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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옷 짓는 조상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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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4 / 한승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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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이 눈에 띄는 영화마다 조상경이었다. 심심한 자연주의, 관습적인 사실주의, 명품으로 도배한 브랜드주의, 이 모두와 거리를 둔 채 개성 있는 ‘룩’을 만들고 있는 조상경은 한국영화에서는 아직 불러보지 못한 ‘코스튬 디자이너’의 크레딧에 도전하고 있다.
영화감독 박찬욱에게 물었다. 첫 번째 질문은 이러했다. “조상경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박찬욱이 답했다. “아니요. 전혀 기억 나지 않아요. 나는 어떤 옷을 입었느냐로 사람을 단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조상경에 대해 몇 가지를 물었고, 마지막 질문은 이러했다. “옷이 정말 날개입니까?” 박찬욱 감독이 답했다. “물론이죠. 스즈키 세이준(대담한 스타일을 추구한 일본의 영화감독. 대표작으로 <도쿄 방랑자> <피스톨 오페라> 등이 있다)은 ‘배우가 의상을 입고 나타났을 때에야 비로소 내 영화의 영감이 시작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공동경비구역 JSA>을 찍을 당시 스위스 장교복을 입은 이영애가 촬영장에 처음 등장했을 때 감탄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번에 <친절한 금자씨>를 찍으면서 금자 씨 원피스가 정말 좋았어요.”
사람들은 옷을 입는다. 가리기 위해서 입고, 추우면 따뜻해지라고 입고, 더우면 시원해지기 위해 입고, 대체로 습관적으로 입고, 때때로 신경 써서 입는다. 파자마와 파자마 사이 어떤 옷을 입는다. 영화 속 인물들도 옷을 입는다. 시나리오가 시키는 대로 입고, 장면이 원하는 대로 입고, 관객에게 자신을 이해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 입는다. 가끔은 벗기 위해 입는다. 앞 장면과 뒷 장면 사이 어떤 옷을 입는다. 박찬욱 감독은 한 입 가지고 두 말 하지 않았다. 사람은 오직 옷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관객은 오직 옷만으로도 캐릭터가 어떤 사람인지 단정할 수 있다. 최민식이 오대수고, 이영애가 이금자라고 가정할 수 있는 건 이러나 저러나 우선은 옷 때문이다.
복수의 전주곡, 땡땡이 원피스
2004년 12월 1일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가 촬영을 시작했다. 첫 촬영은 13년 간 청주의 한 교도소에서 복역했던 금자(이영애)가 출소해 서울역에 도착하는 장면이었다. 이영애는 긴 머리를 하고, 선글래스를 쓰고, 초록색 구두를 신고, 옥색 핸드백을 들었다. 그리고 7부 소매의 하늘거리는 물방울 무늬 원피스를 입었다. 목선이 적당히 파인 리본 칼라였고, 치마는 주름이 많이 잡혀 있었다. 금자는 13년 전 여름에 입소해 겨울에 출소했다. 당연히 유행에도 뒤쳐지고 제철 옷도 아니었다. 한 종교 단체에서 겨울 옷을 넣어줬지만 금자는 종교적인 도움을 거부하고 입고 들어간 그대로 나왔다. 입소할 때 마음 그대로 복수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졌다시피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를 잇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완결편이다. 금자 역에 캐스팅된 이영애가 영화의 95% 이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10년이 훌쩍 넘는 긴 시간과 친절한 척하지만 사실은 마녀인 금자의 이중성, 금자와 함께 수감 생활을 하는 여러 죄수들의 캐릭터를 의상으로 풀어줘야 할 부분이 많은 영화다. 박찬욱의 결론은 조상경이었다. <올드보이>와 <컷>(<쓰리, 몬스터> 중 한국편)에서 스타일이 강한 의상을 선보였던 조상경이라면 단아한 이영애를 ‘복수의 화신’으로 바꿔놓을 수 있고, 청회색의 밋밋한 수감복으로도 캐릭터마다 풍부한 뉘앙스를 살릴 것이라고 믿었다. 조상경은 여느 때처럼 동대문 원단 시장을 뒤졌고 첫날 입은 원피스를 비롯해 두 벌의 코트와 제빵복, 가내복, 일반 수감복과 모범수복 등 13벌의 금자 의상과 80벌의 여자 수감복을 만들었다. 의상은 차례차례 촬영장으로 실려 나가는 중이다. 감독은 <올드보이>와는 달리 스타일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가려고 마음먹고 있지만, 옷을 지어 내보내는 조상경은 어쩌면 이 영화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같은, 금자의 초현실적인 모험담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아니면 말고.
