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울산도호부사(行蔚山都護府使)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증자헌대부(贈資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지경연의금(兼 知經筵 義禁府) 춘추관 성균관사(春秋館 成均館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 都摠管)조선후기의 문관(文官). 자는 종례(宗禮), 호는 운촌(雲村)·운곡(雲谷), 본관은 여흥(驪興). 민여검은 군수(郡守) 사용(思容)의 7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7세에 어머니를, 16세 때에는 아버지를 여의고 형 여임(汝任)을 따라 공부하였다.
1589년(선조22)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임란(壬亂) 후 한동안 회덕선영(懷德先瑩) 동쪽 경운리(景雲里)에 우거(寓居)하며 호를 운촌(雲村) 또는 운곡(雲谷)이라 하였다. 여흥민씨(驪興閔氏) 운촌공파(雲村公派)는 그로부터 파생(派生)하였다.
1608년(선조41) 음보(蔭補)로 남부참봉(南部參奉)을 지내고 1613년(광해군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신진(新進)으로 괴원(槐院)에 있을 때 권신·이이첨(李爾瞻)등의 뜻에 거슬려 10년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비변사(備邊司)의 청(請)으로 정자(正字)·박사(博士)·전적(典籍)·북평사(北評事)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등용되어 곽산군수(郭山郡守)로 나갔는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선두에 서서 반군(叛軍)을 추격하여 안현(鞍峴)싸움에 큰 공을 세웠으나 난이 평정된 후 도리어 지체했던 자의 시기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후 곧 울산부사(蔚山府使)로 복직되고 앞서의 전공이 인정되어 인조4년 겨울에 가선(嘉善) 종2품으로 승품(陞品)하였다. 그러나 이때 조정에서 호패법(戶牌法) 시행에 대한 엄명이 내려 그 명부를 기일안에 작성하지 못했다는 죄로 1627년(인조5) 1월 서울로 소환 도중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여러 요새가 연이어 함락되고 왕이 강화(江華)에 피난하여 화의(和議)가 성립됐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 끝에 충청도 괴산(槐山)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성품이 염결(廉潔)하고 검소하여 옷이 허름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일생을 오로지 충의(忠義)와 애민(愛民)으로 일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