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이전의 이탈리아 영화들은 뭇솔리니의 선전영화와 낙관적 부르주아 영화(일명 백색 전화 영화 White Telephone Film s), 도피적인 코미디물과 뮤지컬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더구나 전후에는 전쟁을 치른 다른 나라들처럼 헐리우드 영화가 양 적으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이탈리아 영화의 엄청난 정체성 확립을 위한 영화인들의 부단한 노력과 두 번에 걸친 대전에서의 패전 경험이 더해져 새로운 영화의 흐름이 일어난다.
루치노 비스콘티의 <강박 관념 Ossessione>('42)으로부터 본격적인 시작을 보게 된 이 흐름은 움베르토 바르바로가 한 잡지에서 '네오-리얼리즘'이라고 칭하게 되고, 당시 파시즘의 몰락으로 인한 새로운 상황과 제반 사회 문제를 총체적으로 반영하 는 영화들이, 새로운 영화 형식 속에 계속적으로 나오게 되면서 네오-리얼리즘이란 이름의 중요한 영화 사조를 형성하게 된다.
비스콘티에 이어 네오-리얼리즘의 방밖론과 형식을 완성한 사람이 로베르토 로셀리니이다. 나찌의 잔혹성과 그것에 대항하는 인간적이고 단결된 투쟁을 그린 1945년작 <무방비 도시, 로마 Roma, Citta aperta>는 네오-리얼리즘의 명성을 세계적인 것 으로 발전시킨다. 이후 로셀리니는 미군이 진주한 이탈리아의 현실을 그린 <전화의 저편 Paisa>('46)과 전후 베를린을 배 경으로 15세 소년이 자살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충격적으로 묘사한 <독일 영년 Germania, Anno Zero>('47)으로 전쟁 3부 작을 완성한다.
<강박 관념>에 이어 <흔들리는 대지 La Terra Trema>('48)로 가장 급진적인 네오-리얼리즘 작가로 인정받은 비스 콘티와 앞서의 로셀리니, 그리고 이들과 함께 네오-리얼리즘의 선두 주자로 꼽히는 비토리오 데 시카는 1946년 <구두닦이 Sci uscia>와 1948년 <자전거 도둑 Ladri di Biciclette>을 발표한다. 여기서 데 시카는 전후 노동자들의 일상 생활과 궁핍 한 현실을 소박하게 담아 내어 당대 이탈리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드러낸 영화로 인정받는다.
## 특정적 스타일
* 현장 작업 (야외 촬영, 자연 조명, 즉흥 연출) : 전쟁으로 인한 제작 환경의 부실은 이들을 자연스럽게 거리로 내몰았고 거 기서 야외 촬영과 자연광 선호의 전통이 싹트게 된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다른 특징들과 함께 다큐멘터리 식의 사실적인 영상으 로 네오 리얼리즘을 규정짓게 하는 요인이 된다.
* 비직업 배우 : 생생하고 사실적인 외모나 행동을 위하여 비직업 배우들을 다수 기용하였다.
* 후시 녹음 : 이탈리아 영화의 관행이기도 한 후시 녹음은 소수의 제작진으로 현장 촬영을 가능하게 했다.
* 서사 형식 : 이전의 전통에 반발하여 느슨한 서사 연결이나 열린 구조를 선호하였다.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대표적인 시나리오 작가 자바티니는 네오-리얼리즘의 원칙들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사물을 보 이는 것처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허구보다는 사실을, 고상한 영웅보다는 평범한 사람을, 낭만적인 환상보다는 사회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네오-리얼리즘의 가장 핵심적인 의의는 하나의 상황에 대한 작가의 주체적인 참여를 통해 영화가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비판적 리얼리즘의 중요한 성격들을 구체화시켜 낸 네오-리얼리즘은, 현실적인 이념을 바탕으로 당대 제문제의 본질을 밝힌 점은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그 시대의 현상들을 만들어내는 원인을 총체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표면만을 드러내는 데 그치고 일 관적이고 전망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들이 한계로 지적 받고 있다.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 네오-리얼리즘 작가들이 점점 심리적이고 개인적인 성격의 작품들을 만들게 되는 원인의 한 가지로 애초 그들의 분명한 방향성 부재를 떠올리게 하는 것도 같 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네오-리얼리즘은 다른 나라의 많은 영화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탈리안 뉴 씨네마의 페데리코 펠리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의 초기 작품이나 프랑스와 누벨 바그, 동유럽 영화, 영국의 사회적 리얼리즘 계열 작품들, 인도의 샤트아지트 레 이 등이 그 대표적인 수혜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