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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1893년)
김철수(金綴洙, 1893년 ~ 1986년 3월 16일)는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이다. 조선공산당 3차 집행부 책임비서로 활동했으며, 줄곧 반(反)박헌영 계열에서 활동했었다. 호는 지운(芝雲 혹은 遲耘)이다.
지운 김철수는 전북 부안 백산에서 태어난 뒤 1912년 젊은이들의 유학을 독려하는 독립지사 성우 이명직 대감이 돌린 사발통문을 보고 감화되어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유학하였고 1915년 9월 7일 이명직 대감이 일제에 독살 당한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 1915년 '열지동맹(裂指同盟)' 1916년 '곡귀단(哭鬼團)'과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조직하였다[1].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에게 한국을 선택하도록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의식화 시킨 장본인 이다[2]. 일본과 러시아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과 코민테른 등 사회주의활동을 벌였다. 특히 코민테른에서 지급한 거액의 군자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전용하였고, 상해임시정부로 부터 미주한인 독립운동기부금의 횡령착복과 조직원 살해미수 혐의로 암살 위협에 처한 이승만의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해방후 유일하게 이승만 정권으로 부터 목숨을 보존받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지사이다.
그는 한국 초창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고 해방공간에서 좌익과 우익의 가교역할을 자임했고 이승만-박헌영 회담을 추진하는 등 통일정부 수립에 노력한 사회주의계열의 최고 원로였다.
1947년에는 극심한 좌우익 세력다툼에 환멸을 느끼고 부안 백산으로 낙향하여 움막을 짖고 칩거하다 생을 마쳤다.
갈물 李喆卿畢現代詩 作品 感想
갈물 이철경
생몰년대 : 1914년 ~ 1989년
성격 : 서예가
성별 : 여
본관 : 한산(韓山,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
저서(작품)
궁체쓰는 법, 초등글씨본, 중등글씨본, 한글습자 가정편지틀, 한글서예, 한글, 김활란박사 묘비, 신사임당동상 명문, 육영수여사 묘비, 유관순열사 기념비, 고당 조만식선생 어록비, 이승만박사 어록비
대표관직(경력)
금란여자고등학교 교장, 대한주부클럽연합회 회장, 여성교육자회 회장, 사단법인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한일여성친선협회 이사,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 회장
내용
본관은 한산(韓山). 호는 갈물. 이만규(李萬珪)의 딸이다. 이철경·이각경(李珏卿)·이미경(李美卿) 세 자매가 모두 한글서예에 침혹(沈惑)하여 뛰어난 필재(筆才)를 발휘하였는데, 각경과는 쌍둥이다.
193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 1938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강사, 배화·이화·진명·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하였고, 1960년에 금란여고 교감에 취임하였으며, 1973년 교장으로 취임해 1979년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였다.
일찍이, 1948년 문교부 검인정교과서 검정위원과 서예교과서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갈물한글서회를 창설하였으며, 대한주부클럽연합회 회장, 여성교육자회 회장, 사단법인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한일여성친선협회 이사, 남북적십자회담대표단 자문위원,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 회장, 국정자문위원 등을 두루 역임하여 여성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8회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고, 미경과 자매전을 캐나다와 미국에서 열었으며, 1991년『갈물 이철경 서집』을 발간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단체전에 참가하였으며, 수상으로는 1929∼1930년 동아일보사 주최 전국학생작품공모전 서예부문에 입상하였고, 1969년 제1회신사임당상, 1974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궁체쓰는 법』·『초등글씨본』·『중등글씨본』·『한글습자 가정편지틀』·『한글서예』·『한글』 등이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관동별곡」·「속미인곡」·「김활란박사 묘비」·「신사임당동상 명문」·「육영수여사 묘비」·「유관순열사 기념비」·「독립선언문」·「고당 조만식선생 어록비」·「이승만박사 어록비」·「나의 소원」(白凡 金九) 등이 있다.
南丁崔正均筆樂志論屛風十谷感想
南丁 崔正均
생몰년대 : 1924 ~ 2001
전북 임실군 지사면 금평리에서 출생했으며, 본관은 전주이고 호는 南丁 또는 南正, 당호는 蘭石山房, 聞香齊 等이있다. 남정 초정균 선생은 선비의 풍모를 갖추고 투철한 신념으로 한국서단을 이끌어 온 예문가이다.
최초로 대학에 서예과를 창설한 교육자로서의 풍모와, 서예와 문이화를 통한 탁월한 예술가로서 한국서단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하다. 이 글씨는 문인다운 단아함이 드러나는 서체로 병풍10곡을 가득히 메우고 있다.
翠雲陳學鐘筆草書屛風十谷感想
翠雲 陳學鐘
생몰년대 : 1924 ~ 2010
전북 고창 출신으로 한국초서심추회 회장, 국전 초대작가, 예술의 전당 초대작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어려서 익힌 한학 실력과 예술적 안목을 바탕으로 평생 초서에 몰입해 왔다. 초서에 매우 능하여 그의 서체를 취운체라 한다. “초서는 한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서체입니다. 보고 쓰는 게 아니라 문장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있어야만하기에 초서를 ‘서예의 끝’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갈수록 쓰는 사람이 줄어 안타까워요”라고 그는 말한다.
蒼巖 李三晩 筆 草書 屛風八谷
蒼巖 李三晩
생몰년대 : 1770 ~ 1847
조선 후기의 서예가. 본관은 全州, 자 允遠, 호 蒼巖, 完山, 전북 정읍 출생.
어렸을 때 당대의 명필로 알려졌던 원교 李狂師의 글씨를 배웠으며, 집안일은 돌보지 않고 서예에만 몰두하였다. 병중에도 하루에 천 자씩 썼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글씨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가 어느 상인이 우연한 기회에 장부에 쓴 그의 글씨를 감정사에게 보인 것이 계기가 되어 필명을 떨치게 되었다. 한다.
특히 초서에 능했으며, 그의 서체를 蒼巖體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라도 도처에서 그가 쓴 扁額을 볼 수 있으며, 경남 하동 七佛庵의 扁額도 그의 筆跡이다.
蒼巖 李三晩이 秋史 金正喜, 원교 李狂師와 같이 朝鮮 後期 三名筆로 이름을 떨쳤다.
秋史 金正喜 1
추사 김정희는 충남 예산 출생으로 24세 때 燕京에서 당대의 經學 ·金石學 ·書畫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詩·書·畵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淸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학문에서는 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秋史 金正喜 2
시대 : 조선
생몰 : 1786년(정조 10) ~ 1856년(철종 7)
직업 : 문신, 실학자, 화가
본관 : 慶州
◎ 개설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노(果老)·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 생애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 앞으로 출계(出系: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 추사의 증조가 영조의 사위)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8년 3개월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 활동사항
1. 학문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서 일찍이 북학파(北學派)의 일인자인 박제가(朴齊家)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학문 방향은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 쪽으로 기울어졌다.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 같은 이름난 유학자와 접할 수가 있었다. 이 시기의 연경 학계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렀었다.
