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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모임 ‘설우회’
“주인공 뫼르소는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 사는 평범한 하급 셀러리맨인데, 양로원에서 죽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이튿날 해수욕장에
가서 여자 친구인 마리와 노닥거리다가 희극 영화를 보면서 배꼽을
쥐는가 하면 밤에는 마리와 정사를 가집니다. 며칠 지난 일요일에 우연히 불량배의 싸움에 휘말려 동료 레이몽을 다치게 한 아라비아인을
별다른 이유도 없이 권총으로 사살합니다. 재판에 회부된 그는 바닷가의 여름 태양이 너무 눈부시기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하고 속죄의 기도도 거부하며 자기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행복하다고 합니다.
처형되는 날은 많은 군중이 밀려들 것을 기대하며 끝납니다.”
한 사람이 간략하게 발제를 하였다. 이어서 토론이 벌어졌다.
“줄거리를 보면 저는 뫼르소가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말이 됩니까. 태양이 눈부셔서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는
게.”
“이 작품은 줄거리를 놓고 도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난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게 이해가 가요. 너무 기막힌 슬픔 앞에서는 오히려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그 때야 슬픔이 밀려들지요.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도덕적 가치와 타인의
시선 때문에 가식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수가 있어요. 뫼르소는 그런
것을 비웃지 않았을까요?”
“뫼르소는 현재의 욕망에 지배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해타산 없이
행동에만 몰입하는 인간형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순진하고 자신에게
정직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를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 즉 인간
존재의 무상성을 자각한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솔직히 그 말은 너무 어렵고 이해가 안갑니다. 나는 뫼르소가 그런
의식이 있는 인간이라고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아주 무책임한 인간인 것 같습니다.”
“어떤 평론가는 뫼르소를 현대사회에서 소외된 비극적 인간상으로
봅니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로 살다가는
부조리성과 반항의 의욕을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식을 담은 철학을 실존주의라고 하지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 책에는 백인 우월주의 사상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백인인 뫼르소가 유색인종인 아라비아인을 죽였기 때문에 아무런 도덕적인 죄의식을 가지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학생들은 저마다 심각하게 고민을 하며 한 마디씩 던졌다. 어떤 학생은 책을 읽지 않고 나타났고 또 어떤 학생은 까뮈의 다른 작품들까지
읽고 인용을 했으며, 꽤 철학 공부를 깊이 하고 온 학생들도 있었다.
이 모임의 이름은 ‘설우회’였다. 설우회는 우암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 중에서 부산고등학교, 동래 고등학교, 경남여고, 동래여고 등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끼리 매주 책을 한 권씩 읽고 와서 독서 토론을
하던 모임이었다. 나는 우암 초등학교를 나온 건 아니지만 감만동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설우회에 나가고 있던 친구들의 추천으로 회원이
되었다. 설우회 동기 중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동창이기도하며 지금은 ‘요산(김태국) 한의원’ 원장으로서 부산에서 유명한 한의사
중의 한사람이 된 김태국과 나중에 서울대 사대를 다니면서 나와 함께 하숙을 하기도 한 이찬혁,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 근무하면서
국제기구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독보적인 인물인 정우탁, 감만동에서 낚시바늘을 생산하여 수출하는 낚시공장의 경영자가 된 안상종 등의 친구들이 있었다.
우암동과 감만동 지역에서 소위 모범생들의 모임이라고 할 만한 설우회에 참여하면서 남들 앞에서 자기의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모임 때마다 삼 분 스피치 시간이 있어 회원들은 무조건 다른 회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삼분간 자기 주장을
펼쳐야 했기 때문에 언변이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매주 한
편씩 읽든 읽지 않든 문학작품을 놓고 토론을 했기 때문에 귀동냥만
하더라도 교양과 지적 수준을 높일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얼치기로 잔뜩 겉멋만
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설우회 참여가 나에게는 아주 소중한
자산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20기까지 이어져 온 설우회는 80년대 중반, 설우회 출신의 한 선배가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면서 더 이상 신입회원을 확보하지 못하여 서서히 소멸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설우회 출신들은 부산을 비롯한 다양한 지역과 다양한 분야에서 중견
사회인으로서 나름대로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다.
