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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행기
올여름 아빠의 20년 휴가가 결정되어 온가족이 중국을 가자고 의논하여 여행코스를 아빠가 아시는
후배분의 교사특별 여행 코스 7박 8일을 소개 받아 출발 하게 되었다.
휴가 일정을 맟추기란 모든것이 힘들었지만 일정대로 진행 하기로 아빠엄마가 결정 하였다.
우리가족과 아빠 후배가족인 아영이네 가족과 2004년8월10일 12시에 충주에서 아침 일찍 짐을
챙겨 승용차로 인천항으로 출발하여 인천 연안부두 15시경 도착하여 아시는분 회사에 차를 주차하고
(공항 주차비가 1일 만원) 점심 연안횟집에서 식사를 하었다.
<인천 횟집에서 아영이네 가족> <인천항 국제 여객 터미널>
인천항의 한미은행 앞에서 전국에서 오신 고등학교 선생님들과 서로 인사하고 일정 계획을 가이드
선생님께서 설명이 있었고, 또한 가이드 선생의 남편께서는 장호원공고 국어 선생님 이였으며
서울예고 역사선생님 부부,포항제철공고 전기과선생님 두분,광주여고역사 여선생님 한분,광주고등학교
국어선생님, 아영이가족 네명,우리가족 네명 모두 16명 한팀을 이루어 단체로 출발 하였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8월10일 21시에 배(자정향호)에 올라 방을 배정 하고 ,4인 가족 특실에는
침대,옥실,화장실,TV가 있으며 ,배에는 식당 ,매점,영화관,수영장 ,오락실 등이 구비된 아주 고급형
자정향호 었다.
<배 침대에서 동생과 함께> <2인용 침대>
배 생활이 8월10일 21시 출발 8월11일 22시에 영구항에 도착 하여 버스를 타고 영구 호텔로 이동
숙소에 머물게 됬다.
호텔은 별 4가 짜리인데 우리나라 장급 여관보다 못하다고 아빠께서 말씀 하시고,방에는 콘센트가
떨어저 있고 옥실 수도는 나오지 않아서, 불편함이 많았으며,또한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하였다.
<배 선상에서 밤에 동생과 함께> <영구호텔 아침 식사 모습>
호텔에서 아침 5시에 일어나 (중국 시차는 한국시간 보다 한시간 늦음 한국시간으로 6시) 호텔에서
식사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안산시로 이동 이동중 길옆에는 옥수수 밭 박에는 보이는곳이 없으며
영구에서 안산시 까지 5시간 걸린다고 하여 중간에 시골 장터에서 과일과 중국 호떡을 사먹고
(가격은 포도 한근에 3위엔(원)(한화450원정도),호떡1원(150원정도),물은 2원(300원정도) 안산시로
출발 옥불관(옥으로만든 불상) 을 구경 하였다.
<중국 시골 장터> <버스안에서 "나"> <중국 옥수수 밭>
*안산(鞍山) 옥불원을 구경 하러 안산에 도착 하여 불상에 인사하고 불상과 함께 사진도 한장
몰래 촬영(불상앞에서는 촬영이 금지 되었으나 기행문을 위하여 찰칵 한장)
<옥불관에서"나"> <옥으로 만든 불상앞에서"나"> <옥불상에서 가조과 함께>
이해를 돕기위해 옥불상에 대하여 가이드 선생님의 설명을 잠시 즐거리를 이야기 하면!
중국에는 희귀한 것들이 많이 있는 나라임에는 분명하지만 요녕성(遼寧省) 본계(本溪)에는 수동(水洞)이 있고, 안산(鞍山)에는 옥불원(玉佛苑)이 있다.
안산시는 심양에서 약 7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우리나라 경기도 안산(安山)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로 인구가 300여만명, 중국 제일의 철강도시 이기도 하다.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옥불원(玉佛苑)과 아름다운 천산(千山)이 있으며, 요즈음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탕강자 온천이 유명하다. 탕강자 온천은 한국인들이 경영하는 곳이 많이 있다.
1996년 9월3일 웅장한 건축물인 옥불원이 사람들의 경탄을 받으면서 세계 제일의 옥불상이 준공되었다. 2년 6개월만에 신비한 자태를 드러내 놓았으며, 1997년에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한 옥불상이다.
옥불원의 총 면적은 4만㎥ 삼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사면은 숲으로 우거졌다. 옥불상은 옥불각(玉佛閣)내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옥불각의 높이는 33m 너비 66m 길이58m인 대형 건축물로 웅장하며, 금빛으로 찬란하게 물들여져 멀리서 바라보거나, 저녁 무렵에 보면 대단히 아름답게 보인다.
이 옥돌은 1960년에 옥돌의 고향이라 불리는 수암현에서 발견되었다. 옥돌의 높이는 8m,너비 7m,
두께 4m 총 무게는 261t으로 어마어마하다. 진하고 연한 녹색이 어우러지고, 노란색, 흰색, 검정 색
그리고 남색이 하나로 어울려져 알록달록하게 되어 있다.
1992년에 안산시가 주관하여 옥불상을 만들게 되었다. 옥돌 정면에는 정중하고 경건한 초대형의 석가모니상을, 뒷면에는 관세음보살상을 조각하였다. 중국인들은 '부처님 상은 하늘이 만들어 주었고, 관세음보살상은 만 백성을 구하려 왔네' 라고 말한다.
관세음보살상의 윗쪽은 용(龍)과 봉황(鳳凰)이 조각되어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기세가 역력히 보인다. 옥돌에 부처님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조각한 것이라 기보다,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이 본래부터 있었던 것을 손질만 조금 한 것으로 보인다.
