敎師들의 출신 신학교를 중심으로 내한 선교사들의 신학적 경향을 추론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을 연구한 이 논문에서 초기 한국 선교사들의 신앙 양태를 淸敎徒 信仰, 敬虔主義 信仰, 福音主義 信仰으로 구분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한국교회의 淸敎徒 신앙에 관련성에 대한 논의는 그가 브라운(A. J. Brown)의 見解를 追從하였기 때문에 나타났다. 이 브라운 패러다임은 한국교회의 신앙 유형을 평가하는데 오랫동안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다. 브라운은 來韓 宣敎師의 특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典型的인 淸敎徒 타입(puritan type)의 사람들'로서 그때로부터 한 세기 전의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처럼 카드와 춤 등 유흥을 금하였고 신학적으로나 聖書 批評에서는 완고한 保守的 立場을 취하였고 終末論에서는 前天年說을 고수하였으며 高等批評이나 自由主義를 危險한 異端으로 보았다고 하였다. 그 연구에서는 초기 선교사들이 保守的 長老敎 교리를 수호하려는 프린스턴(Princeton) 신학과 맥코믹(McCormick) 神學校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 결과 한국교회에서는 그 관심이 내세에만 고정이 되고 社會的 關心이 縮小되어 厭世的 來世 신앙으로 現實 逃避的 信仰 樣態를 만들고 社會的이기보다는 個人主義的인 敎會가 되었다고 하였다.
청교도주의와 한국교회와의 관련성에 관한 논의 중 김인수는 그의 논문에서 한국 기독교의 한 특성으로 淸敎徒 情神을 들고 있다. 종교 개혁의 슬로건 중에 하나인' 오직 聖書 (Sola Scriptura)' 라는 전통이 영국 청교도 정신의 근간이 되었고 이러한 전통이 청교도들의 후예인 美國 宣敎師들에 의해서 韓國에 傳達되었다고 한다. 또한 청교도 운동은 "이 세상의 악의 세력과 대결하고 잘못된 傳統, 慣習, 舊習을 打破하고 하나님의 정의와공평이 실현되는 세상 창조를 위해 매진한다 "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실례들로써 安息日 聖守, 一夫一妻制의 강조, 禁酒, 禁煙, 賭博, 奴隸制 禁止, 國家와 敎會의 分離 정신 등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세기 말엽의 미국 선교지 한국에서 역사적인 청교도 신학과의 連續性을 논의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 이유는 청교도에 대한 정의와 그것과의 역사적 연속성의 확인 문제에서 나타난다. 미국 청교도 운동은 대개 대각성운동 이전에 종결되고 미국의 기독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교도신앙을 한국교회와 연결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초기 한국교회 신앙 유형의 두 번째 특징으로 敬虔主義(pietism)가 논의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웨슬리의 전통을 잇는 내한 監理敎 宣敎師들은 물론 장로교 선교사들까지도 敬虔主義的 신앙의 소유자라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색채는 교파를 넘어 일반화된 현상이었고 한국교회의 경건주의 전통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한 重生의 체험과 기도와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훈련, 그리고 宣敎와 社會救濟로 연결되는 윤리적 실천 등으로' 요약되곤 하였다.
한국교회의 부흥운동도 이러한 경건주의운동의 맥락에서 파악되고 있는데 1903년의 원산 부흥회가 하아디(R. A. Hardie) 선교사의 개인적 회개와 중생의 체험에서 집단적 회개로 발전한 대표적인 경우라고 하겠다. 그리고 평양 부흥회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되어 祈禱會와 査經會는 한국 초기 부흥운동의 촉발 요인이 되었고 한국교회의 경건주의적 성격을 더욱 심화 시켰다고 한다.
김홍기는 이러한 이론의 대표적인 경우로서 경건주의와 한국교회와의 관계를 연구한 그의 글에서 敬虔主義는 韓國敎會의 중요한 흐름이라고 서술하였다. 그는 경건주의의 흐름을 獨逸 敬虔主義, 진젠도르프의 모라비안 형제단, 英國의 웨슬리 復興運動, 美國의 대각성운동으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근대 교회사의 가장 일반적인 해석이라고 하겠다. 그는 경건주의의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하였다. 우선 體驗的 感性的 신앙의 강조가 두드러진다. 칭의(justification)보다 중생(rebirth)을 강조하여 문자(word)보다 文字를 살아있는 말씀이 되게 하는 靈(spirit)을 중요시한다. 그 이유는 경건주의의 기원이 루터 정통파의 신학이 스콜라주의로 기울어 교리화 제도화되고 경직화됨으로 신앙의 生動性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경건주의는 個人 救援을 强調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 사회 정의의 실현이나 社會 倫理에 無關心하다고 한다. 경건주의가 관심을 갖는 것은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 사회 봉사(service)에 관심을 둘 뿐 사회 변혁(transformation)적 차원은 아니라고 한다. 초기 경건주의자들은 "인격을 통한 세계의 변화" 즉 인격이 변화하면 세계가 저절로 변화한다는 생각을 가졌으나 그들은 내면적, 인격적, 영적 변화에 치중하다 보니 사회적 변화에 기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경건주의는 내세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며 肉體와 靈이라는 二元論的 思考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따라서 非政治的 政敎分離의 原則을 강조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韓國敎會 復興運動의 성격이 典型的인 敬虔主義의 모습이라고 한다.
한국교회가 경건주의적 이라는 판단은 일반적인 것 같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영국의 웨슬리 부흥운동과 유사하다는 백낙준의 지적 외에도 언더우드 선교사는 "꽥꽥 소리지르는 감리교도(roaring Methodist)"라고 알려져 있었고 교회사가 라투렛(K. S. Latourette)도 지적하기를 한국교회의 선교사들을 "부흥운동, 개인주의, 이원론을 포함하는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선교사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경건주의 역시 청교도운동처럼 한국교회와의 역사적으로 직접 관련된 요소가 없다. 따라서 경건주의를 초기 한국교회 신앙의 뿌리로 이해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한국교회의 성격은 19세기 미국교회와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타당하다.
한국교회의 신앙 유형에 대해 민경배는 한 마디로 福音主義(Evangelicalism)적 교회라고 했다. 홍치모 역시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保守的 福音主義를 들고 있다. 이덕주는 복음주의라는 개념은 교파마다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기는 했지만 "성서의 절대 권위, 그리스도의 구속과 신앙 의인론, 심판과 재림, 삼위일체 등 보편적 프로테스탄트의 신앙 원리"로서 초기 선교사들이 공유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의 초기 信條들을 비교하면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성경의 권위, 그리스도의 탄생, 대속, 부활과 재림에 대한 교리의 특징을 제시하였다.