우리 사회를 만들어 가는 푸른 머리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가 뭐가 있겠노?”
“정치.”
“그런 거 말고 일반 시민들 말이다.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꼭 고쳐야할 문제를 가지고 말해보자.”
“질서를 너무 안 지킨다.”
“그러면 우리가 질서를 잘 지킵시다, 하고 캠페인이라도 벌리자는
말이가. 그거는 우리가 안 해도 방송에서 벌써 하고 있고 국민학교 도덕책에도 나온다.”
“인사를 잘 합시다.”
“웃기고 있네. 나도 어른 같지 않은 어른한테는 인사하기 싫더라.”
“바른말 고운말을 씁시다.”
“바른 말 고운말. 그래 맞다. 바로 그거다. 그걸 가지고 하자.”
“그런데 그거는 니 말마따나 국민학교 도덕 책에도 나온다.”
“그러면 도대체 뭘 하자는 말이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 교장 선생님만 해도 전체조례 시간에
들어보면 내내 말속에 한자말을 넣어 쓴다. 또 영어 좀 배웠다는 애들은 꼭 우리말에 영어를 넣어 쓰는 애들도 있다. 그러면 우리말이 우째
되겠노. 그 나라 말과 글이 죽으면 민족도 죽는다고 국어선생님이 안
그랬나.”
“그러면 우리말을 바로 씁시다, 하면 되겠네.”
“그거다. 우리말 바로 쓰기 캠페인.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어려운 한자어 대신에 쉬운 우리말로 바꿔 써서 맑고 깨끗한 우리말을 살리자는 캠페인을 해보자.”
“그러면 이번 주까지 바로 써야 할 우리말을 몇 가지 뽑아보자.”
“그런데 유인물은 언제 나눠줘야 되겠노.”
“다음 주 토요일 오후로 하자. 이번 주까지 내용 뽑고 다음 주 중에
유인물을 만들어서 토요일에 작업하자.”
“혹시 우리가 그 일 한다고 잡혀가는 거는 아이제?”
“그걸 말이라고 하나. 우리가 대학생들처럼 유신철폐를 썼나 잡혀가게.”
‘우리 사회를 만들어 가는 푸른 머리’ 라는 뜻의 ‘청두’는 입시에 찌든 속에서도 고교시절을 재미있고 뜻깊게 보내려는 별난 아이들의 모임이었다. 주로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 모임의 주요 형식이었는데 이렇게 ‘우리말 쓰기 캠페인’ 유인물을 만들어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던 기억도 있다. 이 모임을 하는 동안 나도 서서히
변화해 갔다. 어릴 때부터 가슴속에 있었던 단어였지만 더욱 구체적인 모습을 띄며 장래 희망까지 바꿔 놓은 단어, 바로 ‘민족’이라는
두 글자가 가슴에 새겨진 것이었다.
감만동에서 동아중학교나 부산고등학교로 가려면 26번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는데, 이 버스를 타고 문현동에서 좌천동으로 나오는 교차로 위의 ‘오바 브릿지’ 라는 다리를 넘어오다 보면 수정동 산비탈에 마치 조가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무허가 판자촌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시절 대부분의 국민들이 가난했고 내가 살던 감만동도 가난한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동네였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산비탈에 즐비한 판자 집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저 가난한 사람들을 잘 살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고민 끝에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이 민족을 위해 일하는 정치 지도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차마 남들에게 말을 하진 않았지만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한 건 그런 과정을 지나면서였다.