옥돌에 부처님의 눈은 눈 색깔, 얼굴은 얼굴 색, 귀는 귀의 형태가 손바닥은 손바닥 모양으로 각각 다른 색깔로 되어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천산(千山)의 용천사(龍泉寺) 미륵대보살이 옥불원을 멀리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이곳을 뒤로하고 심양으로 가는중 점심 식사를 하기로 하여 ,중국 정통 음식은 입이 맞지않아
모든 선생님들께서 한정식으로 하기로 하고 안산을 지나 심양가는길에 한민족 식당을 찿아 불고기
모듬을 먹고,(8인 기준 한국돈 2만원) 다시 심양으로 출발 하게 되었다.
☞ 이곳은 명가원으로 중국의 유일한 한국 식당임.
<명가원에서 아빠랑>
심양에 도착 하여 유적지를 돌아보기로 하였는데 비가 너무 많이와 조선 백화점 쇼핑을 하기로하고
백화점에 도착 했을때 백화점에 전기가 나가(중국에는 전기사정이 않좋아 자주 정전이 된다고함) 들어갈수가 없어서 시장으로 쇼핑을 가는 도중에 꼬마애들이 와르르 모여와 돈을 달라고 하여 같이간
포항공고 선생님께서 천원을 주니까 몇분 되지않아 한20여명의 꼬마들이 몰려와 붙잡고 하여
당혹하지 않을수 없었다.
열차 시간이 많이 남아 커피숍에 들어 갖는데 이곳은 북한정부에서 운영하는 곳이였습니다.
이곳 누나와 대화를 하는데 옛날 용천 폭파사고시 한국에서 많이 도와줘 고맙다고 아주 씩씩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였고 ,우리는 같이 사진 찍자고 하였더니 ,허락하여 한장 챁칵......(북조선이라고 하더군)
<북한 누나와 함께 빼지에는 김일성사진 부착> <활짝웃는 북한 누나>
이렇게하여 휴식과 쇼핑을 맟히고 심양역으로 이동 심양에서 통화로 가는 야간열차를 타고
8월12일 21시 열차를 타고 8월13일 아침 5시에 통화역에 도착하니 통화에서 압록강 및 고구려 유적지를 안내할 가이드 선생님이(조선족)기다리고 있었으며,그곳에서 아침 식사를 위하여 중국식 부페 식당
에서 식사를 마치고 <열차에서 세면을 못하여 호텔 부페 식당에서 간단하게 세수> 고구려 유적지인
집안으로 이동 집안시 박물관,광개토왕비,광개토왕릉,장군총 ,국내성터,오분벽화그림,답사후 압록강
으로 이동 중국에서 북한 입구 까지 뽀트를 타고 관람 하였다.
<심양역에서 열차 기다림> <침대열차 3층 침대에서 하루 숙박>
우리는 아침 일찍 8월13일 05시에 통화 도착 후 호텔 부페로 이동 아침 식사를 하였으며
이곳에서 출발 집안시로 이동(한번 버스 타면 3시간에서 5시간거리 아주 지루함)
기는도중에 사과 나무 농장<세계최대의 농장 사과는 우리나라 것 보다 작은 사과 및 꽃사과>을 거처
집안시에 도착 하였다.
<중국 호텔 부페 식당 1인당 30원(6,500원)> <집안시 박물관 앞에서 엄마와 진호동생>
집안시의 고구려 역사에 대하여 잠시 설명 하면 다음과 같다.<가이드선생님의 말씀>
집안은 지금도 고구려의 집 안이다.
중국 집안의 고구려 유적 가운데서 가장 경이로운 것은 1,2000여 기가 넘는 무덤떼이다.
고구려 후기의 수도인 평양 근방에도 1,000기밖에 없는데 그 보다 10배가 훨씬 넘는 무덤들이
한 곳에 몰려 있다는 것은 전세계에서도 유래가 없는 일이다.
집안시 안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무덤떼는 모두 32개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1962년 봄 집안시
전체의 문화유물을 전면적으로 조사할 때 파악한 숫자에 따르면 모두 12,358기나 된다고 한다.
일본의 한 학자가 "고구려인들은 땅의 절반은 주거지로 절반은 무덤으로 사용하였다"고 했는데 실감나는 이야기다.
통구하 부근의 무덤떼 (최근 마을이 형성되어 많이 훼손되어 있는데 60년대에는 촌민들이 채소보관소로도 이용했다고함)
고구려의 피라미드, 1,2000여 기의 무덤떼
고구려 무덤떼중 주요한 무덤들을 보면, 장군총은 한 변의 길이가 30m가 넘고, 태왕능은 66m이며, 가장 큰 천추묘는 85*80m나 된다. 천추묘는 묘자리만 2,057평이나 되는 거대한 피라미드이다. 이집트피라미드도 증축하기 전 처음에는 한 변이 63m였으니 이러한 거대한 묘들은 고구려의 피라미드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집안시 고구려 유적 성안에는 아파트> <우산 귀족 묘지에서 "나">
고구려 무덤떼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실질적 가치는 23기의 무덤에 나타난 벽화이다. 벽화는 주제가 풍부하고 대채로워 인간세상의 갖가지 생활상과 사후의 하늘세계까지 자유자재로 표현하고 있으며, 기술적 수준이 대단히 높아 고구려인의 창조력과 예술적 감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걸작이다. 한편 이 벽화는 고구려의 정신문화와 물질문화를 읽어낼 수 있는 생생한 자료일 뿐 아니라 당시 동북아세아의 상관관계를 읽을 수 있는 영상자료라는 점에서도 학자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무덤 앞에서 "나"> <무덤속의 벽화들 ..>
여기서 젱리 유명한 동방의 금자탑, 장군총 은....
