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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章: 도량(道場)
Ⅳ.사찰 건물의 성격별 구분[1]
사찰은 두 가지 기능을 겸하고 있다.
스님들의 입장에서 보면 갖가지 수행을 하는 공간이며, 이 경우 모든 건축물은 제각기 여러 방법으로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예불·법회의식을 행하는 공간은 부처님의 세계를 뜻하긴 하지만, 그 외의 공간은 여러 수행공간으로 나눠진다. 즉 선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선원, 경론을 연구하는 강원, 율장을 공부하는 율원과 개인의 수행공간인 요사 등이 있는데, 이곳은 대체로 단청을 하지 않은 수수한 형태를 한 경우가 많다.
반면에 재가불자들에게 있어 사찰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부처님의 세계인 것이다. 경전에는 극락세계를 비롯한 각종의 불국정토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을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예배공간인 전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배객이 만나는 공간은 일주문에서부터 중심법당까지 모두가 화려한 단청으로 장엄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 자체가 불국토를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一. 예배(禮拜)의 공간(空間)인 전각(殿閣)
예배의 공간은 크게는 전각과 탑으로 나눌 수 있으며, 다시 전각에는 불보전(佛寶殿)·법보전(法寶殿)·승보전(僧寶殿)·호법신중단(護法神衆閣壇)이 있다.
☞불보전·법보전·승보전 등의 구분은 공식적인 분류법은 아니다. 단지 모셔진 주존(主尊)이나 전각의 성격에 따라 나눠 본 것이다.
1.불보전(佛寶殿)
불보전(佛寶殿)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대웅전(大雄殿-대웅보전大雄寶殿), 대적광전(大寂光殿-대광명전大光明殿·비로전毘盧殿), 무량수전(無量壽殿-극락전極樂殿·미타전彌陀殿), 약사전(藥師殿-유리전琉璃殿), 용화전(龍華殿-미륵전彌勒殿), 영산전(靈山殿-팔상전八相殿·捌相殿), 천불전(千佛殿), 만불전(萬佛殿) 등이 있다.
[1]적멸보궁(寂滅寶宮)
절에는 부처님의 궁전이 있는데, 그 중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향기를 직접 접할 수 있는 곳이 석가모니(釋迦牟尼)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다.
사리(舍利)란 범어(梵語) 샤리이라(śarīra)의 음역으로 신체나 유골(遺骨)을 뜻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사리를 불골(佛骨)·불사리(佛舍利)·진신사리(眞身舍利)라고 하는데, 경전에 의하면 8섬4말이 나왔다고 하지만, 당시 인도와 지금 우리의 계량법이 다르므로 정확한 것은 알기 어렵다.
우리나라에 사리가 처음 전래된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진흥왕 10년 조에,
「서기 549년 봄 양(梁)나라에서 신라의 유학승 각덕(覺德)과 함께 사신(使臣)을 파견하였는데, 불사리(佛舍利)를 보내옴으로 왕은 신하들로 하여금 흥륜사(興輪寺) 앞길에 나가 이를 맞아들이게 하였다.」고 기록하였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권3에.
「진흥왕 때 사리가 전래된 후 100년 뒤인 선덕왕(善德王)12년(643)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중국으로부터 불두골(佛頭骨)·불아(佛牙)·불사리(佛舍利) 100과(顆)와 부처님 금란가사(金襴袈裟) 한 벌을 모시고 왔는데, 사리는 셋으로 나누어 황룡사탑과 대화탑(大和塔) 그리고 통도사에 금란가사와 함께 모셨고, 나머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자장율사께서는 선덕왕5년(636)에 제자 10여명과 중국으로 건너가 청량산(淸凉山-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불사리 등을 받았다고 한다. 643년 귀국하여 분황사(芬皇寺)에 머물며 갖가지 경론을 설하다가 이윽고 646년 통도사를 창건하고 이어서 오대산·설악산·태백산·사자산 등에 사찰을 창건하고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1)영취산(靈鷲山) 통도사(通道寺) 적멸보궁(寂滅寶宮)
적멸보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곳이 통도사 적멸보궁이다. 그래서 통도사를 ‘불지종가(佛之宗家-부처님의 근본도량)’라고도 하고 ‘불보사찰(佛寶寺刹)’이라고도 한다.
통도사의 적멸보궁은 대가람의 중심법당이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편액은 북쪽에 걸려 있고, 동쪽에는 대웅전(大雄殿),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은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는 편액(扁額-현판懸板이라고도 함)이 각각 걸려 있다.
