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생가(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724-4, 담안 마을)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세 가지 요소
풍수답사를 다니다 보면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현장들을 많이 만난다. 정통풍수이론에 비추어 보아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은 장소에서 훌륭한 인물이 탄생하여 커다란 발복을 이룬 경우를 자주 접하는 경우이다.
3백 년 동안이나 만석꾼지기로 부를 이어 온 경주 최부잣집의 교동주택이 그러하고 이번에 보고 온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의 생가 또한 그러하다. 그 외에도 전직 대통령들의 생가나, 선영을 찾아 연구해 보아도 마찬가지다. 이렇다 할 뚜렷한 풍수적 특징이나 발복의 현장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우리나라 땅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형태의 국세일 뿐이다.
물론 용맥이나 안대, 또는 혈장 앞으로 흐르는 수세 중 어느 하나 정도는 특별한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발복되었다고 판단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 일반 여염집의 집터에도 그런 특징 한 두 가지 정도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통풍수 이론이 틀렸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발복의 근원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건 아무래도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요소가 풍수원리 한 가지뿐만 아니라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사람의 운명(運命)을 가름하는 요소는 모두 세 가지가 있다. 천(天), 지(地), 인(人) 삼요소가 그것인데, 천(天)은 하늘로부터 받은 명(命)을 말한다. 이것은 천시(天時), 즉 어떤 일을 해야 할 때를 말하는 것으로 하늘이 정해준 때를 알아서 거기에 맞는 일을 해야 운명의 흐름이 순조로워진다는 것이다.
봄이 되면 씨를 뿌리고, 여름이면 가꾸고, 가을에는 거두어서 겨울에는 저장하여 다음 해 또 다시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바로 이러한 때의 원리이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늘의 때를 맞추지 못하고 한겨울 꽁꽁 언 땅에 씨를 뿌린다면 아무것도 싹트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처럼 하늘의 때에 맞추어 일을 행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속담 중에 ‘철들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씨를 뿌리고, 가꾸어 거두어들이는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사철의 때를 알고 거기에 맞추어 세상을 살아갈 만큼 지혜로워졌다는 말이다. 인생에 있어서도 하늘의 때가 작용한다.
사람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때가 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자기 인생의 때, 즉 나아갈 때와 물러나 기다려야 하는 때를 알기 위한 방편으로 명리학(命理學)이 있다. 보통은 태어난 시기를 기준하여 인생의 흥망성쇠를 판단하는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이 많이 쓰인다.
또 하나 지(地)는 지리(地利) 또는 지리(地理)라고 하는데, 이는 땅으로부터 얻는 생활환경을 뜻한다.
사람은 살고 있는 환경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 운명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는 저마다 가지고 있는 성격이다. 그런데 이 성격은 환경의 영향에 따라 각자 다르게 형성된다. 물론 집안의 가풍이나 부모의 성격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부모나 또는 그 윗대의 조상들의 성격도 환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 대부분이므로 같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가족은 비슷한 성격을 형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골에 사는 사람과 바닷가에 사는 사람의 성격이 다르고, 농촌사람과 도회지 사람의 성격은 분명 다르다. 또 일년 사철 눈과 얼음으로 덮인 극지방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아프리카 열대지방에서 살아가는 사람 역시 생활방식이나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것은 환경에 따라 적응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로 인한 성격 또한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생활환경의 작용이 인간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여 사람이 살기에 좋은 지리적인 환경을 찾아내는 것이 풍수지리(風水地理)라는 학문이다. 전통사상에 나타난 풍수지리의 원리는 사람의 성격을 좌우하는 환경요인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잉태지(孕胎地)이다. 처음으로 생명이 만들어져 어머니 뱃속에 자리 잡을 때의 환경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결혼하여 신혼 여행지를 산천이 좋은 곳으로 택하는 이유는 바로 이 잉태지의 환경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잉태하는 날의 기상상태도 중요한 환경요인으로 작용하는데, 결혼 날짜를 신중하게 택하는 이유도 그 날의 일진(日辰)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다. 또 잉태하는 순간에 부모의 건강상태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서 옛날 우리 조상들은 비오거나 천둥이 치는 날, 또 흐리고 일진이 좋지 못한 날에는 부부관계를 금하였으며, 특히 술에 취했거나 기분이 나쁜 날, 그리고 심신이 불안하여 신체상태가 좋지 못한 날에도 부부관계를 금하였다. 이것은 부모의 건강한 씨앗으로 태아를 잉태시키기 위한 방편이었으며 현대과학으로도 충분히 근거를 지니는 내용이다.