12,000여 기나 되는 집안의 고구려 무덤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장군총이다.
장군총은 국내성에서 4.5km 떨어진 용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교적 높은 곳에 있어 압록강과
집안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장군총을 바라보면 우선 엄청나게 큰 규모에 압도 된다. 물론 가장 큰 천추총이나 태왕능에 비하면
3분의 1이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 빼어난 건축술과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있는 웅대한
모습을 보노라면 중국 학자들이 "동방의 금자탑"이라고 했다는 말이 실감난다.
장군총의 딸린 무덤
12.4m높이의 장군총을 올라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5층 높이의 아파트를 걸어서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되고, 한 변의 길이가 31.58m인 바른네모꼴이므로 건평 300평 짜리 건물을 상상하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수수께끼의 버팀돌과 딸린무덤
무덤 사방에서 굉장히 큰 돌을 3개씩 기대어 세워놓았는데 부쪽 맨 왼쪽 하나가 깨져 지금은
11개만 서 있다.
11개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이라도 15톤이나 되고, 직접 서 보니 필자 키보다 두 배가 넘는 것도 있다.
이런 세운돌들은 "밑 기단 돌이 밀려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현지 학자들의 주장이지만
함께 간 역사 선생님도 그 정도의 무게로는 무너지는 것을 막는 버팀돌 노릇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한 면에 3개식 12개를 세워 12지처럼 보호신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군총 위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오른쪽, 그러니까 동북쪽을 보면 마치 고인돌 비슷한 돌더미가 보이
는데 이것이 딸린무덤이란 것이다.
원래 장군총에는 5기의 딸린무덤이 있었는데 지금은 1기밖에 남지 않았다
장군총과는 모양도 판이하게 다르고 크기도 대단히 작다. 남은 한 기의 딸린무덤도 일찍이
도굴당하고 파괴되어 지금은 밑부분 3계단만 남아 있다. 밑변 길이 9.2m, 계단 높이 1.9m이다.
이러한 딸린무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도 3개가 있다고 한다. 딸린 무덤은 왕의 첩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 수수께끼인채 암아 있다.
장군총은 누구의 무덤인가?
장군총은 건축규모나 딸린무덤의 수를 볼 때 고구려 때의 왕능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부장품이
모두 도난당해 누구의 무덤인지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일본 학자들이 장군총은 광개토
대왕의 묘라는 설을 내 놓았다. 그러나 중국 현지 학자들은 장수왕의 묘라고 주장한다.
"장수왕은 수도를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긴 장본인이고, 또 평양에서 세상을 떴는데 어떻게 이곳까지
와서 묻히게 되었는가?" 라는 나의 질문에 중국 현지의 학자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고구려 왕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무덤을 준비해간다. 그렇기 때문에 장수왕도 수도를 옮기기
전에 이미 국내성에 무덤을 준비해 놓았고, 관례에 따라 시신을 옮겨 이곳에 장사지냈던 것이다."
흔히 한국인들은 크기에 대한 열등의식(size complex) 이 있다고 한다.
사대주의나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엽전이 뭐 그러면 그렇지!" "우린 땅덩어리가 너무 작다"는 등
자신을 비하하는 말투가 많은데 이 모든 것이 사이트.컴플렉스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장군총을
비롯한 고구려의 유적을 보노라면 그러한 열등의식이 단번에 사라지고, "과연 고구려는 대단했다"
"고구려는 스케일이 크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장군총에서 가족과 단체 사진> <장군총 무덤에서"나">
<무덤에서 "나"> <무덤속의 돌 무덤(돌관)>
2004년 8월 13일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후 시간이 남아서 우리는 압록강 철교에서 북한과 인접한 곳을
관람 하기로 하고 출발 하여 그곳에서 북한을 구경 하였다.
압록강에서 북한을 바라보니 산은 벌목으로 나무가 없고 농사짓는 농부들의 모습을 만원경으로
관람하고 중국 재례식 화장실에서 소변도 보고 중국 군인과 사진도 한장 찰칵........
<압록강 철교에서 중국 군인과 함께> <압록강에서 북한 만원경 관람 "나">
<압록강에서 바라본 북한> <중국 재래식 화장실-문이없음>
또한 우리는 이곳을 지나 압록강 뽀트를 타기 위해서 약 한시간 버스를 타고 갖다.
우리가 도착한 압록강주변에는 조선족이 절반 이상 살고 있으며,한국돈도 받고 있다.
저녁식사전 시간이 여유가 있어 가이드께서 유람선 뽀트를 타라고 하여 10원씩 주고 한시간 가량아주 스릴 만점의 고개운전 하는 조선족과의 만남을 이루었다.(재미 만점 사실 처음 타 보았음)
<압록강 뽀트 맨앞이 "나"> <압록강에서 가족과 함께>
압록강 주변의 조선족 식당에서 저녁 식사(재래식 숫으로된 화로에 철망으로 소고기 구이)를 하였으며
1인분에 20원(한국돈3,000원) 고기가 맛있어 추가로 시켜 저녁식사를 해결하고,통화역에서 이도백화로
가는 열차를 타기위하여 통화역 도착 8월 13일 22시 통화 출발 침대열차에서 숙박 하고 8월14일
05시에 이도백화 역에 도착하니,백두산으로 가는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으며,이도백화서부터는
조선족으로 구성되어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며 ,지도 및 수건을 파는 모습이며 우리는 지도와
손수건을 한국돈으로 1,000원씩 주고 구입 하였다.
