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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주변의 정세 2
계속 진행되는 북파공작훈련 5
곡마단 칼잡이 8
하극상이 일어나다 11
이중간첩 이수근 국외 탈출 14
북파 침투 명령 16
공작원의 분노 20
예견된 반란 22
3부. 실미도의 분노
1968년은 우리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 등 충격 적 사건이 연달아 터진 최악의 한해였다.
1. 21사태 이틀 뒤인 1월 23일에는 미 푸에블로호 선원 북한 납치 사건이 발생 되었다.
이 도발적인 북한의 납치사건에 대해 미국에서는 즉각적인 강경 보복 조치를 취하라는 여론이 거셌고 전 세계가 충격적인 대사건으로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또한 미국은 즉시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그 대응책을 강구하는 한편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원회를 소집 요구해 푸에블로호 나포의 부당성을 항의하였다.
그리고 외교 노력의 일환으로 소련에 대해, 나포 함정의 송환을 알선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 후 북한은 푸에블로호 선원을 학대, 고문하여 그들이 북한의 영해를 침 범하였음을 시인케 유도하여 그 사안을 가지고 미국 측에 사죄 하도록 요구하였다.
북한은 이 사건을 마치 미국이 불법적으로 침략적인 도발행위를 감행하고 있는 것처럼 대내외적인 선전을 펼쳐 세계적인 여론 조성에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사건 발생 후 11개월이 지난 1968년 12월 23일 북한은 판문검을 통해 승무원 82명과 유해1구를 송환하고 푸에블로호 합정과 거기에 설치된 비밀 전자장치는 몰수하였다.
미국은 이 송환을 위해 북한에 대해 푸에블루호의 북한 영해 침범을 시인, 사죄하는 요지의 승무원 석방 문서에 서명하였는데, 이는 후일 미국의회에서 정치 쟁점화 되었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도 존슨 미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에 보복 조치를 강행 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납치된 미 선원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하게 국가의 한 단위로 취급했다.
과감한 보복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지만 존슨 대통령은 국가의 자존심읕 버리고 푸에블로호 미 선원의 구출을 선택했다.
그리고 북한을 자극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납치된 미국 선원을 구출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미 CIA도 모르는 684 주석궁 폭파 부대를 창설하여 운용하고 있었기에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도 과감한 보복 침투를 결정한다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예정된 9월의 북파 침투는 연기 되고 만다.
그 후 한달이 채 넘어가기도 전에 울진 삼척지구 북한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이 터진다.
차라리 9월에 주석궁 폭파 부대의 침투로 북에 타격을 주었다 해도 결국은 이런 형태의 침투가 있었을 것이 뻔한 일인데…‥.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2일까지 3차례에 걸쳐 무장공비 120명을 15명씩 조를 편성, 침투시켜 군복, 신사복, 등산복 등으로 위장하여 게릴라전을 폈다.
침투한 무장 공비들은 11월 3일 새벽 주민들을 모아놓고 남자는 남로당, 여자는 여성 동맹에 가입하라고 총검을 들고 위협하였다.
이 사건은 북한이 우리나라의 산악 지대와 농촌에서의 게릴라 활동 가능성을 탐색해 본 것이며, 한국에서 월남과 같은 전쟁을 시도 할 수 있는지 시험한 것이다.
이로 인해 684군부대 전 공작원은 자기들도 북에 침투 시, 성공을 이뤄내기 위해 더더욱 불굴의 투지로 공작 훈련에 임하는 변화를 보여주었다.
정부정보기관에선 북파 공작 작전의 “오소리 작전”을 연기시겼다.
김방일 소대장은 공작원들에게 딱히 변명할 말이 없었다.
이 훈련만큼은 전직 곡예단 쌍칼 묘기의 공작대원 “김동주”를 따를 대원이 없었다.
기간병중 단검 투척이 장기인 사병과 김동주 대원이 명중내기를 하기도 했는데 김동주 대원이 이겼다.