종래 경학(經學)의 보조 학문으로 존재하였던 금석학(金石學)·사학·문자학·음운학·천산학(天算學)·지리학 등의 학문이 모두 독립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금석학은 문자학과 서도사(書道史)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금석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고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 대표적인 학자들로서는 신위(申緯)·조인영(趙寅永)·권돈인·신관호(申觀浩)·조면호(趙冕鎬)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경학은 옹방강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을 근본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의 경학관을 요약하여 천명하였다고 할 수 있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한 완원의 학설과 방법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밖에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청대 학자들의 학설을 박람하고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소화하였다. 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음이 그의 문집에 수록된 왕복 서신과 논설에서 나타난다.
다음으로 그의 학문에서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불교학(佛敎學)이다. 용산의 저택 경내에 화엄사(華嚴寺)라는 가족의 원찰(願刹)을 두고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불전(佛典)을 섭렵하였다.
그는 당대의 고승들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다. 특히 백파(白坡)와 초의(草衣), 두 대사와의 친분이 깊었다. 그리고 많은 불경을 섭렵하여 고증학적인 안목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승려들과의 왕복 서간 및 영정(影幀)의 제사(題辭)와 발문(跋文) 등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말년에 수년간은 과천 봉은사(奉恩寺)에 기거하면서 선지식(善知識: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의 대접을 받았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서 두루 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의 이름난 유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 미칭(美稱)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 문화의 거성적 존재였다.
2. 예술
김정희는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술은 시·서·화 일치 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 온 조선 고유의 국서(國書)와 국화풍(國畵風)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바로 전통적인 조선 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연경(燕京)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진적(眞蹟: 친필)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조맹부(趙孟頫)·소동파(蘇東坡)·안진경(顔眞卿)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다시 더 소급하여 한(漢)·위(魏)시대의 여러 예서체(隷書體)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創出)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하다)한 추사체(秋史體)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그는 시도(詩道)에 대해서도 당시의 고증학에서 그러했듯이 철저한 정도(正道)의 수련을 강조했다.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소식(蘇軾)·두보(杜甫)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시도의 정통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시상이 다분히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의 저술인 『시선제가총론(詩選諸家總論)』에서 시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화풍(畵風)은 대체로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시·서·화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림에서도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文人畫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마치 예서를 쓰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고담(枯淡: 글이나 그림 따위의 표현이 꾸밈이 없고 담담함)하고 간결한 필선(筆線)으로 심의(心意)를 노출하는 문기(文氣)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그는 난(蘭)을 잘 쳤다. 난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말하였다.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화법(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서화관은 가슴 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 맑고 고결하며 예스럽고 아담하다)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조희룡(趙熙龍)·허유(許維)·이하응(李昰應)·전기(田琦)·권돈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예원(藝苑: 예술가들의 사회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을 풍미하였다. 현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歲寒圖)」와 「모질도(耄耋圖)」·「부작란도(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시·서·화 이외에 그의 예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전각(篆刻)이다. 전각이 단순한 인신(印信)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한 분야로 등장한 것은 명나라 중기였다. 청나라의 비파서도(碑派書道)가 낳은 등석여(鄧石如)에 이르러서 크게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김정희는 등석여의 전각에 친밀히 접할 수가 있었고, 그밖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인각(印刻)을 새겨 받음으로써 청나라의 전각풍에 두루 통달하였다.
고인(古印)의 인보(印譜: 여러 가지 인발을 모아둔 책)를 얻어서 직접 진(秦)·한(漢)의 것까지 본받았다. 그의 전각 수준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다. 그의 별호가 많은 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서 서화의 낙관(落款)에 쓰고 있었다. 추사체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독특한 자각풍(自刻風)인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룩하여, 졸박청수(拙樸淸瘦: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깨끗하며 가늘다)한 특징을 드러내었다.
3. 문학
김정희의 문학에서 시 아닌 산문으로서 한묵(翰墨: 문한과 필묵이라는 뜻으로, 글을 짓거나 쓰는 것을 이르는 말)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편지 형식을 빌린 문학으로서 수필과 평론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그의 문집은 대부분이 이와 같은 편지 글이라고 할 만큼 평생 동안 편지를 많이 썼다. 그리고 편지를 통해서 내면 생활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그중에도 한글 편지까지도 많이 썼다는 것은 실학적인 어문 의식(語文意識)의 면에서 높이 평가할 일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그의 친필 언간(諺簡: 언문 편지라는 뜻으로, 한글로 된 편지)이 40여 통에 이르는데 제주도 귀양살이 중에 부인과 며느리에게 쓴 것이다. 국문학적 가치로 볼 때 한문 서간보다 월등한 것이다. 또 한글 서예 면에서 민족 예술의 뿌리가 되는 고무적인 자료이다. 한문과 국문을 막론하고 그의 서간은 한묵적 가치 면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문집은 네 차례에 걸쳐 출판되었다. 『완당척독(阮堂尺牘)』(2권 2책, 1867년)·『담연재시고(覃揅齋詩藁)』(7권 2책, 1867년)·『완당선생집』(5권 5책, 1868년)이 있다. 그리고 『완당선생전집』(10권 5책, 1934년)은 종현손 김익환(金翊煥)이 최종적으로 보충, 간행한 것이다.
◎ 평가와 의의
우리나라 역사상에 예명(藝名)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이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도 학문·예술의 각 분야별로 국내외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그는 단순한 예술가·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였다. 즉,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 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추사가의 한글편지들』(김일근, 건국대학교출판부, 1998)
『추사김정희명작전』(예술의 전당, 1992)
『언간의 연구』(김일근, 건국대학교출판부, 1986)
『한중관계사연구』(전해종, 일주각, 1970)
『완당선생전집』(1934)
「추사실기」(최완수, 『간송문화』30, 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86)
『淸朝文化東傳の硏究』(藤塚紐, 東京 國書刊行會, 1975)
추사(秋史) 김정희… 柱聯 11개 작품 전시
고창군립미술관, 오는 6월까지 서예 거장 86점 등
▲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년) 선생이 쓴 주련(柱聯⋅기둥이나 벽에 쓴 글) 등 11점의 작품이 오는 6월까지 고창군립미술관에 전시된다. © 이한신 기자
전북 고창 아산면 반암마을 울산김씨 제실에 보존돼 오다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 1786~1856년) 선생이 쓴 주련(柱聯 ⋅ 기둥이나 벽에 쓴 글) 등 11점의 작품이 오는 6월까지 고창군립미술관에 전시된다.
판소리박물관 별관에 터를 잡은 고창군립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주련은 추사가 귀양길에 나선 심정을 적은 것이 다수여서 제주도 귀양길에 이곳을 지나가며 쓴 것으로 추사체의 변천 과정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추사(秋史) 주련과 전북 지역에서 존경받는 언론인이자 서예 애호가로 꼽히는 무초 진기풍 선생(前 전북일보 사장)이 기증한 전북 서단의 뿌리와도 같은 창암 이삼만(倉巖 李三晩, 1770-1847) 선생의 작품 등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 거장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뜻깊은 전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추사(秋史) 주련과 진기풍 컬렉션 서예대가(大家)전"의 이번 전시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후손들이 지역에서 발견된 문화유물은 발굴지역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원칙하에 자료를 판소리박물관 별관 군립미술관에 영구 기탁하면서 마련됐다.
