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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 ]
경상북도 서북부에 자리한 醴泉郡은 동쪽은 안동-영주시, 서쪽은 문경시와 접하고,
남쪽은 의성군-상주시, 북쪽은 충북 단양군과 경계를 이룬다.
지형적으로 북쪽은 묘적봉(1148m) - 뱀재 - 싸리재 - 저수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루금과
맞닿아 있고, 저수령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매봉(865m) - 국사봉(728m) - 꽃재 - 왕의산(339m)
지맥은 문경과 경계를 이루며 내성천과 금천 사이로 빠져나간다.
동북쪽은 백두대간 묘적령에서 가지쳐 나온 옥녀봉(890m). 자구산(784m), 부용봉(688m) 등이
솟아 있고, 남쪽은 낙동강이 하회마을 하류의 구담교 부터 의성과 경계를 이룬다.
예천의 고을 중에서 최남단의 풍양면과 낙동강 건너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내성천과 낙동강 사이에는 백두대간 옥돌봉(1242m)에서 남쪽으로 가지쳐 봉화와 풍산을
지난 지맥에 학가산(870m), 보문산(643m) 등의 산이 우뚝 솟아 있다.
백두대간과 가까운 북부 산간 지역이고, 서남쪽은 낙동강과 내성천이 빚은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다.
전체적으로 북고남저의 지세를 이룬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수주현'이었고, 757년(경덕왕16)에 예천군이라 처음 불렀다.
고려 때에는 甫州, 襄陽이라 했으며, 조선 태종 때인 1416년에 다시 예천군이 됐다.
1895년 예천군과 용궁군이 따로 나뉘었고, 1896년 경상북도에 속했다.
1906년 동로, 화장면이 문경군에, 다인면이 비안군에 편입됐고, 1914년 용군군이 다시 예천군에
통합됐으며, 1923년 안동군과 감천면과 영주군 상리,하리면이 예천군으로 편입됐다.
1937년 예천면이 읍으로 승격됐다.
예천읍을 비롯해 용문, 상리, 하리, 감천, 보문, 호명, 유천, 용궁, 개포, 지보, 풍양면등 1읍11면으로
되어 있다.
단술'예' 자 와 샘'천' 자 를 예천이라는 지명은 삼국시대 '수주'에서 유래됐는데, 이는 고을의
물맛이 단술과 같다는 뜻이다.
예천읍 노하리에 이 유래와 관련있는 샘이 있다.
*내성천
낙동강의 지류인 乃城川은 백두대간의 봉화군 물야면 선달산(1236m)남쪽 기슭에서 발원해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하기 까지 101.8km 를 흐르는 강이다.
처음 신흥가계천 이란 이름으로 봉화군 중심부를 관류하고, 안동 북서쪽으로 적시고 흐르다가
영주시 문수면에 이르러서는 풍기, 영주를 지나온 서천을 받아 들여 덩치를 키워 남서류 한다.
이후 호명면에선 백두대간 묘적봉(1148m)에서발원해 예천읍을 적시고 온 한천을 받아들여
덩치를 한껏 키운다.
그후 낙동강에 합류하기 직전의 용궁면에선 백두대간 대미산(1115m) 동쪽에서 발원해 동로, 산북,
산양면 등 문경 동쪽 고을을 적시 온 금천을 받아 들인뒤 곧바로 낙동강에 합류한다.
*회룡포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 내성천 자락에 있다.
강물이 용틀임 하며 350도 휘돌아 가는 회룡포는 한 삽만 뜨면 섬이 되어버릴것 같은 아슬아슬한
물도리동이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육지속의 섬마을'로 꼽힌다.
전망대가 있는 비룡산(240m)에는 내성천 물줄기를 감상할수 있는 숲속 등산로와 봉수대, 원산성 등
역사적 흔적도 살필수 있다.
비룡산은 아기자기 하고 힘들지 않아 산책 삼아 거닐기 좋다.
장안사 - 제1전망대(회룡대) - 정상 봉수대 - 원산성 - 제2전망대 - 용포마을 - 전망대 코스는
30~40분 쯤이면 충분하다.
통일신라 시대의 운명선사가 세웠다는 고찰 장안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넓은 산책길로 5분쯤
오르면 회룡포 전망대가 있다.
*삼강나루
삼강은 내성천, 금천,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으로
어우려져 있다.
에전에는 서울로 가는 길목으로 문경새재 가기전에 삼강나루터를 꼭 거쳐 갔다.
200년 넘은 회화나무 아래엔 낙동강 물줄기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주막이 있다.