그리고 갖가지 소리가 나지 않게 무기를 사용하는 법 (무성무기 사용법)을 훈련했다.
그동안 3개월간은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서로 대화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이날 처음으로 이들은 서로가 과거에 무엇을 하며 지내왔고 어디서 살았는지 어떤 연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이곳에 모인 공작원들은 실미도에 들어오기 전 직업이 다양했다.
조치원의 한약방거리에 있는 한 평범한 한약방 집 아들은 크게 사고를 치거나, 생활 형편이 어려워서 공작원을 지원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친모가 일찍 죽었고 편모슬하에서 이유 없는 감정의 엉킴으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무엇인가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다친 마음들을 어루만져주고 싶었던 탓이리라…‥
경기도 오산 쑥 고개에서 군 트럭 보급품을 홈쳐내기 위해 달리는 트럭에 올라타 훔쳐내던 일명 쑥고개 시라소니라는 절도자도 기관원의 집요한 설득으로 이곳 실미도에 오게 됐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감방에 드나들던 사람들이 많았다.
어찌됐든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할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방일 소대장은 그래도 이들을 인간 대 인간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시켰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적 인권의 보장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이들은 인간이기에 앞서 대한민국 국민의 기록이 이미 삭제되고 있었다.
국가와 민족을 의해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군인인 것이다.
특수요원이기에 어쩔 수 없이 본인의 호적조차도 삭제되어버린 공작원들이지만 그들도 인간이었다. 군인의 신분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서커스 곡마단에서 전국을 떠돌며 단검 던지기 속칭 ‘곡마단 칼잡이’ 로 인기를 모았던 김동주 대원은 김방일 소대장과 고향이 같았다.
이것저것 고향 이야기를 하다보니 김방일 소대장의 아버지와 김동주의 아버지가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동주는 어려서 청남초교를 졸업하고 형제가 많은 탓에 각자 호구지책으로 가출하여 대전으로 나갔다.
대전 역 앞에서 구두닦이로 인근 다방을 다니면서 구두를 찍어오는 일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백구두의 중년 신사가 김동주를 손짓으로 불렀다.
“예, 아저씨 데려가 주세요. 지도 서커스 해보고 싶어유.”
김동주는 그렇게 해서 백구두의 중년 신사 곡마단장을 따라가 그 길로 곡마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던 중 단검투척 아저씨가 김동주를 귀엽게 잘 돌보아 주었다.
공연이 없는 날에는 김동주에게 단검 투척의 요령을 습득시켜 주었다.
곡마 단원 중 17세 소녀가 있었는데 그네뛰기 곡마단원의 딸로 김동주보다는 두 살 어렸지만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나무 원판이 물레방아처럼 돌아가고 그 원판에 그 소녀가 팔다리를 벌린 채 묶여있는 다리 팔 사이에 단검을 투척하여 관객들의 애 간장을 녹이는 그런 서커스였다.
곡마단원으로써 적응도 되어가고 단검 투척의 실력이 점점 무르익어 가면서 나이도 먹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수원의 한동네 서커스공연에서 곡마단 행사를 진행하고 있을 때 기관원 두 명이 관객으로 나타나 김동주를 북파 공작원의 특기자로 낙점하였다.
곡마단으로 유랑하면서 화투 도박에 빠지는 바람에 빚만 늘어 지금까지 고향집에도 가보지 못 하던 차에 사람답게 살고 싶어 탈출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곡마단원들도 알지 못하게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실미도로 향했다.
김동주와 고향이 같은 것을 알고 난후 김방일 소대장이 휴가를 받아 고향 청주를 갔을 때였다.
김방일 소대장의 아버지와 김동주의 아버지가 동네 대포 집에서 막걸리 한잔을 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김방일 소대장을 아버지가 불렀다.