이곳부터 길림 및 백두산 가지는 한국돈으로 물건 및 식사비를 지불 하였으며,꿀 및 참기름이 주를 이루고 장뇌삼이 한국돈으로 3만원~5만원까지 팔고 있었다.
조선족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백두산으로 출발 하여 약 5시간만에 백두산에 도착 하여 정상을 위하여 찝차로 올라갔으며, 백두산은 우리나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북한을 통해서 올라가면 얼마나 좋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지만 어쩔 수 없이 중국을 통해서 갈 수 밖에 없다.
<백두산 입구에서 가족과 함께> <백두산 올라가는 차>
여기서 백두산에 대한 가이드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백두산은 장백산이라고 한답니다.
백두산은 북한 양강도 삼지연군과 중국 길림성[吉林省]에 걸쳐있는 산이다. 높이 2,744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 길림성성 안도현[安圖縣] 이도백하[二道白河鎭]과의 국경을 이룬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장군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해발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고 한다. 어느 거이 더 정확한지는 두고 보아야 할일이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장백산맥[長白山脈]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화산폭발에 의해서 덮인 부석(경석이라고도 함)이 회백색을 나타내며, 꼭대기는 1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하며, 만주어로는 "귀러민산예아린"이라고 부르는데 "귀러민"은 길다(長), "산예"는 희다(白), "아린"은 산을 의미한다.
문헌에 나타난 백두산 최초의 이름은 〈산해경 山海經〉에 불함산(不咸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단대령(單單大嶺)·개마대산(蓋馬大山)·태백산(太白山)·장백산(長白山)·백산(白山) 등으로 불렸다.
한국의 문헌에서 백두산에 관한 기록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三國遺事〉 기이편에 태백산(太伯山)이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나며, 〈고려사〉에도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쪽에서 살게 했다"하여 "백두산"의 명칭이 문헌상에 처음 기록되었다.
한민족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본격적으로 숭상한 것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부터라고 추정된다. 백두(白頭)라는 이름은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 東國名山記〉,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 林下筆記〉 등의 문헌에 의하면 백두산의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白)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의 범위는 천지 중심의 마그마 활동에 따른 화산암의 분포지로 한정해보면 현재 북한측의 면적은 8,000㎢로 전라북도의 면적(8,052㎢)과 비슷하고 개마고원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중국측의 백두산 화산암의 분포지까지 합하면 3만㎢에 이른다. 또한 해발고도 1,800m까지는 완만한 경사(8~12°)를 나타내어 방패 모양의 순상화산이나, 1,800~2,500m는 급경사로 종 모양의 화산을 이룬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690m의 백운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 500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 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백두산은 구성암석과 지질구조에 의해서 크게 5부문의 수직구조로 파악된다. 백두산의 밑바닥은 선캄브리아기의 화강편마암류이며, 그위에 제3기말의 현무암대지, 제3기말의 경사 현무암고원, 제4기의 알칼리 조면암류, 부석의 순서로 덮여 있다.
백두산의 밑바닥을 이루는 선캄브리아기의 화강편마암류는 평안북도에서 함경북도에 걸치는 평북육괴·함북육괴로 백두산의 지표에서는 극히 일부분의 침식산지를 빼고는 노출되어 있지 않다.
제3기에 들어서 지표로부터 60~70㎞ 깊이의 지하에서 상부 맨틀을 구성하는 암석 가운데 방사능원소들이 붕괴되면서 열점이 만들어졌다. 이의 영향으로 당시의 지표암석인 화강편마암류에 수직방향의 쪼개진 틈(열곡구조)이 만들어졌다.
해발고도 1,000m까지는 완만한 경사의 현무암대지이다. 이는 제3기말인 310만~1,990만 년 전 6회의 화산분출로 200~400m 두께의 현무암대지가 만들어졌다. 이는 방사능원소들의 붕괴로 만들어진 열점에서의 열에 의해서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녹아서 지하 3~5㎞의 마그마 챔버(magma chamber)에 모였다가, 자체 압력이 증가되면서 열곡구조의 약한 틈(약선대)을 따라서 분출한 현무암이다. 이 현무암은 잘 흐르는 염기성 용암이 굳어진 것으로 천지 주변의 200~300㎞ 범위에 흘러서 3만㎢의 백두산 화산암의 분포지가 되었다.
백두산의 중국 쪽의 사면에서는 해발고도 1,000~ 1,800m 55㎞의 거리가 경사도 8~12°의 완만한 현무암고원이다. 이는 제3기말에서 제4기초의 제2차 염기성 용암의 분출(약 260만~290만 년 전)로 만들어진 녹회색의 현무암으로 470m 두께로 덮여 있다(그림 2-3). 해발고도 1,800m까지, 즉 현무암대지와 경사 현무암고원까지가 순상화산을 이루는데 이는 잘 흐르는 염기성 용암이 여러 번 분출된 까닭이다.
해발고도 1,800~2,500m는 보다 급경사(35~40°)의 종 모양 화산을 나타낸다. 이는 제4기에 21만~61만 년 전, 13만 년 전, 9만~10만 년 전의 3회에 걸쳐 잘 흐르지 않으며 점성이 큰 산성 용암이 분출하여 만들어진 조면암이기 때문이다. 그 두께는 약 650m이다
천지 주변의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백두산 꼭대기 지표면은 40~60m 두께의 회백색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는 가스가 많고 폭발력이 큰 화산에서의 분출 마지막 시기에 나타난 것으로, 공중 분출물이 떨어져 덮인 것이다.