韓國敎會의 信仰 類型이 福音主義라는 논의를 확대한 학자는 박명수이다. 그는 초기 한국교회 선교사들이 복음주의라는 용어 사용에 익숙하며 오히려 '正統'이나 '保守'라는 말이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았음에 착안한다. 그는 近代 福音主義의 核心을 聖書 中心의 信仰, 體驗的 基督敎, 大衆的 運動, 傳道의 强調, 聯合的 運動이라고 정의하고 특히 역사적으로는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가 복음주의와 근본주의가 분리되기 전으로 '평범한 성서적 신앙'을 강조하는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특히 聖書의 강조와 經驗的 信仰이라는 두 요소를 가지고 복음주의와 한국교회의 신앙의 관계를 규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우선 유럽과 달리 미국에서는 성서가 강조되어 교리나 성례도 성서를 통하여 깨닫게 하였고 생활의 규범으로써도 성서를 강조하였다고 한다. 특히 성서적인 신앙은 성서가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常識哲學(common sense philosophy) 또는 常識 實在論(common sense realism)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였다. 상식 철학은 보통 사람의 상식에 인식론적 실재성을 부여하는 18세기 후반에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사상으로, 19세기 미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복음주의에 대한 정의는 광범하게는 改新敎會가 지향하는 普遍的 신앙 원리로서 聖經의 絶對的 權威, 영원한 구속자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믿음을 통한 구원, 영적인 변화는 개인의 道德的 변화와 성경공부, 기도생활, 전도와 선교 등 個人的 獻身으로 나타나는 생활의 변화로 나타난다는 신앙 원리로 쓰인다. 독일어 표현에서도 복음주의(Evnagelismus)는 카톨리 신앙과 상대되는 개신교 신앙 전체를 포괄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이 개념은 루터와 성공회를 포괄하기도 하며 또는 20세기 미국의 根本主義에게 축소 적용하기도 한다. 마르드센(George Marsden)은 복음주의를 18세기와 19세기에 英語圈의 세계와 그 밖의 세계를 휩쓸었던 復興運動을 가리키는 美國과 英國의 用語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복음주의의 핵심은 십자가 위에서 행한 그리스도의 구속적 행위에 그에 대한 개인적 확신이다. 부흥운동은 뉴 잉글랜드의 강력한 청교도의 유산 속에 준비되었고 단순히 성경을 설교하여 회심을 이끌어 내는 방식은 미국 개신교의 표준적 형태가 되었다. 이러한 개신교는 미국의 모든 교파에 광범한 영향을 끼쳤다. 감리교, 회중교회, 침례교, 장로교, 그리스도의 제자 교회와 기타 교파를 망라하여 19세기 미국 문화 형성에 관련되었다. 노예 제도 반대와 금주 운동과 같은 개혁 운동은 강한 복음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복음주의는 미국의 학교와 대학에 그리고 미국의 지배적인 도덕적 표준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헌터는 福音主義가 여러 시대의 保守的 改新敎와 관련된 北美 地域의 독특한 宗敎 文化的 現象이라고 한다. 福音主義的 세계관은 宗敎改革, 유럽과 미국의 淸敎徒들, 그리고 1차 2차 대각성운동에서 기원했다고 보고 있다. 그는 복음주의자들의 교리적 핵심을 聖經을 無誤謬의 하나님 말씀으로 여기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의 생애, 죽음, 인간의 영혼 구원을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확신한다고 한다. 복음주의는 靈的 救援을 지향하는 個人的이고 經驗的 신앙과 타인에 대한 강렬한 복음주의적 확신의 설득 작업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한다.
베빙턴에 의하면 소문자로서 복음주의(evangelical)이란 단어는 광범한 의미에서 복음에 속하는(of the gospel)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대문자의 (Evangelical)로서 복음주의란 적어도 영국에서는 1730년대에 시작한 운동으로서 18세기의 중요한 현상으로 주목된다고 하였다. 이 현상의 특징은 복음주의가 特定한 黨派에 限定的으로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복음주의는 프로테스탄트의 敎理를 體系的으로 敍述하는데 중심을 두지 않고 基督敎의 特定한 部分에 대한 强調와 그 强調點을 직접 생생하게 적용하는 信仰生活을 주장하였다.
복음주의 신학의 특징은 체계화된 敎理的인 내용이 없지는 않지만 뚜렷한 조목으로 표현하지 않는 미국 복음주의의 전형적인 형태로 점차 나타나게 되었고 신조나 교리보다는 개인의 경험과 영혼 구원의 실제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대각성 운동의 영향으로 생겨난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慣用的 傾向은 福音의 單純性을 설교하는 경향으로 흘렀다. 무디는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 그리고 성령에 의한 중생이 반복되는 그의 설교의 핵심적인 주제였다. 그의 설교는 3R로 요약되었다. 죄에 의한 破滅(Ruin) 그리스도에 의한 救贖(Redemption) 성령에 의한 重生(Regeneration)이 그것이다. 19세기 말 미국 복음주의 변화는 자유주의 신학과 진화론의 도전으로 인해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경향과 이에 거세게 대항하는 근본주의적 경향으로 나뉘어 갈등하게 되지만 이때 무디는 이러한 自由主義的 傾向은 拒否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상에는 후에 나타난 근본주의적인 요소가 그대로 들어 때문에 그는 근본주의자의 선조였다. 그럼에도 그가 근본주의자들과 같은 범주에 있었던 것으로는 평가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그의 태도 때문이었는데 근본주의자들이 가진 호전적 태도와는 달리 무디는 논쟁을 피했고 시종 평화주의자의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학적 논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회심을 일으키는 사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886년 그는 시카고에 무디 성서학원(Moody Bible institute)를 설립하였다. 내한 선교사들 중에는 장로교 헨리(H. M. Henry) 리트거스(M. Rittgers) 베어드(R. M. F. Baird) 뵈겔(H. Voegel) 말스베리(D. R. Malsbery), 감리교의 힌즈(F. Hinds) 앨버트슨(M. M. Albertson) 등은 무디 성서학원 출신으로 내한한 선교사들이었다. 그는 1879년 그의 고향 메사추세추 노스필드에서 노스필드 회(Northfield Conference)를 결성하였다. 여기에서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선교 운동 단체인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SVM)이 자라 나왔고 수 천명의 학생들이 그들의 생을 선교사역에 헌신하게 되었다. 학생자원운동의 모토는 무디 자신의 목표 바로 그것으로 "이 세대 안에 세계의 복음화"였다.
미국 부흥운동이 한국교회에 전달되게 된 통로는 내한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SVM의 영향 범위 안에 있었기 때문에 무디의 복음주의적 영향은 자연스럽게 선교지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는 당시 미국 북장로교의 해외 선교부 총무였던 스피어(Robert E. Speer)의 역할이 컸을 거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존 매카이(John A. Mackay)는 스피어를 가리켜 위대한 基督敎 宣敎師의 政治家라고 불렀다. 그는 자기시대의 바울과 같은 사람으로 빛나는 열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인물이라고 평했을 만큼 미국 해외선교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는 초창기 SVM의 行政官이었고 1891년부터 1937년까지 미국 장로교 海外宣敎部 總務로 재직하였다. 1897년에 한국을 방문 선교 현장 보고서를 남기기도 하였다.
탁월한 組織力을 가졌던 스피어는 재학생 시절에 이미 학생 자원 운동을 이끌어 110개 대학을 순회 1100명의 학생을 선교사로 모았다. 그러한 그의 재능이 눈에 띠어 그는 미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가 되었고 그의 지휘 아래 1600명의 선교사를 海外로 派送하였다. 그는 존 모트와 더불어 당시 선교 단체 최고의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장로교 뿐 아니라 다양한 교파들을 모으는 탁월한 선교 행정 능력을 발휘하여 에큐메니칼 선교 운동을 확대시켰다.