“아 휴가 나왔나 보군, 우리 셋째 자네와 같은 나이라서 집에 있었다면 군대에 가있을 텐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통 소식을 몰러.” 하며 혀를 끌끌 찼다.
김동주와 그의 아버지는 10여 년 동안 서로 생사도 모르고 있는 처지였는데 말하고 싶었지만 국가 최고부대의 공작 보안이었기 때문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다행히 김동주는 북파 작전에서 제외될 취사병이기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많은 위안을 주어 말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가슴속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답답했지만 김방일 소대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정중하게 김동주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린 후 부대로 귀환했다.
부자지간의 혈육에 정마저도 연결시킬 수 없었던 김방일 소대장은 내내 조국과 민족의 미래만 생각했다.
반복되는 훈련으로 시간 여유가 차츰 생기기 시작하였다.
짬을 낸 휴식시간에 날아가는 새만 보이면 백발백중 명사수들의 시범이 보여졌다.
정확히 과녁을 꿰뚫듯 명중되면 최고의 간식거리가 되었다.
또한 경비초소망루에서 경비병이 신호를 올리면 선녀 바위 근처 수심이 깊은 바다에 수류탄을 까넣어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그 당시 공작원들은 워낙 많은 고기를 잡아 물리도록 먹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나바론 요새’; ‘전투’ 등 수많은 특수공작과 관련된 영화들을 상영하여 보고 또 보았다.
그러면서 국가관과 충성심의 발현을 위해 정훈훈련을 해왔다.
하늘은 높고 구름 한 점 없는 늦가을 토요일 오후였다.
하수용 소대장의 지시로 철봉이며 평행봉을 더 만들 요량으로 공작원 4명에 기간병 2명을 감시자로 보내고 소대장특이 번갈아 가며 쌍안경으로 나무를 하는 공작원들을 감시했다.
잠시 후 나무를 메고 내려오는 공작원들이 보여서 안심하고 내무반으로 들어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무심코 보고를 받다가 기간 병 1명의 입술이 터져있고 볼이 부어 있는 것 같하 이상한 예감이 들어 다그첬다.
하수용 소대장이 순간 권총을 빼어들고 “바른대로 말해” 하면서 기간병 머리에 총을 쏠 기세를 보이자 기간병은 자초지종을 말했다.
이석규 공작원이 나무를 메고 내려오던 중 퀭한 심정이 섕겨 기간병에게 쏘는 말투로 말했다.
가뜩이나 북파공작은 연기되고 지겨운 반복훈련과 작업으로 공작원의 정신을 독기 나게 한터라 그대로 주먹이 기간병에게 날아 들어갔다.
기간병은 고꾸라졌고 이석규 공작원의 민첩한 동작이 이미 기간병의 권총을 빼앗아 들고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부대로 돌아가, 말하지 않으면 살려 두겠지만 만약 발설하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 이다. 약속해라!”
기간병은 그러리라 다짐하고 없었던 일로 숨기려 했으나 하 소대장의 예리한 판단이 적중한 것이다.
하수용 소대장은 곧 김방일 소대장과 의논 끝에 징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석규 공작원은 다른 공작원 조의 조장을 맡고 있었는데 조장의 권한과 깡의 세기로 야간에는 대원들을 화장실로 한명씩 불러내어 똥불(게간)을 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조직과 군사기를 떨어뜨리는 독소중 하나였기에 언제부터인가 조치하리라 마음먹던 터에 제대로 구실이 생겼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9시를 전후해서 하수용 소대장은 이일규 공작원을 불렀다.
그리고 안성찬 조장에게도 전 공작원을 집합시키라고 일렀다.
하 소대장은 대검을 이석규 공작원에게 던져주고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라콕 했다.
이때 안성찬 조장이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 잡고자 나섰다.
곧이어 공작원들이 박달나무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어떤 몽둥이에 급소를 맞았는지 수 분 내로 절명하고 말았다.