부석은 고온의 마그마가 지상에 분출됨에 따라서 이에 용해되어 있었던 휘발성분과 수증기 등의 가스가 증발되어 바위 부스러기에 구멍이 많이 생기게 된 것으로, 가벼워서 물에 뜬다. 이와 같은 천지 주변의 부석더미는 백두산 화산활동의 최후시기를 나타내며, 천지 형성과정과 그 시기를 나타내는 증거가 된다. 천지는 수면의 해발고도 2,190m, 평균수심 213.3m, 가장 깊은 곳 384m, 남북거리 4.85㎞, 동서거리 3.55㎞, 둘레 14.4㎞, 면적 9.165㎢로 매우 넓고 깊은 호수이다.
일반적으로 마그마의 분출만으로 이루어진 화구는 그 둘레가 2㎞ 이상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천지 둘레는 이보다 훨씬 길며 주변의 외륜산에는 화산폭발의 최후시기를 나타내는 부석이 두껍게 덮여 있다.
따라서 천지는 이 부석의 공급원이 되었던 화산폭발과 함께 화구가 함몰하여 이루어진 칼데라에 빗물 등이 모여서 된 칼데라호이다.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매우 강대하여 화산재가 대류권 상층까지 올려져서 이곳에서 부는 강한 서풍인 제트기류에 의해서 백두산에서 약 1,000㎞ 떨어진 일본의 동북지방 북부에서 홋카이도[北海道] 남부까지 흩어져 있다
이 화산재는 그 성분이 천지 주변의 회백색 부석과 같으며, 가까운 동해 밑바닥에서는 10㎝ 내외의 두께이고 멀리 떨어진 일본 북부에서는 5㎝ 내외로 보다 엷어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97년(선조 30) 8월 26일, 1668년(현종 9) 4월, 1702년(숙종 28) 4월 14일의 3번의 분화가 기록되어 있다.
백두산의 화산활동은 천지 밑 62~67㎞ 깊이의 상부 맨틀 암석 중 방사능 원소들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열에 의해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녹아서, 지하 3~5㎞ 깊이의 마그마 챔버에 모였다가 자체압력이 증가하면서 지각의 약선대를 따라서 분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제3기말에서 제4기에 걸쳐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지금부터 1,000여 년 전 대규모 화산폭발이 나타나면서 마그마의 저장고였던 마그마 챔버가 함몰되어 천지의 칼데라를 만든 후 화산활동은 차츰 약화되면서 휴화산이 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질연대로 보면 오래지 않아서 그 영향으로 천지를 중심으로 반지름 50㎞ 이내에는 소규모의 지진이 자주 나타나고(중국측 자료에 따르면 1973년 4월과 6월에 진도 2.1 및 2.5의 지진이 있었음), 온천이 많다.
백두산의 특색있는 지형으로는 화산지형·빙하지형·주빙하지형 등을 꼽을 수 있다. 화산지형은 주변부의 순상화산과 중앙부의 종상화산이며, 중심부는 칼데라와 외륜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번의 화산분출로 이루어진 복성화산임을 알 수 있다.
빙하지형으로는 U자곡과 권곡이 있다. 중국 쪽에서 천지에 이르는 길인 얼다오바이허의 골짜기 가운데 창바이 폭포-빙장(氷場) 사이의 길이 4㎞, 너비 1㎞의 골짜기가 빙하침식곡인 U자곡이다. 이는 현재 중국의 영토이다.
남포태산(2,433m)의 남쪽 기슭인 포태천 계곡에 빙하퇴적 제방인 빙퇴석(maraine)이 있고, 천지 주변의 칼데라 벽에 빙하침식의 흔적인 권곡과 빙퇴석의 존재가 보고되었다. 이들 빙하지형은 마지막 빙하기(약 1만~7만 년 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어왔으나, 이는 약 1,000년 전 백두산의 화산폭발과 그 함몰에 따른 천지형성과 모순된다.
권곡이 이때의 파괴에서 남은 것이라고 해도 빙퇴석의 존재는 여전히 모순된다. 천지 주변 외륜산 기슭의 빙하지형 문제는 우리나라에서의 마지막 빙하기의 빙하와 천지형성 문제를 푸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백두산은 해발고도 약 2,000m가 수목한계선이 되어 이보다 높은 지대는 짧은 여름철에 풀만 자라는 산악 툰드라 지대에 속해 주빙하지대이다. 천지 주변의 그늘진 골짜기에는 가장 더운 달인 7월에도 눈이 남아 있고, 땅속 0.8~1m 깊이 이하에 영구동토층이 있어 여름에도 녹지 않는다.
주빙하지형으로는 백두산 기상대 근처 동쪽 사면에 표토가 얼고 녹는 것의 반복에 의해 형성된 계단 모양의 솔리플럭션(solifluction), 역시 기상대 부근 2,180m 고도에 작은 무덤 모양으로 표토가 0.3~ 0.4m 높이로 부풀어 오른 대규모의 유상구조토, 잔설의 재동결과 녹은 물의 침식에 의해서 지면이 둥그렇게 움푹 파인 설식요지, 암석이 얼고 녹는 것의 반복에 의해서 부서지고 무너져내려 바위부스러기 더미를 이룬 애추(talus) 등이 보고되어 있다.
백두산 꼭대기에서는 강한 바람이 부는 때가 많아 바람이 깎은 지형현상으로 풍식구멍·풍식버섯·풍식기둥 등이 암석에 많이 나타나 있다.