19세기 후기의 미국 해외 선교가 무디의 부흥운동과 SVM 그리고 무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스피어의 지도력을 통하여 수행됨으로 인하여 그 경향이 전반적으로 강한 복음주의적 신앙과 부흥운동과의 관련성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 북장로교가 선교의 가장 큰 주도권을 행사하던 한국교회가 이러한 특징을 띠게 된 것은 자연스런 것이라고 하겠다.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의 원형은 19세기 후반 미국 복음주의 부흥운동에서 뻗어 나왔던 것이다. 특히 부흥운동 기간의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중 무디의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복음주의 종말론과 한국교회 : 초기 한국교회에서 終末論은 독특한 지위를 가진다. 특히 부흥운동을 통하여 종말론은 강력하게 信者들의 世界觀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 1912년 카나다의 게일(J. S. Gale) 선교사는 1913년「예수의 재림」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초기 북장로교 평양 선교사였던 베어드(W. M. Baird)는 James H. Brooks의 「Till He Come」을 1922년 번역 「쥬재림론」으로 출간하였다. 이 책도 게일의 책과 유사한 전천년설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특이하게 신도들의 공중 휴거와 함께 교회의 휴거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급속한 世俗化의 進展을 末世의 徵兆로 보고 있다.
복음주의와 오순절 운동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聖潔敎會의 김상준은 1918년 「묵시록 강의」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啓示錄을 象徵的으로 해석하며 성결교 특유의 공중 재림 사상을 확립하였다.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과 성도들의 휴거가 있고 심판 후에 교회의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천년왕국에 해당하는 新天新地는 옛 세계의 소멸과 새 세계의 창조가 아니라 改革된 現歷史라고 하였다고 한다. 성결교의 전통 가운데서는 이명직, 김응조, 장장덕 같은 영향력 있는 목회자들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특징을 지닌 종말론을 주장하였다. 장로교의 길선주는 그의 1922년 출판된 그의 「말세학」에서 종말론을 다루고 있다. 길선주의 종말론은 그가 1907년도 대부흥운동에서 가장 탁월한 영적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부흥운동과의 관련성에 그 중요성이 있다. 그는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을 부인한다.1920년대 이후에도 한국교회에는 종말론이 많이 소개되었다. 게일과 베어드의 책 외에도 1922년 E. W. Thwing의 Jesus is Comming Again이「그리스도의 재림」으로 J. G. Holdcroft의 Coming Hope가 「재림론」으로 출간되었고 언더우드와 게일은 「스코필드 성서」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종말 신앙이 天皇制 이데올로기가 강요되어 민족의 主體性과 기독교의 정체성의 위기로 치닫던 일제말에 강력한 抵抗의 에너지로 분출된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공통적 신학 요소가 바로 終末論이었던 것이다. 신사참배 거부자였던 朱基徹 孫良源 韓相東 朱南善의 경우를 통해 나타난 것처럼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信仰的 힘은 원천에는 그리스도의 再臨과 천년왕국에 대한 믿음에서 이를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세대주의자들처럼 당시의 시대를 終末 直前의 시대로 보았고 종말을 計算하는 세대주의적 計算法의 일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現體制인 일본 제국이 再臨主에 의하여 審判받고 또 天皇崇拜나 神社參拜와 같은 偶像崇拜가 심판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복음주의 성서관 : 복음주의의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神學的 典據는 敎理나 信條, 그리고 體系的 신학이 아니라 聖書였다. 무디 처럼 설교의 근간을 신학이 아닌 聖書에 集中시키는 것이 福音主義의 特徵이었다. 복음주의 성서관과 성서 해석의 방법이 복음주의 이해의 중심 요소이고 또한 복음주의 부흥운동 이해의 핵심이 된다.
마르드센은 福音主義 聖書觀의 핵심에 이른바 스코트랜드 常識哲學(common sense philosophy)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中道派들에 의하여 발전된 것으로 그 주도적 인물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토마스 리드(Thomas Reid)와 더글라드 스튜어트(Dugald Stewart)였다. 이 철학은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이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대학을 떠나 1768년 미국의 프린스톤의 전신인 뉴저지 대학(college of New Jersey)의 학장으로 就任하면서 미국에 소개되었다. 1870년에 이미 상식철학은 한 세기 동안 미국 문화에 영향을 끼쳐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전의 50년간 상식 철학은 미국 대학에서 가르쳐진 支配的인 哲學이었다. 상식 실재론은 여러 형태의 浪漫的 觀念論과 경쟁을 벌였지만 미국의 독자적 철학으로 남아있다. 상식 철학은 미국의 문화와 잘 融合하였다. 그 이유는 이 철학이 民主的이고 반엘리트적 傾向을 띠었기 때문이었다.
상식 철학은 인간의 마음의 構造가 實在 世界를 직접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스코틀랜드의 상식 철학을 體系化한 주요 인물인 토마스 리드(Thomas Reid)에 의하면 正常的인 모든 사람은 實在 世界의 存在, 原因과 結果, 自我의 持續性 등과 같은 진리를 믿는다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호흡처럼 自然스런 것이라는 것이었다. 학자에게나 농부에게나 상식은 진리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안내인인 것이다. 여기에는 민주주적 의미가 뚜렷하게 含蓄되어 있었고 반엘리트적 경향을 띤 18세기 미국에서 '상식'은 革命的 標語가 되었다는 것이다.
상식 철학은 19세기의 미국에 呼訴力이 있었다.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이나 啓蒙主義的 인물들 공통적으로 우주가 全知하고 慈悲로운 어떤 창조자에 의해 보장된 하나의 合理的인 法則에 의해 통치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영역에 공통적이었고 상식 철학은 外面 世界가 事實上 겉보기와 똑같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經驗的 構造를 세울 수 있는 土臺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상식 철학은 미국의 道德的 基準을 세우는데 공헌하였다. 聖書에는 道德法이 있지만 그 성서와 일치하는 常識의 機能이 하나의 普遍的 標準이었다. 이간은 실재들을 상식으로 파악하듯이 도덕 또한 파악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초기 한국 선교사인 마펫의 聖書觀은 典型的인 福音主義的 觀點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 선교의 복음주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결코 어떤 불확실 함도 없었다. 대부분의 구성원이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검이라는 확신에 찬 사람들이었다. .... 우리는 우리의 사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그 복음, 곧 초자연적 계시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 이 신앙 때문에 성서는 우리의 선교사역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해왔다.