두 번째는 탄생지이다. 사람은 탄생하는 순간 첫 호흡을 통하여 우주의 기운을 들이마신다. 이것으로 운명의 첫 발을 딛게 되는 것이므로 태어나는 순간의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태어나서 성장하는 어린 시절의 자연환경이 성격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됨은 너무나 당연하다.
세 번째는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주변 환경이다. 현재 살고 있는 생활공간의 환경 역시 사람의 성격이나 생활태도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10년이 뱃속의 열 달만 못하고, 뱃속의 열 달이 잉태 하룻밤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잉태해서 태어나기까지 산모가 겪게 되는 심신의 상태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은 잉태환경과 임신부의 태교를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태교지침서로 영조 임금 때 사주당 이씨 부인이 쓴 태교신기가 있다. 여기에는 모두 10가지의 태교법을 서술하였는데 현대의 태교법과 비교하여도 대단히 과학적이고 우수한 태교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옛날에는 가족구성이 대가족 형태를 띠었으므로, 대개는 잉태지와 탄생지, 그리고 성장하여 살아가는 곳까지도 거의가 한 곳에서 이루어졌지만, 핵가족 시대인 현대인의 삶은 어떠한가. 잉태는 신혼여행지의 호텔에서, 태생지는 산부인과 병원, 그리고 살아가는 곳도 직장 따라 잦은 이사로 인해 일정하지가 않다.
좋은 아기를 갖기 원한다면, 좋은 날을 택하여 결혼 하고, 신혼여행도 산천이 좋은 곳으로 가야 할 것이며, 산부인과 병원도 이왕이면 좋은 병원으로 택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무튼 사람의 성격형성과 운명에 자연환경이 그만큼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이고, 여기에 대한 전통적인 방법으로 풍수지리학이 적용되어 왔다.
마지막으로 인(人)은 인심(人心), 즉 사람의 마음을 말한다. 이것을 심상(心相)이라 한다. 사람의 마음은 얼굴로 나타난다. 마음이 고운 사람은 얼굴 표정이 곱고 온화하다. 그러나 마음이 고약한 사람은 얼굴 표정이 어딘지 고약하게 보인다. 이는 세상살이 조금만 한 사람이면 누구나 얼굴 보고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얼굴은 곧 마음의 거울이 된다.
마음의 생김새를 심상(心相)이라 하며, 얼굴의 생김새를 관상(觀相)이라 한다. 흔히 “사주팔자 좋은 것이 관상(觀相) 좋은 것보다 못하고 관상 좋은 것이 심상(心相)고운 것보다 못하다”라고 하여 사람의 운명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라고 한다. 마음 씀씀이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는 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상으로 언급한 천지인(天地人) 세 가지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요인으로 각각 30%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모두 90%정도 작용한다고 본다. 나머지 10% 정도는 부모의 교육수준이나 재산상태, 또한 자신의 학력이나 교우관계, 사회활동에서 일어나는 대인관계 등에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변화를 주게 되며, 특히 배우자의 영향력이 많이 작용한다고 본다.
이렇게 정리하여 놓고 보면 한 사람의 훌륭한 인물이 탄생하는 데에는 풍수적인 요소 한 가지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방법이라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우주라고 할 만큼 생긴 구조부터가 복잡하게 되어 있는 인간의 삶이 어찌 어느 한 가지 요소로만 결정될 일이겠는가? 흔히 사주풀이니 풍수감결이니 하여 한 가지 요인을 놓고 운명 운운하는 것을 많이 보는데 이는 거의가 결과를 먼저 놓고 거기에 맞추어 가는 짜맞추기식 풀이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길흉을 논하는 주술식 풍수이론을 거의 믿지 않는다. 다만 좋은 집터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함에 장애가 되지 않을 정도의 자연환경이면 족하다고 보며, 건강하고 좋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는 생기가 모인 터가 가장 훌륭한 명당이라고 보는 것이다.