통도사의 적멸보궁은 대웅전을 겸하고 있기에 다른 적멸보궁과는 달리 예불·기도·법회 등이 모두 이루어지는 곳이다. 법당 안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은 불단만 장엄하고, 뒷벽은 유리로 되어 있어서 사리탑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불단 위에는 부처님 자리인 방석만 있다. 불상을 모시지 않는 이유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뒤편의 탑에 봉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리탑은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고도 하는데, 금강(金剛)이란 금강문(金剛門)에서 살펴봤듯이 바즈라(vajra)를 번역한 것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무엇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고, 만약 그릇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부술 수 있다. 그래서 금강(金剛)은 부처님의 지혜를 뜻하기도 한다. 이 금강계단에는 두 가지 큰 뜻이 있다. 그 하나는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곳이 금강처럼 강하여 영원히 파괴되지 않길 바라는 뜻이 있는데, 사실 부처님의 법신은 영원하고 상주(常住-항상 존재하는 것)하는 것이므로 파괴될 수가 없다. 다른 하나는 모든 이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계(戒)를 잘 받들고 잘 지켜 금강처럼 부서지지 않고 물러서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은 누구라도 반드시 지혜를 성취하게 되며, 지혜로운 이는 어떤 것에도 허물어지지 않는 법이다.
계율과 연관된 자장율사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선덕여왕이 자장율사께 재상을 맡으라고 하면서, 만약 그 자리를 맡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했는데, 자장율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재상을 거절했다. 출가생활에 대한 자장율사의 자긍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오녕일일지계이사(吾寧一日持戒而死)언정
불고백년파계이생(不願百年破戒而生)이라
내 차라리 하루 동안 계를 지키다 죽을 지라도
계를 파하고 백 년 동안 살기를 원치 않노라.
금강계단(金剛戒壇)은 수계를 하는 곳이다. 자장율사가 주석할 당시 전국의 스님들이 이곳에서 수계를 했다고 한다. 금강계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곳은 범어사·해인사·불국사·화엄사·월정사·금산사·회암사 등 많은데, 모두 수계법회를 행하는 곳이었음을 뜻한다.
통도사 사리탑은 가장 장엄하게 조성되어 있다. 탑의 본체는 돌로 만든 종(석종石鐘) 형태로 연화대 위에 안치되었고, 탑의 동서 양면에는 비천상이 아름답게 양각(陽刻-돋을새김)되었으며, 남북 양면에는 사리함이 양각되었다. 탑 아래는 넓은 기단(基壇)이 설치되었는데, 상단(上壇)의 사면(四面)에는 비천상(飛天像)이 조각되었고, 하단(下壇)의 사면(四面)에는 불보살상(佛菩薩像)이 조각되어 있다. 이 기단(基壇)의 네 모서리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서 있는데, 이는 부처님을 옹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부에는 사방에 석주(石柱-돌기둥)로 울을 만들고 석문(石門-돌로 만든 문)을 달아서 함부로 들어갈 수 없도록 하였으며, 가장 바깥쪽에는 사면에 석등(石燈)이 서 있다.
통도사의 적멸보궁은 법당이 차지하는 비중에 있어서나 사리탑의 조성규모로나 우리나라 적멸보궁의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2)태백산(太白山) 정암사(淨巖寺) 적멸보궁(寂滅寶宮)
자장율사(慈藏律師)께서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오매불망(寤寐不忘-밤낮으로 잊지 아니함)으로 잊지 못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암사의 창건연기(創建緣起-절을 세울 때 얽힌 얘기)가 그것을 말해준다.
자장율사는 언제나 문수보살을 만나길 발원했다. 중국에 가서는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사리 등을 직접 받은 것으로 되어 있고, 통도사 창건연기에는 문수보살이 가르쳐 준 곳에 통도사를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장율사는 그 후로도 계속 문수보살 친견을 발원했는데, 강원도 수다사(水多寺)에 머물 때 중국에서 만났던 스님이 꿈에 나타나 “내일 송정에서 만나길 바라노라!”고 하여, 다음날 송정에 갔더니 다시“태백산 갈반지(葛盤地-칡이 둥글게 엉킨 땅)에서 만나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이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 생각하여 곧 태백산으로 가서 칡이 뱀처럼 얽힌 곳[뱀이 똬리를 틀고 있던 곳이라고도 함]에 절을 지으니 바로 정암사이다.