추사 글씨 주련 9점은 3종의 판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것은 중국 원대의 시문(詩文)의 대가 우집(虞集)의 시구를 쓴 것(子瞻文章世稀有 謫向江波動星斗)과, 남송(南宋) 때의 시인 양만리(楊萬里)의 시구(何人有筆筆無塵 鵞溪一幅爲寫眞)를 쓴 것 등 4점이다.
또, 우집이 쓴 시구를 쓴 주련은 ‘소동파의 문장은 세상에 드무니, 귀양길 강물 결에 별빛도 따라 움직이네’라는 시구로, 자신을 소동파에 견준 추사의 학문적 자부심과 멀리 귀양 가는 착잡한 심정이 잘 표현돼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추사가 자신이 쓴 시 '상선암'(上仙岩)의 기승(起承) 부분을 쓴 것(行行路轉峰廻處 一道淸泉天上來) 2점과 자신의 시 '옥순봉'(玉筍峰)의 전결(轉結) 부분(芙蓉萬朶自珊瑚 若比人間凡草木)을 쓴 것 2점이다.
'상선암'을 쓴 첫 번째 시구는 "가고 또 가는 길 돌아 산봉우리 도는 곳에, 한 줄기 맑은 물 하늘 높은 곳에서 쏟아지네"라고 풀이되는데, 추사 자신의 귀향길에 마주치는 산천의 아름다운 모습과 정한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판각은 양각으로 조각하고 글자 위에는 푸른색을⋅배경에는 흰색 도료로 마감한 것으로 비교적 판각의 수준이 높으며, 추사의 특징적인 필체가 그나마 잘 드러나고 있다.
세 번째 유형은 '양백기사품십이칙'(揚百夔詞品十二則)의 한 구절(田家敗籬 幽蘭逾芬) 쓴 1점으로 추사 주련의 두 번째 유형과 같이 양각으로 조각했고 글씨는 청색이고 바탕은 흰색인데, 판각자가 다르고 보존상태가 제일 좋다.
추사 주련과 함께 있었던 창암 이삼만의 글씨 주련은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의 칠언율시 '정중유감'(靜中有感)의 제5구와 제6구인 경련(頸聯)을 쓴 것이다.
이 판각은 추사 주련 두 번째 유형과 조각자 및 조각형태가 같다.
한편, 진기풍 컬렉션은 진기풍 선생이 평생 수집한 것 중 2011년까지 고창군에 기증한 작품들을 말한다.
추사(秋史) 김정희 선생의 귀향길 이동 경로는 ▲ 1840년 9월 2일 제주도 대정현 위리안치 명 ▲ 9월 3일~4일 귀향길 출발 ▲ 일자불명-전주에서 창암 이삼만 선생과 만남 ▲ 9월 20일께 현 고창군 내 흥덕현-하오산마을-반암마을(병바위)-선운사-무장현 ▲ 9월 23일께 장성-비아-나주 ▲ 9월 25일께 해남 대흥사(초의선사 만남) ▲ 9월 27일 아침, 완도에서 배를 탐 ▲ 9월 27일 저녁 제주도 대정현 도착 등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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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글씨 주련 고창군립미술관에 영구기탁
인촌기념사업회(회장 김재호)가 추사 김정희 글씨 주련 9점과 창암 이삼만 글씨 주련 2점을 고창군이 운영하고 있는 고창판소리박물관별관 군립미술관에 영구 기탁 했다.
이 주련들은 지난 8월 12일 고창군 반암리에 소재하고 있는 울산 김씨 인촌 김성수 집안 제각에서 발견돼 학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인촌기념사업회는 언론 보도 이후 도난 및 보존관리를 위해 고려대 박물관에 보관해 오다가, 지역에서 발견된 문화유물은 발굴지역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여론과 관계자들의 의사를 받아 들여 추사 김정희, 창암 이삼만, 의재 허백련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예가들의 작품을 보존관리하고 있는 판소리박물관 별관 군립미술관에 영구기탁하게 됐다고 전했다.
백원철 고창문화연구회 회장은 "주련에 쓴 소동파의 시구들에 대해서는 소동파(字 소자첨)에 견준 추사의 학문적 자부심과 멀리 귀향 가는 착잡한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주련에 쓰인 추사가 직접 지은 상선암(上仙岩)이라는 시의 ‘걷고 또 걷는 길이 굽어져 산봉우리 돌아드는 곳(행행로전봉회처行行路轉峰廻處)’이라는 시구는 반암마을의 풍광과도 어울릴 뿐 아니라 멀고 먼 귀향길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창군은 군립미술관에 기탁 받은 글씨들을 영구 보존처리 할 뿐만 아니라 추사 김정희 및 금석문 전문가들을 감정평가 위원으로 위촉해 심도 있는 감정평가를 거쳐 군립미술관에 전시할 계획이다.
또한 추사의 자취를 조명하는 역사문화탐방프로그램을 개발해 추사 김정희가 남긴 높은 기개와 예술혼을 체험할 수 있는 문화관광컨텐츠도 함께 개발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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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에서 찾은 추사 김정희의 유배 흔적
세한도 속 노송 닮은 '허리 꺾인 소나무'(고창=연합뉴스)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 속 '허리 꺾인 소나무'가 화제다. 이 소나무는 최근 추사 글씨가 대거 발굴된 전북 고창의 무장 동헌의 뜰에 있다. 2015.8.12 <<고창향토문화연구회>> sungok@yna.co.kr
전북 고창에서 확인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의 흔적은 여러모로 주목할 만하다.
개중 하나로 그의 유배 행로를 추정할 만한 근거가 나온 점을 들 수 있다.
세한도 속 노송 닮은 '허리 꺾인 소나무’
한양에서 제주도까지 추사의 유배 행로는 여러 문헌을 통해 대체로 알려졌으나 경유지인 전주와 나주 사이 행로는 그동안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고창향토문화연구회가 수집, 공개한 추사 관련 자료는 반암마을에 있는 인촌 김성수 집안의 제실 주련(柱聯)과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하오산 마을에서 채집한 이야기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주련 가운데 중국 원나라 때 학자이자 시인인 우집(虞集)의 시에서 뽑아낸 다음 구절이 먼저 눈길을 끈다.
"자첨문장세희유(子瞻文章世希有 : 소동파의 문장은 세상에 희귀한데)
적향강파동성두(謫向江波動星斗 : 귀양길은 강물이 하늘과 맞닿은 먼 곳이네)"
귀양 길의 소동파를 노래한 이 시구 속 자첨(子瞻)은 중국 북송 때 시인인 소동파의 자(字)이며, 적향(謫向)은 귀양 뜻한다.
백원철 공주대 명예교수는 우집의 시를 쓴 이 주련은 자신을 소동파에 견준 추사의 학문적 자부심과 멀리 귀양 가는 착잡한 심정을 드러낸 것이라고 풀이했다.
전북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반암마을에 있는 인촌 김성수 집안의 제실. 이곳에서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 11점이 최근 발굴됐다.
이번에 발굴된 주련은 이처럼 귀양가는 추사의 심정을 담은 글귀가 대부분이다.