천지 주변의 연평균기온은 -7.3℃이며, 1월평균기온 -24.0℃, 7월평균기온은 8.5℃이다. 월평균기온으로 보면 영상의 기온은 6~9월의 4개월간 10℃ 이상으로 오르지 않고, 영하의 월평균기온은 10월에서 다음해 5월까지 8개월간 계속된다.
이를 쾨펜의 기후구로 나타내면 한대기후 가운데 툰드라 기후에 속한다. 천지 주변의 백두산 기후는 동결기(10~5월의 8개월간)와 해빙기(6~9월의 4개월간)의 2계절로 나뉜다. 동결기에는 기온이 매우 낮아서 가장 낮은 기온이 -40℃까지 나타나고, 해빙기(이곳의 여름철)에도 월평균기온은 10℃ 이상으로 오르지 못해 땅표면이 녹기만 할 뿐 서늘하여 나무는 자라지 못하고 풀만 자란다.
첫서리는 8월 상순에, 마지막서리는 7월 하순에 내려서 무상기간은 7월말에서 8월초까지 20일간이다. 연강수량은 1,500㎜로 주변의 낮은 지대인 삼지연보다 600㎜ 더 많다. 이는 해발고도가 높아서 응결고도 이상 지역이 넓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개가 자주 발생하여 강수량이 많은 6~9월에 월평균안개일수는 15일이며, 그중 80%가 비와 함께 하여 안개의 평균 계속시간은 6.6시간이다. 7월과 8월에는 비가 많고, 6월과 9월에는 우박으로 내릴 경우가 많다.
눈은 9월 중순에서 다음해 6월 중순까지 9개월간 내리며, 8개월 이상(적설기간은 257일) 눈이 쌓여서 1.2~ 2m 정도의 두께에 이른다. 바람이 매우 강하며, 겨울철에는 북서풍이, 여름철에는 남서풍이 주로 분다. 따라서 백두산의 기후는 기상변화가 매우 심한 고산 툰드라 기후를 나타낸다.
백두산에는 650여 종의 식물종이 분포해 가지수로 볼 때는 한국의 다른 지역보다 적은 편이다. 이는 최근 200~400년 전의 화산활동의 영향으로 새로운 식물천이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백두산은 해발고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고도에 따라서 식물종의 분포가 뚜렷해 식생의 수직분포를 보인다(그림4).
삼지연(1,400m)에서 신무성(1,600m)까지는 교목대로 잎갈나무·분비나무·가문비나무 등의 침엽수림과 자작나무·사시나무·달피나무 등이 분포한 침·활엽수림의 혼합림대를 이룬다. 교목 밑에는 물싸리나무·들쭉나무·까치밥나무 등의 관목림과 초본이 자란다.
신무성에서 무두봉 부근의 해발고도 2,000m까지는 잎갈나무·가문비나무·분비나무 등의 침엽수림대로, 해발고도가 높아지면서 나무의 키가 작아진다. 무두봉(1,930m)에서는 겨울철의 강한 북서풍의 영향으로 사스레피나무의 가지가 남동쪽으로 편향수(偏向樹)가 되며, 수목한계선을 나타낸다.
해발고도 2,000m 이상은 키가 작은 관목류와 초본들이 자라는 고산대로, 산악툰드라 지대이다. 이곳에 자라는 초본류는 두메자운·담자리참꽃·바위돌꽃, 눈속에서 꽃이 피는 노란 만병초 등이다. 이 지대는 특히 꽃이 피고 씨가 만들어지는 기간이 짧아서 7~8월에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서 아름다운 꽃밭을 이룬다.
백두산의 토양은 해발고도 1,600m까지는 산악포드졸성 갈색삼림토양이며, 1,600m에서 수목한계선인 2,000m까지는 산악포드졸성 토양, 그 이상의 높이에서는 산악초원토양이다. 8·15해방 전의 보고에 따르면 북포태산(2,289m)의 해발고도 1,900m 지점에서 산악포드졸성 토양이 발견되었고, 이 지점의 지표 아래 87㎝ 밑은 9월 중순에도 얼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백두산에는 호랑이·곰·이리·늑대·멧돼지·사슴·노루 등 50여 종의 산짐승, 꿩·부엉이·딱따구리 등 137종의 새, 산천어·열목어 등의 냉수성 어류가 살며, 나비 등의 곤충도 많다.
천지의 총저수량은 20억t으로 그 가운데 70%는 빗물이며, 나머지 30%는 지하수가 솟아 오른 용천수이다. 천지에는 물고기는 없고, 식물성 플랑크톤이 5종, 작은 동물과 곤충류가 4종, 그리고 이끼가 생장한다.
천지의 물은 중국측의 달문으로만 유출되어 장백폭포에서 이도백하를 흘러 송화강[松花江]을 이룬다. 압록강과 두만강으로는 지하수로서 유출될 뿐이다.
장군봉(2,750m) 부근의 해발고도 2,000m에 있는 백두폭포는 높이 18m, 너비 0.8m로 1단계에서 7m, 2단계에서 11m의 높이를 나타내는 2단계 폭포이다. 천지의 물이 지하수화해 용천수로 떨어져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1년 내내 흐른다. 중국의 장백폭포- 이도백하 계곡에는 수온 37~82℃의 온천이 13개 있고, 북한에서도 천지 남서부에서 수온 73℃의 온천이 발견되었다.