또한 한국 감리교의 존스(George H. Jones) 선교사는 기독교가 한국에 끼친 가장 큰 貢獻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성서의 韓國語 飜譯이고 둘째는 女性의 地位를 높인 것 셋째는 下層民의 解放을 가져다 준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성서의 번역을 통하요 한국인들은 知的 생활을 향상시킬 수가 있었고 더불어 言語가 福音化되는 것과 더불어 그들의 生活이 福音化 될 수 있었다고 한다. 1912년까지 성서는 무려 1,430,491권이 팔렸는데 한국어로 출판된 책들 중에 이보다 많이 팔린 책은 없었다고 한다. 성서는 한국 기독교인의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선물이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서가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최상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聖書가 韓國語로 飜譯됨으로 인해 漢文에 비해 열등한 지위를 누리던 한글을 救援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성서는 한국에서 오랜 慣習들에 대한 대중의 견해 그리고 倫理的 標準들을 變革시킴으로서 聖書의 變革的 힘을 信憑性있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3. 부흥운동의 정치적 배경 : 한국 근대 민족주의
신채호는 근대 한국민족주의의 이론적 제창자였다. 그는 국가주의, 국민주의, 국민경제에 근거한 민족주의을 제창하였다. 신채호는 사회 진화론을 수용하여 당시 한국이 처한 정황을 설명하고 그 타개책을 마련 하고자 하였다. 그는 국제사회의 질서는 끊임없이 국가간의 생존 경쟁이 벌어지는 각축장이며 그 속에서 우수한 자는 살아남고 열등한 자는 소멸하는 법칙이 관철되는 장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이러한 경쟁이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으로 필연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또한 이러한 진화 과정은 인류가 동물과 구별되는 1기, 동물의 생활을 극복한 2기, 사회 생활을 하는 3기, 국가를 만드는 4기, 인류 공영의 5기로 진화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당시의 당면 과제는 국가를 주체로 하는 경쟁의 참여였다. 그는 이러한 논점에서 國家主義를 주창하였다. 國民은 國家에 從屬됨으로써 最高의 價値를 가지게되며 國家는 國民에게 超越的 存在라는 것이다. 둘째는 국민주의로써 국가 권력의 기원을 국민에게 근거한다고 보았다. 국민 주권에 근거한 국가만이 진정한 국가라고 보았다. 이러한 국가주의와 국민주의를 이루기 위한 실질적 조건이 국민경제의 원칙이었다. 국가 내부의 상호 결합된 국민경제의 확립을 통해 외부 세력과 대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국제 질서를 수용하는 입장에서 전개되었기에 反帝國主義的 민족주의는 아니었다.
신채호는 국가 존속의 최대의 조건은 민족의 생존이라고 보았다. 민족을 역사적 존재,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인간 집단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國粹를 특별히 강조하였다. 합방이전에는 국수의 논리가 한국민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에 맞추어져 있어 역사적, 혈연적, 문화적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정치적 국민 창출의 부수적 이론으로 병존하였다. 그런데 일본에 의해 국권이 소멸 경쟁의 법칙에서 현실적으로 한국이 패배하게되자 민족의 논리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즉 한국민 고유의 것은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어떤 보편적 가치로도 이를 소멸시킬 수 없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모순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것은 민족 고유의 가치를 가지는 것도 사회 진화론의 입장에서 무의미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민족주의의 성격이 변한 이유는 합방 이전에는 사회 진화론에 무게 중심이 합병 후에는 사회 진화론에 근거한 정치적 국민의 창출이 실패함에 따라 국수주의가 전면에 나서게 되고 反帝國主義的 입장의 새로운 民族主義로 발전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같은 무렵인 1901년에 선교사들의 교회와 국가의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에 대한 원칙적인 견해가 발표되었다.
1. 목사들은 나라일과 정부 일에 전혀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2. 한국과 선교사의 모국간의 국제법상의 정책에 따르되 교회 일과 나라 일을 분리하며 교회는 나라일 보는
곳이 아니다.
3. 기독교회에 입교한 그리스도인들을 대한의 백성으로서 국법을 준수하게 할 것이다.
4. 교회는 교인 개인의 정치적 행동을 부추기지도 금하지도 않으며 교인의 정치적 행동에 대한 책임은 교회가
담당하지도 보호하지도 않는다.
5. 교회는 성령의 집이요 나라일 보는 집이 아니므로 예배당이나 교회사택이나 교회학당에서 정치적 집회를
금지하며 특히 목사의 사택에서는 더욱 금지한다.
그러나 초기 이러한 정교분리를 명백히 선언했던 선교사들은 항상 정치적 견해를 유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왜 이러한 변화들이 나타났던 것일까? 우리는 선교사들의 태도를 단기적 변화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장기적 태도를 통해서 볼 때 그들의 일관된 정책이나 사상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실지로 1935년 이후 신사참배 강요가 시작되자 나타났다.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그 원칙을 세웠던 선교사들은 신사 참배 강요를 통해 그들의 궁극적 목표라 할 복음선교와 교회의 본질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게 되자 대다수 선교사들이 이에 강력하게 저항한 사실에서 이러한 선교사의 선교 정책의 일관성에 대한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즉 선교를 위해서는 구한국 정부이든 일본의 식민 체제든 정교 분리의 범위 안에서 협력할 수 있었고 반면 선교사들의 종교적 신념이나 선교 자체에 대한 위협은 강력한 저항이 되었던 것이다. 만일 선교사들이 민족주의적으로 정치적으로 친일적 입장을 견지하였다면 1935년경에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강력한 저항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즉 선교사들의 문제를 보는 시각은 정치적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시각이 아닌 종교적 선교적 시각에서 볼 때 그들의 일관된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민족주의운동의 촉발점과 점환점이 되었던 乙未事變과 乙巳條約을 계기로 한국교회의 民族主義 운동의 흐름이 그 특징을 드러낸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전국적 의병운동이 전개되는 등 강력한 반일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기독교에서도 이때부터 전투적이고 愛國忠君的 교회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1895년의 북장로교 선교보고서에는 한국교회가 애국심을 자랑스럽게 표현하고 있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교인들의 집집마다 교회마다 자발적으로 태극기를 걸었고 민비 시해를 추모하는 예배를 감리교 장로교 합동으로 정동교회에서 연바가 있었다. 또 아관파천으로 피했던 고종을 환영하는 행렬, 고종 탄신을 축하하는 모임이 1896년 9월 2일 모화관에서 열리기도 하였다.
또한 獨立協會와 기독교도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독립협회는 세 가지 세력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었는데 그것은 첫째, 온건 개화로 갑오경장 때 관료층인 건양협회(建陽協會)와 둘째, 외교인들과 서양인들로 이루어진 貞洞俱樂部 세력, 그리고 셋째로 개별적으로 독립개화를 지지하던 독립파 관료 세력이었다. 그 중에 정동구락부 세력이 기독교와 독립협회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을 보여주는 세력이었다. 여기에 속한 인물 중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일합방 직후 일제의 기독교 민족운동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방편으로 조작된 사건이 바로 105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인들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 조작된 일제에 의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최종적 목표는 新民會를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신민회는 안창호에 의해서 주도된 비밀결사체로서 實力養成論에 근거하여 독립국가를 이루되, 내적으로는 봉건제를 청산한 근대적 공화정의 추구와 외적으로는 외세를 배제한 자주독립 국가를 이루는 것을 그 목표로 하였다. 신민회는 평안도 지역에서 광범하고도 세밀한 조직을 구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합방 초기 이러한 애국 단체를 일제는 말살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신민회의 태동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단체가 바로 尙洞靑年會였다. 구한말 기독교 민족운동의 중요한 계보는 상동청년회에서 신민회로 이어지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상동청년회는 1897년 9월 5일 남대문 達城敎會에서 청년들의 신앙 훈련을 목표하여 엡윗(Epworth) 청년회로 시작이 되었다. 그러다 1900년 무렵 해체되었다.