추사 금석문 연구가인 이용엽 국사편찬위원은 "추사의 주련이 대거 발굴된 것은 추사 연구의 기념비적 사건"이라며 "추사 중기의 이 글씨들은 추사체의 변천과정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고창향토문화연구회가 밝혀낸 추사 주련 제실 글씨는 11점. 하지만 이곳 반암마을 주민이며 향토사학자 김모씨가 1975년 이 제실에서 탁본해 소장한 주련이 20점이다. 따라서 추사 주련은 적어도 20점 이상이었다가 1975년 이후 언제인가 9점 혹은 그 이상이 행방을 감추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추사 글씨는 주련 외에도 더 있었다는 증언, 혹은 증거도 있다.
고인돌박물관 문화해설사 강신교(67) 씨는 반암마을 주민 김모씨가 '倒影碧流'(도영벽류 : 흐르는 물에 그림자가 거꾸로 비친다)라고 쓴 편액을 갖고 있다가 1985년경 지인에게 높은 가격에 판매하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30×80cm 크기의 먹감나무로 만든 이 편액 탁본 역시 향토사학자 김씨가 소장하고 있다.
추사 주련이 어떻게 김성수 집안 제실에 걸리게 되었을까? 그 연유는 아직 베일에 가렸다.
추사 글씨 외에도 인근 하오산 마을 일대에 전하는 추사 관련 일화도 흥미롭다.
고창에서 발굴된 추사 김정희 글씨(고창=연합뉴스) 전북 고창에서 새로 발굴된 추사 김정희의 글씨 11점. 2015.8.12 <<고창향토문화연구회>> sungok@yna.co.kr
주련을 찾은 인촌 김성수 집안의 제실
유배에 오른 추사는 하오산 마을에 있는 전주 이 씨인 이문술 집안에서 유숙한 것으로 전한다. 이문술 집안은 왕실 종친으로 병조판서와 도승지를 배출한 명문가.
추사박물관 허홍범 학예사는 "추사가 벼슬을 했지만 유배길에 오른 죄인이었기에 객사에 재울 수 없어 유배지까지 가는 동안 대체로 지방 수령들이 유숙할 곳을 마련해주었다"고 말했다.
이문술 집안에서는 추사가 도착할 날에 맞춰 미리 소를 잡아 육포를 만들어서 추사에게 줬다는 일화도 있다.
추사는 그 보답으로 글씨를 써줬으며 이 집안에서 병풍으로 만들어 후손에게 전해오다 한국전쟁 당시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고창 주민들은 또 추사가 제주도에 그린 세한도 소재가 된 '허리 꺾인 소나무'가 고창 무장면에 있는 무장동헌의 노송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창향토문화연구회는 "이 소나무가 세한도 속 노송을 닮기는 했지만 추정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오강석 고창향토문화연구회장은 "여러 증언과 추사 글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제주도로 유배된 추사는 1840년 9월 20일과 23일 사이 고창 하오산과 인근 반암마을을 지나 장성을 거쳐 나주로 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전주 이씨 집안의 문집과 행장(行狀), 비문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해보면 추사의 유배 행적 등을 더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추사 김정희 선생, 주련 11점 발굴
고창향토문화연구회 공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제주도 귀양길 고창 행로 밝혀져(서예문인화, 2015년 9월 호)
고창 향토문화연구회(회장 오강석)에서 추사 김정희(1786~18560)선생이 제주도 귀양길에 고창을 지나간 행로와 추사가 쓴 柱聯(기둥이나 벽에 장식으로 써 붙이는 글) 편액 탁본 등을 공개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연구회는 8월 12일 발표한 자료를 통해 고창 반암마을에서 발견된 주련 중에 ‘謫向’(귀양)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것을 추사가 귀양 가는 중에 글을 썼다는 결정적 근거로 들었다.
유홍준 교수가 ‘완당평전’에서 ‘모질도’를 근거로 남원을 경유해 나주로 갔다고 주장한 것이 오류임이 밝혀진 뒤 공백으로 남아있던 전주 ~ 나주 간 행로가 이번 발견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1840년 9월 2일, 제주도 대정현에 圍籬安置( 예전에, 죄인을 귀양살이하는 곳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일을 이르던 말)를 명받은 추사는 곧 행장을 준비해 귀양길에 나섰다. 일행은 추사와 수행을 담당한 금오랑, 그리고 수발을 들 하인 등 서너 명이었다.
고창에서 추사의 귀양길 행적이 처음 나타나는 곳은 부안면 하오산마을이다. 추사는 전주~태인~흥덕을 거쳐 하오산마을 전주이씨 이문술의 집에서 유숙하게 된다. 이문술의 깁안은 왕실의 종친으로 병조판서, 도승지 등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이와 관련해 추사박물관 허홍범 학예사는“벼슬을 했지만 죄인을 객사에 재울 수 없어 유배지까지 가는 동안 지방 수령들이 대부분 유숙할 곳을 마련해 주었다.”고 말했다.
9월 3~4일 경 한양을 출발하여 9월 27일에 완도에서 재주도로 가기 위해 배를 탔으니 하오산에 온 것은 9월 20~23일 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 죄인의 압송이었다면 열흘이면 왔을 길을 20일 가까이 걸린 셈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동생인 서정태(93세) 시인은 13 세 때 하오산마을에 사는 친구 이동필의 집에 갔다가 동필의 할아버지로부터 추사와 관련
윤상도 옥사 사건
가. 옥사가 일어난 배경
윤상도(1768~1840)라는 하급관리가 순조 30년(1830) 고급관리인 호조판서 박종훈과 유수를 지낸 신위, 그리고 어영대장 유상량 등의 3명을 부패하다고 탐관오리로 몰아 탄핵 상소문을 올린다.
그러나 군신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이유로 왕의 미움을 사서 역풍을 맞아 추자도에 유배되고, 추사의 생부 김노경은 배후조종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된다. 그러다가 헌종 6년(1840) 윤상도는 의금부에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아들과 함께 능지처참된다.
이 사건을 두고 윤상도 옥사라고 하는데 추사는 윤상도 부자가 올렸던 상소문의 초안을 잡았다는 이유로 이 사건에 뒤늦게 연루되어 제주로 유배되었던 것이다.
나. 추사 김정희의 유배 기간
추사는 조선 왕실의 외척가문(증조가 영조의 사위)으로 앞날이 창창했지만,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고금도에 유배 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났으나, 자신도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55세 때 1840년 안동 김씨 세력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제주도 대정지방에 위리안치 형을 받아 8년 3개월간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나 정계에 복귀한다.
1851년(철종 2년)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벗인 영의정 권돈인의 禮論으로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되었다가 1853년에 풀려났다.
이 후에는 정계에 복귀하지 못한 조선 최고의 서예가이다.
추사는 유배기간 동안에도 허송하지 않고 오히려 제주사람을 뽑아 제자로 가르치고, 학문과 서예를 대성시키는 수련의 시간으로 삼아 일세를 대표할 만한 대학자로 서예가로 이름을 남겼다.
추사는 추사와 완당이라는 호를 많이 사용했으나 그밖에 100여 개가 넘는 별호를 사용했다. 당색으로는 노론으로 외척이었지만 벽파나 탕평당에 들지 않고 북학파가 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족이었고, 양어머니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된다. 실학자 박제가의 문인으로 연암 박지원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흥선대원군과 박규수, 효명세자는 그의 문인들이었다.