백두산의 최대자원은 적송·잎갈나무·가문비나무·자작나무 등의 삼림으로서, 이들 목재는 철도와 압록강 및 두만강의 뗏목에 의해서 길주·만포·무산의 제재소로 운반된다. 기타 자원으로는 건축용의 골재와 단열재로 이용 가능한 부석, 천연수로 이용되는 천지의 물, 약초와 산나물 등을 들 수 있다.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聖山)·신산(神山)으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숙신족·읍루족·말갈족·여진족·만주족 등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전설화·신격화했다.
풍수지리에서는 지세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이해하기도 하는데 백두산을 "기"(氣)가 결집된 머리로, 낭림-태백-소백 산맥을 백두산의 기가 전달되는 등뼈산맥으로서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인식했다.
그밖에 청나라의 번영도 태산(泰山)·장백산(長白山) 지맥설(支脈說)을 통해서 풍수지리상으로 백두산의 정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백두산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북방 이민족의 정신적 구심점과 활동무대가 되어왔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국경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거주를 제한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개척하자 백두산을 그들의 영토로 귀속시키려고, 1712년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그 내용 가운데 토문강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청나라와의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했으며, 간도 및 녹둔도의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09년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두만강이 국경선으로 결정되었으며, 지금 백두산은 천지까지도 분할되어 천지 북쪽 2/5는 중국측에, 남쪽 3/5은 북한측에 속한다.
백두산의 교통로는 북한이나 중국을 통하는 2가지 방법이 있다. 북한에서는 평양에서 백두산 입구인 삼지연까지 비행기·열차·자동차 편이 있다. 삼지연에서 백두역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이며, 백두역에서 향도역까지는 케이블카로 10분 걸린다. 향도역에서 장군봉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이다. 중국 쪽에서는 연변 조선족자치주 내의 얼다오바이허가 백두산 입구가 된다.
이곳까지는 연길[延吉]나 안도[安圖]에서 열차나 자동차 편이 있다. 이도백하에서 장백폭포 입구까지는 50㎞의 거리로 버스를 이용하며, 버스 종점에서 창바이 폭포를 지나 천지 물의 단 한곳의 유출구인 달문까지는 2㎞의 거리로 걸어서 오른다. 현재 우리가 백두산에 이르는 길은 중국을 통하는 방법뿐이다.
1. 천지
백두산 정상에 위치한 화구호로 해발 2,155m 높이의 기암괴석에 둘러싸여 있다. 평균수심 204m, 최고수심 373m 이며 남북 길이 4.86km, 동서길이 3.35km 이다. 천지에 담긴 물의 용량은 무려 40억t에 이른다. 매년 1,400mm 의 강수량과 지하 온천수, 눈이 녹은 물이 수원을 공급하고 있다. 잉어를 비롯한 몇 종류의 어종이 서식하고 있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 호수로서 압록강과 두만강 송화강의 발원지
이다.
<백두산 천지 주차장> <아름다운 백두산 천지>
<백두산 천지에서 "나"> <백두산 천지에서 가족과 함께>
2. 장백폭포
높이 68m의 폭포로 천지의 달문을 통해 1km 정도 흘러내린 물이 절벽에서 갑자기 수직으로 낙하된다.2.5m의 폭포 폭은 두갈래로 나뉘어 있다. 동쪽 폭포 수량이 전체 수량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장백 폭포에서 "나"> <장백 폭포 >
3. 16개 백두산 봉우리
백두산 천지 주변은 16개의 봉우리로 둘러 싸여 있다. 가장 높은 주봉은 2,750m의 백두봉으로 북한측에 위치하고 있다. 주요 봉우리는 향로봉, 청석봉, 백운봉, 차일봉, 제비봉, 천문봉이다. 천문봉 좌측 장군봉에는 북한에서 설치한 케이블 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16개의 봉우리는 중국측에 6개 북한측에 7개가 있다.나머지 3개의 봉우리는 중국과 북한의 경계선에 놓여 있다.
4. 소천지
장백폭포 하류 3km 지점에 위치한 자그마한 2개의 호수로 주변이 벚나무에 둘러싸여 고요하기 그지없다. 두 호수의 크기는 비슷하다. 둘레 260m이며 수심은 10m 이다.
5. 백두산 온천
장백폭포 근처에는 최고수온 82도, 최저수온 37도의 고열온천군이 자리잡고 있다. 다량의 무기질과 유화수소를 함유한 백두산 온천수는 피부병과 고나절염에 효과가 있다. 뜨거운 온천수에 삶은 달걀은 일반 달걀과는 달리 노른자부터 익는 것이 특징이다.
<백두산 온천수로 계란 익히는 모습> <뒷편이 온천수>
6. 국제자연보호구
백두산은 자연생태계가 온전하게 보존된 지역으로 1980년 유네스코에 의해 "백두산 국제자연보호구"로 지정되었다. 백두산에는 173종의 조류와 동북호랑이, 반달곰, 담비등의 300여종의 각종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백두산에서만 볼 수 있는 미인송을 비롯해 주목과 들메나무 등 희귀 나무류와 산삼, 영지 등 불로초로 불리는 한약재들이 번식하고 있다. 백두산 고도에 따라 침엽활엽수대 → 침엽수대→사스레나무수대 →고산수대로 뚜렷이 분포된 초목의 생태변화를 살펴보는 일도 매우 흥미롭다.
돈화시 대산취자진의 동쪽에 삼면이 물에 둘러싸인 자그마한 어촌이 있는데 이를 소산취자촌이라 한다.촌은 산을 의지하여 자리잡고있는데 옆에는 물을 끼고있으며 서남쪽은 목단강이 있고 동쪽은 안명호가 있다.근년래 휴가촌을 새로 세웠는데 매년 방방곡곡에서 오는 손님들을 수없이 접대하고있다.