하극상의 전말이 비참하기 그지없었고 또한 성추행의 전말이 이렇게 무참히 짓밟힌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석규 공작원의 시신은 한 나절을 그대로 고꾸라져 연병장에 내팽개쳐져 있었고 누구하나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다.
중식 때가 되어서도 이석규 공작원의 시신 옆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다.
오후 3시쯤 되어서 하 소대장이 지시를 내리자 공작원들이 장작더미에 불을 지피고 시신을 태웠다.
먼저 독도법 훈련 때 탈출하려다 맞아죽은 두 구의 시신도 파내어 함께 지글 지글 몇 시간을 태웠다.
그리고 이 유골가루를 망망대해 멀리 바다로 나가 바람에 뿌렸다.
이렇게 통일과 반공 일념으로 조국을 위해 훈련만 죽도록 받다가 그들은 산화되어 서해 바다의 수호신이 되었다.
이 수근 국외 탈출 사건이후 아이들의 고무줄놀이에 접목시켜 불렀던 노래이다.
그 북한 측 기자가 바로 북한 중앙 통신사 부사장이 수근이었다.
이런 극적인 15초의 탈출느라마가 전 국민에게는 열렬한 환영으로 이어졌다.
그 후 이수근은 사회 각계로부터 1000만원 상당의 재산을 기증받고 모 의대 교수를 만나 결혼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수근이 오류동 2426 전대에 방문하는 일이 생겼다.
김방일 소대장이 경호 특명을 받고 이수근을 경호했다. 방문 목적은 얼마 전 김포 강화 쪽에 북한 공군 영관급 비행기 조종사가 불시착한 일 때문이었다.
국가정보기관에서 이수근을 독대시켜 이 북한공군기 조종사를 전향시키려고 만남의 장소로 오류동 2426전대가 지정된 것이다.
이 전대계곡에서 이수근과 불시착한 북한 공군 조종사 그리고 몇 명의 정보기관원이 함께 수박을 썰어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러한 사실을 감지한 중앙정보부는 1월 31일 베트남 사이공 공항에서 캄보디아로 탈출하기 직전 검거하여 2월1일 오후 특별기 편으로 압송해 왔다.
서울지검 공안부 부장검사는 1969년 3월 22일 이수근을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이수근 피고인에 대한 첫 공판은 4월10일 오전 10시5분 서울형사지법 합의6부 심리로 대법정에서 열렸다.
이날 법정에 들어가지 못한 500여명이 배재고 정문 앞에서 재판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자리를 뜨지 않을 정도로 이 재판에 관심이 컸다.
그리고 1969년 7월 3일 오전 11시 45분 서울 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이 수근은 사형장에서 “ 한번만 더 살려 달라”는 마지막 진술을 했고 부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채 사형이 확정 된지 47일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중간첩 이수근은 왜 북한을 탈출했고, 또 왜 남한을 탈출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까?
20년 동안 공산주의에 젖고 젖은 그가 2년여 동안 민주주의에 그토록 젖기가 어려웠던 것일까?
전향 하였더라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진 않았을 덴데……
이수근이 사형된 7월 이후 북파 공작시기가 정부 정보기관 측에서 나름대로 결정되었다.
남서풍이 북으로 불어 북한침투가 가장 용이한 시기가 9, 10월이다.
부대장으로부터 조 편성을 다시 하여 훈련 성적이 우수한 1개 조원을 다시 선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선발 소대장으로는 하수용 소대장이 선발되었고 안성찬 공작원이 조장으로 발탁되었다.
3명은 침투조, 3명은 폭파조, 3명은 교란조 그리고 조장이 모든 지시와 판단을 맡았다.
김일성 주석궁 모형을 만들어 평양주변 지형과 주석궁 내부를 완벽히 인식하고 침투조와 폭파조 그리고 교란조를 정했다.