다. 추사의 유배 이유 및 그때의 직업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간 이유는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관련된 배후조종 혐의로 유배를 갔고, 추사는 윤상도가 올렸던 상소문의 초안을 잡았다는 이유로 유배를 갔다. 당시 직책은 예조참의로 정3품 당상관이였다.
김정희의 가족 관계
할아버지 의정부 우참찬(김이주)
친 아버지 이조판서(생부 김노경)
큰아버지 대사헌(양부 김노영)의 양자
윤상도(1768∼1840)는 순조30년(1830) 호조판서 박종훈과 유수를 지낸 신위, 그리고 어영대장 유상량 등을 탐관오리로 몰아 탄핵을 한다.
그러나 군신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이유로 왕의 미움을 사서 추자도에 유배되고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은 배후조종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된다. 그러다가 헌종6년(1840) 의금부에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윤상도는 아들과 함께 능지처참된다.
추사 유배지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1661-1
학문과 예술 세계를 꽃피운 추사의 마음이 서린 곳
대정현은 추사 김정희가 유배를 와 8년 3개월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조선시대 형벌에는 태·장·도·유형과 함께 사형이 있었는데, 유배에 해당하는 유형은 사형을 면한 형벌로 죄가 무거울수록 임금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냈다고 한다. 제주도로 유배를 오면 제주관아가 있던 제주목에 머무르는 것이 대부분이나, 추사는 제주목에서도 한참 떨어진 대정까지 유배를 왔으니 정쟁이 극심했던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겠다.
경주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북학의 대가이던 박제가를 스승으로 두었으며 문과에 급제한 후 규장각을 거쳤고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판을 지내며 소위 ‘잘 나가던’ 시절을 보냈으나 55세 되던 해 안동 김씨 세력과 벌이던 정쟁에서 밀려나 제주도로 유배오게 된다. 유배 중에서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위리안치’형을 받는데 이는 지금도 담장을 두르고 있는 가시달린 탱자나무를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인이 귀했던 제주이기에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청나라에까지 이름을 알리던 인물인 추사에게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추사가 머물렀던 원래 집은 제주 4·3항쟁 때 불타버려 후에 복원을 했는데 제주도 민가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
추사는 이곳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하면서 마음자세가 변하게 되는데 그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제주도로 유배를 오면서 벗이었던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해남 대흥사를 찾았다고 한다. 그때 대흥사에 걸려 있던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글씨를 보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떼버리라고 했다 한다. 하지만 유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이곳에 들러 예전에 자신이 잘못 보았다며 다시 걸어달라고 하고 자신의 글씨는 뒷방에 걸어달라 부탁을 하였으니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겸손한 마음을 만들었으며, 그로 인하여 독특한 예술성을 가진 추사체와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그림인 세한도를 제주에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留 守
시대 : 조선
성격 : 관직
유형 : 제도
분야 : 역사/조선시대사
요약 고려·조선시대 수도 이외의 옛 도읍지나 국왕의 행궁이 있던 곳 및 군사적인 요지에 두었던 유수부의 관직. 유수제도는 중국 당·송의 옛 제도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내용
하나는 황제 부재시에 유수를 두어 수도를 지키게 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옛 도읍지에 유수부를 두어 행정을 담당하게 한 것이다.
고려시대는 당·송의 제도 가운데 후자의 제도를 도입해 옛 왕경인 삼경(三京)에다 유수부를 설치하고 유수관을 두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위의 삼경제도를 벗어나 수도 방위를 위한 행정적·군사적 중요 지역에 유수부를 두어 유수를 파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995년(성종 14)에 수도인 개경(開京)을 개경부라 하고 당나라 제도를 모방해 적현(赤縣)과 기현(畿縣)을 두었다. 그리고 옛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를 동경(東京), 고구려의 옛 도읍지인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하여 각각 유수부를 설치하고 유수에 대한 삼경제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문종 대에 이르러 옛 백제의 도읍지인 서울(당시 楊州)에 남경을 설치하고 유수부를 두어 개경을 제외한 동경·서경·남경을 삼경으로 하여 유수를 두었다. 유수는 3품 이상관으로 유수사(留守事, 서경)·유수사(留守使)·유수관(留守官) 등으로 불렸으며 모두 외관직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수를 처음 둔 곳은 조선 태조의 어향(御鄕)인 전주와 고려의 옛 도읍지인 개성이었다. 초기에는 유수를 유후(留後)라고 했으며 관아를 유후사(留後司)라 하였다. 전주의 경우 그 상세한 것을 알 수 없으나, 개성유후사는 보다 조직적·체계적으로 운영되었다.
이는 태조가 개국한 기명지(基命地)일 뿐만 아니라, 고려의 옛 도읍지인 동시에 중국 사행(使行)의 유숙지로 크게 활용되어 더욱 중시되었다.
개성유후는 정2품직으로 한성부와 마찬가지로 경관(京官)을 임명하였다. 개성유후사는 1438년(세종 20) 10월에 개성부로 개칭되고 유후도 유수로 개칭되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2인의 유수를 두되 1인은 경기관찰사가 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행정은 전임(專任) 유수가 담당하고 군사 업무도 주관하였다.
유수제는 조선 후기부터 더욱 확대되었다. 즉,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로 피신했다가 환도 뒤 이곳에 유수를 두었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에는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수어청(守禦廳) 체제를 강화하면서 유수를 두었다.
그리고 1793년(정조 17) 정조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하고 도성(都城) 중심의 내영(內營)과 화성(華城 : 水原) 중심의 외영을 설치하면서 이곳에도 유수를 두게 되었다.
이상에서 조선 초기에는 국왕의 행궁터 등에 유수를 파견했으나 조선 후기에 가서는 유수부가 수도의 외곽을 방어하는 배도(陪都)로서의 기능이 더욱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수원유수는 총리영(摠理營)의 사(使)를 겸했으며, 광주유수(廣州留守)는 몇 차례의 변동이 있은 뒤에 남한산성의 수어청사(守禦廳使)를 겸하였다.
또 개성유수는 관리영사(管理營使)를 겸하고 강화유수는 진무영사(鎭撫營使)를 맡아 수도의 외곽 방어에 책임을 졌다.
어영대장(御營大將)|
정의
조선 군사 국방 용어
조선후기 오군영의 하나로 인조대에 설치한 어영청의 대장.
내용
인조가 반정을 기도하던 1623년(인조 1) 이귀(李貴)가 개성의 유수(留守)로 있으면서 반정을 위해 모집한 군사 가운데 용감하고 건장한 이들을 뽑아 화포(火砲)를 가르치고, 어영군(御營軍)이라 이름하였으며, 이때 이귀를 초대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임명하였다. 1624년 어영청으로 군문이 설립되었으며, 1628년(인조 6) 구인후(具仁垕)를 어영대장으로 삼고 하나의 국(局)을 두어 교련을 전적으로 관장하도록 하였다. 1652년(효종 3) 이완(李浣)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비로소 군영(軍營)을 세우고는 보인(保人)을 정하여 베를 거두어 군사 양성의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어영대장은 훈련도감과 금위영의 대장과 같이 삼군문의 대장으로 도성의 방어는 물론 궁궐의 숙위까지 담당하던 수도방위의 책임자였다. 또한 국왕의 행행을 수행하던 수가대장(隨駕大將)의 임무도 맡았다. 따라서 어영대장은 어영청이 설립되던 초기부터 왕권을 보위하는 무력을 담당하는 정치적인 지위였다.