고 이병철회장의 생가에도 미리 말하지만 재벌이 탄생할 만한 풍수적 요인은 없다. 다만 삶을 건강하고 안정적으로 유지시켜 줄 만한 집터인가 아닌가를 기준하여 본다면, 괜찮은 집터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전제해 놓고, 생가를 풍수적으로 감결해 보자.
삼성(三星)이 창업(創業)되기까지
대한민국 제일의 기업이자 세계적인 기업인 삼성그룹을 일으킨 호암 이병철 회장은 우리나라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유명한 사람이다. 특별한 언급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으므로 태어나서 삼성을 창업하기까지의 과정만 간략하게 조망해 보기로 한다.
고 이병철 회장은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본가에서 부친 이찬우 공과 모친 안동 권씨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선비의 집안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병철 선생은 강직한 가풍 속에서 비교적 유복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다섯 살 때부터 조부인 문산 이흥석 공이 세운 서당 문산정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했고, 열한 살 되던 해에 진주에 있는 지수보통학교에 편입, 이듬해에는 서울의 수송보통학교로 옮겨 수학했다. 그 후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1926년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 박두을 여사와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학업에 전념하여 1930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이 무렵 세계적인 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극심한 경제혼란이 빚어낸 사회상을 목격하고 생각한 바가 많아 동경의 유학생활을 중도에서 그만두고 귀국 몇 년 동안 깊은 사색과 구상 끝에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민족경제의 건설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결론을 내리고 사업에 투신하기로 결정했다.
1936년 봄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공동 투자하여 협동정미소를 설립했고 이후 자동차운송업도 병행하여 사업규모를 키워나갔다.
1938년 3월 1일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하여 중국과 만주 등을 상대로 무역업을 시작했다. 삼성상회는 무역업 외에도 국수제조업으로 내실을 다지면서 성장가도를 달렸고 삼성상회의 성공에 힘입어 1939년 조선양조를 인수했다. 자본금 3만원으로 창립한 삼성상회는 오늘날 삼성의 주춧돌이 되었다. “행하는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라는 평소의 철학으로 국내 최대의 기업을 일구어낸 고 이병철 회장은 한국 경제사의 거목이자 이 땅에 수많은 기업인의 표상이 되고 있다.(이병철 경영대전, 홍하상 지음, 바다출판사에서 인용)
생가(生家)의 풍수(風水)
호암 이병철 회장이 태어나 성장한 생가는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의 장내(墻內)마을 산자락 바로 아래에 포근하게 안긴 듯이 자리잡고 있다. 장내의 원래 지명은「담안」마을인데 한자식으로 바꾸어 장내가 된 듯 하다. 그냥 우리말로 담안이라 하면 좋을 것을 굳이 한자식으로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건지 이 모두 먹물들의 유식이 만들어 낸 소산이다. 장내 마을의 지명유래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의령군 정곡면 홈페이지에서 밝힌 자료에 의하면 옛날 이 곳에 정경벼슬을 했던 은진 송씨 부잣집이 있었는데, 8촌까지 수십가구가 한 곳에 모여 살면서 주위에 돌담을 쌓았으므로 이로 인해 담부랑안이라 하다가 담안이란 지명이 붙게 되었고 송씨네의 논밭이 많이 있던 두곡마을 아래 들판을 ‘정경들’이라 부른다고 밝히고 있다.
담안 마을의 또 다른 지명유래는 이 마을뒤 대안등 능선이 마치 담을 치듯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담안 마을이라 하였다는 풍수적 해석도 있다.
담안이라 불렸던 장내마을이 있는 중교리(中橋里)의 원래 명칭은 중다리였다. 동네 앞으로 흐르는 월현천 위에 큰 다리가 놓여 있어서 중다리라 하였다는 설도 있지만 중다리의 ‘중’은 가운데 중(中)이며 ‘다리’는 다리(橋)가 아니라 달(月)의 변음이라는 것이다.