주석궁 폭파에 필요한 TNT, COMPOSITION C4, 탄약, 비상식량, 의약품 등을 완벽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도폭선을 몸에 감을 양만 알맞게 잘라, 육탄공격 및 자폭용으로 만들었다.
부대장에계 하수용 소대장은 “단결! 임무 완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조장 안성찬과 9명의 공작원도 일성으로 “단결! 체포되면 자폭하라" 를 외치며, 공직선에 을랐다.
서해고도의 복파침투장소에 도착하여 기존의 공작원 북파대기소 막사에 군장을 풀었다
같은 경비행기에 속하는 기구와는 달리 공중을 자유롭게 항행할 수 있게 추진 장치와 조종 장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공침투를 위한 레이다망에 추적되지 않는 최적의 장비로 외국기관에 의뢰하여 제공된 비행선이었다.
탑승 적정 인원은 10여명이고 탑승 장치가 비행선아래 매달려 있다.
이 고공 침투 훈련은 전국을 무대로 야간에 실시해왔다.
과천 청계산에서 대구 팔공산을 지정하여 침투하강 하기도 하고 다시 되돌아오는 반복훈련을 통해 익숙해져 있었다.
모두가 숨죽은 듯 긴장감이 팽팽히 감돌았고 눈빛이 번뜩였다.
어쩌면 오늘밤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감이 소리 없이 휘감겼다. ˙
그날 밤 양주에 가을 추수로 장만된 과일들로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공작원들끼리 향연이 벌어졌다.
“684 주석궁 폭파공작원은 들어라! 이소대장 하수용은 여러분의 건투를 빈다.”
“부디 김일성 주석궁을 폭파하고 꼭 생환하기 바란다. 이 향연이 결코 마지막이 되지 않길 바란다.”
“만약 실패해서, 자폭하게 되면 이 향연은 마지막이 될 것이다.”
“김 일성 주석궁을 폭파하라! 체포되면 자폭하라!” 라고 외치며 건배를 들었다.
북파침투장소인 서해 외로운 고토의 섬에서 죽음의 그림자 드리워지듯 공작원의 그림자는 썰렁하게 흔들렸다.
“하 소대장님! 과연 우리는 임무를 완수하고 돌하올 수 있을까요?”
“야! 안 조장 그걸 말이라고 하나 지금까지 갖은 고통을 감내하며 짐승 같은 훈련을 끝내고 오직 국가에 충성하겠다는 일념 하나뿐인데 그런 약한 모습을 보여, 이리와!”
그 순간 하 소대장은 권총을 빼어들고 머리통에 들이대었다.
이때 민 중령이 하 소대장을 순식간에 업어치기로 메다꽂았다.
서해고도의 침투장소의 달밤은 새벽이 오자, 홀연히 사라졌다.
바람세기를 측정하고 풍향을 체크했다. 바다는 이미 알고 있는지 그날따라 파도도 잠잠했고 바람도 조용했다.
전 공작원은 눈을 번뜩였고 꼭 임무를 완수하고 살아오겠다는 신념이 얼굴에 붉게 타올랐다.
“전 공작원은 들어라! 김일성 주석궁을 폭파하라! 체포되면 자폭하라! 그리고 무사히 생환하기 바란다.”
전 대원 한명 한명에게 일일이 악수하고 대원들은 “단결”을 외치며 거수경 례를 했다.
평양 김일성 주석궁 상공에 낙하될 수 있을 만큼의 수소를 넣었다.
막 비행선 베론을 띄우려는 순간 민 중령에게 연락이 왔다.
비행선 베론의 수소가 빠지듯 공작원의 사기도 서서히 빠지면서 어둠이 걷혔다.
전날의 긴장감에 극도로 심신이 지쳐 있었고 나른하였다.
본인을 북파시켜주면 주석궁은 반드시 폭파하고 귀환할 수 있다고 자부하던 하수용 소대장도 무기한으로 북파공작명령이 연기되면서 긴장이 풀려 장티푸스를 앓게 되었다.
