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중독적 성격이 강하다. 월드컵이 열리면 온 국민이 축구에 빠져들고, 김치 냉장고가 좋다고 하면 집집마다 김치 냉장고가 채워진다. 한국 남성의 알코올 중독 평균 유병률은 20%를 넘어선다. 즉 우리 나라는 다섯 가정 중에 한 가정이 술 문제를 가진 아버지나 할아버지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술(알코올 중독)과 여자(성 중독)와 노름(게임 중독)에 동시에 빠져 지내셨다는(교차 중독)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중독 현상과 그 회복 방법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도 시급한 일이라 하겠다.
중독 = 통제 불능 + 의존 중독은 사전적으로 “생체(生體)가 어떤 독물의 작용에 의해 예기치 않은 반응을 일으켜 가끔 생명에 위험을 미치는 일”로 정의한다. 이 경우의 중독은 의학적, 생물학적 용어에 가까운 것으로 영어 ‘intoxication’을 번역한 말이다. 심리학적 의미의 중독은 영어 ‘addiction’을 번역한 말이다. 중독에 대한 좀더 전문적 단어는 ‘DSM-IV’라는 정신과 질병 분류 서적에 등장한다. ‘물질 사용 장애’로 번역되는 약물 중독은 ‘Substance Dependence’ 즉 ‘약물 의존’으로 표현된다. 중독이란 엄밀히 말해 의지하는 것, 기대는 것을 뜻한다. 즉 좀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인가에 지나치게 기대어 사는 현상을 중독이라 할 수 있다. 중독의 또 다른 측면은 ‘통제 불능’으로 표현된다. 중독자는 초기에 자신이 중독 대상을 통제하고 그것을 통해 행복감을 느끼며 자신의 삶을 향상시켜 나갈 수 있으나, 중독 이후엔 중독 대상이 자신을 통제하며 자신의 삶을 파괴시켜 나간다. 중독의 구체적인 진단 기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다음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문제를 보이면 우리는 중독을 의심해 볼 수 있다). 1) 내성: 똑같은 시간이나 동일한 양으로 만족되지 않는다. 2) 금단 현상: 끊으면 불안하다. 3) 의존: 하지 않으면 못 배긴다. 4) 사회적 문제: 지각, 결근,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 생긴다. 5) 금전적 손실, 건강 파괴 등 부정적 결과가 있을 줄 뻔히 알면서도 하게 된다. 6) 인간 관계 갈등: 주변 사람이 비난하거나 심한 잔소리를 해도 아랑곳없다. 7) 부정: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파악하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8) 기능의 감소: 집중력 감소, 산만함 등으로 인해 예전에 잘 하던 일들을 잘 하지 못한다. 9) 법적 문제: 음주 운전, 폭력, 횡령, 사기, 간음 등. 10) 인간 관계 파괴: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등 대인 관계가 파괴된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만족을 구할까 그러면 사람은 왜 무엇인가에 지나치게 기대어 살려고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이 보편적으로 ‘중독 대상’으로 인해 보상받고 있는 삶의 영역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아들러를 포함한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자신의 일과 인간 관계 그리고 여가 생활에서 모두 만족을 얻을 수 있다면 그런 대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에 어려움을 겪을 경우, 사람은 그것을 대체할 다른 중독 대상을 찾아 나선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일’이 마음먹은 대로 잘 안될 때 술 한 잔이 생각난다. 어떤 사람은 ‘인간 관계’에서 외로움을 느끼거나 갈등을 경험할 때 술 생각이 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특별한 이유 없이 ‘할 일 없고 심심할 때’ 술자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즉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특별한 의존 대상 없이도 자신의 ‘일’과 ‘인간 관계’ 그리고 ‘취미 및 여가 생활’에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중독자는 이 세 가지 삶의 영역에 불만과 갈등이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대체할 무엇인가를 찾게 된다.