신민회는 상동교회 출신 梁基鐸 李甲 柳東設 李東輝 李東寧 全德基 등이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의 최초 발기인이 되었다. 신민회 조직은 안창호가 개인별로 접촉하여 은밀하게 조직하였다. 양기탁은 신민회를 공개적 단체로 만들자고 하였으나 안창호의 견해대로 비밀 조직이 되었다. 신민회의 근본적인 성격은 국민 계몽적 운동 단체를 넘어서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신민회는 王政制를 폐지하고 共和制를 수립하려는 혁신적인 방안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에 國權을 상실할 경우를 대비한 抗日獨立團體를 구상하고 있었다.
한국교회 안에는 민족주의적이고 정치적 색채를 띤 독립협회 상동청년회 신민회와 같은 계보와 선교사와 그들이 주도했던 비정치적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맥락이 뚜렷한 성격 차이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4. 부흥운동의 전개와 한국개신교의 성격 형성
처음 나타난 이후 지속적으로 한국교회에 영향을 끼치게 될 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거기에는 선교사 하디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디는 1865년 카나다 온타리오(Ontario) 할디만(Haldman) 카운티에서 출생하였다. 1886년 토론토대학 의대를 입학하고 2학년때 해외 선교를 자원하였다. 그의 한국 지원은 게일의 영향이었다. 하디는 에비슨(O. R. Avison)이 토론토 의대 교수일 때 그에게 수학하기도 하였다. 하디 부처는 1890년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토론토 대학에는 카나다 대학 선교회 (Canadian College Mission)이 있었는데 우선 게일이 미북장로교로 소속을 옮기고 하디가 미국 남감리교로 소속을 옮기자 이후로는 이 선교회와 한국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1892년 하디는 원산에 갔고 펜윅의 사택을 진료소로 사용하였다. 그는 의료 진료를 그만두고 복음 사역으로 전환 복음 선교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하디는 한국에 45년간을 체류하면서 한국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였다. 그의 업적은 크게 셋으로 나누는데 첫째는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주도한 것이고, 둘째는 1910년 감리교 협성 신학교 교장으로서 교육에 헌신한 것, 셋째는 문서 운동을 통한 한국교회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부흥운동을 주도함으로써 한국교회의 흐름을 바꾸는 거대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01년 3월 하디는 원산에서 2주간 전도 집회를 연적이 있었다. 그때 한국인들 가운데 처음 回心의 體驗이 나타났다. 그 이듬해 하디는 선교 사역에서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다. 그는 원산의 기독교인들의 입교 동기에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하디가 보기에 그들의 入敎 動機는 신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身邊의 安全을 圖謀하려는 것으로 파악되었던 것이다.
1903년 미국 남감리교의 중국 선교회 소속의 화이트양(Miss Mary C. White)이 한국 방문을 위하여 한국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그녀는 선교사들에게 영적 진전을 위한 査經會와 祈禱會를 제안하였다. 한 주 동안 지속되었던 이 모임을 통하여 참석한 사람들은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되었고 하디 역시 心情의 變化를 體驗하였다. 그는 자신이 완전히 자신감을 상실한 상태에 있었으며 성령의 힘이 결핍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실패가 바로 성령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성령의 도움 없이는 모든 수고와 노력이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성령의 임재 가운데서 평화와 기쁨을 느끼게 되었고 이것이 자신 뿐 아니라 모든 구원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개최된 기도 모임에는 하디와 저다인 그리고 화이트와 카나다 장로교의 맥컬리(Louise McCully) 등이 참석하였다. 하디는 여기서 요한 복음 14장 12-14절, 15-17절, 23-24절을 가지고 효과적인 기도의 세 가지 요소에 대하여 발표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안에 居함,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聖靈의 經驗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이를 준비하면서 바로 자신이 그러한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책 속에서 오랜 시간 기도한 끝에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속죄의 믿음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믿음, 성령의 임재에 대한 체험에서 오는 평화였다. 그는 이 체험을 다른 선교사들에게 나누었고 고백하게 되었다. 하디는 이러한 성령의 체험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의 참된 체험을 한국교회 안에 뿌리내릴 필요가 있음을 느겼다.
하디는 선교 사역 중 한국 기독교인들이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그의 소망과 달리 그런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한국인들은 성서에 대한 지식은 많이 가지고 있었으나 생활은 실제적 행동은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생활의 모습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령의 임재 체험으로 확신을 가지게 된 하디는 다음 주일 예배에서 자신의 변화된 심경을 교인들 앞에서 公開的으로 告白하였다. 자신의 교만, 강팍, 믿음의 부족을 고백하였다. 교인들은 하디의 고백과 그가 그런 변화된 생활을 지속화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罪의 告白과 變化된 生活을 目擊하게 되었다. 교인들에게 필요한 리더쉽은 바로 체험을 공유하고 고백하는 공동체적 고백의 영성이었던 것이다. 하디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고백함으로써 한국교인들은 신앙 생활의 실제적 모습을 경험적으로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하디의 행동은 그가 고뇌하던 한국교회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었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되어 송도, 제물포, 서울로 확산된 일련의 부흥운동은 내용상으로는 전형적인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이었다. 그것은 회개와 중생의 체험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오순절 운동과 같은 방언, 신유의 형상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전반적인 부흥운동의 유형은 먼저 사경회와 기도회를 통하여 부흥회가 준비되었고, 강력한 죄의 회개가 권고되었다. 그리고 나서는 죄를 공중 앞에서 고백하게 하였다. 이러한 公衆告白은 개인적으로 큰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과거의 죄들로부터 벗어 나와 個人 生活을 變化시키는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고백을 통하여 상호간의 신뢰와 이해를 깊게 하여 공동체의 연대가 생겨났다. 그리고 성령을 통한 사죄의 체험으로서 이것은 교인들에게 罪로부터의 解放과 內的 平和를 가져다주었다. 원산 부흥운동의 전반적인 흐름에는 죄의 회개라는 흐름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곤 결과적으로 교인들 간에, 교회간에 연합이 일어났다. 처음에 하디의 내면적 회개와 용서의 체험에서 시작한 이 부흥운동은 비신앙적 동기를 가지고 교회에 들어온 많은 교인들의 신앙적 동기들을 정화하고 순수한 복음적 내향적 신앙으로 전향하는 커다란 전환점이 되게 하였다
1907년도 평양의 대부흥운동은 하디 목사의 감리교 부흥운동의 연장과 확대로 이루어졌다. 원산의 부흥운동은 하디의 개인적 체험에서 출발하여 여러 감리교 지역으로 이행하면서 敎會가 政治化하는 경향으로부터 敎會를 淨化할 수 있는 한 方便으로 宣敎師들 가운데 認識되기 시작하였다. 부흥운동은 1906년부터 長老敎 監理敎의 聯合 集會의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평양 부흥운동은 연합 집회를 통해 평양으로 이행하는 부흥운동을 통해 이러한 비정치화의 작업이 본격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계획된 프로그램이었다. 평양 장로교의 부흥회를 주도했던 선교사의 한 사람인 블레어는 당시 평양 부흥운동이 진행되게된 배경을 몇 가지 지적하였다.