조상경은 옷 얘기를 그리 많이 하지 않았다. 시나리오나 캐릭터 얘기를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저는 의상이 작은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일을 쉽게 하는 편이에요. 시나리오는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거지만 의상은 시나리오에 답이 다 있어요. 내가 해줘야 하는 일이 이거고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게 의상이니까 할 뿐이지 사명감이나 자부심 같은 거 별로 없어요.” 조상경은 어쩌다가 영화 의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어쩌다가 좋은 영화를 만났고, 어쩌다가 좋은 감독을 만났고, 어쩌다가 잘나가는 의상 팀장이 돼서 일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세상에는 어쩌다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어쩌다가 지진이 나기도 하지만, 어쩌다가 일을 하지는 않는다. 영화 일은 더욱 그렇다. 어쩌다가 영화 일은 4년이나 했는데, 어쩌다가 그 분야 최고로 꼽히지는 않는다. 조상경이 어쩌다가 그렇게 말했을 뿐일 것이다.
집요함의 결정체,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술감독 류성희(<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등)는 1998년 미국 유학 중에 <정사>를 봤다. 도예과를 졸업하고 AFI(미영화연구소)에 프로덕션 디자인을 공부하러 간 류성희는 단순히 미술도 아니고, 세트도 아니고, 소품도 아니고, 의상도 아니고, 분장도 아니고, 그 모든 것을 포함해 미장센을 만드는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목표였다. <정사>에는 프로덕션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이 없었지만 디자이너 정구호가 참여한 이 영화는 그걸 하고 있었다. 미술과 세트와 소품과 의상과 분장이 혼연 일체가 되어 드라마의 굴곡을 만들어내고, 캐릭터의 정서를 끌어내고 있었다. 류성희가 하려던 게 바로 그거였다. 2년 뒤 류성희는 한국에 돌아왔다. <정사>의 경우는 <정사>만의 경우였다는 걸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한국영화는 적당히 그럴듯하고 적당히 예쁜 미술이면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2000년 디지털 장편영화 <꽃섬>의 작업을 끝낸 후 류성희는 ‘펄프 누아르’ <피도 눈물도 없이>로 본격적인 데뷔 준비를 하던 류승완 감독과 김성제 프로듀서를 만났다. 20대의 젊은 그들은 류성희가 하고자 하는 일에 동의했다. 류성희는 작업 파트너들을 찾아 나섰다. 특히 의상 파트는 기존 인력이 아닌 참신한 인재를 원했다. 학교를 중심으로 여러 사람을 추천받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무대미술과 4학년이었던 조상경도 그중 한 명이었다. 류성희는 조상경이 가져온 포트폴리오에서 감각적이고 과감한 붉은색 드레스를 보았다.
조상경의 데뷔작 <피도 눈물도 없이>는 주요 인물만 13명이었다. 단역까지 수십 명이 돈가방 하나를 두고 배배 꼬이는 영화였다. 다들 밑바닥 인생이지만 굉장히 스타일리시한 밑바닥이었다. 영화의 배경은 한여름 밤이었지만 색상은 화려하고 재질은 천차만별이었다. 양아치 독불(정재영)은 날렵한 슈트에 스니커를 신었고 더워도 가죽 재킷을 입었다. 수진(전도연)은 어깨를 드러낸 블라우스에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었다. 독불에게 자주 얻어 터졌기 때문에 밤에도 크고 짙은 선글라스를 썼다. 경선(이혜영)은 돈에 쪼들리는 택시 기사지만 멋을 낸 유니폼에 부츠를 신었다. 악랄한 보스 KGB 역의 신구에겐 크기와 형태가 다른 체크무늬 옷을 입혔다. 어르신이 한마디했다. “아니 모자도 체크, 셔츠도 체크, 바지까지 체크를 입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세상에는 없지만 영화에는 있다는 것이 조상경의 생각이었다. 영화는 영화라는 것은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조상경의 생각이다. 두 번째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을 제외하면 조상경은 <올드보이> <범죄의 재구성> <컷> <얼굴없는 미녀> 등 누아르나 공포같이 스타일이 강한 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개봉을 앞둔 <달콤한 인생>이나 촬영 중인 <친절한 금자씨>도 그런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질 않는다. 화면에 공을 들인 웰메이드 장르 영화의 도래는 조상경의 표현주의적인 의상을 과감하게 흡수했다.
