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기분이 참 더러웠다.
어떻게 보면 농락당했다는 생각도 들고 분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딱 부러지게 손해본 건 없고
흔히들 말하는 마음의 상처를 받은 건데
그거 갖고 시비를 걸어? 그래서 보상을 받아?
그것도 유치한 짓이고 니가 싫어서 가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고 그냥 그동안 재미있었다라고
생각하기로 하였다.
실은 그게 잘 되지를 않아서 여파가 오래갔다.
그게 그런 모양이다.
언뜻 보기에 아무 것도 아닌 듯한데
이어져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던가??
아무 것도 아니다고 생각한 일이 아무 것도 였으니
그게 탈이었고 병이었고 그 병치레를 오랜동안 하였다.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께서 환한 웃음을 지으며 물으신다.
"시골뻐쓰야~ 얼케 됐냐?"
갔슈~
"엉? 가다니 어딜가?"
걍, 다들 갔슈~
"아, 시방 먼소리 하는겨? 어딜 갔냐니께"
서울 갔슈~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아버지께서 노발대발하시며 이것들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놓겠다고 하신다.
아부지~ 됐슈~
"되기 모가돼! 이 싸가지 읍는 긋들을 콱!"
아부지~ 됐데니께유!! 냅둬유~
아버지는 더 이상 말씀을 안하신다.
지금하는 말이지만, 세상살이에 닳고닳은 사람을
당할 재간은 없는 법이다.
초등학생이 아무리 축구를 잘해도
성인 축구를 이길 수 없는 거지 머~
오후에 큰형님을 만났다.
큰형님도 그간의 이야기를 듣더니
"그럴 줄 알았어. 그사람들 그런 쪽으로 닳고 닳았더라.
입으로는 우리같이 진실하고 순박한 사람들 처음 보았다면서
뒤에서 딴짓하는 인간들.
미국이란 나라가 살아가기가 만만하지 않은데
그런데서 살 정도면 닳고 닳은 사람들 아니겠냐?
시골뻐쓰야~
나쁜 기억은 지워라.
아프겠지만, 너도 그만큼 성숙하는 거 아니겠냐?"
그러고는 말이 없다.
그 이후로도 형님은 말이 없었다.
우리집안 어느누구도 그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남들은 사깃죄로 고소하라며 추근대기도 했지만,
그런 걸로 남의 이목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한마디 했다.
됐슈~
그런데 그여파가 무척 오래갔다.
그해 서울올림픽이 열렸지만,
나는 문닫아 걸고 끙끙 앓았다.
일이란게 그런가보다.
긴 시일도 아니고 오랜동안 만난 것도 아니고
마치 한순간 유행하던 병에 걸려
만성 고질병으로 되듯 정말 오랜동안 고생했다.
그해 대학원 졸업논문을 써야했는데 논문이고 나발이고
내가 아파 죽게 생겼는데 논문이 대수야?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교수님과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교수님이 나에게 그러신다.
"시골버스야~ 장가갔냐?"
아뇨~
"글면 사귀는 여잔 있냐?"
아뇨~ 공부하느라 연애도 못했습니다.
"미친놈~ 연애도 못한 놈이 무슨 문학을 한다 지랄야.
연애를 못해본 놈이 사랑을 알아? 눈물을 알아?
이별의 슬픔을 알아? 사랑의 기쁨을 알아?"
글고는 아무 말없이 식사를 하신다.
그런가?
그럼 나도 연애를 해볼까?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떠났다.
악몽같은 8월이 하고도 20일에 그녀는 미국으로 간다했으니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고 생각했다.
혹시 저 비행기를 타고 그녀는 미국으로 가고 있겠다라고~
그녀가 흘린 슬픈 눈물을 생각하며
아~ 이렇게 사랑과 이별은 슬프고 마음아프고 안타까운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가져보았다.
남들 보면 뻘짓을 한거지만, 그런들 어떠랴~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생각하는 거지.
내머리를 온통 헷가닥 뒤집어 놓고 정신세계를 뭉개놓고
지나간 8월이후로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해 보았다.
죽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세익스피어의 4대비극을 보면 온통 죽음으로 끝장을 내던데
햄릿처럼 우유부단하기 이를데 없는 내 성격때문에
나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 그래야 하는 걸까?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당시엔 심각했다.
에이쉬펄!(she pearl)
이와 이렇게 된 거 이렇게 살아볼래! 라며
진정 폐인의 길을 걸어가기로 하였다.
이렇듯 8월의 광풍으로 유행병같은 고통을 몇달을 앓고
드뎌 방구석에만 틀어어박혀 한없이 과거로만과거로만
내안의 세계속에 빠져들어 스스로를 미로 속에 얽어매어
살아가던 어느날.
그날은 10월 25일 경이었다. 일요일.
아버님과 절친한 분을 오랜 만에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분은 세계적인 천재물리학자인 고(故)이휘소 박사와
경기고등학교 재학시절 1, 2등을 다투었다는 속칭 천재에 속하는
분이었는데 아버님과는 오랜동안 친분이 있었고
우리형제들은 그분을 친 삼촌처럼 좋아했다.
늘 우리들 걱정을 해주고 여러모로 도움을 주시고
늘 아버님을 친형님처럼 대하고 그런 분이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분이 나를 보더니 대뜸 그러신다.
"시골빤쓰야~
네가 저번 여름에 선보았던 아가씨 말야, 알지?"
그름유~
"걔~ 일주일 전에 한국서 결혼해서 며칠 전에 미국갔어."
첫댓글 가끔씩 뒷통수 치는 일도 당하고...뭐 사는게 다 그렇치요
.....다시보니 그어르신이 "시골빤스"야라고 하신다............
예리하시다..............
울교수님은 술도 못마시는게 무슨 사상이 있냐구 그러셨었는데..교수님들은 죄 연애박사에 술고래였나?..이히히히히
시골빤스는 합바지랑 비슷한 의미?
그녀가 흘린 슬픈 눈물도 연극이었나???!!! 조건 좋은 남자를 찾아 떠나기위한... 아~ 슬프고 괘씸한 현실...
그녀 이후의이야기가 앞으로도 계속요 그 시절 님의마음에 깊은 공감을
아픈속을 긁으시네요...시골빤쓰라고 부르시는 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