첫째는 韓國敎會의 獨立과 관련되어 있었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를 韓國人 自治의 교회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여 왔고 그 시기는 1907년이 적절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것을 위한 예비로 재정적 자립도를 높여 왔으며, 1907년에는 한국 장로 교회가 독립되고, 신학교를 졸업한 한국인 목사들이 목회 일선에 배치될 계획이었다. 老會가 구성되면 교회의 치리권은 수효가 훨씬 많은 한국인의 손에 넘어갈 것이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아직 經驗이 없는 韓國人 指導者들이 治理를 맞게 됨으로써 일어날 危險을 憂慮하고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신앙의 훈련을 필요로하고 있었다.
둘째는 러일전쟁에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한국은 일본의 관할이 되었고 이에 따라 일어난 激烈한 反日 民族 意識이었다. 결사항전의 '한국을 한국인에게' '노예가 되느니 죽음이 낫다' 라는 구호가 전국에 메아리 쳤고 전국에 걸쳐 秘密 組織이 결성되었다. 의병들은 게릴라 전술을 펴서 거류지를 떠난 일본인은 여행이 위험했다. 선교사들과 한국인 사이의 갈등 또한 증폭을 더하고 있었다.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했고 이에 따라 反宣敎師 感情이 나타나고 韓國人 基督敎 指導者들은 賣國奴라는 指彈을 받았고 심지어 生命의 威脅을 받기도 하였다.
셋째는 미국에서 체류하던 애국적 지도자들의 입국이었다. 선교사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지만 그들의 기독교는 나라를 해방하겠다 마음과 자신의 個人的 野心으로 가득한 사람들이며 교회의 걸림돌로 이해하였다. 이들을 통하여 美國人의 非道德性과 飮酒 그리고 不信仰 風潮를 유포되었으며 이들이 反美 感情을 부추기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한국교회의 독립에 따른 지도력의 확보, 강렬한 민족주의의 영향으로부터 교회의 보호 그리고 격한 반미 감정으로 인한 선교사와 한국교회와의 균열의 봉합, 평양의 부흥집회는 이러한 상황의 돌파구로서 준비되고있었다. 부흥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선교사들 전반에 깔린 기본적인 생각이었고 바로 지금 때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한국인들은 지금 무언가 신뢰하고 의지할 만한 것을 절박하게 갈구하고 있었다고 선교사들은 생각했다. 선교사들은 나라도 국토도 잃은 이들에겐 하나님과 그를 신뢰하는 길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스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가나안의 경계선에 와있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이따금씩 歷史 속에 주시는 그 幾回를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믿기만 한다면 그 기회란 분명히 거대한 부흥이 될 것이다..... 내가 믿기로는 지금 敎會에 必須的인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復興이다.
1907년 1월 2일부터 평양시의 4개 장로교회 연합으로 사경회를 개최하였다. 이 기간 동안 吉善宙의 설교가 매일 있었다. 길선주는 평양 부흥운동을 통하여 나타난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기수였다. 수요일에는 '마음을 열고 聖神을 迎接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이날 집회에서부터 서서히 기도의 열기가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 목요일에는 '이상한 貴賓과 괴이한 主人'이라는 설교가 행해졌다. 세째날 설교는 '地獄을 취하랴 天堂을 취하랴'였고 넷째날에는 사도행전 5:1-11절을 본문으로 '聖靈 앞에 숨을 자는 없다'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1월 6일부터는 사경회와 연결된 기도회가 장대현 교회에서 열렸다. 이 사경회는 남자들만 참석토록 하였고 여자와 어린이들은 다른 곳에 모이도록 하였다. 이 사경회에는 1,500명이 모여들었다. 이 사경회는 힘을 점점 더하여 갔다. 선교사와 한국인 설교자들이 이 모임을 인도하였으며 성령의 임재의 필요성에 대한 설교가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1월 12일 토요일 저녁 집회에서 블레어 선교사의 설교가 있었다. 그는 고린도전서 12:27절 을 가지고 설교하였다. 블레어는 교회 안에 자리잡고 있는 葛藤을 염두에 두고 설교하였다. 이 설교에서 말하는 갈등은 民族主義의 대두로 일어난 韓國基督敎人들과 宣敎師들 사이의 反美 感情과 反宣敎師的 태도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1월 13일은 규칙적인 주일 예배로 모였고 그날 밤 다시 연합 모임이 있었다. 이 날 밤 사회는 베어드 선교사가 맡았다. 그러나 집회는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1월 14일 월요일 낮까지는 커다란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이 날 낮에 모여 다시 기도회를 가졌다. 그리고 월요일 밤 집회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날 설교를 맏은 리(G. Lee) 선교사는 會衆을 향해 通聲으로 기도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나자 기도의 폭발과 같은 기도의 물결이 메아리치기 시작하였다.
내게는 그 기도 소리가 마치 물줄기가 쏟아지는 것처럼 또는 하나님의 보좌를 두드리는 祈禱의 瀑布처럼 들렸다. ....하나님이 항상 회오리바람 속에서 임하시거나 작고 세미한 음성 속에서 임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날 밤 평양에서는 하나님은 울음 소리와 함께 우리에게 오셨다. 기도가 계속되고, 죄에 대한 슬픔과 무거운 분위기가 청중 가운데 임했다. 한쪽에서 누군가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폭발적인 기도의 물결의 흐름이 지나가고 차분하게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게 시작된 기도는 밤 두시가 넘어서야 끝을 맺었다. 기도회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차례로 일어나 자신들이 지은 罪를 公衆 앞에서 告白하는 간증을 하였다. 집회가 끝나고 수백 명이 남아 아침까지 기도 모임을 가졌다.
1월 15일 화요일 낮 선교사들은 기도 모임을 갖고 어제 일어난 일을 감사하며 오늘 저녁에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하였다. 이 날 저녁 길선주 장로의 설교가 있었다. 화요일의 성령의 역사는 월요일보다도 더 강력한 것이었다. 이 화요일 밤 집회를 끝으로 장대현 교회의 부흥회는 일단락 되었다.
부흥운동의 불길은 전국적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길선주 장로는 2월에 서울에 잇는 선교사들의 초청으로 상경하여 부흥회를 열었다. 길선주 장로는 2월 17일부터 서울 중앙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부흥회는 둘째 날부터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300에서 500여명의 사람들이 이 집회에 참석하였다. 모두가 罪를 告白하고 서로가 마음속에 감추어 두었던 미움들을 고백하기 시작하였다. 이 부흥운동이 서울을 강타했다. 미스 베렛(Miss Barrett)이 가르치던 어떤 여학교에서는 기숙사에서 회개하는 울음 때문에 특별 기도 모임이 결성되기도 하였다. 일요일 집회에서는 성서에 기록된 것과 같은 한 귀신들린 청년이 나타나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4월 1일 개학한 평양 신학교는 4월 6일에 부흥회를 가져 강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였고 崇實大學과 崇實中學은 2월에 개학하였지만 정규 수업을 중단하고 부흥회를 가져 90 퍼센트의 학생들이 회심의 체험을 가진 바도 있었다. 선교사들은 각 지방으로 순회 집회를 돌았다. 리는 宣川으로 스왈론은 光州, 헌트는 大邱로 가서 순회 부흥회를 하였다. 3월 16일에 개최된 여성경 학교에 모인 550명의 여성 지도자들에게도 12일간의 부흥회가 있었고 참석자 모두가 성령의 은사를 받고 돌아갔다. 1907년 10월 길선주는 의주에서 부흥회를 열어 교인을 비롯 그 지방 유지들까지 참석하여 큰 체험을 하고 돌아간 일도 있었다. 장로교 뿐 아니라 평양 감리교의 남산현 교회에서도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1907년 2월 10일 주일에 남산현 교회 집회에서도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있었다.