중독의 유형 따라서 세 가지 삶의 영역에서의 불만족감을 어떻게 중독 대상을 통해 대체해 나가느냐에 따라 중독의 종류를 생각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먼저 중독의 종류에 대해 알아보고, 각각의 중독이 앞서 삶의 영역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강경호는 중독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대별했다. 1) 물질 중독: 알코올, 약물, 음식 중독 2) 무형의 행위 중독: 관계, 분노, 연애, 종교 중독 3) 유형의 행위 중독: 일, 도박, 사이버, 성, 쇼핑, 운동 중독
무형의 행위 중독은 과정 중독, 유형의 행위 중독은 행위 중독으로도 부른다. 즉 전자는 중독에 이르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경우이고, 후자는 중독 행동 자체를 즐기는 경우다. 자세한 내용은 그의 저서를 참조하기 바란다(강경호, 「중독의 위기와 상담」, 한사랑가족상담연구소, 2002). 그렇다면 앞서 여러 가지 중독이 인간의 주요 삶의 영역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첫째, 중독자들이 만족감을 ‘일’에서 찾는 경우다. 어떤 사람은 사업에 실패하고 도박이나 약물에 빠지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일의 성공을 통해 확인받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일 중독에 빠진다. 인터넷 게임에 중독된 중고교생들은 현실의 학업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자기 가치감을 사이버 세계에서 게임을 통해 누리고자 한다. 고졸의 학력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대통령 표창을 세 차례나 받은 어느 노인이 정년 퇴직 후 재산을 더 늘리기 위해 인터넷 주식에 빠지는 바람에 집을 잃은 경우를 본 적이 있는데 이 경우는 일 중독에 해당한다. 둘째, 중독자들이 만족감을 ‘인간 관계’에서 찾는 경우다. 청소년기에 학생들은 친구들의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술이나 담배 등 약물을 사용한다. 어떤 청년은 교제하던 애인과 헤어지고 상실감으로 인해 술에 빠져들기도 한다.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해 부탄 가스를 흡입하고 환상 속에서 그 어머니를 만나려 했던 중학생을 만나본 적도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 채팅이나 개인 홈페이지에 빠져드는 사람들, 외설적 동영상을 즐기는 사람들은 모두 현실의 삶에서 ‘인간 관계’를 맺는 능력이 부족하다. 연구에 의하면, 쇼핑 중독에 걸리기 쉬운 사람은 남자보다 여자 특히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애정 표현을 물질을 통해 받았던 경우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셋째, 중독자들이 만족감을 ‘여가 생활’에서 찾는 경우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즐기면서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하면 삶이 매우 무미건조해진다. 의미를 갖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기 힘들 경우, 무료한 시간을 채울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필요로 한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본드를 흡입하는 많은 청소년들의 환상 속에 가장 흔하게 나타난 환상은 놀이 동산에 가서 오락 기구를 즐기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30, 40대 직장인들이 업무 이후 시간을 즐기는 곳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장소가 ‘술집’이라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요즘 청소년들은 친구들과 모이면 주로 컴퓨터 게임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우리 주변에 교회 중독자들도 있는 것 같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깊은 교제 없이 단순히 ‘교회’가 제공하는 인적(人的), 물리적, 시간적, 환경적 만족감에 젖어 사는 사람들을 간혹 만나볼 수 있다. 그들은 교회에서의 여러 가지 사역이 주는 만족감과 성취감 때문에, 혹은 조금은 왜곡되고 부분적인 하나님과의 가짜 친밀감 때문에, 혹은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무료함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중독자가 되는가 그렇다면 어느 누가 앞서 소개한 여러 가지 중독 대상에 빠져들게 되는가? 첫째,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 중독 대상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의 평안을 구한다. 하지만 항상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며 살아가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늘 ‘자신은 괜찮은 사람, 사랑받고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느낌으로 살고 싶지만, 이를 현실에서 그대로 느끼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중독자들은 ‘자신이 나쁘다, 완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분열, 부정, 투사 등 원시적 방어 기제를 사용하게 된다. 또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은 매우 강한 반면에 자신감은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현재 자신이 지닌 주변의 자원으로부터 주어지는 위로만으로 불충분함을 느껴 중독 대상이 가져다주는 위로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즉 중독자들은 자기 가치감을 유지하고,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통스런 느낌을 없애기 위해 중독 대상물을 사용한다. 둘째,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삶의 기술을 적절하게 개발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오래 전에 정신 병원에서 언더그라운드 음악 밴드로 일하면서 진해거담제를 한 번에 30알 이상 복용하던 22세의 기타리스트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젊은 음악가는 더 많은 사람들과 예술적 교감을 나누기 위해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개발하는 데 힘을 기울이기보다 약물이 주는 환상적 느낌을 힘입어 자신의 음악 세계를 표현하려 했다. 이처럼 극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 학생이나 직업인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이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데 실패하면서 중독 대상에 의지해 자신의 능력을 표현하려 하거나, 무능력을 느끼지 않으려고 중독 대상이 주는 쾌감에 빠져드는 경우도 있다. 이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일의 성취로 경험하려는 사람들은 일 중독자가 되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삶의 기술이 미흡해 현실에서 개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약물이나 게임이나 도박 등에 중독자가 된다. 셋째, 자신이 실제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며 ‘나는 썩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다. 이는 세상의 어느 부모도 자식을 완전하게 양육시켜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나는 썩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항상 갖고 살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상 관계 이론은 심리적으로 건강한 삶을 사는 데 있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안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인간은 태초에 이런 모습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실제로 괜찮았다. 그래서 하나님도 사람을 지으시고 보시면서 ‘좋다,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들이 하나님보다 더 나아질 수 있겠다는 잘못된 자부심을 갖게 되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단절되었고, 그 결과로 인간은 ‘자신들이 괜찮지 않다’는 의식 즉 수치심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함 받고(엡 1:7),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그분으로 인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들어가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올바른(괜찮은)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롬 5:22~25).