결국 중달(中月)이란 말을 쉽고 편하게 부르면서 중다리가 된 것이라고 정곡면 홈페이지 지명유래에서 밝히고 있는데, 중달(中月)은 보름달을 뜻한다. 이것이 유식한 체면의식에 잡힌 먹물양반들이 멋대로 해석하여 중교(中橋)라 하였으니, 휘영청 둥근 보름달이 어느 새 ‘가운데 다리’라는 엉뚱한 의미로 와전되어 버린 것이다.
어쨌든 최초의 마을 이름이 보름달이란 뜻을 지니게 된 것이 어떤 연유인지는 자료에서 찾을 수가 없으나, 마을의 형국을 풍수적으로 살펴보면 보름달처럼 밝고 큰 소망을 담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보름달은 풍요의 상징이다.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보름달을 신성시 해 왔다. 매년 처음으로 들어오는 정월 보름에는 달집을 태워 액운을 불사르며 보름달을 향해 한 해의 건강과 복을 빌었으며, 추수를 끝낸 팔월에 보름달이 뜨는 날을 추석으로 정하여 조상께 제사 지내는 추수감사제를 올렸다. 이렇게 보름달은 풍요를 이룩하는 상징이었고 복을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보름달에서 유래했던 중교리의 마을 이름 속에도 이런 염원이 담겨 있을 것이다.
중교리의 산수 형세를 살펴보자. 의령의 산맥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덕유산(德裕山, 1,614m)을 태조산(太祖山)으로 한다. 지리산에서 동으로 뻗은 낙남정맥(洛南正脈)은 남강이 가로막아 건너지 못하므로 의령군 땅에는 백두산의 정기(精氣)를 전달하지 못한다.
덕유산에서 동남으로 갈라져 나온 산맥은 합천 황매산(1,108m)을 거쳐, 성현산(482m)에서 남으로 꺾이어 의령의 진산(鎭山) 자굴산(??山, 897.1m)을 일으키니 이것이 정곡면의 소조산(小祖山)이 된다. 자굴산에서 북으로 뻗은 산맥은 궁유, 대의, 가례의 3개면을 경계짓는 한우산(寒雨山, 764m)을 세우고 동으로 뻗어 나와 궁유의 응봉산(鷹峰山, 584.7m), 우봉산(牛峰山, 312.3m)을 넘어 중교리에 이르러 수려한 봉우리 옥녀봉(玉女峰, 245m)을 솟구치는데, 이것이 중교리 마을의 진산(鎭山)이며 생가(生家)의 주산(主山)이 된다.
옥녀봉에서 남으로 길게 내려온 중교리의 내룡(來龍)은 태식(胎息)현상을 보이며 힘찬 기운을 지닌 생룡(生龍)인데, 처음으로 솟구친 제일성은 숯골산(285m)이며, 그 아래에서 속기(束氣)를 이루고 지기(地氣)를 강하게 뭉친다. 이어 도문산(214m) 봉우리에서 다시 몸을 일으키더니 대안등이라는 능선을 이루며 마침내 월현천을 만나 생기(生氣)를 응집(凝集)시키고는 장내마을에 이르러 긴 행룡(行龍)을 멈춘다.
생가(生家) 앞으로는 정곡천이 주산(主山) 옥녀봉에서 발원(發源)하여 내룡(來龍)과 나란히 내려오다 장내마을에서 월현천과 만나 남강으로 흘러든다.
굳이 삼성그룹을 일구어낸 부(富)의 발복(發福)을 생가 풍수에서 찾으려면 바로 이곳이라 할 수 있다. 풍수에서 물은 재물을 나타내는데 중교리의 장내마을은 수세(水勢)가 뛰어나다. 마을 앞쪽으로 흐르는 정곡천과 도문산 봉우리의 동쪽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문곡소류지에서 흘러내리는 두 물줄기가 장내마을에서 만나 합수를 이룬다.
두 물줄기가 합치는 안쪽을 두물머리 명당이라 하는데 이는 풍부한 수세로 인하여 재물발복이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또 하나 물줄기는 오방리 달재고개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월현천이다. 월현천은 정곡면에서 가장 큰 물줄기로 오방리와 석곡리를 적시고, 중교리에 이르러 성황천과 만나 그 풍부한 물로 중교리 넓은 들녘을 기름지게 만들어 풍요를 일구어 낸 다음 남강으로 흘러드는데 정곡천이 월현천과 만나는 지점이 장내마을 앞 들판이다.