부흥운동은 1907년으로 마무리 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復興運動은 하나의 傳統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百萬人救靈運動' 이었다. 부흥운동의 놀랄만한 성공으로 고무된 선교사들은 이러한 열기를 박차로 대담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백만인을 전도하여 기독교인화 한다는 것이 바로 그 것 이었다.
그것은 開城의 감리교 선교사들에게서 시작되었다. 1909년 개성의 세 감리교 선교사들은 1907년도 부흥운동의 열기가 점점 衰落하는 것을 느끼게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 주간의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가지기로 하였다. 山上에서 열린 이 기도회에서 온 한국민의 구원을 향한 기도가 이루어 졌다. 그 중 한 사람인 스톡스(M. B. Stokes) 목사는 지방 순회 전도를 떠나면서 내년에 5만명의 結信者를 얻도록 기도를 부탁하였다. 이것은 대담한 도전이었다.
1909년 9월에 개최된 남감리교 재한 선교부 연례 모임에서 '20만 명을 그리스도에게로' 라는 슬로건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 직후 福音主義宣敎 聯合公義會(The General Council of the Evangelical Missions) 가 서울에서 소집되었는데 여기서 남감리교의 슬로건이 토의되었다. 여기서 리이드(W. T. Reid)의 건의로 改新敎 全體의 傳道 標語를 채택할 것을 건의하여 이 표어는 ' 百萬 人을 그리스도에게로' 라고 바꾸어 채택되었다.
백만인구령운동은 평양의 부흥회처럼 커다란 부흥의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어떤 전도 운동 보다 광범하게 성서를 배부하고 가택 방문을 하였으며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데에 큰 가치가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애초에 설정한 목표에 훨씬 못 미치는 2,010명이 세례를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적 결과의 劣勢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인들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百萬人救靈運動이 진행된 1910년 여름, 1910년 8월 22일 韓日 合邦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韓國敎會는 이러한 政治的 變化에 조급한 反應을 보이지 않았다. 그 기간 내내 진행된 이 百萬人救靈運動은 체계화된 조직과 재정적 시간적 헌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운동의 목표가 이웃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끈다는 종교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교인들은 이제 부흥운동을 통하여 구세주에 대한 신앙을 내면 깊이 정착시키게 되었고 이것은 植民治下 歷史的 現實의 苦痛을 信仰 안에서 解消하고 지탱하여 나갈 精神的 에너지의 源泉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超越과 歷史를 연결시키는 經驗的 신앙, 聖禮典的 信仰, 成育身的 信仰이 한국교회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5. 신사참배 거부 : 정치적 투쟁인가? 종교적 저항인가?
일본의 천황제는 근대 일본의 정치사적 변동 속에서 탄생하였다. 일본의 개국이전 까지 일본의 정치 체제는 幕府 체제였다. 이러한 막부 체제가 붕괴된 것은 1853년 미국 제독 페리에 의한 강제 개국이었다. 개국을 반대하던 고메이 천황이 조약을 취소하고 서양인들을 물리칠 것을 막부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밀려오는 서구 열강의 군대에 군사력으로 개국을 저지하는 것은 일본의 현실적 능력으로 불가능하였다. 그러던 중 1867년 고메이 천황이 사망하고 明治 천황이 등극하였다. 그러자 幕府打倒論이 고개를 들었다. 당시의 막부였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재빨리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할 것을 밝혔다. 그러나 타도파는 1868년 1월 3일 무장봉기를 통하여 幕府制를 폐지하고 天皇制를 수립하였다.
메이지 憲法에 규정된 일본 천황은 일본이 오직 천황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이며 天皇은 神聖不可侵으로 통치권을 총괄하고 있는 것으로 描寫되었다. 천황의 권한은 법률의 裁可, 執行, 議會의 召集과 解散, 非常時 법률을 대신하는 命令權, 勅令이라는 행정 명령, 관청 제도의 신설권, 관료와 군인 임명권, 군대의 통수권, 조약 체결권, 계엄 선포권, 爵位 수여권 등 막대한 권한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이 명치 헌법은 의회에 의해 제정된 입헌군주적 제도가 아니라 천황이 국민에게 하사하는 형식의 欽定憲法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후에는 聖典으로 취급되었다. 이 헌법의 근본 취지는 自由民權 思想을 억제하기 위해 제정된 것으로 근본적으로 군주권을 옹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에서는 명백한 君主權 제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헌법 4조에 '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總攬하며 이 헌법의 條規를 준수해야 한다 '고 규정하였고 이 조항의 해설 부분에서 헌법 정치는 군주권의 제한을 뜻한다고 분명히 못을 박고 있었다. 이처럼 명치 헌법은 군주권의 옹호와 제한이라는 相衝되고 矛盾된 조항을 가지고 있었다. 헌법의 성격이 이렇게 된 것은 사실 天皇의 政治的 意思를 政府가 獨占하고 그래서 천황의 권한을 크게 함으로써 國民과 議會에 대한 政府의 權限을 强化시키려는 것이 이 헌법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천황은 헌법상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권한의 실천은 오직 정부를 통해서만 가능하였기 때문에 絶對的인 天皇의 權限은 政府의 權限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 파시즘의 원형은 바로 家族主義的 國體論에 근거한 천황제를 根幹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가족주의 국가관은 독일 나치즘의 아리안족 優越主義와 같은 강렬한 民族主義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국체론은 단지 理論的 영역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國體라는 말의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이 경험하는 현실적 국가 체제 자체를 지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家族主義는 傳統的 農業社會였고 따라서 농촌 중심으로 발전한 일본 일반 민중의 傳統的 家族主義 思考에 附合하는 측면 또한 가지고 있었다.
파쇼시대 천황제의 특징은 天皇이 神格化를 밟아가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 1935년 군부의 권한이 최고조에 이를 무렵 군대에서는 천황을 現人神으로 믿고 있었다. 그 이유는 軍部가 天皇을 神格化함으로써 그 권위를 절대화하여 궁극적으로 天皇에 直屬된 軍의 權威까지 絶代化하려는 것이었다.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이루어진 왕정복고는 일본이 천황제를 강화하면서 아울러 국가 신도를 장려함으로 고대 일본의 제정일치적 국가를 구상하여 나아갔다. 특히 天皇制와 國家神道의 結合은 天皇을 神格化하는 데에 나아갔고 日本 軍國主義 政府는 政治的 要素와 宗敎的 要素를 가진 양면적 특성의 체제로 나아갔다. 외형상 제정일치 제도를 선택한 일본의 천황제는 일본 내부의 민권운동을 탄압하면서 매우 情緖的이고 家族主義的인 국가 체제를 이루는 한 편 군국주의와 독점 자본주의가 결합한 침략 체제로 아시아를 침략하였다. 이미 메이지 정부는 그들이 서구열강에게 당했던 강제 개국을 한국에 강요하여 침략국으로 전환하게 된다. 일본 천황제에는 外的으로는 강한 軍事力과 獨占資本主義로 軍國主義의 길을 걸어갔지만 그 核心에는 祭政一致의 宗敎性이 자리잡고 있었다.
