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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2세로 아버지 반대에도 험난한 야당
정치인의 길 자원 → 청와대 비서관으로 발탁 → 다시 최연소 차관된
김무성 내무부 차관
(사진 캡션)
그는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당료생활을 할때, 그는 툭하면 전직원을 데리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보고, 짜장면 먹고, 영화보고, 저녁먹고, 영화를 봤다.
"아무 생각없이 몰두 할 수 있어서 좋거든요"
지난 12.23 개각 이후 단행된 차관급 인사에서 최연소 차관으로 주목을 받았던 김무성
내무부 차관. 그는 전남방직, 신한제분 새항상호신용금고 등을 거느린 전방 그룹 창업주의 3남으로 사업가의 길을 가다 험난한 야당생활을 자처하면서 정치권에 입문한 특이한 이력의 주인공이다. 그가 최초로 공개하는 나의 정치입문기
일요일만큼은 철지히 가족과 함께 보낸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자집도 가고, 도시락을 싸 들고 미사리 조정경기장 잔디밭에 가 공놀이도 한다
그는 전방그룹 창업자인 고 김용주 회장의 4남 1녀 중 3남. 큰 형님은 부친의 뒤를 이어 가업을 잇고 있고, 둘째 형과 막내 동생은 각자 사업을 한다. 누님은 용문중.고등학교 이사장
오는 5월, 서울필하모니오케스트라와 협연 계획을 가지고 있는 아내는 서울 음대, 미국 맨하탄 음대, 파리고등음악원에서 수학했다. 큰 딸과 작은 딸이 바이올린을 켤 때 그는 뭘 할까. “그냥 구경하죠”
“호감가는 인상이고, 성격이 원만한 것 같아 좋아했는데 결혼 초에는 많이 속상했어요. 결혼 잘못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도통 말이 없는 거예요. 무뚝뚝하고. 경상도 남자가 다 그렇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올해 국민학교에 입학하는 막내아들 종민이. 늦게 얻은 외동아들이기도 하지만 개구쟁이라 종민이는 집안 식구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김무성 내무부 차관
51년 신묘생인 김무성 신임 내무부 차관.
상도동 가신 그룹 3기생인 그를 대중 앞에 소개한 이는 김영삼 대통령이다.
40대 초반의, 형정경험이 전무한 청와대 민정비서실 사정비서관인 그를 내무부 차관에 임명, 국민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준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최연소 차관'이란 점으로 주목받던 그를 화제의 인물로 부각시킨 것은 야당 최고위원들이다.
‘김무성 청와대 사정비서관의 내무차관 기용에 대해 최고위원회에 보고 했더니 폭소를 터뜨리면서 더 이상 거론할 필요도 없다고 하더라’며 비아냥거린 야당 대변인의 코멘트.
스물일곱에 철강회사 운영했던 청년 사업가
김무성. 누구길래?
이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YS란 ‘키’를 가지고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대통령께서 단식을 끝낸 뒤였으니까 83년 말경이죠. 경남중.고등학교 총동창회에서 처음 뵈었는데, YS를 푸대접하는 거예요. 연설순서도 뒤로 잡아놓고, 의식적으로 멀리하고... 평소 존경하던 선배가 공개석상에서 그런 대우를 받는 걸 보니까 울화가 치밀더군요. 그래서 옆에 가서 이런저런 말씀을 드리면서 인사를 드렸지요”
그때 그의 나이 서른셋. 전방그룹 차업주인 부친 고 김용주 회장이 떼어준 사업체를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작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신한제분에 몸담고 있던 때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 바로 윗 형님과 포항에서 동해제강이란 철강회사를 경영했는데 처음엔 무척 잘 되었어요. 자동차 부속품인 볼트너트를 제조, 생산했는데 70년대 중반 이후 자동차 산업이 얼마나 호황이었어요. 포니 1백만대 수출이라고 온 나라가 떠들썩했잖아요.
그래서 은행 융자받고, 외자 도입해서 최신식 기계 설비를 갖추며 사업을 확장했는데 10.26으로 인해 부도가 났어요. 정국이 불안정하다보니 수출이 안되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납품 물량이 줄어드는 거예요. 판로도 줄어들고. 그건 자동차 부품 생산업체인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장벽이었죠. 제조업에 종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정말 뼈저리게 절감했어요.”
종업원과 피를 나누며 일군 회사, 10.26으로 5년만에 문 닫다
그때의 허망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까. 스물여섯 혈기왕성한 나이에 물설고 낯선 포항에 내려와 시작한 사업이었고, 설이나 추석도 없이 5년동안 일만 하고 일만 생각하며 종업원들과 피를 나누면서 가꾼 회사였다.