현재 문화마을로 조성중인 삼강마을엔 1620년(광해군20)에 청풍자 정윤목이 세운 '삼강강당'
(문화재자료 제204호)이 있다.
*황목근
용궁면 금남리 금원 마을의 당산목, 수령500년 쯤으로 추정되는 팽나무로 높이 15m, 둘레3.2m에 이른다.
기록에 의하면 '황목근'이라는 이름은 1939년 마을 사람들이 쌀을모아 마련한 공동 재산인 토지를
이 팽나무 앞으로 등기이전 하면서 부터 유래됐다고 한다.
5월이면 누런꽃을 피운다 하여 '黃'씨 성과 근본이 있는 나무라는 뜻의 '木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황목근은 땅을 소유하고 세금을 내고 있다.
마을에선 정월 대보름 자정에 당제를 올리고, 다음날에는 온 마을 주민이 나누 아래 함께 모여
잔치를 벌인다.
또 7월 백중날에도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며 나무를 보살핀다.(천연기념물 제400호).
*석송령
감천면 천향리 석평 마을 입구에 서있는 수령 600년 이상 된 노송.
마을의 안녕과 단합을 지켜주는 洞神木이면서 토지를 소유하고 재산세를 납부하는 부자 나무이기도 하다
마을에선 '석송계'를 조직해 이나무를 보호 하고 있으며, 정월 대보름 새벽에 석송령 아래 제단에서
제를 올린다.
나무높이 10m, 둘레 4.2m로 천연기념물 데294호로 지정됐다.
전하는 말엔 600년쯤 전 풍기에 큰 홍수가 났을때 석간천을 따라 떠내려오던 소나무 한그루를
과객이 건져올려 이곳에 심었다고 한다.
그 뒤 이마을의 이수목이라는 사람이 이 소나무엔 영험이 깃들어 있다해서 이름을 '石松靈으로
지었다 한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이나무 이름에게 상속하고 등기해 주었다.
이때 부터 이나무는 재산세를 납부하게 됐다.
또 박정희 대통령은 석송령에게 500만원을 하사했으며, 기 기금으로 해마다 우수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금당실 전통마을
용문면 삼금곡리에 있는 금당실 마을은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 했던 곳이라 한다.
이곳엔 함양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모신 추원재 및 사당(민속자료제82호)
조선 숙종때 도승지 김빈을 모신 반송재 고택(문화재자료 제262호), 원주변씨 입향조 변응년을 모신
사괴당 고택(문화재자료 제 337호), 구한말 세도가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저택터가 있다.
용문 중학교를 중심으로 500m쯤 길게 늘어선 소나무와 면사무소 앞의 300년된 아름드리 느티나무
에서 마을의 내력을 짐작할수 있다.
*개심사터 5층석탑
예천 번화가로 들어가는 길목인 예천읍 '솔개들'이라 불리는 논 한복판에 자리한 개심사터 5층석탑
(보물 제53호)은 고려시대인 1010년(현종1년)에 건립됐다.
마음을 연다는 뜻의 開心寺가 있었던 자리인데 지금은 탑만 외로이 서 있다.
2층 기단위에 5층으로 세워진 이 석탑은 높이 4.3m로 그리 크진 않지만 정연한 비례와 적당한
상승감을 보여주고 있다.
2층 기단중 아래층에는 한 면에 眼像이 셋씩 나있고 그 안상 안에 십이지신상이 하나씩 새겨져 있다.
그위 상층 기단엔 각 면마다 가운데 탱주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하나씩 팔부중상이 조각되어 있다.
또 그위 1층 탑신의 남쪽 정면에는 양 옆에 칼을 잡고 서 있는 인왕산이 새겨져 있다
이 탑엔 탑신과 갑석 처마밑에 문자가 새겨져 있다. 상대갑석 처마밑에 새겨진 96자를 해독하면
'고려 현종 원년(1010년)에 이 고을 호장 임장부 의 어머니가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僧俗
10,000인의 힘을 모아 4월초파일에 준공했다' 는 내용이라고 한다.
*초간정
용문면 죽림리의 草澗亭(경북문화재자료 제143호)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대동운부군옥>의
저자 '초간 권문해(1534-1591)가 1582년(선조15)에 건립한 정자다
임진왜란때 불에 탄것을 1612년(광해군4)에 재건했으나,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어 다시 세웠다.
그 후 세월이 흘러 퇴락한 것을 1870년(고종7)에 중수해 오늘에 이른다.
주변의 울창한 수림과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뤄 일찍부터 명승지로 사랑받아 왔다.
