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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스님의 장군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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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스크랩 금강경 청봉선사강설 13-B 20. 一體同觀分 第十八 (한 몸 같이 봄)
무애심 추천 0 조회 45 15.09.18 14: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금강경강설(청봉선사) 13-B-1.zip

 

 

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

 

 

佛告須菩提하시되 爾所國土中所有衆生  若干種心如來悉知하나니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저 국토 가운데 있는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가 모두 아나니

淸峯:그 많은 불 국토의 그 많은 중생의 온갖 마음의 번뇌 망상과 작용을 모두 아시는 것이 불안임을 일러 주셨다.

  갓이 없는 삼천 대천세계의 한량없는 중생들의 갖가지 자아의 업식은 모두 한가지로 망념으로부터 나툰 것이며, 그 망념인 미혹이 제해지면 청정한 마음뿐이니, 그것이 곧 부처의 마음이요, 또한 다르지 않는 중생의 마음인 것이나 청정한 깨달은 마음은 본각(本覺)을 닦아 얻은(始覺) 마음인 것이다.

  중생과 부처가 둘 아니요 삼천 대천세계가 내 집 아님이 없고 일체만물이 나와 한 몸임을 깨닫게 되어야 한다.


 

何以故하면 如來說諸心皆爲非心이요 是名爲心이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이라고 하는 것

모두가 마음이 아니라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라.

淸峯:어째서 갖가지인가 하면, 본래 일체가 그 바탕이 하나이건만 오욕으로 미혹에 가려 갖가지 집착하는 생각을 냄으로 아상이 있어 갖가지 마음이라 하는 것이나, 실다운 모습이 없으며 여래가 말씀하고자 하는 마음은 근본인 마음 바탕이니, 공적한 본래 마음인 것이다. 이 마음(法性)이라고 하는 본성은 생각이나 말로써 이를 수 없는 것이나 방편으로(말하자면) 마음(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미혹이라는 것도 본래 없으나 스스로 집착으로 인하여 만든 것이니, 진여의 마음과 둘 아닌 것이다. 이 근본 마음이 곧 참마음이요, 항상 하는 불심이며, 반야바라밀다심이며, 청정하고 고요한 열반심인 것이다. 그러나 차별상으로 보면 중생은 어리석어 그 미혹으로 각각 업식인 망념된 마음(自我)의 종이 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所以者何하면 須菩提過去心不可得이며 現在心不可得이며 未來心不可得이니라

어째서인가하면, 수보리야!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淸峯: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것은 가변적(可變的)이니 본래 없는 것임을 요달하면 이름일 뿐이다. 과거는 과거라 할 때 현재요, 현재는 현재라 할 때 과거요, 미래는 미래라 할 때 현재이니, 따라서 처소가 없고 시공이라는 것을 초월한 것으로 시간적으로 마디가 없고 공간적으로는 막히거나 한계가 없다.

  그러므로 불가득이라는 것은 형상이 없고 처소가 없으며, 얻어 가질 바가 없는 것을 말함이다. 그 마음이라는 진심은 실상이 항상(恒常)하나 형상이 없으니(無相), 얻어 가질 것이 본래 없으므로 얻을 것이 있지 않음인 것이다.

  또한 일체가 근본 바탕이 형상이 없고 나눌 수 없는 하나인 것으로 모양도 이름도 없으나 일체를 구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의 갖가지 마음은 실은 여래의 마음과 둘 아니므로 모두 아신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이 각각 그 마음(업식의 마음)이 다르나 모두가 삼심(三心)을 얻을 수 없는 것을 모두 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얻어 가질 수 없는 마음이란 공적하므로 이름이 있거나, 상이 있거나, 얻어 가질 수 있는 것이 없는 空(빈)한 것이기 때문에 여래의 마음과 다르지 않는 것이다. 중생의 갖가지 마음이라 이름한 것은 진심이 아닌 집착으로 인한 번뇌 망상의 업식(業識)의 마음인 것이다.

  그럼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면 어느 마음을 얻어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에 안주 할 것인가?

자, 어느 마음에 점을 칠 것인가? 일러보라!

   “다시 그곳에 점을 치리라”

  이 공안은 주금강이라고 별명이 붙은 덕산 선감 선사가 깨치기 전에 금강경을 무불통지로 알아 자만심에 꽉 차있을 때 남방에서 선지식들이 있어 문자를 세우지 않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 견성 성불하도록 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이런 마구니들을 쳐부수어 불법을 바로 잡겠다” 고 자기가 지은 금강경소초를 짊어지고 남방을 여행하던 중 길가에서 떡장수 노파를 만나 시장하여 점심을 하고자 떡을 팔라 하자 노파가 “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금강경소초'라 하니 “금강경에 있는 것을 물어 대답하면 떡을 드리고 그렇지 못하면 떡을 줄 수 없다”하여 “물어라”고 하니 “금강경에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 했는데 스님께서는 어느 곳에다 점을 치고 점심을 드시겠소?”하자 말을 잊고 답을 못하자 용담선사를 찾아뵙게 하여 그 기연으로 깨우치게 되자 자기의 금강경소초를 불태워 버리고 “이까짓 문자가 무슨 소용이며 팔만대장경도 문자에 불과하다”라고 한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다.

 

 

 

法界通化分 第十九 (법계를 모두 교화함)


 

須菩提於意云何인가 若有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以用布施하면 是人以是因緣으로 得福多不하느냐 如是이니다 世尊이시여 此人以是因緣으로 得福甚多이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써 얻는 복이 많다 하겠느냐?” “그렇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써 얻는 복이 매우 많사옵니다.”

淸峯:한계가 있는 유루의 복이므로 유상(有相)한 것이기 때문에 많다 한 것이다. 그러나 복이란 실다움이 없는 것으로 많다 하는 표현은 무한대의 사량할 수 없는 큼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체 법계 중생이 본래 무한량의 복덕을 구족하고 있으므로 범, 성의 분별마저 없는 것이다.



須菩提若福德有實이라면 如來不說得福德多이나 以福德無故如來說得福德多하니라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실다움이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그 얻은 복덕이 많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나 복덕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므로써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淸峯:칠보로 보시하여 얻은 복은 유루의 복이라 샘이 있어 다함이 있으니, 불과를 얻어 항상하고 상락아정하는 공덕과 비교도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유상(有相)의 것은 주고 받음이 있으므로 많고 적음을 논할 수 있으나 무루의 공덕은 복으로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덕이라면 많다는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번뇌 만상을 여의고 본성(本性)을 요달하여 갖추어진 것을 확인한 것일 뿐, 얻을 것은 유루의 복이요, 무루의 공덕은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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