끌리면 오든지 말든지, 겨울 바다
조상경은 연극원에 입학하기 전 미대를 다녔다.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동양화, 그것도 수묵화가 전공이었다. 먹을 다루는 게 잘 맞았다고 한다. 디자인도 아니고 순수 미술을, 조소도 아니고 회화를, 게다가 수묵화를 전공했던 조상경이 화려한 영화 의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될 줄은 그 자신도 몰랐다. 연극원 생활이 사람을 바꿔 놓은 것도 아니었다. 조상경은 무대미술과 1학년 때 휴학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그리고 혼자 노는 게 습관이었는데 무대 미술은 공동 작업이 필수였고 그나마 1학년 때는 '노가다'에 가까운 커리큘럼이 포진해 있었다. 혼자 대학로를 배회하다 연극을 봤고, 혼자 종로를 배회하다 코아아트홀 같은 데서 영화를 봤다. 혼자 공원에서 책 읽고, 혼자 만화방에 가고, 혼자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리는 게 천성이었지만 잡다하게 읽은 것도 많아서 휴학 시절에는 희곡을 각색하는 일, 사보에 자유 기고가로 활동하는 일, 심지어 가요에 노랫말을 다는 작사 일까지 했다. 선생님과의 면담 끝에 연극원에 복학했고 이때부터 무대 미술보다 연출이나 의상 작업을 많이 했다. 그 다음은 앞서 말했다시피 4학년 때 류성희 미술감독에게 발탁됐다는 것이고, 앞서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자신이 연출한 연극에 배우로 출연하게 된 3년 연하의 선배와 졸업 후 결혼했다는 것이다.
<컷>에서 영화감독 류지호로 출연한 이병헌은 조상경과 처음 작업을 하게 됐다. <올드보이> 제작진이 다시 뭉친 <컷>은 다들 친한 사이라 현장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새로 합류한 사람은 이병헌이었는데 촬영장에는 이방인처럼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조상경이었다. 장난기가 많은 이병헌은 별명을 붙였다. ‘겨울 바다’. 스탭들이 옳거니 하고 맞장구를 쳤다. “저는 사람들 많으면 얘기를 거의 안 해요. 작품도 편협하고, 인간관계도 편협하고. 촬영장에선 배우 옆에 붙어 있기는 한데 도통 정체를 알 수 없으니까 매니저인 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좋아요.” 무릇 영화 의상 팀장이란 ‘여름 바다’같아야 한다. 감정이 예민한 배우들과 잘 지내야 하고, 자존심이 강한 감독들과도 잘 지내야 하고, PPL을 많이 따려면 업체 사람들과도 잘 지내야 한다. 그래서 조상경은 영화 일하기가 쉽지 만은 않았다. “주연부터 단역까지 의상은 제가 다합니다.” “사극에는 돈 쓰면서 현대극은 왜 협찬으로 때우려고 하죠?” “감독님이 속옷까지 지정하실 거면 직접 하세요.” 겨울 바다는 종종 찬바람 쌩쌩 부는 소리를 냈다.