소산취자촌풍경은 수려하여 남국수향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있을뿐만아니라 북방의 호방한 특징도 소유하고있다.관광객들은 여기에서 등산이거나 낚시질을 할수 있으며 배놀이도 하고 헤염도 칠수 있다.게다가 배를 타고 이웃에 있는 풍경구인 경박호풍경구에까지 갈수 있다.
7.온천
흑풍구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흑석아래에는 여라문곳에서 뜨거운 약수가 솟아나오는데 어떤 곳은 사발만큼 크고,어떤 곳은 가는 물줄기가 졸졸 흐르고있는데 이것이 지면우에 분포되여있는 천여평방메터의 온천무리들이다.온천은 오색찬란한 빛을 뿌리고 또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열기를 발산하고있는데 관광객들의 특별한 눈길을 모으고있다.특히 겨울이면 그 둘레가 소복단장을 한 빙설천지이지만 온천두리에서는 도리여 열기가 차넘치고 뽀얀 안개가 서서히 피여올라 참말로 독특한 경치를 이루고있다.
온천은 온도가 60도-70도이상이며 어떤 때에는 82도에까지 달하여 닭알을 넣으면 인차 익혀먹을수 있는 고온온천으로 되고있다.
온천은 신비로운 샘물이라고 불리우는데 근육을 느슨히 하고 피의 활력을 증강시켜 한기를 몰아내고 병을 치료함에 있어서 효과가 뚜렷하다.지금 온천에는 여러곳에 욕실을 세워 관광객들이 사용하고 있다.
온천부근에는 또 장백약수샘이라는 광물질샘물이 있어 위병,만성관심병에 현저한 치료효과가 있다.광물질샘물을 마시면 마치 구미에 맞는 얼음에 랭각시킨 청량음료를 마시는것과 같아 소화를 돕고 비장을 튼튼히 하며 열을 제거하고 더위를 몰아내기에 사람들은 <<천연사이다>>라고 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백두산 천지를 아쉬움만 남기고 다음 목적지를 향하여 출발 하게 되었다.
백두산에서 연길로 이동 버스를 타고 4시간 정도 가야 하는 중간에는 사과 나무가 전체를
이루고 있으며 일송정의 옛 대성 중학교를 방문 하기 위하여 시간에 쪼끼며 버스를 타고 달린다.
대성 중학교 가는도중에 서울예고 선생님께서 대학 시절에 성악을 전공 하여 멋있는 일송정을
2절 까지 아주 근사하게 불러 주었으며,마지막에는 합창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곳은 윤동주 시인 나는 여기서 또하나의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됐다.
김구 선생이 이곳 사진에 있는게 아닌가? 윤동주 선생과 친구 였다는 사실를 알게 되어
얼마나 이곳에 잘왔는지 부모님께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대성 중학교에서> <윤동주 시인의 연역>
이곳에서 아빠께서는 찬조금 한국돈으로 만원을 내고 서명 하였다.
우리는 모든 일정을 마치고 연길에서 심양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하여 출발 전 연길에서 북한 냉면
으로 식사를 하고 연길역으로 발길를 돌리고 ......
<북한 냉면 맛 좋음> <북한 냉면 먹는 장면>
2004년 8월14일 22시에 연길에서 또다시 침대 열차를 타고 심양으로 출발 하였으며
열차는 밤 23시면 무조건 잠을 자야 합니다.
이곳열차에는 객실 하나마다 공안요원이 보안을 책임 지고 있으며,중국의 여행객 90%가 한국 사람
이며 열차에는 전체가 한국 고구려 역사 왜곡에 대한 조사단으로 장사를 이루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05시30분에 심양에 도착 하여 누루아치 청나라 황제 북능 및 묘를 답사 하였다.
☞이곳은 주민들이 춤 문화가 발달 하여 공간만 있으면
춤을 추곤 한다.
☞할아버지들께서는 바닥에 스폰지로된 붓으로 붓글씨를
쓰는 취미가 있다.
심양은 요령성의 수도이고 북경과 상해, 천진에 이어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오늘날 중국 동북공업지대의 중심이자 교통의 축이기도 하고, 정치·문화적으로 동북아지역에서 가장 중심 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총 면적은 약 8,500㎢이며, 지리적으로 요하평원의 중부, 혼하(渾河)의 북안에 자리잡고 있다.심양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도로 이미 전한(前漢)시대(기원전 206년∼서기 24년)에 초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 원(元)대에 심양로(瀋陽路)라 불리게 되었고, 『심양』이라는 도시명칭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청의 시조 누루하치가 이곳을 도읍으로 설치, 성경(盛京)으로 이름 붙였으나 청의 북경천도와 함께 개칭, 1945년에 다시 심양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누루아치묘> <누루아치 릉에서 단체>
2004년 8월 15일 모든 일정을 마치고 버스를 이용하여 영구로 이동 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영구 까지 5시간 소요로 중간에 안산에서 역대 황제들의 약탕온천인 탕강 온천에서
온천과 휴식을 즐기고 석식후 영구 호텔로 이동 호텔에서 1박 후 영구항으로 향해 배에 탑승
2004년 8월16일09시에 자정향 탑승 8월17일 15시에 인천항 도착 하여 이번 여름 휴가를
마쳤습니다.
오는도중 배에서 노을 및 아침 해 뜨는것이 너무 아름답운 아쉬움을 뒤로 한채 충주에 도착 하여
여정을 풀고 휴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