서해 침투 장소 섬 주둔부대의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모든 공작원들도 해 이 해지기 시작했다.
목표가 사라지는 것 같은 불안감과 예측하기 어려운 앞날에 궁금증이 일면서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한 공작원들은 이곳 섬의 악동이길 거부하지 않았다.
주둔군 헌병 두 명이 지나가면서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공작원 두 명이 이들을 불러 세웠다.
이때 공작원 한명이 날랐다. 이단옆차기가 작렬하고 업어치면서 두 명의 헌병을 포박했다.
어디에선가 구해온 납작한 돌 끝으로 순식간에 이들의 머리 가죽을 반씩이나 벗겨버렸다.
인간병기로 둔갑한 이들은 상상하기 조차 힘든 무서운 괴력과 담력의 소유자들이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난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곧이어 주둔군 부대장에게 정부정보기관의 요원들이 단언을 내렸다. 국가 최고 권력자의 명령에 의한 입무수행을 방해할 셈이냐고 항의했다.
오히려 피해자가 업무수행에 차질을 주어 유감이라는 말로 조용히 마무리 되었다.
약 1개월 정도가 지나자 하수용 소대장도 장티푸스로부터 완쾌되고 완전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실미도의 늦가을 바람이 산을 에이려는 듯 차갑게 불어왔다.
돌아온 대원들이 실미도 부대에 합류되자, 남아있던 대원들은 동료애로 반갑게 맞이했다.
김방일 소대장도 일단은 무사귀환올 축하해주었고 안성찬 조장과 힘 있게 악수를 하고 살아 돌아왔다는 반가움으로 부둥켜 앉았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망망대해로부터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실망감을 안고 실미도를 휘감아 돌아나갔다.
다시 침투명령이 날 때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대기해야 한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육지의 겨울과는 비쿄가 안 될만큼 섬의 겨울은 살을 도려내는 듯한 혹독한 추위였다.
비바람올 동반하거나 눈보라가 휘몰아칠 땐 얼굴이 얼어붙는 것처럼 진저리나는 추위였다.
그러나 그런 겨울이 지나며 또다시 봄날이 다가오고 훈풍이 불었다. .
파릇파릇 돋아나는 이파리들과 이름모를 꽃들 거기에 어우러지는 자연향수의 냄새들…
봄기운만큼이나 활력이 넘치는 대원들의 정력도 불을 뿜는 듯한데 소모할 수가 없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연병장에서 야간 영화를 상영 중이었다.
전 대원이 부대 내를 뒤졌으나 찾질 못하고 그들의 탄띠가 화장실 뒤편에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한 명 한 명 사라졌던 것이 생각났다.
탄약고 문이 열려있었고 점검해보니 실탄과 수류탄이 일부 없어졌다.
무의도 경찰초소와 연락소 역할을 했던 이장 집에 전화연락을 해보니 통신두절이었다.
김방일 소대장은 순간 무의초교 숙직실 관사에 여교사 2명이 생활하고 있던 것을 기억해냈다.
김 소대장은 1차적으로 무의초교를 수색하기로 하고 실미도 정상 망루에서 무의도 쪽 백사장으로 줄달음질쳤다.
역시 세 명의 발자국이 모래사장에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탈출한 공작원 3명은 무기와 탄약, 수류탄을 소지하고 있으니 위급한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 대의를 위해서 사살을 해도 좋다” 라고 명령을 내렸다.
무의도 실미해수욕장에 다다랐을 때 “탕”하는 한발의 M1 소총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무의초교 쪽이라 판단하고 예비군과 교전일 것으로 짐작했다.
약 10 여분 구보로 달려갔더니 예비군과 경찰소수인원이 대치하고 있었고 예상대로 숙직 실관사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전 대원은 관사를 빙 둘러 포위하고 하 수용소대장이 접근했다.
사태의 추이를 보기위해 경찰, 분교장, 주민들을 집합시켜 경위를 물어 보았다.