<달콤한 인생>을 준비하면서 조상경은 남자 모델이라면 누구나 무대에 서보고 싶어하는 모 남성복 디자이너를 찾아갔다. <달콤한 인생>에는 줄잡아 50명의 남자들이 나오는데 남성복, 특히 슈트에 자신이 없어 의상 슈퍼바이저로 자문을 구할 참이었다. 그 디자이너는 주조연 배우만 커버하겠다고 했고, 자기 이름을 내걸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대로 돌아왔다. 신사동에서 남자 옷만 30년 만든 양복쟁이에게 갔다. 주인공 선우 역의 이병헌 패턴 뜨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 선우파, 강사장(김영철)파, 필리핀 갱, 러시아 갱, 회장단 등 어두운 인생을 사는 남자들을 위해 디테일에 변주를 준 어두운 옷들을 뽑아냈다. 백 사장 역의 황정민에겐 신체의 핸디캡인 ‘오다리’를 살려 팬츠를 타이트하게 입혔다. 굽 높은 신발까지 신기니 황정민이 걷는 폼새가 <갱스 오브 뉴욕>의 대니엘 데이 루이스같았다. 조상경은 아주 흡족했다. “배우가 걸음걸이까지 의상에 맞게 들어오니까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이젠 누굴 만날까?
조상경을 발탁했으며 <피도 눈물도 없이> <올드보이> <컷> <달콤한 인생> 등 네 편의 영화에서 함께 작업한 류성희 미술감독은 조상경의 장점을 "캐릭터를 발전시키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연극으로 훈련이 많이 돼서 그런지 캐릭터를 잘 잡아요. 상경 씨를 뽑은 건 다른 친구들보다 영화를 잡다하게 많이 봐서 열려 있다는 거였는데 앞으로는 스타일보다는 드라마가 풍부한 작품도 많이 했으면 해요.” 요즘 조상경은 일본 드라마를 챙겨서 본다. 유치하면서도 무시하고 싶은 감정까지 건드리는 다양한 캐릭터들 때문이다. <친절한 금자씨>같이 인물 많은 영화를 할 때면 톡톡히 도움을 받는 것 같다. 청담동 패션 거리도 자주 간다. 트렌드를 모르면 트렌드를 피해갈 수도 없다. 까딱하다간 영화 만들어서 옷 장사 좋은 일만 시키게 된다. “영화 의상이 배우 옷 입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로얄 타넨바움>에서 기네스 펠트로가 줄창 라코스테 옷만 입고 나오는데 분명 감독과 의상이 캐릭터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해요. 내가 하는 일이 결국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거라고 믿는데 현실적으로 100% 발휘할 수 없으니까 일이 성에 안 찰 때가 많아요. 역시 영화는 감독 거야, 난 내가 보고 싶은 영화에 동참하는 거로 만족해야지, 그렇게 자위하죠. 그런데 한 감독님하고 여러 편 작업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여지가 점점 커지고 영화 의상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서 다행이에요.”
요즘 조상경은 마음이 한가하다. <범죄의 재구성> 막바지 촬영을 하면서, <컷> <얼굴없는 미녀> <달콤한 인생> <친절한 금자씨>까지 한 해 동안 만날 캐릭터들이 줄줄이 예약돼 있던 지난 해 1월과 비교해, <친절한 금자씨> 이후 결정된 차기작이 없는 요사이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날 기대에 부풀어 있다. 좀 밝고 어린 쪽이 땡긴다. 용기 있는 자는, 조상경을 훔쳐라.
사진 김춘호 기자
조상경의 의상 코멘터리
<피도 눈물도 없이>(2001)
<록스타 앤 스모킹 배럴스>나 <스내치>같은 영화를 좋아해서 취향에 잘 맞았다. 그런 영화를 참조하면서 인물들의 관계를 공식으로 세우고 의상의 색과 재질을 대입시켰다. 조직 폭력배를 한번도 못 봐서 이태원 등을 다니며 현장 취재를 했지만 작업에서는 리얼리티 철저히 무시했다. 전체적인 컨셉은 ‘한여름 밤, 밑바닥 인생들의 끈적임’이었다. 처절한 느낌이 많이 나도록 신경 썼는데 작업하면서 나도 많이 힘들었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2003)
에로영화를 표방했지만 보통 여성 관객들도 공감할 수 있는 일상적인 얘기여야 했다. 주연배우인 김서형, 김성수의 체형이 서구적이어서 일부러 야하지 않은 평범한 속옷을 많이 썼다. 이 영화에서는 ‘섹스 코드’에 대해 많이 배웠다. 봉만대 감독님은 찢어진 청바지나 진동둘레가 넓은 남자 러닝을 입은 여자가 망사스타킹 신은 여자보다 더 야하다고 했다. 그런 접근을 나중에 많이 써먹게 됐다.