“공장장으로 있을 때였는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근로자가 지게차를 타고가다 떨어지면서 옆구리를 기계에 받쳤는데 출혈이 무척 심했어요. 수혈을 받아야 하는 상황까지 갔는데 피가 없는 거예요. 다급한 마음에 제 피를 뽑아 수혈해주면서 그 위기를 넘겼는데 그 일을 계기로 공장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어요. 말 그대로 한 식구란 연대감도 쌓이고”
그 일을 겪으면서 그를 대하는 종업원들의 시선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애송이’ 공장장이란 냉소적인 눈길도, 고용주에 대한 이유없는 반감도 줄어들었다.
그가 헌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그 일이 계기였다.
“8백여 종업원과 함께 코카콜라 작은 병 정도 되는 3백50CC를 헌혈한 뒤 모두 헌혈증을 받았죠. 쇠를 다루는 사업장이기 때문에 사고가 났다하면 대형사고라 항상 피가 필요했거든요.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어요. 지금은 좀 덜하지만 헌혈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던 때였잖아요. 헌혈한 다음날 다시 수혈받은 이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왜 아까운 피를 쓸데없이 뽑느냐고 아내에게 야단맞았다’며 피를 다시 넣겠다며 수혈을 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헌혈한 다음날 수혈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 열정으로 영일만의 차가운 바람을 헤치며 키운 사업체였고, 서로에 대한 믿음 하나로 79년 말부터 80년 초의 극심한 노사분규파고도 슬기롭게 넘긴 사업장이었다. 하지만 경기침체로 인한 불황의 소용돌이는 그들이 빠져나오기에는 너무나 거세고 깊었다.
침체된 경기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빚은 눈동이처럼 불어나고... 자연히 회사는 자금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1953년, 6.25의 폐허 속에 회사를 설립해 그룹으로 키운 부친에게 손을 내밀고 싶지는 않았다.
집 팔고, 비축금을 털어 밀린 임금과 해고수당을 지불하고, 깨끗이 사업을 정리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공허한 그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선 것은 고등학교 시절, 3선 개헌 반대 시위가 좌절되면서 접어두었던 ‘정치에 대한 관심’이었다. 작은 아버지가 경영하던 신한제분에 근무하면서 그가 중학교 선배인 YS팬임을 자처하고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정치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어린 시절부터 자라왔다.
“부친의 영향이 컸죠. 국민학교 2학년 때, 민주당 참의원 선거에 출마한 부친을 따라 선거 유세를 다녔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요. 트럭 위에 올라타고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면서 밤새도록 접은 전단 나눠주면서 악수하고, 박수치고, 연호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그때의 호기심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이를 먹으면서 더욱 커졌다. 4.19직후, 실시된 의원 선거에 출마 경남 참의원에 당선되어 민주당 원내총무를 하던 부친이 5.16 직후 수배를 당하고, 부친이 경영하던 사업체가 외압에 시달리는 시련을 직접 목격했지만 그의 호기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더욱더 강렬해질 뿐이었다.
고등학생 때, 3선 개헌 반대 시위 모의하다 발각되기도
고등학생이던 70년 초, 김대중씨가 운영하던 한국내외문제연구소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대달 개최했던 강좌에 학생 신분으로 매번 참석한 것도 정치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친구 3명하고 어울려서 다녔어요. 유진오, 김대중, 김상현씨의 강연을 들었는데 그 때문에 학교에서 인기 좋았죠. 그때 정부에서는 전쟁이 날 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사회분위기를 몰아갔는데 유 박사 강의를 들으면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였거든요. 그래서 유 박사가 한 말을 그대로 기억했다가 아이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하면 모두들 넋놓고 제 이야기를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학창시절의 그 치기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장기 집권을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3선 개헌안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부친으로부터 엄한 질책을 받았던 것.
“중동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있지만 그때는 종로통에 중동, 경복, 경신, 경기 등 12개 고등학교가 밀집해 있었어요. 12개 학교 학생 3만명이 연합 시위를 하면 그 당시 경찰력으로는 막을 수 없었는데... 각 학교 대표들이 이것을 모의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발설하는 바람에 사전에 들통이 나고 말았지만. 물론 모두 경찰서에 불려갔죠.
그 일로 부친도 경찰서에 불려갔다 오셨는데 부친이 그러시더군요. ‘네가 나쁜 짓 해서 불려간 것이 아니고 옳은 일하다가 그렇게 된것이기 때문에 난 부끄럽지 않다. 네가 자랑스럽다. 나도 개인적으로 박 통을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배고픔의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민주는 그 다음이다. 지금은 참고 기다려야 할 시기다’ 그 말씀에 ‘아니다’ 라고 할 수 없었어요. 사상적으로 미성숙하기도 했지만, 저로 인해 집안에서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너무 컸거든요”
부친이 운영하던 사업체에 이유없는 압력이 가해졌다. 영국에서 들어오기로 했던 차관이 갑자기 취소되고, 누님이 운영하던 용문 중.고등학교에 제재가 가해지고, 그의 뒤에는 항상 형사가 따라다녔다.