첫 술잔을 들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인 배신환 선생님은 ‘알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원래 교무실 시간표에 영어 독해를 의미하는 Reading의 첫
글자인 ‘R’자 밑에다가 담당 교사의 성인 ‘배’자를 조그만하게
써 둔 것 즉, ‘R배’를 우리말로 ‘알배’로 읽었던 것인데, 실제 담임 선생님의 외모도 ‘돌배’와 비슷하다고 하여 그냥 ‘알배’로 통칭된 것이다. 서울대 영문과를 나온 배신환 선생님은 수업 시간 중에
멋진 시를 읊어주기도 하고 좋은 영화를 추천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부산고등학교에서는 ‘주초고사’라고 해서 월요일마다
국어, 영어, 수학 세 과목의 시험을 쳤다. 그래서 아이들은 주말을 잊고 시험 공부에 몰두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학교에서 단체
영화 관람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험에 쫓긴 아이들이 영화보러 가기를 주저하자, 배신환 선생님께서 야단을 쳤다.
“야, 이 바보 같은 놈들아, 이렇게 좋은 영화를 안보면 평생 후회할끼다. 그리고 영어 배워서 어디 쓸 거고, 이 영화에 여자 주인공으로
나오는 배우하고 펜팔이라도 한 번 해 봐야 될 것 아이가? 그 배우 주소를 내가 알고 있으니까 영화보고 필요한 사람에게는 주소 갈쳐 주께.”
담임 선생님의 강력한 추천에 이끌린 아이들은 시험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극장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해서 본 영화가 헤밍웨이 원작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였다. 그 영화의 주인공이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 이었음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리라.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영화가 스페인 내전을 다룬 세계적인 명작이라는
사실은 제대로 알 지 못한 채, 잉그리드 버그만의 영롱한 아름다움과
게리 쿠퍼와의 비극적인 사랑에 완전히 매료당하고 말았다. 월요일,
시험을 친 다음 아이들은 담임 선생님에게 잉그리드 버그만의 주소를
가르쳐 달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러자 선생님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주소는 갖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미리 알려줄 사실이
있다. 너거가 본 그 영화는 그 배우가 20대 초반에 찍은 거다. 지금 그
배우는 50이 넘은 할매 아이가. 그래도 주소가 필요한 사람 있나?”
“으으으으으…….”
담임 선생님이 이처럼 멋쟁이였기 때문에 자연히 아이들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담임은 남의 나라 말은 우선 단어를 많이 알아야 된다고 하면서 우리 반 아이들에게만 별도로 매주 단어와 숙어를 200개씩 외우는 숙제를 냈다. 이 숙제 때문에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도 쉴
틈도 없이 영어 단어 외우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친한 친구들끼리
누가 단어를 더 많이 맞추는지 내기를 걸기도 했다.
우리 반에는 ‘두원’이라고 재수를 해서 들어온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그 때 벌써 당구가 150점이나 되었고 술과 담배도 몰래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친구에게 공부하는 재미를 붙여주기 위해 단어 시험 점수를 누적해서 시험을 못 친 사람이 잘 친 친구에게 술을 사주기로 내기를 걸었다. 다소 엉뚱하기는 해도 암기력에 대해 자신감이 있었던 두원이도 흔쾌히 동의를 해서 내기가 성립되었다. 그래도 점수는 내가 높았다. 그래서 두원이가 술을 사기로 하고 증인을 섰던 몇몇
친구들과 함께 중국집으로 갔다. 은밀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은 당시로서는 중국집 뿐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독한 빼갈을 마시게 되었다. 나와 친구들이 처음으로 술을 마신다는 걸 안 두원이는 엄포를
놓았다.
“너거들, 술 처음 마시제? 그라모 내말 잘 들어야 된데이. 이 빼갈은
엄청 독한 기라. 독한 술 마시다 잘못 해서 목구멍이 막히기라도 하면
바로 간다 이 말이다. 그러니까 우째 마시노 하면, 이렇게 손으로 코를 잡아서 숨을 멈춘 다음 술잔을 입안으로 바로 톡 털어 넣어야 하는
기라. 알겠제. 니부터 한 번 해 봐라.”