<올드보이>(2003)
시나리오에 옷이 보여서 의외로 쉽게 접근했다. 단, 시나리오에는 이우진(유지태)이 구치를 입었다고 써 있는데 구치가 협찬을 안 해줬다. 결국 이우진 의상은 듀퐁 라벨을 붙인 제작 옷으로 갔다. 미도(강혜정)는 두 남자에 가려 캐릭터가 불분명했는데 의상이나 분장에서 발전을 많이 시켰다. 이제까지 만든 캐릭터 중 가장 마음에 든다. 어릴 적 미도 사진에 내 딸이 나와 개인적으로 추억이 된 작품이다.
<범죄의 재구성>(2004)
주인공들이 항상 변신에 능한 사기꾼이라 캐릭터의 일관성보다는 상황에 맞게 갔다. 박신양이 창호와 창혁 1인 2역을 했는데 사기꾼 창혁은 겉멋 들린 애로 갔고, 모범생 창호는 셔츠 넣어 입고 바지도 짧게 입혔다. 인경(염정아)은 첫 등장에서 찢어진 치마에 모피 숄을 두르고 선글라스에 장갑까지 끼고 성장으로 나온다. 최동훈 감독이 인경은 무조건 섹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모든 감독들이 그걸 요구한다.
<얼굴없는 미녀>(2004)
인물은 적지만 의상은 많이 썼다. 지수(김혜수) 이상에 총 100 피스가 들어갔고 33번 바꿔 입었다. 잠옷과 코트, 빨간 원피스 등 포인트 장면 의상만 제작했다. 배우 소장품과 협찬이 80%나 됐다. 감독, 배우와 의상에 대한 컨셉이 달라서 많이 부딪힌 영화였지만 결국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우기면 안 된다는 걸 배웠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석원(김태우)의 영화다. 그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에 지수만 화려하게 부각돼야 하는 것이다.
<컷>(2004)
연극적인 성격이 강한 단편영화라 세트와 긴밀히 맞춰갔다. 내가 아는 감독 중에는 류지호(이병헌)처럼 벨벳 재킷을 입는 사람은 없지만 집이 이 정도로 잘살면 감독 스타일이 화려해도 되겠다 싶었다. 너무 심하지 않게 하의만 청바지를 입혔다. 최미란(강혜정)은 끈으로 묶였을 때 아름답고 처연해 보여야 했다. 부드러운 소재를 사용해서 끈 사이로 올록볼록 옷감이 튀어나오록 했다.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가장 기능적인 의상이었다.
<달콤한 인생>(2005)
남자들이 떼로 나오는 영화다. 한 성별이 과도하게 많을 때 다 살리려고 하면 다 죽는다. 색보다는 소품으로 변주를 주었다. 기존 깡패영화와는 달리 세련된 도시 누아르를 표방하는 작품이어서 고급스러운 의상을 많이 썼다. 강 사장(김영철)과 백 사장(황정민)의 슈트는 원단만 시중가 3백만 원짜리 영국제다. 거의 유일한 여자 희수(신민아)는 뻔한 ‘팜므 파탈’ 이미지를 피하기 위해 스쿨 룩을 택했다.
<친절한 금자씨>(2005)
이금자(이영애) 땡땡이 원피스는 직접 제작했다. 도트가 규칙적이면 자칫 세련돼 보일 수 있고, 크기나 색깔이 도드라지면 팝아트풍으로 비쳐질 수 있는데 빨강과 파랑 도트가 불규칙적으로 흘러 제법 균형감이 없어 보였다. 수감복은 청회색의 뻣뻣한 느낌이 싫어 물 빠진 데님 천을 사용했다. 금자가 모범수가 돼서 입는 수감복은 원래 베이지인데 화사한 느낌을 주려고 노랑을 썼다. 노랑이 조명을 잘 안 받아 주황을 쓰고 싶었지만 박찬욱 감독이 미국영화 따라하는 것 같아 싫다고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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