용례
敎曰 親軍諸營 卽宿衛之任 所重自有別焉 監督之稱 不過一時權宜也 現今軍容稍成 營制頗定 稱號改爲親軍營使 以曾經將任人差除 營中文牒 一依御營使之稱御營大將例 所佩符信虎符及傳令牌造給 以爲定式 以前營監督韓圭稷爲前營使 左營監督李祖淵爲左營使 禁衛大將閔泳翊爲右營使 右營監督尹泰駿爲後營使[『고종실록』 21년 8월 26일]
御 營 廳
요약
임진왜란 뒤 5위(五衛)에 대체되어 설치된 3군문(三軍門)의 하나.
1623년(인조 1) 이귀(李貴)가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있으면서 건장한 자 260명을 모집하여 화포술(火砲術)을 가르치고 이를 어영군(御營軍)이라 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귀를 어영사(御營使)로 삼고, 뒤에 어영찬획사(御營贊劃使)·찬리사(贊理使)를 두고 군대를 편제하여,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는 인조를 어영군이 공주(公州)로 호종하였고, 공주에서 민간인의 포수를 뽑아 정예부대를 조직하였으나 총융청(摠戎廳)에 소속되었다.
1628년 어영청을 설치하여 이서(李曙)를 제조(提調)로, 구인후(具仁垕)를 대장으로 임명하여 군병 훈련을 전담하게 하였다. 1652년(효종 3) 효종의 북벌(北伐)계획에 따라 어영청을 정비·강화, 비로소 군보(軍保)를 정하고 군영을 설치하여 이완(李浣)을 어영대장으로 북벌계획의 본영(本營) 구실을 하였다.
관원은 도제조(都提調:의정 겸임)·제조(提調:병조판서 겸임)·대장(종2품)·중군(中軍:종2품)·별장(別將:정3품) 각 1명, 천총(千摠:정3품) 5명, 별후부(別後部) 천총(정3품:永宗僉使 겸임) 1명, 기사장(騎士將:정3품) 3명, 파총(종4품) 5명, 외방겸파총(外方兼把摠:종4품, 지방수령 겸임) 10명, 종사관(從事官:종6품) 문·무관 각 1명, 초관(哨官:종9품) 41명, 교련관 12명, 기패관(旗牌官) 11명이 있었으며, 병력은 별무사(別武士) 30, 군관(軍官) 38, 별군관(別軍官) 10, 권무군관(勸武軍官) 50, 가전별초(駕前別抄) 52, 기사(騎士) 150, 표하군(標下軍) 783, 별파군(別破軍) 160, 수문군(守門軍) 40, 치중군(輜重軍) 50, 기타 보군(步軍)으로 되어 있었다.
효종 때의 어영군은 별초병과 기병을 주로 한 정예부대로서 경상·전라·충청·강원·경기·황해의 6도에 나누어 배치되었는데, 1706년(숙종 32)에 1영5부제(一營五部制)로 기구가 축소되었으며, 얼마 뒤 양화도(楊花渡)를 어영청에 속하게 하였다. 1881년(고종 18)에는 장어영(壯禦營)을 새로 설치, 어영청을 이에 병합시켰다가, 이듬해 장어영을 폐지하고 어영청을 다시 설치하였으며, 1884년에는 별영(別營), 1888년에는 총어영(摠禦營)으로 각각 개칭하였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참조항목
가전별초, 갑오개혁, 겸별파진, 겸파총, 경영, 기효신서, 어영청등록, 이괄의 난, 이귀
역참조항목
겸내취, 계령, 권무군관, 기사장, 기포, 남소영, 남창
戶 曹
유형 : 제도
시대 : 조선
성격 : 관서, 관청
시행일시 : 1389년(공양왕 1)
폐지일시 : 1894년
<정의>
조선시대 호구(戶口)·공부(貢賦)·전량(錢糧)·식화(食貨)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서.
<내용>
육조(六曹)의 하나이다. 지관(地官)·지부(地部)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의 호부(戶部)가 판도사(版圖司)로 격하되었다가 1389년(공양왕 1) 호조로 개칭된 것이 그대로 조선시대로 계승되었다.
조선 초기의 육조는 단순한 실무 집행기관이었으나 1405년(태종 5) 관제개혁 때 정2품아문으로 승격하면서 실무뿐 아니라 정책수립의 권한도 아울러 가지게 되었다. 초기의 소속기관은 판적사(版籍司)·회계사(會計司)·경비사(經費司)로서 각사는 정랑 3인에 의해 분장되었다.
판적사는 호구·토전(土田)·조세·부역 등 재부(財賦)에 관계된 일을 관장하였다. 회계사는 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에 비축된 미곡·포(布)·전(錢) 등의 연도별 회계, 관리의 교체 때 맡은 물건의 부족함을 살펴 해유(解由)를 내는 일 등을 관장하였다.
경비사는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국용(國用)의 제반 경비의 지출 및 왜인(倭人)의 양료(糧料)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다. 3사의 분장체제는 선조대 이후로 새로운 용도가 생겨나고 또 업무가 늘어나 여러 방(房)·색(色)을 신설과 함께 변화를 가져왔다.
1596년(선조 29) 훈련도감 군사의 급료관리처로서 별영(別營)이 용산(龍山)에 세워지면서 그 지급 사무를 전담하는 별영색(別營色)의 신설이 있었다.
1640년(인조 18)에는 또 각 관서의 원공(元貢)에 부족한 물종과 중국·일본과의 별무(別貿) 물종의 무역가 등을 마련, 보관하는 별고(別庫)가 역시 용산에 설치되어 그 관리를 맡은 별고색(別庫色)이 두어졌다.
이 두 색의 신설은 위 3사 분장에 큰 변동을 가져오지 않았으나, 1694년(숙종 20)에 사섬시(司贍寺), 1767년(영조 43)에 사축서(司蓄署)가 각각 혁파되어 내속되는 등 관제의 변동에 따라 정조대 초반에는 3사 14방(房)의 체제로 정돈되었다.
즉, 판적사에 잡물색(雜物色)·금은색(金銀色)·주전소(鑄錢所)·수세소(收稅所)·사섬색(司贍色) 등 5방이, 경비사에 전례방(前例房)·별례방(別例房)·판별색(版別色)·요록색(料祿色)·세폐색(歲幣色)·응판색(應辦色)·별고색·별영색·사축색(司畜色) 등 9방이 각각 설정되고, 회계사에는 방색이 두어지지 않았다.
1788년(정조 12)에 편찬된 ≪탁지지 度支志≫에서는 당시의 호조소관업무가 사실상 크게 축소된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즉, 호적은 한성부로, 어염세(漁鹽稅)는 균역청으로 각각 넘어갔다.
군국(軍國)의 중요한 재원인 조(租)·용(傭)·조(調)에서도 용은 병조가 방번수포(放番收布)하고, 조(調)는 각 읍에서 전(錢)으로 매겨 거두고, 조도 선혜청이 대동미(大同米) 12두(斗)를 거두어, 호조 소관으로는 전세(田稅) 4두뿐이라는 것이다.