결국 그는 다시는 현실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다.
“솔직히 어렴풋이 정치에 대한 매력을 느끼면서 스물여섯, 서른 다섯, 마흔, 쉰 하면서 나이를 헤아리기도 했죠. 하지만 그 일을 겪고 난 뒤, 캠퍼스 생활을 하면서 정치란 스스로에게 부끄럼없이 살았다는 자신감이 선 뒤에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정리했죠”
한양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뒤에도 그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평범한 학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부친이 경영하던 (주) 전방의 말단 사원으로 입사하고, 형님과 함께 운영하던 동해제강의 과장으로 사업을 배우고, 종업원과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혼신의 힘을 다해 일에 매진한 것도 세상읽기의 한 과정이었다.
그런 그에게 83년, YS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5.16 이후 정치적 시련을 겪었던 부친의 ‘정치는 우리 집안 사람 성격과 맞지 않으니 절대 하지 말라’ 유지를 거역하고, 부친이 물려준 부와 기반을 뒤로 하고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다.
“85년 2.12 총선 전까지는 후원자였죠. 집안에서 정치하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지만, 사회분위기가 드러내놓고 야당을 지원할 수 없었잖아요.
2.12 총선 유세기간 중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그때 YS가 부친 빈소에 문상을 오면서 제가 정치에, 야당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 주변에 알려지기 시작했죠. 그때 YS는 연금 중이었는데 연금을 뚫고 빈소까지 직접 문상온 YS를 보고 한마디로 감격했습니다”
83년 말, YS와 첫 인연 85년 2.12 총선 뒤에서 돕다
그 이후 그는 정치에 본격적으로 몸을 담는다.
YS의 민족문제연구소 이사, 민주산악회 포항, 영일 지구당 위원장, 통일민주당 창당 발기인, 통일민주당 총무국장, 민자당 의원국장, 김영삼 후보 추대위총괄국장, 민자당 총재 정책 보좌역, 14대 대통령 인수위원회 행정실장 등을 역임하면서 그는 YS측근으로 부상하고, 신정부 출범과 더불어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청와대 비서실 민정 비서관으로 YS와 함께 청와대에 입성하게 된다.
인맥과 학맥이 중요시되는 정치판에서 ‘확실한’ 끈이 없던 그가 십여년만에 YS의 핵심측근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을 사람들은 그의 탁월한 이재술과 치밀함으로 꼽는다.
그가 87년 통일민주당 창당 후 서울 중림동 당사를 구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야당가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가 털어놓는 이재에 얽힌 또 하나의 일화.
“통일민주당 재정국장으로 13대 대선을 치렀는데, 투표 전날 대세를 판가름해보니까 이미 대세가 상대편쪽으로 기울었더라구요. KAL기가 떨어지고 날리였잖아요. 그래서 투표 바로 전날 당사로 빚쟁이를 모두 부른 다음 그랬어요. ‘내가 지금 줘야 할 돈은 몇억원인데 가진 돈은 절반뿐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빚잔치를 하든지 그게 싫으면 선거 끝난 다음에 보자’ 난리였죠.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서부터 험한 소리도 하고...‘알았다. 그럼 선거 끝난 다음에 보자’ 그 말만 되뇌이면서 베짱을 보였죠. 그렇게 해서 빚 한 푼 안지고 선거를 끝냈던 거예요.”
그의 치밀함은 청와대 민정비서실 사정담당 비서관으로 일하면서 진가를 발휘한다. 사정1비서관은 사정기획과 정부괴위직의 비리 체크가 주 업무.
그가 내무부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22개월동안 그를 데리고 있던 김영수 민정수석비서관은 한 인터뷰에서 김 차관을 이렇게 평했다.
‘김무성 사정 비서관은 아주 우수합니다. 김 비서관은 검사 출신으 법률담당 비서관도 놀랄정도로 박학하고, 사물을 크게 보고, 사업 경험도 있고...’
김 대통령이 다소 파격적이란 소리를 감내하면서까지 그를 차관으로 승진발령시킨 것도 그동안 사정업무를 무리없이 수행했다는 긍정적인 평가 때문이다.