신도는 이미 오랜 역사를 통하여 내외 종교들과 관계를 통해 일본 특유의 종교로 자라오고 있었다. 신사는 천황제의 종교성을 강화시켜주고 국민 통합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행하는 중요한 일본 군국주의 이념체계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었다. 신사는 국가제사로서 종교성과 신학은 명치시대를 거치면서 종파신도로 분리되었지만 根本的으로 宗敎性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祭政一致的 성격을 지닌 천황제와의 투쟁은 외적인 정치적, 경제적 항쟁보다도 더 깊은 일제 체제의 가장 깊은 핵심과 투쟁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그런데 韓國敎會가 이 日本 軍國主義 體制의 核心인 天皇制와 對決하였던 것이다.
신사참배 문제가 政治的이냐 宗敎的이냐 하는 논쟁은 일제의 독특한 체제에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다. 일본 天皇制가 明治維新이후 祭政一致를 추구했던 國家神道와 軍國主義의 結合體로서 내부적으로 이 두 가지 요소를 분리하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체제로 구성이 되었기 때문에 이 체제에 대한 저항이 정치적인가 종교적인가 하는 논쟁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는 철저하게 종교적인 요소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일례로 주기철 행정 명령으로 내려진 創氏改名을 행하여 신천기철(新川基撤)로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사참배에는 저항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창씨개명은 신앙의 貞節과는 아무관련이 없었으나 신사참배는 바로 신앙의 핵심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신사참배는 政治的 結果는 낳았을지 모르지만 政治的 意圖가 介入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자들에게 부과 된 罪名은 宗敎的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國體變革의 음모자들이라는 일제의 體制 抵抗者들이라는 죄명이 부과되었던 것이다.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검속한 뒤 작성된 예심종결서에는 이들에게 적용한 죄를 國體變革을 기도한 반국가 반체제 사범으로 처리하려하였다. 이들은 모두 천황의 신성을 거부하고 신사참배를 기독교 律法의 가장 큰 죄인 偶像崇拜로 간주하였고 現歷史가 멸망 받을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결국 일본의 멸망을 초래할 것이라는 이념을 撒布하여 '개국이래의 국가관념, 국민감정을 어지럽히고 현존 질서를 동요케 하여 만세일계의 천황통치인 日本의 國體를 變革'할 陰謀를 企圖하였다는 것이 그 起訴 내용의 골자였다.
최종 재판의 판결문도 동일한 요지를 띠고 있었다. 1942년 순천노회 박해 사건의 판결문에 나타난 것을 보면 당시 기소되었던 15명의 판결 내용의 주요 골자 또한 反體制的 國體變革의 음모 기도였다. 판결문에는 이들이 그리스도 재림 이후의 천년왕국 사상으로 현 일본 체제를 전복하려는 國體變革을 기도하였다는 것이 그 판결의 핵심이었다. 결국 신사참배 거부 투쟁은 외견상 정치적 압박을 받았지만 내용상은 한국의 복음신앙이 일제의 체제를 우상숭배라고 규정함으로써 발생한 종교적 신앙 투쟁의 성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부흥운동을 통해 형성된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적 신앙이 이 신사참배 거부 투쟁의 원초적 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부흥운동을 통한 신앙 내연의 특징은 個人的 次元과 共同體的 次元 두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형성되었다. 우선은 개인의 罪性과 그 위기의 심각성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한 죄의 성격의 심각성은 부흥운동 기간 내내 각 사람의 回心과 罪의 告白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容恕의 體驗과 성령의 은사들을 체험하게 됨으로써 각 개인의 체험 속에 깊이 刻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체험은 신앙인의 內面으로부터 絶對的 超越的 존재에 대한 믿음과 그의 역사 主宰와 攝理에 대한 신앙의 絶對性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앙 체험이 가지는 力動性은 현존하는 질서들의 한계와 그 限界들을 直視하게 하며 따라서 현실을 뛰어넘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복음주의와 일제와의 대결 양상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되었다. 天皇崇拜와 神社參拜는 한국교회에게 기독교의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하였다. 복음주의자들에게 天皇制 종속된 일본적 기독교라는 이름의 교회란 이미 자신들이 신앙하던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근본적으로 복음주의는 偶像化되고 絶對化될 수 있는 地上的 요소들을 배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위기를 통과하는 것은 全的인 투쟁 뿐 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복음주의적 그룹들 특히 성서 중심의 신앙과 경건으로 일관된 그룹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신앙을 통해서 그들이 최후의 저항을 수행할 수 있었던 그 내연적 에너지의 내용 즉, 信仰의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하나님을 絶對的으로 신앙하고 따라서 相對的인 것이 絶對化하는 것을 打破하는 偶像崇拜의 拒否가 그 하나였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再臨과 그의 審判을 통해 義人의 구원을 待望하는 終末論이 그 두 번째였다. 이러한 신학은 부흥운동을 통하여 형성된 한국교회 복음주의 신앙이었다. 이러한 하나님 절대의 신앙은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신앙의 중핵으로서 이 神觀 그들의 歷史觀이나 世界觀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6. 맺음말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이었다. 福音主義는 聖書를 强調하고 回心 體驗과 傳道 活動, 그리고 十字架 信仰을 강조하는 18세기 英語圈에서 일어난 信仰運動이었다. 복음주의는 다양한 개신교 전통의 혼합물로서 정교한 이론적 신학 체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그 신앙 형태가 매우 力動的인 측면이 있었다. 한국교회는 복음주의적 성향이 짙은 선교사들에 의하여 선교가 되었고 한국교회 부흥훈동은 복음주의 신앙이 깊이 자리잡게 되어가는 福音主義 신앙의 內向化, 內燃化의 과정이었다.
일제말기 이 최후의 저항을 통하여 福音主義는 값진 승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일본적 기독교로의 강요와 신사참배 강요에 의해서 한국교회의 신앙의 근본적 정체성이 무너질 때 보수적 복음주의 신앙인들로부터 저항이 야기되었다. 이들은 神社參拜를 偶像崇拜이며 基督敎 信仰의 危機로 단정하고 결사 항전하여 빛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이들의 신앙의 승리는 그들의 절대불변의 聖書中心의 신앙과 주의 再臨을 待望하는 終末論的 信仰을 통하여 그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신앙은 복음주의 신앙의 정수로서 바로 復興運動을 통하여 形成된 福音主義 信仰의 核心的 內容이었다.
신사참배 거부 투쟁은 보수적 복음주의 신앙이 가지고 있는 靈性이 비현실적 비역사적인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복음주의 신앙이 저항과 순교라는 강인한 에너지로 외연될 수 있었던 것은 실재론에 근거한 신앙에서 비롯한다고 할 수 있다. 부흥운동과 신사참배 거부 투쟁 사이의 관계를 통하여 基督敎는 다른 어떤 外的인 活動이나 外的 理念과의 결합이 아닌 基督敎 信仰의 內容 그 자체가 가장 큰 歷史 變革의 에너지임을 밝히게 되었고 基督敎는 信仰으로서만 歷史에 가장 크게 貢獻할 수 있다는 것을 史實로 立證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