초간의 필생의 역작인<대동운부군옥>은 단군 이래 조선 선조까지의 역사를 비롯해 인물, 문학, 예술,
지리, 국명, 성씨는 물론이고, 산, 나무, 꽃, 동물 이름등을 총 망라한 책이다.
저작 당시 참고한 자료는 <삼국사기><계원필경>등 한국서적 총176종, <사기><한서>등 중국 서적
15종으로 모두 191종이나 된다.
개인의 저작으로는 양과 질에서 방대하고 뛰어나서 임진왜란 이전의 사실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문헌으로 꼽힌다.
<대동운부군옥>을 찍어낸 책판과 3종의 초고본은 보물 제878호로 지정되어 있다.
후손인 예천권씨 종가에서 보관하고 있다.
*예천 권씨 종택
용문면 죽림리에 있는 정면5칸, 측면5칸의 조선시대 가옥으로 중요민속자료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다.
1598년(선조22)에 초간 권문해의 조부 권오상이 세운것이다.
종택은 종가별당(보물 제457호)과 연결하여 평면으로 구성했는데, 동쪽으로 뒷산이 반달모양으로
싸안고, 좌측으로 백마산이 청룡을 이루고, 우측으로는 아미산이 백호를 이루어 명당자리로도
유명하다.
사랑채는 앞쪽으로 돌출되어 있으며, 안채는 뒤쪽으로 ㄱ자형을 이루고 있다.
1589년(선조22)에 지은 권씨종가 별당(보물 제457호)은 1.8m 높이의 잡석으로 높이 쌓은 축대위에
초석을 놓은 정면4칸, 측면2칸의 팔작기와집이다.
중간 앞에 여러단의 축석을 쌓고 주위에 난간을 돌려 건물 전체가 매우 높고 웅장하며 고졸한
멋을 풍긴다. 건물을 향해서 오른쪽 3칸은 넓은 대청으로 하고 왼쪽 1칸은 온돌방이며 내부는
다시 2개의 방으로 구분되어 있다.
권씨 종택 한쪽에 자리한 유물각엔 대동운부군옥 책판교본(보물 제878호), 초간일기(보물제879호),
예천권씨 종가문적(유형문화재 제170호), 등 여러점의 문화재가 보관되어있고, 입구엔 수령500년
넘은 향나무(도지정기념물 제110호)가 자라고 있다.
초간 권문해가 1580년 부터 57세로 타계했던 1591년까지 11년간 개인의 일상에서부터 국정 전반과
당쟁에 이르기 까지의 상황들을 자세히 기록한 초간 일기는 임진왜란 직전의 국내 정치등을
살피는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는다.
*선몽대
호명면 백송리 내성천변 언덕에 세워진 仙夢臺는 퇴계 이황의 종손이며 문하생인 우암 이열도가
1563년에 지은 정자다.
창건 당시 퇴계 이황과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김상현, 이덕형등 유명 인사들이 찾아와 축하했다고 한다
이들의 친필시가 게액되어 있으며, 선몽대 세 글자는 퇴계의 친필이라 한다.
선몽대에서 내려다 보인는 내성천 풍광이 좋지만 늘 문이 굳게 닫혀 있다.
그래도 선몽대 입구의 노송 가득한 솔밭은 여름에 피서지로 봄 가을엔 산책코스로 애용된다.
*옥천서원
감천면 덕율리 입구에 자리한 옥천서원 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전체 소설인 '국순전'의 저자
'서하 임춘'(생몰연대미상)선생등 예천의 명현 4위가 모셔져 있다.
원래 옥천에 있어서 옥천서원이었는데, 흥선대원군때 훼철되었던 것을 1985년 이곳 감천으로
옮겨 세웠다.
넓은 대지 위에 명교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함양재와 흥문제가 있고, 명교당 뒤쪽 높은 축대위에
사당 '상현사'가 있다.
'서하'는 고려 의종때 진사를 지내다가 1170년(의종24)에 일어난 정중부의 난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후 예천으로 피신해 당대의 문인 이인로를 비롯해 오세재,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와 더불어
시와 술을 즐겼다.
이들은 스스로 중국 진나라 때의 죽림칠현에 비하여 '강좌칠현'이라 했는데, 우리나라 淸淡 의 風
은 여기에서 시작 됐다고 한다.
술을 의인화 하여 교훈적으로 풍자한 '국순전' 과 엽전을 의인화한 '공방전'은 조선 전기 소설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한천사
감천면 증거리의 寒天寺는 678년(신라 문무왕18) 에 의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전하는 말에는 의상대사가 영주에 부석사를 지을때 절집 기둥이 자꾸 넘어져 그 이유를 알아보니
백두대간 남쪽 주마산(508m)의 지세가 '달리는 말머리 형국'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의상은 주마산의 지세를 누르기 위해 현재의 자리에 한천사를 지었다고 한다.
