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뉴스= 김들풀 기자]
지금 전북 고창은 국화꽃 천지다. 해마다 이맘때면 마산 서산 화순 영암 함평 등 여러 지자체가 앞다투어 국화축제를 열지만, 고창 사람들은 잘마재 주변의 오색 국화 2천만송이를 전국 최고로 꼽길 주저하지 않는다. 때마침 고창 고인돌공원길에서는 이달 초부터 오는 19일까지 ‘2017 고창국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고창 미당 묘소 주변의 국화꽃 길, 사진=김들풀 기자)
고창의 국화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미당 서정주(1915~2000) 시인이다. 또 미당과 국화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이 지역의 토박이로, 미당시문학관 사무국장을 역임한 서동진 시인(65)이다.
미당이 ‘국화’와 ‘바람’의 시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솥작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로 시작되는 그의 대표시 ‘국화 옆에서(1946)’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미당의 대표시이다. 그의 생가터에 자리 잡은 미당시문학관, 묘소 주변이 국화로 장식된 것은 자연스럽다.
현재 전라북도 문화관광 해설사이자, 고창문화연구회 사무차장인 서동진 시인은 질마재 하면 미당과 국화가 연상되도록 만드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2001년 미당시문학관 개관 때부터 질마재 4개 마을(안현, 진마, 신흥, 서당) 을 찾아다니며, “미당이 질마재고, 질마재가 미당”이라고 주민들을 설득하던 모습은 이 지역 출신인 기자의 뇌리에 아직도 남아 있다. 그는 질마재 축제를 전국적인 축제로 만들었고, 미당시문학관을 학생들과 문학애호가들이 반드시 방문해볼만한 명소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미당시문학관 옆 생가 전경, 사진=김들풀기자)
미당은 고창이 배출한 큰 시인이지만, 그를 기리는 움직임은 예나 지금이나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우리 고유의 정서를 토착언어에 담아내는데 성공했지만 일제강점기 말년에 그가 쓴 친일시와 제5공화국 아래서 그가 보였던 독재찬양 전력은 주홍글씨처럼 그를 따라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기간 미당시문학관의 지킴이 노릇을 하며 많은 이들에게 미당을 알려온 서 시인 역시 이런 부담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올해는 특히 전집 발간을 계기로 미당의 친일 및 독재 부역 논란이 다시 한번 불거진터라, 미당에 관해 언급하는 일조차도 부담스런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누구보다 미당을 잘 알고, 그를 존경한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서 시인은 “미당의 친일경력을 감추거나, 미화해서는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만 미당의 미학적 성취는 성취대로 정확하게 알리고, 그가 잘못한 일은 또 그것대로 알려 후대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동진 시인(사진)은 “최근 SNS등을 중심으로 미당 관련 논란이 단편적으로 제기되다 보니 미당의 친일행적 가운데는 과장된 것들이 적지 않다”며 “젊은 날의 미당은 나라를 찬탈당한 울분에 싸여 일본에 저항하는 면모도 보였는데 그런 대목은 잘 알려지지 않은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2001년 개관한 미당시문학관에는 그가 1944년 이후 쓴 친일시들이 전시되어 있다. 올해 발간된 미당전집이 그의 친일시를 누락시킴으로써 논란을 촉발시킨 것과 비교하면, 매우 전향적인 운영방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문학관측이 먼저 나서서 미당의 친일시를 내건 것은 아니었다. 태평양전쟁유족회와 민족문제연구소 측의 줄기찬 요구가 있었고, 당시 미당시문학관 박우영 이사장과 김정웅 이사 등이 이를 전향적으로 받아들여 2006년부터 미당의 친일시를 미당문학관에서 관람하기 좋은 자리에 걸었다. 기념하고자 하는 문인의 치부를 들어내는 일이 부담스럽지 않을리 없었으나 미당을 객관적으로 알리는 일이 먼저라고 판단했다.