≪경국대전≫에 명시된 관원은 판서 1인, 참판 1인, 참의 1인, 정랑 3인, 좌랑 3인, 산학교수 1인, 별제 2인, 산사(算士) 1인, 계사(計士) 2인, 산학훈도 1인, 회사(會士) 2인 등이 있었다. ≪속대전≫에서는 별제·계사·회사 등 각 2인이 1인으로 감원되고, ≪대전회통≫에서는 종6품의 겸교수(兼敎授) 1인이 증치되었다.
태조 원년의 관제에서는 최고책임자로 전서(典書) 2인이 두어졌으나, 1403년에 1인을 감하고 뒤이어 이름을 판서라 고쳐 정2품으로 하였다. 1593년 훈련도감을 설치하면서 호조판서는 이의 제조(提調)직을 예겸하도록 하였다. 판서는 비변사를 비롯해 장생전(長生殿)·선혜청·예빈시·광흥창·군자감·선공감(繕工監) 등의 제조도 예겸하였다.
정랑·좌랑직은 모두 생원·진사 출신의 음직(蔭職)이었는데, 정랑의 1인은 1749년에 문신으로 차정해 춘추관기주(春秋館記注)를 예겸하도록 하였다. 좌랑 1인은 1756년 무신으로 했고, 좌랑 1인은 장생전의 낭관을 겸하였다.
회계를 주무로 하는 산학(算學)이 속사(屬司)였는데, 위 관원 중 종6품의 교수 1인 이하 종9품의 회사 1인 모두 이 속사의 것이었다. 속사에는 그 밖에도 부료계사(付料計士) 등의 인원이 54인 있었다. ≪만기요람 萬機要覽≫에는 계사가 모두 60인이라고 했고, 그 밖의 속원으로 서리 60인, 고직 9인, 사령 40인이 배속되었다.
호조는 1418년 세조의 즉위로 조정된 서열에 따라 이조 다음으로 두 번째로 법제화되었다. 호조의 소관사무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증대함으로써 운영상의 변동을 겪었으나 정2품아문으로서의 관서 자체는 1894년 갑오경장 때 탁지아문(度支衙門)으로 바뀔 때까지 존속하였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탁지지(度支志)』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만기요람(萬機要覽)』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대전회통(大典會通)』
上仙巖 ㅡ 金正喜之詩
行行路轉峯廻處 걷고 또 걸으니 길은 굽고 산봉우리 돌아드는 곳
一道淸泉天上來 한 가닥 맑은 샘물 높은 하늘에서 흘러 오네
縱使有方能出世 아무리 방법이 있어 세상에 나간다 하더라도
異時歸海亦蓬萊 훗날 바다로 나간다면 또한 봉래산이리라.
우집(虞集 1272 ~ 1348) 1
원대의 저명한 학자이자 시인으로 자는 伯生이고 호는 道園이며 蜀郡사람이다. 부친 우급은 송나라 때 황강위를 지냈는데 나라가 망하자 임천 숭인으로 옮겨 살았다. 어려서부터 家學을 전수받았고 일찍부터 경학가인 오징을 따라 유람하였다. 성종 대덕 초기에 추천을 받아 대도로 유학교수를 제수받은 두 집현수찬과 규장각시서학사를 지냈다. 오랫동안 문명을 날리며 게혜사揭傒斯, 유관 柳貫, 황진과 함께 元儒四家로 로 불렸는가 하면 시로도 게혜사, 범팽, 양재와 함께 元詩四家로 불렸다. 사람들이 소암선생이라고도 불렀다. 經世大典편찬을 이끌었고 저서로 道園學古錄과 道園遺稿가 있다.
우집[虞集] 2
생몰 : 1272년 ~ 1348년
원나라 임천(臨川) 숭인(崇仁) 사람. 자는 백규(伯生)고, 호는 도원(道園) 또는 소암(邵庵)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선대는 촉(蜀) 사람이었는데, 송나라가 망하자 아버지 우급(虞汲)이 숭인으로 옮겨 살았다. 젊어서 가학을 계승해 많은 경전을 읽고 그 대의를 파악했다. 성종(成宗) 대덕(大德) 연간에 천거되어 대도로(大都路) 유학교수(儒學敎授)에 임명되었다. 그 뒤 국자사업(國子司業)과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등을 지냈다.
인종(仁宗) 때 집현수찬(集賢修撰)으로 옮겨 학교 문제를 거론해 학관(學官)은 당연히 경명행수성덕(經明行修成德)한 선비를 기용해야 한다면서 자격이 없는 사람을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림대제(翰林待制)에 올랐다.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규장각시서학사(奎章閣侍書學士)를 여러 번 지냈다. 『경세대전(經世大典)』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다. 문종이 죽은 뒤 안질에 걸리고 권력자들이 꺼리자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
어려서 어머니 양씨(楊氏)에게 배웠고, 학문은 정주(程朱)의 이학(理學)을 종주로 했다. 주희(朱熹)의 이학을 관학(官學)으로 삼고, 주희의 설을 과거시험의 표준으로 삼자고 주장했다. 저명한 학자 오징(吳澄)과 친하게 지냈으며, 그의 영향으로 주희와 육구연(陸九淵)의 학문을 종합하려는 성향을 보였다. 후대 전조망(全祖望)은 주자학을 근본으로 하면서 육구연의 학문을 겸했다고 평했다. 저서에 『도원학고록(道園學古錄)』과 『도원유고(道園遺稿)』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집 [虞集]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이회문화사)
秋史 金正喜의 歲寒圖 와 不作蘭圖
歲寒圖
아버지는 고고학을 공부하셨습니다. 직업도 그와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서울 수유리에 살았을 때, 마당에는 값비싼 것은 아니었으나 크고 작은 유물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고고학과 고미술에 관한 자료가 빼곡히 쌓여 있고, 골동품도 여기저기 놓여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고서화나 골동품을 감상할 때 가장 행복해하셨습니다. 서재에서 오래된 글씨나 그림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은 언제나 그윽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 작품들을 뚫어지게 지켜보면서 마치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이기도 했고요. 사랑하는 엄마를 바라보시는 눈길과도 같았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잘 들어오진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저도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관심을 뒀기 때문이지요. 대학에 들어와 공부한 것은 사회과학이었기에 회화를 포함한 미술을 가까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림감상을 좋아했지만 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전하는 미술
제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원에 들어와 상담학을 배우면서부터입니다. 상담학은 마음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내담자의 닫힌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이 상담사의 일입니다. 마음과 심리를 공부하면서 저는 인간이 마음과 심리를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가 미술임을 알게 됐습니다.
미술은 언어처럼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내진 않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뿐만 아니라 느낌까지 포괄하는 마음을 담아냅니다. 언어는 마음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지만, 그렇다고 복잡 미묘한 마음을 모두 언어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는 생각뿐만 아니라 느낌도 존재하고,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도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느낌과 무의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 데 미술은 매우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포의 마음을 언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포의 느낌은 언어로 전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연재에서 다룬 적이 있는 뭉크의'절규'가 적절한 사례입니다.'절규'는 인간이 갖는 공포의 느낌과 생각을, 다시 말해 공포의 마음을 생생히 전달합니다. 작품을 보는 순간 뭉크가 느낀 공포를, 나아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공포를 온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미술이 마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저는 미술에 매혹됐습니다. 미술 관련 서적들을 읽어보고 전시회를 찾아 다녔습니다. 서른이 넘어서야 미술이라는 존재와 의미를 발견하게 된 셈이지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비로소 오래전 고서화와 골동품을 그윽하게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오늘 소개하고 싶은 것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의 작품입니다. 김정희는 조선 후기에 활동한 정치가이자 학자, 그리고 예술가입니다.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전통 사회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지식인이지요.