- 김 차관의 승진 발령을 ‘15대 출마를 위한 경력관리용’이란 말이 많은데요
“오랜동안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지만, YS는 한 개인의 경력관리를 위해 인사를 단행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는 6월에 치러지는 4대 지방선거를 통해 선거혁명을 이루라는 특명을 내리신 것으로 전 해석합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패불감증은 선거를 통한 선거혁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근본적으로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이 대통령의 확고한 생각이거든요”
-행정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이 핸디캡으로 지적되는데, 이런 시각에 대해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저도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전 행정이 특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행정은 바로 우리의 일상생활이 아닙니까. 그 가운데 제가 할 일은 우리의 생활이 원활하게 돌아가게끔하는 윤활류라고 생각합니다.
전, 도식적이고 관습적으로 굳어진 시각으로 행정 업무에 임하는 것보다는 이제는 행정에도 새로운 시각, 진보적인 안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업도 해보았고, 국회에서 의회정치의 매커니즘도 익혔고, 2년 동안 청와대에서 각 분야 행정을 들여다 보았고... 큰 걱정은 안합니다”
사업과 정치가 병행되면 깨끗한 정치를 할 수 없다
- 각 일간지에 난 프로필을 보면 ‘호남형’이란 설명이 빠지질 않는데 학창시절 여학생에게 인기가 좋았겠습니다
“(웃음) 근데 난 연애 한번 제대로 하질 못했어요. 연애를 하려면 둘 만의 시간이 필요한데 친구들과 어울려다니는 것을 더 좋아해서 그럴 기회가 별로 없었거든요. 지금까지 아내가 두고두고 저에게 섭섭하다고 하는 것도 그 점이에요. 오붓한 데이트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결혼했다는 거”
그가 숙명여대에서 피아노 실기를 가르치고 있는 아내 최양옥(39)여사를 만난 것은 81년 서른한살 때다. 현재 전방그룹을 운영하고 있는 큰 형 친구가 다리를 놓은 중매였다.
그 당시 최 여사는 경기여고, 서울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 맨하탄 음대 대학원 1학년에 재학중이었고, 그는 부도가 난 동해제강을 정리하고 있었다.
“저하고 여섯 살 차아가 나니까 아내 나이 스물여섯일 때였는데 순진한 것이 마음에 들었어요. 하얀 백지와 같았거든요”
남편을 편안하게 해주는 아내가 최고라는 보수적인 그의 여성관에 맞춤한 상대였다. 최양옥이란 여자는 남성보다 앞서서 걷기를 원하는 여성이 아닌, 남성이 앞에서 끌어주기를 원하는 여성이었다.
- 일반적인 시각에서 볼 때 재벌기업 자제의 야당 정치입문이란 것이 낯섭니다. 특별한 뜻이 있었던 선택이었습니까
“사업가는 모두 여당을 한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부친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정치와 가까워졌고, 그러면서 YS를 만나게 된 거죠. YS에게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데 여타의 정치인과 달리 ‘깨끗하다’는 점 때문에 YS를 선택했습니다. 저는 후세 사가들이 YS를 논할 때 ‘대통령 YS가 돈을 받지 않은 점’을 가장 크게 평가하리라고 봅니다”
- 사업을 하면서 정치를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분도 많고
“사업을 하면서 정치를 하면 깨끗한 정치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또 계산하고 따지는 사업보다는 정치가 훨씬 좋고요”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사나이로 태어나서 문민정부 수립에 일조를 했다는 것에 보람과 자부심도 느끼고, 나라의 녹을 먹은 이상 더 이상 원도 한도 없습니다. 야당의 길을 걷는 저를 옆에서 지켜봐주셨던 주위 분들과 가족에게도 떳떳할 수도 있었고요.
더 이상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앞으로 뭐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목숨걸고 YS를 보필하겠다는 생각뿐입니다. 그게 곧 국가에 헌신하는 일이니까요”
부호 집안 출신의 기업인으로는 드물게 험난한 야당생활을 하며 차세대를 이끌 상도동 3세대로 주목받고 있는 독특한 이력의 신임 내무부 차관.
그는 무미건조한 제복보다는 캐주얼한 복장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고, 사진 촬영차 집무실을 방문한 기자 일행을 맞이하면서 클래식 음악을 틀 줄 아는 유연한 감각의 소유자고, 기자와 첫 인터뷰를 하는 아내가 못미더운지 거실을 왔다갔다 하면서 ‘다 들통나는 게 아니냐’며 불안한 심경을 그대로 내비치는 꾸밈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관료적인 공무언 사회에, 내무부에 어떤 바람을 불어넣을지 자못 궁금하다.
“내무 행정은 종합 행정으로 대국민 서비스 행정인데 백화점 수준에는 못미치더라도 군림하는 자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을 꾀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