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초가을 밤 사랑고백 사연 담겨 있어
작사가 박건호 씨 여인과의 이별소재로 탄생
이용 취입…1982년 가요대상 휩쓸며 대히트
박건호 작사, 이범희 작곡, 이용 노래의 <잊혀진 계절> 가사이다. 4분의 4박자 슬로우 고고 풍의 이 노래는 가을이면 자주 전파를 타는 대중가요이다. 노랫말이 주는 분위기에서도 그렇지만 한 남녀의 애틋한 이별과 관련된 느낌이 물씬 풍긴다.
인기대중가요엔 노래의 탄생에서부터 히트하기까지의 뒷 얘기가 많고 만들어진 사연들도 있게 마련이다. <잊혀진 계절> 역시 마찬가지다. 이 노래는 작사가 박씨의 대표작으로 그가 알고 지내다 헤어진 한 여인에 대한 이별의 추억을 그린 것이다.
노래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 1982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9월의 어느 날 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씨가 평소 친구처럼 사귀던?‘정아’란 여인과 서울시내에서 술을 마시게 됐다. 술을 잘 못했던 그는 그날 따라 2홉들이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취해 있었다. 함께 있던 그녀는 걱정이 돼 주인에게 술값을 치르면서 “더 이상 주문을 받지 말라”고 일렀다.
박씨는 얇은 여름옷을 입고 있어 찬바람이 옷깃을 스몄고 술에 취한 나머지 왠지 쓸쓸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 여인과는 ‘사랑’이란 말을 주고받을 만큼의 관계가 아니었다. 자주 만나 얘기하고 서로가 공감하는 정도의 친구였다. 그러나 그날 따라 박씨의 감정은 평소 같지 않았다. ‘나 혼자만의 짝사랑일까?’그는 자신에게 의문을 던지며 ‘차라리 헤어져 버리자’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박씨의 마음을 아는지 그녀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박씨를 부축, 버스에 태워주며 안내양에게 “이 분 흑석동 종점에서 내리게 해주세요!”하고 부탁까지 한 후 헤어졌다. 버스는 그날 따라 만원이었다. 박씨는 문 쪽에서 흔들리며 서 있다가 자신의 집이 있는 흑석동까지 가지 않고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버렸다. 버스에서 내린 그는 그녀가 간 쪽을 향해 내달렸다. 그날 밤 그녀에게 무언가 꼭 할 얘기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거리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고 빗물에 옷이 흠뻑 젖어 한기가 들었다. 한참을 달려간 그의 눈에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서울 동대문에서 창신동으로 꺾어 들어가는 곳에서 그는 숨이 턱에 닿는 목소리로 “정아 씨!”하고 불렀다. 그녀는 깜짝 놀라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박씨는 그녀 앞으로 달려가 “사랑해요!”한마디 말을 던지고 얼른 도망쳤다. 용기를 내어 말은 했지만 다음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두렵기도 했고 쑥스러웠던 것이다.
박씨는 달리면서 ‘아! 나는 왜 근사하게 사랑고백을 하지 못했을까?’하며 후회를 했다. 사랑고백을 들은 그녀의 놀란 표정이 계속 따라오는 것을 박씨는 느꼈다. 그 후 두 사람의 만남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그 날밤 이별의 경험이 박씨를 두고두고 괴롭혔다. 피어나지 못한 첫사랑의 아쉬움만은 아니었다. 뭔가 찝찝하고 아쉬운 비 내리는 9월의 밤 이별 때문일까.
박씨는 당시 신인작곡가였던 이범희 씨의 곡에 자신의 이 같은 사연과 느낌을 노랫말로 새겨 넣어 가수 이용이 취입했다. <잊혀진 계절>이란 제목으로 탄생된 노래는 성공작이었다. 노래가 전파를 타고 선을 보이자 음반신청이 쇄도하는 등 대중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실업자에 가까웠던 작사가 박건호와 신인작곡가 이범희, 무명가수였던 이용이 한방에 뜬것이다.
이 노래는 그해 말 MBC 최고인기상, KBS 가요대상 작사부문상, 카톨릭가요대상 수상 등 가요관련 상들을 휩쓸었다.
이용은 올해 나이 48세로 1999년 봄학기부터 대전 우송정보대학 방송음악과 겸임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1981년 서울예전 재학 때 ‘국풍81’대학가요제에서 금상을 받으면서 가수생활을 시작한 이용은 1985년 미국유학을 떠나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 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하기도 했다. 가수 김지애의 <몰래한 사랑>, 하춘하의 <사랑은 길어요> 등이 그가 작곡한 노래들이다.
한편 <잊혀진 계절> 노래가 히트하자 밑도 끝도 없는 말들이 돌았다. 박씨의 이런 사연을 모르고 유신의 후예들이 1979년 10·26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추모해 만든 노래라는 등 헛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이 노래의 또 다른 뒷얘기로 노랫말 중 ‘시월의 마지막 밤’이란 표현이 나온다. 이는 원래 ‘구월의 마지막 밤’이었으나 노래 발표시기와 느낌상의 문제로 취입 전에 바뀌었다. 또 중간 도입부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쓸쓸했던 표정이’란 표현도 ‘씁쓸한 표정이’가 바뀌어 취입된 것이다. 노래가 졸지에 뜨자 어쩔 수 없이 그 부분을 ‘쓸쓸했던 표정이’로 굳어버렸다.
이 노래는 박씨가 애초엔 가수 장재현이 취입토록 작사했다가 여러 사정상 이용에게 넘어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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