6_25전쟁때 전각이 완전히 소실되어 최근에 다시 지었고, 다만 전란을 거치면서도 잘 보존된
철조약사여래좌상(보물제667호)은 통일신라 시대때 조성된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된 철불로
꼽히고 있다.
방형의 좌대위에 모신 불상의 높이는 1.53m, 어깨폭은 0.75m, 무릎 폭은 1.13m, 가슴폭은0.4m.
또 1988년 조경공사를 하다 발견된 금동자물쇠 등 4점의 유물은 보물 제 1141호로 지정됐고,
현재 직지사 성보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본전인 유리광전 앞에 서있는 3층석탑(유형문화재 제5호)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으로
아담하지만 우아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용문사
용문면 내지리에 자리한 용문사는 870년(신라 경문왕10)에 두운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맞배 기와지붕의 균형미가 빼어나 보물로 지정된 대장전(보물 제145호)은 1173년에 지은 목조건물.
대장전 안에 있는 윤장대(보물 제684호) 는 국내 유일의 회전식 불경 보관대다.
또 대추나무로 불상을 조각한 목불좌상 및 목각탱(보물 제989호)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됐다.
조선 세조가 1457년(세조3)에 경상감사에게 '절을 잘 보호하고 잡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라' 며
내린 친필 수결인 '용문사 교지'(보물 제729호) 가 있다.
윤장대란 藏經을 돌리는 대 라는 뜻으로, 곧 회전식 불경 보관대를 말한다.
용문사 윤장대는 마루바닥에 8각을 뚫고 축을 세워 천장에 고정 시켜놓고, 그축을 중심으로 寶宮을
축소한 듯안 작은 팔각형 회전 전당을 만들었다.
크기는 높이 4.2m, 둘레 3.2m 이며 삼존불이 좌정한 양쪽으로 하나씩 한쌍이 세워져 있다.
또 8정도를 의미하는 8각의 각 면마다 문을 만들어 경전을 넣고 여닫을 수 있게 했고, 문에는 화려한
꽃살무늬 장식을 했다.
빽빽하게 拱包 를 올려 지붕 처마를 아름답게 꾸며서 書庫 전각 같은 모형이다.
다른 불교 국가에도 이처럼 완전한 원형이 남아 있지 않아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보물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삼한 통일의 큰 뜻을 품고 두운대사를 방문하고자 동구에 이르니
갑자기 바위 위에서 쌍용이 나타나더니 절로 가는 길을 인도 했다 하여 태조는 산이름을 용문산,
절이름을 용문사라 명명했다고 한다.
*정충사
예천읍 고평리의 정충사는 조선 선조때 명재상 '약포 정탁'(1526-1605)의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세운 유물각이다.
이황의 문하생이었던 약포는 1552년(명종7) 사마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한뒤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1568년(선조1)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이조좌랑 등을 지냈고, 1581년 대사헌때 정인홍과의
불화로 이조 참판에 전직됐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엔 좌찬성으로 왕을 호종하여 의주로 피란했으며, 1597년 정유재란때 늙은 몸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 독려 하려는 것을 왕이 말렸다.
약포는 특히 임진왜란때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등 명장을 발탁하는 등 인재를 발굴하는 데 높은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저서에 <약포문집><용만문견록>이 있다.
정충사의 약포영정(보물 제487호)은 왕명에 따라 그린 공신 초상화.
또 약포 유고 및 문서(보물 제 494호)는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기록한 일기, 교지 등으로 임진왜란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내성천 건너 호명면 황지리이 '도정서원'에는 약포 선생과 그의 아들 '청풍자 정윤목'을 모셔놓은
약포 사당이 있다.
*익장 문화유적마을
지보면 도장리 낙동강과 가까운 태을산 기슭의 익장 마을은 동래정씨 집성촌이다.
정사(1400-1453)의 묘소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지보재를 최근 보수했고, 내성군 사당은 임진왜란때
만인의총에 묻힌 선무공신 '정기원'을 모신 사댱이며, 지포강당은 석문 '정영방'이 학문을 논한 사당이다
이런 전통에 걸맞게 국문학의 태두로서 <조선시가사강>, <한국시가의연구>,<한국문학사> 등을
지은 '도남 조윤제'(1904-1976) 선생의 생가가 있다.
*예천 별미
- 예천 청포묵
- 예천 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