어둠이 짙어질 9시 무렵 공작원 3명이 무의 2리에 나타나 수류탄 2발을 던져 1발은 터지고 1발은 물에 짖어 불발이 되었다는 것이다.
경찰을 무자비하게 패면서 경찰탄약고의 위치를 알아냈다고 한다.
아마 김일성 주석궁 폭파훈련의 일환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훈련과정에서 침투 시 제일먼저 탄약고 및 유류고가 타깃이 되기 때문에 경찰 탄약고부더 물어두었던 것 같다.
실탄과 총도 바다를 건너 수영해올 때 젖어서 사용불능 상태였다.
처녀 2명과 청년 3명을 강제로 숙직실 관사로 끌고 갔고 숙직실에는 과외 공부하던 6학년 초등학생 10여명과 남자 교사가 있었다.
여교사 2명은 토요일이라 인천의 자택으로 외출 나가고 없었다.
일단 총과 탄약, 수류탄을 사용할 수 없다하니 안심이 되었다.
경찰과 예비군을 전원 철수시키고 684부대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선박의 입출항, 주민이동, 통신, 교통수답을 일체 금지시켰다.
그리고 권총을 뽑아들고 하수용 소대장이 숙직실로 접근했다
“가까이 오지마라! 만약 가까이 오면 이안에 있는 모든 놈들은 다 죽여버리겠다.”
“아저씨! 살려주세요” 하고 애원하는 소리가 애간장을 태웠다.
“너희들의 심정을 이해한다. 사나이 대 사나이로 대화 하자. 내 선에서 없었던 일로 끝낼 테니 인질들은 모두 풀어줘라.”
소대장들은 숙직실에서 약 20미터 떨어진 운동장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인질을 빼내고 무사히 구출 시킬 수 있을까? 머리를 맞대고 숙의하였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미 특수공작원이길 포기한 그들은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5명의 특공조에게 소주를 한 병씩 대접에 마시게 했다.
플래시로 신호하면 창문으로 2명, 현관으로 3명이 동시에 난입키로 했다.
잠시 후 조용해진 틈을 타서 플레시로 원을 크게 그려 신호를 하고 “돌격” 하며 외첬다.
유리청이 부서지고 현관문이 엎어지면서 비명소리, 달아나는 소리와 함께 대소동이 일어났다.
군용 플래시로 숙직실안을 비추어보니 민간인 옷을 입은 세 사람이 엎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가슴과 목에 굴 따는 칼에 찔려 선혈이 낭자했고 정병화는 목이 두 군데 찔려있었지만 살아있었다.
공작 훈련 시 늘 외치고 세뇌시켰던 “체포되면 자폭하라” 대로 자살을 시도 했던 것이다.
그 뒤 다시 학교로 돌아가 현장사진을 찍고 다시 한번 사과를 한 다음 마을을 빠져나왔다.
실미도 부대로 돌아오니 정병화 공작원이 링거를 꽂은 채 유리창을 깨어 부셔, 깨진 유리로 자기의 목과 가슴을 마구 찌르고 있었다.
이미 엎어진 물을 주워 담진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는지 자포자기 한 것 같았다.
아니면 학교 숙직실에서 인질 난동 시 여름휴가를 기해서 무의도 섬에 놀러온 아가씨 2명을 무참히 강간한 대가로 괴로운 몸짓을 하고 있는 건지 몸부림치고 있었다.
잠시 후 정병화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숨이 깔딱 깔딱 넘어가고 있었다.
부대장이 인천 파견대 본부로 출장을 떠나면서 중정 조정관의 명령 대로 태워버리라고 지시를 했다.
세구의 시체가 또다시 허무하게 충성심의 기름으로 불태워졌다.
그들의 유골가루는 망망대해로 훨훨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684 주석긍 폭파부대 훈련 공작원 31명중 7명이 북파침투 이전에 산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