자장율사는 계속 문수보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는 남루한 옷을 입은 거사가 칡 망태기에 죽은 개를 담아서 둘러메고 찾아왔다. 시자가 그 형상을 설명하며 자장율사에게 만나길 청한다고 알렸으나 자장율사는 쓸데없이 귀찮게 한다며 알아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거사가 망태기를 내려놓으니 죽었던 개가 푸른 사자로 변했고, 거사가 사자에 올라타니 곧 문수보살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문수보살은 “아상(我相-자기중심적 관념)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 하며 하늘로 올랐는데, 깜짝 놀란 시자가 이 사실을 알리자 자장율사는 비로소 실수를 깨닫고 맨발로 남쪽 언덕까지 따라갔으나 결국 만나질 못하고 입적(入寂-고요한 경지에 듦. 큰스님들이 돌아가셨을 때 쓰는 표현)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어디까지나 설화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진신사리(眞身舍利)가 상징하는 참 부처님은 모든 명예나 율사라는 등의 상(相-선입견 등의 굳어진 관념)을 넘어서야만 함을 뜻한다.
▶사람이 기회를 놓치는 것은 항상 자신의 분별에 걸리기 때문이다.
정암사의 적멸보궁은 다른 사찰과는 달리 도량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다. 적멸보궁의 규모는 작은 편이고, 적멸보궁 안은 역시 불단위에 방석만 있으며, 사리탑을 직접 볼 수 없기에 뒷벽은 유리가 아닌 금으로 장엄되어 있다. 금이 곧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리탑은 뒤편 언덕위에 있다. 급한 경사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사리탑이 나타난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 쌓아올린 모전탑(模塼塔)으로 칠층탑이다. 자장율사께서 중국에서 귀국할 때 서해용왕이 도와 이 마노석(瑪瑙石)을 옮겨왔다고 해서 수(水)자를 앞에 붙여 수마노탑(水瑪瑙塔)이라고 불리는 마노(瑪瑙)는 붉은 보석으로 칠보에 속하는 것인데, 탑의 재질은 마노가 아니다. 아마도 탑 자체가 마노 같은 보물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1972년 해체복원 되었는데, 그 속에서 사리구와 사리[부처님 치아·사리·손마디 뼈]와 염주 등이 나와서 다시 잘 모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정암사 적멸보궁에 대해 학계에서는 자장율사께서 직접 사리를 봉안한 것이 아니라, 사명대사(泗溟大師)께서 임진왜란 때에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통도사의 사리를 나누어 봉안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대구 비슬산 용연사(龍淵寺에)도 적멸보궁이 있는데, 사명대사께서 통도사의 사리를 나누어 모신 것으로 전한다.
[자장율사께서 기도하여 문수보살을 친견했다는 중국 오대산 기도도량(아래건물)]
[통도사 적멸보궁의 금강계단 편액-남쪽에서 촬영]
[통도사 불사리탑의 전체 모습]
[통도사 불사리탑의 탑신과 상하 기단부]
[통도사 불사리탑-모서리 천왕상 쪽에서 본 전경]
[태백산 정암사의 적멸보궁과 내부의 비어 있는 보좌]
[정암사 불사리탑인 수마노탑]
[대구 용연사의 불사리탑-뒤쪽 측면에서 본 모습]
[대구 용연사의 적멸보궁-1980년 여름 이곳에서 며칠 기도하며 지냈다.]
첫댓글 궁극적으로는 상에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는 경계까지 공부를 해야한다고 배웁니다.
그러나 불보살님의 상과 장엄된 도량을 통하여 더욱 굳건한 신심과 수행코자하는 마음이 더욱 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도량에 관한 상세한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 )( )
사람들이 공부하는 과정이 견문각지(見聞覺知)를 통하기에 멋진 것을 보고(見), 훌륭한 것을 듣고(聞), 바르다는 것을 느끼고(覺), 어떻게 해야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바로 그것이 또 다른 허상임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양을 통해 모양없는 경지로 나아간다고 표현합니다. 누구나 가능한 경지이지요. 훌륭한 믿음입니다. ^^
자장 율사의 원력이 천삼백 여년을 훌쩍 넘어 동영상으로 움직이고 있을 줄을~ "모양을 통해 모양 없는 경지로 나아간다" 라는 스님의 말씀~ 감사합니다!
어디 자장율사님만의 원력이겠습니까? 부처님의 원력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모두의 원력이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