삶의 통제권을 하나님께 사람들은 일, 약물, 인정, 관계, 인터넷, 도박, 음식 등 다양한 대상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사람의 인정이 그리워서,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기 어려워서,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그리워서, 무언가를 이뤄내는 성취감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다양한 대상에 기대어 살아간다. 중독을 넓게 정의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직면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만들어낸 여러 가지 우상들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돈, 권력, 명예, 학력, 목회의 성공 등에 기대어 살아가는 현상들이라 할 수 있다. 역설적인 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아니 창조되면서부터 인간은 의존적인 존재였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조화로운 관계 안에서 완전함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 관계가 깨어진 후 인간 스스로 독립적으로 자신의 완전함을 누릴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중독의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인간을 완전케 하시는 ‘성령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하고 기대어 살아야 한다. 즉 불완전한 ‘자신’이 삶의 주도권을 쥐고 살아가는 이상 인간은 마지막까지 삶을 불완전한 의존으로 마감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건강하고 ‘자신’을 살릴 수 있는 완전한 의존의 대상이 필요하며, 이는 곧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 자신의 일과 노력을 통해 사람들을 섬기며 살아간다. 부모는 우리를 완전히 인정해 주고 보호해 주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잉태 이전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느끼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인생을 다시 설계하며 ‘일, 사랑, 여가’라는 삶의 주요 영역에서 회복을 시작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인정과 사랑으로 ‘나는 비록 … 하지만 꽤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자신감을 가지는 사람만이 삶의 온전한 통제권을 쥐고 살아갈 수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우리를 온전히 내어드릴 때 가능한 삶이다.
다른 이들의 회복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가 첫째, 자신이 무엇에 중독돼 있는지, 어느 정도 중독돼 있는지를 검토하고 받아들이게 한다(중독 정도 평가). 둘째, 그들을 현실 생활에서 접근 가능한 중독 대상으로부터 격리시킨다(중독 대상으로부터의 격리). 셋째, 중독 대상에 의존하지 않고, 어떻게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대안을 함께 계획한다(삶의 대안 탐색). 넷째, 자신이 썩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고 느끼게 된 이유 또는 실제로 썩 괜찮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알고 받아들이게 한다(심리 역동 탐색). 다섯째, 위와 같은 느낌은 완전치 못한 부모와 자신이 만들어낸 속임수이며,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이를 삶에서 연습시킨다(영적 지도와 연습). 여섯째, ‘괜찮은 자신’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삶의 계획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하나씩 익힌다(대안에 적응시키기). 일곱째, 상담자를 떠나 독립해 새로운 삶에 계속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그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삶에 자신을 매일 내어드린다(하나님께 온전히 기대기).
이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중독 상담자는 가장 먼저 자신이 중독자임을 인정한 후에 중독자와 더불어 깊은 신뢰의 관계를 마련해 일차적으로 중독자의 외로움, 고통을 함께 나눈다. 이후 중독 대상으로부터 단절(단약, 단주, 단인터넷, 단도박 등)을 시도하고, 지난날에 겪었던 좌절을 공감하며 앞으로 발전적 삶을 살기 위한 삶의 구체적인 목표를 계획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문제 해결 능력을 향상시킨다. 인간 관계 맺기가 어려운 사람들에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쉽게 전달하는 방법을 훈련시킨다. 자신의 진로에 대해 방향과 자신감을 잃고 헤매던 사람들에겐 삶의 뚜렷한 계획과 그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작전(시간 계획, 금전 계획, 자질 획득 등)을 짜고 실천하도록 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중독자들이 상담자와 맺고 있던 의존 관계를 청산하도록 한다. 즉 중독자들이 중독의 대상은 물론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의존해 온 상담자와의 관계에서도 독립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방법을 익히게 한다.
하나님과 연합한 강한 자기, 진짜 자기 되기 이것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로 표현되는 성령의 열매를 얻게 된다. 흔히 ‘성령의 열매’라 하면 기대되는 것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무슨 징표 같은 것을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내적 요소들로 보고 있다. 물론 이런 내적 요소들로 인해 겉으로 표현되는 분명한 행동이 있다. 희락한 사람은 우울할 수 없고 화평한 사람은 인간 관계가 좋을 수밖에 없다. 오래 참고 절제하는 사람은 중독 대상을 향해 참고 절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는 내적 요소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면 그 내적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을 돌봐 주는 대상과의 신뢰 관계가 회복돼 강한 자기, 진짜 자기가 되는 일이다. 좌절하거나 외롭거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한결같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에 잇닿아 이 세상의 무엇이라도 스스로 조정해 가며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체성이 바로 온갖 종류의 중독에서 벗어나 성령에 취해 사는 사람들이 갖는 내적 요소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땅엔 온갖 종류의 대상에 잘못 기대어 살아가는 중독자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업의 세계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자신의 통제권을 넘겨드리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누릴 수 있는지를 알기 원한다. 또한 자신들로 하여금 때때로 분노에 휩싸이게 하고 외로움에 내어버려 두기도 한 부모들과 하나님은 어떻게 다른지, 그분과 연합해 살아가는 것이 실제 우리의 관계 능력을 얼마나 풍성하게 만드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기 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여가 시간에 누구와 만나서 무엇을 즐길 수 있는지를 실제로 알기 원한다. 하나님께 삶의 모든 통제권을 넘겨드리지만 그분의 다스리심 안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강한 조절 능력이 회복되는 역사가 목회자들의 설교와 상담 사역을 통해 한국 교회 안에서 역동적으로 이뤄지길 기대한다.[object TEXTA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