의리와 사랑이 빛나는 순간
추사체로 널리 알려진 김정희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서예가입니다. 아버지는 서예 작품을 좋아하셨지만, 저는 서예에 담긴 의미를 아직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미술이 마음과 정신의 표현이라면, 서예에도 마음과 정신이 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정희는 서예와 그림의 필법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신을 불어넣어 표현한다는 점에서 서예와 그림은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지요.
김정희를 대표하는 그림은'세한도(歲寒圖, 1844, 국보 제180호)'입니다. 정선의 산수화, 김홍도의 풍속화와 함께 한국인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보고 배우는 작품입니다. 김정희는 이 작품을 정치적으로 좌절한 제주도 유배 시절에 그렸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쓸쓸한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쓸쓸함을 담담하고 의연하게 견뎌내려는 선비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작품엔 창문 하나가 달린 작은 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집에 기댄 듯 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집 주위에 잣나무 세 그루가 서 있습니다. 계절은 겨울인 듯합니다. 소박한 초옥 한 채와 나무 몇 그루가 고적한 한겨울의 느낌을 안겨줍니다. 작품의 제목도 날이 추워진다는 의미를 가진'세한(歲寒)'에서 따왔습니다. 김정희는 그림 뒤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는 가까이하다가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모른 척하는 것이 보통이다. 내가 지금 절해고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처량한 신세인데도 이상적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런 귀중한 물건을 사서 부치니 그 마음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헌종 때 김정희는 제주도 대정으로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것이지요. 권력을 가졌을 때는 누구나 우러러보고 두려워하지만 권력을 잃으면 교류가 끊어지고 주변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의리와 사랑이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때입니다. 내가 권력을 잃어도 나를 좋아하고 존중하는 이가 진정한 친구이겠지요. 김정희에겐 제자인 역관 이상적이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중국에서 귀한 책을 구한 이상적은 그 책을 권력자가 아닌, 귀양살이를 하는 스승에게 선물했습니다. 김정희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요.
추울 때라야 안다~~^^
앞의 문장에 이어 김정희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공자는'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知松柏之後凋)'라 했으니, 그대의 정의야말로 추운 겨울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조(節操)가 아닐까."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란 추운 계절이 돼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언행을 다룬 유교의 고전'논어(論語)'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찾아오는 이 거의 없는 제주도 대정에 유배 와서 김정희는 새삼 권력과 인간과 의리를 생각하게 된 듯합니다. 그리고 소나무, 잣나무와 같은 제자 이상적의 아름다운 의리를 이렇게 칭찬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선비 정신은 낯설게 느껴집니다. 특히 저와 같은 여성의 경우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조선 사회는 가부장적 사회라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럼에도'세한도'가 감동적인 것은 어려운 시절에 나누는 의리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면 살아가면서 적어도 한두 번 어려운 시절을 겪게 되지요. 진정한 친구와 동료란 바로 이때 힘이 돼주는 이들입니다. 모두 다 돌아선 채 나를 멀리하더라도 끝까지 내 옆에 남아 나를 지켜봐주고 때때로 격려해주는 것이 진정한 의리와 사랑이 아닐까요.
의리란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져야 할 바른 도리입니다. 설령 손해를 보더라도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의리는 사대부라면 가져야 할 덕목의 하나였습니다. 가부장주의로서의 유교 문화를 싫어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이제껏 나눠온 믿음에 대한 신뢰라 할 의리가 새삼 그리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세한도'는 제게 의리와 신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그림입니다. 또, 삶의 고난을 의연하게 견뎌내는 기품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일희일비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인간의 품격이 그리울 때면 저는'세한도'를 찾아보곤 합니다.
不作蘭圖(不二禪蘭圖)
추사의 작품 가운데 시선을 끈 또 하나는'부작란도(不作蘭圖)'입니다. 제주와 북청에서 긴 유배 생활을 하고 돌아온 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라 하기도 합니다.
‘부작란도'는 그림과 글씨가 어우러진 독특한 작품입니다. 그림 한가운데엔 한 포기 난초가 놓여 있습니다. 난초는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오른쪽으로 휘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꽃은 그 반대인 왼쪽에 피어 있고, 자유분방하게 솟아오르는 기운이 한껏 느껴집니다. 여백에는 글씨가 가득 씌어 있습니다. 여백 맨 위에 쓰인 글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통로를 제공합니다.
‘난초 꽃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만에 뜻하지 않게 깊은 마음속의 하늘을 그려냈다. 문을 닫고 마음 깊은 곳을 찾아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힐(維摩詰)의 불이선(不二禪)이다.'
김정희에게 난초를 그리는 행위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재현한다기보다는 마음속의 하늘, 즉 맑고 푸른 정신의 세계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유마거사의'불이선'과도 같은 깨달음입니다.'불이(不二)'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난초 오른쪽에 쓰인 글은 이렇습니다.'(난을) 초서(草書)와 예서(隷書)의 이상한 글씨체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를 이해하고 어찌 이를 좋아할 수 있으랴.'
金正喜의 書畵一致
김정희는 글씨를 쓰듯 난을 그렸습니다. 그에게 글씨를 쓰는 것과 난을 그리는 것은 동일한 의미입니다. 서화일치(書畵一致)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앞서 말한 '불이'에도 대응하는 것이지요. 글씨와 그림은 하나이고, 미술 작품을 만드는 것과 정신의 고결함을 간직하는 것도 하나라는 게 김정희가 생각한 예술관인 듯합니다. 김정희에게 미술은 이렇듯 마음과 정신의 세계를 드러내는 데 일차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셈이지요.
김정희의 작품들을 보면서 저는 미술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습니다. 미술은 시대에 따라 변화합니다. 하지만 미술에 담긴 정신은 시간이라는 구속을 넘어서기도 합니다. 김정희에게 정신은 마음의 맑고 아름다운 세계입니다.'세한도'에 나타난 고결한 의리와 절조의 정신은 신뢰와 믿음이 무너지는 현대사회의 비정한 현실을 돌아볼 때 커다란 위로를 안겨줍니다.
더불어 그 정신은 세상의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으려는 굳고 의연한 마음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세한도' 앞에 서면,'사랑하는 제자야. 스승은 지금 가장 외롭고 힘든 상황이지만 이 어려움을 저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끝까지 의연하게 이겨나가겠다. 너의 정성이 정말 고맙구나'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참으로 미술은 쓸쓸한 마음의 따뜻한 거처입니다.
박 상 희
● 1973년 서울 출생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문학박사,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방문학자
● 現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JTBC'사건반장' 고정 패널
● 저서 :'자기대상 경험을 통한 역기능적 하나님표상의 변화에 대한 연구' 등
박상희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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