따라서 장내마을은 모두 세 개의 물줄기로 싸여 수세가 대단히 길격(吉格)인데 특히 마을 뒤로 흐르는 문곡마을의 물줄기는 암공수(暗拱手, 풍수에서 산자락에 가리어 보이지 않는 물을 말한다.)가 되어 더 큰 부의 발복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것도 마을 전체의 식록(食祿)이 풍부하게 되는 형국이지만 유독 생가에만 발복을 준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계속해서 산세를 살펴보자.
앞서 밝힌바와 같이 생가의 주산은 옥녀봉이다. 생가 건너 앞산에서 내려다보면 옥녀봉에서 뻗어내린 내룡의 능선인 대안등 줄기가 힘 있게 뻗어와 생가 바로 뒤편에서 멈춘 것이 보인다.
혈은 내룡의 끝자락에 모이기 마련인데 생가의 위치는 내룡의 끝보다 조금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기를 옆에서 받고 있으므로 진혈에 자리잡았다고 볼 수는 없다. 안채의 뒤로 돌아가 보아도 이렇다 할 뚜렷한 용맥은 보이지 않고 약하게 잉(孕)의 모습이 보인다.
본채 바로 옆에는 지기가 강하게 품은 바위덤이 튀어나와 있다. 이것은 터에 너무 강한 기운을 주는 탓에 좋은 작용으로 보기는 어렵고 또 생김새로 보아 재물발복과는 무관한 모양이다. 다만 생기의 강한 기운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안대(案對)를 보니 약한 금체형(金體形)이 모여 구불구불 수형산(水形山)을 이루었다. 재물복과 인물복을 기본적으로 갖추긴 했으나, 대재벌이 태어날 정도의 길격은 아니다.
백호(白虎)자락은 궁유로 넘어가는 막실고개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로 장풍을 잘 이루며 안산(案山)까지 만들어 놓았다.
청룡(靑龍)줄기는 마을 앞으로 보이는 월현천 너머 산자락인데 너무 멀리 있는 탓에 장풍(藏風)을 이루지 못한다.
집의 좌향(坐向)은 간좌곤향(艮坐坤向)이다. 좌향을 간좌(艮坐)로 놓은 집에서는 부자가 많이 난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집터 선정방식에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전저후고(前低後高), 전착후관(前窄後寬)의 방법이 원칙이다. 이는 사람이 살기에 가장 안락한 조건을 제시해 준다.
배산임수(背山臨水)란 산을 등지고, 물을 앞으로 두는 방식이다. 산이 뒤에 있으면 겨울철 북풍을 막아주고, 집 앞 들판으로 개울이 흐르면 농토를 기름지게 만들어 식록을 풍부하게 해 준다.
전저후고(前低後高)는 집터의 뒤는 높아야 되고 앞쪽은 낮아야 되는 원리이다. 이는 집터의 배수를 용이하게 하고 통풍이 잘 되며 집 앞의 조망이 열려 건강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전착후관(前窄後寬)이란 집터의 입구는 좁고 집안이 넓은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집 안의 프라이버시를 유지해 주고, 바깥의 나쁜 기운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 복있는 주택을 만든다.
중교리 장내마을은 위의 세 가지 모두가 적용된 길지임에 틀림없다. 옥녀봉과 도문산, 그리고 마을 뒤를 담장처럼 둘러싸는 대안등을 뒤로 하고 마을 앞으로는 정곡천과 월현천이 만나 멀리 남강까지 흐르니 배산임수형임에 틀림없다.
뒤에 산이 있고 앞으로 개천이 흐르면 당연히 전저후고가 된다. 또 월현천이 흘러나가는 수구는 좁고 마을안의 형국은 넓은 벌판을 이루니 전착후관의 국세 또한 갖추고 있다. 이로써 중교리의 장내, 문곡, 두곡 세 마을은 풍부한 물과 넓은 농토로 인하여 식록이 풍부하고 마을을 감싸는 산등성이로 인해 장풍형국을 갖춘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명당임이 틀림없다.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삼요소를 고루 갖춘 인물이 태어난다면 아마도 또 하나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가가 탄생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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