친구는 빈 잔으로 시범을 보였지만 나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우정 어린 충고를 받아들였다. 친구가 시키는 대로 코를 잡고 술잔을 단 번에
입안에 털어 넣은 것이다. ‘으핵, 켁케’ 숨이 막히고 입안과 식도에서 불이 난 듯 했다. 첫 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남들 하는 건 다 해보고 싶어
대학 진학 목표를 서울대 법대로 잡고 고교 일 학년 동안은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서울 법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전국에서 100등 안에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매일 도시락을 두 개씩 싸 다니면서 방과후에도 교실에 남아 마지막 차가 오는 시간까지 공부를 했다. 어두침침한
교실 조명은 고등학교 진학 한 지 한 학기도 되기 전에 안경을 쓰도록
만들었다. 그래도 같은 반에 3년 내내 전교 1,2 등을 다투었고, 나중에
서울대 전자학과를 나와 지금은 포항공대 교수로 있는 박홍준과 같은
친구들이 있어서 그들에 뒤지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공부했다.
그러다가 2학년 올라가면서 서서히 농땡이를 부리기 시작했다. 입시제도가 바뀐 때문이었다. 이전처럼 학과별 모집을 하지 않고, 계열별로 학생을 뽑은 다음 대학에서 3학기가 지난 2학년 2학기에 학과 배정을 하는 방식으로 서울대 학생 선발 방식이 바뀐 것이다. 목표로 하고
있던 법학과는 다른 12개 학과와 함께 사회계열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일단 사회계열에 들어간 다음 3학기가 지난 뒤에 법학과로 학과 배정을 받을 수 있으면 되었다. 결국 이전에는 법학과에 가려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전국 100등 이내에 들어야 했지만, 계열별 모집에서는
일단 사회계열 모집 정원인 485등 안에만 들면 되었다. 이렇게 되니
상당히 마음이 느긋하게 되었다. 위대한 정치 지도자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다듬어 가던 나는 ‘공부만 잘하는 사람’ 보다는 ‘무엇이든
잘 하는 사람’, 또는 ‘남들이 하는 것은 다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다 보니 어른들의 시각에서 보면 일탈로 비칠 수 있는 행동도 저지르게 되었지만,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즐거운
추억이다.
나는 운동을 좋아했고 또 잘했다. 개교 기념일이면 1, 2, 3 학년 대항
축구 시합을 했는데, 항상 학년 대표 선수로 뽑혀 실력을 발휘했다.
축구뿐 아니라 야구 또한 베스트 나인에 뽑힐 정도였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즐겼던 탁구도 다시 시작했다. 주초고사를 치는 월요일
오후에는 친구들과 시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탁구장으로 달려가곤
했다. 이렇게 해서 늘어난 탁구 실력이 아마추어 수준에서는 제법이었다.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은 뭐든지 좋아했고, 3학년 때 받았던 체력검사에서는 8개 종목 중 턱걸이와 넓이뛰기를 제외한 여섯 종목 모두 만점 받을 정도로 운동신경과 체력이 좋았다.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니까 자연히 껄럴껄렁한 아이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았다. 그들과 운동으로 내기를 하기도 하고 술자리를 갖는 일도
적지 않았다. 술을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그래서 어떤 후배는 나를 학내에 있는 주먹 서클의 일원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술을 마시다 파출소에 끌려간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부산고등학교 학생이라고 하면 ‘공부나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야지. 대학 들어가거든 데모는 하지 말고’ 하는 정도의 훈계만 몇 마디하고 풀어주었기 때문에, 그런 일도 예사로 여겼다.
집안식구들한테는 독서실에서 밤샘을 한다고 하고선 해운대 등지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차가 끊겨 여인숙에서 자는 일도 있었다. 여인숙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올 때는 차비조차 없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무작정 학교 방향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서 같은 학교 학생들에게 차비를 얻어내기도 했다. 그렇게 학교에 와서는 친구들이 싸온 도시락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이런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주먹 서클의 누군가가 자기 서클에 들어
올 것을 제안 했다. 하지만 운동을 하고 술을 마시고 친구들과 어울린
것은 호연지기를 키우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기에, 이러한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