(미당문학관에 전시된 미당부부 사진, 김들풀 기자)
서 시인은 미당 서정주 시인이 “김구 선생이나 안중근 의사 같은 애국지사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행동도 하는 인물이었음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중앙고보 학창시절 사회주의에 빠져 빈민구제 운동 등을 펼치기도 했고, 광주학생운동 지지 주모자로 연루돼 구속됐으나 어리다는 이유로 기소유예된 적도 있다는 것. 그 사건으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그 이듬해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독서회 사건’에 몰려 또다시 퇴학을 당했는데, 이 사건은 미당을 포함한 일부 학생들이 당시 불온서적으로 분류되던 사회주의 사상 관련 책을 돌려 읽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된 사건으로, 죄명은 독립운동, 불온자 등이었다.
그 뒤로도 미당의 삶을 보면 시골 분들의 주례 등과 같은 부탁도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웬만하면 들어주곤 했는데, 이런 성격이 일제 강점기 말기의 절망적 상황인식과 맞물리면서 그로 하여금 친일시를 쓰게 했을 것이라고 서 시인은 분석했다. 그는 미당의 친일시를 옹호할 생각이 절대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 70여 년 동안 미당이 쓴 시가 1천여 편이고 이 중에서 친일시는 1944년에 쓴 6편인데, 나름대로 미당의 인간적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평했다.
물론 미당의 친일행위에 대한 가혹한 비판도 있다. 미당이 문필로 친일 대열에 합류한 것이 1942년 7월 <매일신보>에 평론 ‘시(詩)의 이야기-주로 국민시가(國民詩歌)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부터이니, 꼭 그가 1944년에만 친일시를 썼다고 하기 어렵다는 것, 또 해방 후 이승만, 전두환 등을 찬양하고 유착한 정도는 상상을 뛰어넘는다는 비판도 여전하다.
서 시인은 국회와 전국문화원이 공동주최하고 문화관광부가 후원한 전국민의 창작시 공모행사에서 ‘어느 오후의 외출’로 금상을 차지해 등단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미당을 일방적으로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공은 공대로 흠결은 흠결대로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미당을 위하는 길이라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그런 신념으로 사무국장 시절 친일시를 전시관에 걸었다. 당시 주변에서 “힘깨나 쓰는 미당 제자들이 널렸는데, 대단하다”라는 말을 들었다.
올해 질마재국화축제 기간에도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2003년 11월 중순경 주위에서 “미당 묘소 주변이 잡목과 쓰레기고 뒤덮여 너무 보기 흉하다”는 말을 듣고,정원환 고창군 의원, 미당의 동생인 서정태 시인과 함께 <국화 옆에서> 시비 주변부터 국화를 심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전국의 명소가 되었다.
2005년 11월 3일에는 ‘미당문학제’를 열었다. 폐가였던 미당의 생가는 시문학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서 시인은 미당의 시 가운데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지만,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아버지의 밥숟갈’을 꼽겠노라며 인터뷰를 마감했다.
아버지가 들고 계시던 저녁 밥상머리에서
나를 보시자 떨구시던 그 밥숟갈정그렁 소리내며 떨어지던 밥숟갈
광주학생사건 2차년도 주모로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감옥에 끌려간 내가
해어름에 돌아와 엎드려 절을 하자저절로 떨어져 내리던 아버지의 밥숟갈
……그래서 나는 또아버지가 끼니밥도 제대로는 못 먹게 하는
대불효의 자격을 또 하나 더 얻었다-서정주. 「아버지의 밥숟갈」전문. 1930
우리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보듬고 살아가고 있다. 100년 이상을 열강들의 패권놀음에 휘둘려왔다. 그때 만큼은 아니지만, 갈등과 상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서 시인과 대담하는 내내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나라가 배출한 큰 시인의 무게감과, 한 인간으로서 그가 감당해야야 했던 나약함…
미당시문학관 안에는 미당이 친일시와 전두환 생일 축시등이 눈에 띄는 곳에 걸려 있다. 거기서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과거일수록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겠다는 후학들의 의지를,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미당을 그가 마땅히 있어야할 자리에 위치시키는 첫 걸음이라는 각오를 읽었다면 기자만의 과민함이었을까?
(왼쪽부터 서동진 문화관광해설사, 서정주 친동생 서정태 시인, 서정주 둘째 아들 서윤 부부. 사진=김들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