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경험의 세계
자연이야말로 시의 보고요 이미지의 천국이다. 아놀드노인비는 자연이 아무리 아름다원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면 자연의 주인이 인간이며 역사의 주인고도 인간이라는 뜻이다. 역사학과 역사철학은 다른 분야이지만 토인비는 역사철학의 경지까지 이른 대 역사학자였다. 우리는 자연의 존재의 오묘함과 자연법칙이 지혜를 발견함이 얼마나 흥미 있고 유익하며 경이로운가를 알고 늘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 어쩌면 문명은 공중누각이요 자연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문명의 이상적인 본상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넓게는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이라고 보아 자연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사유는 우리들을 지치지 않게 한다. 자연에 대해 경견하게 생각할수록 우리는 자연의 혜택, 자연이 주는 진리와 지혜를 캐내게 된다.
그리하여 시에 있어서도 자연은 가장 광범한 소재가 되는 것이다. 시에 있어서 자연은 토인비의 언급처럼 인간과의 관계에서 등장하게 되고 나의 경우 자연은 진리와 지혜와 서정성의 이미지로서 시에 등장하게 된다. 이때 진리, 지혜, 서정은 따로 따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한편의 시 속에 하나의 보편 진리 속에 그것을 발견하는 지혜와 함께 재 삶의 고통과 슬픔과 기쁨 속에 함께 한다.
상황과 보편적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연에 비친 인간과 문명의 모습을 바라보며 비판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저리 애 닮던 어머님의 사랑
당신의 大地를 가득 메우고
내 몸뚱이에 모질게 남겨 논 날개
날아야지
죽지 상해 헤어진다 해도
날아야지...
이 광명한 나날 빛이 오는 저 환상의 宇宙를 날으자.
시간 어디 끝나는 날 있을거냐
사랑 어디 머물지 않을 곳 있을거냐
-( 群鳥 . 3 )에서 아직 우주전체를 우리의 자연이라고 부르르 수는 없으나 그러나 우주는 넓은 의미의 인간의 자연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확대된 자연 현상 속에 나의 의식도 확대해서 자연과 나를 보고자 했다. 여기서 상징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내 생명과 존재의 문제이다. 우주와 생명은 빛과 삶의 이미지를 내게 던져주고 있다. 어머님에 의해 지상에 던져진 실존적 존재인 나는 빛과 함께 날으며 사랑 곧 삶의 창조하는 인류의 이미지를 떠 올리려고 하였다.
이때 우주는 미지의 세계, 나의 지식영역 밖의 것이기 때문에 좀 신비적인 색채와 환상적 분위기를 떠 올려 동경의 대상이며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서 우리의 자연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눈,
눈,
눈이 내리는 저 하늘
관념의 강
시간의 건너편에서
새들은 날아온다.
.............................
저 하늘
인식의 도래지
시간의 건너편에서
새들은 눈발이 되고
구름이 되거
빛발이 되어
온 누리를 날고 있다. - ( 群鳥 . 10 ) 1. 3연 _
여기서는 자연현상 으로서 눈이 , 인식의 확대화로서, 날으는 새의 이미지로 구름에서 내리지만 눈이 오는 허황한 공중은 하늘이라는 관념어가 되어 우리의 인식 안에 들어오고 <시간의 건너편에서 새들은 날아온다>로서 우리의 현실 안으로 잡아들인 것이다. 인식의 도래지로서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다시 인간 세상에 내리며 여러 가지로 변신한다. 나는<나의 체험적 이미지론>에서 이를 <변신하는 절대자의 이미지라고 언급한바 있다. 지상과 하늘 사이에 인간이 존재하고 <공간 / 바람 / 구름 / 눈발 >등 자연현상이 우리의 인식을 일깨우며 그러한 개별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서로 연결시키므로써 만들어진 이미지군, 이것이
「군조. 10」이라는 한편의 시가 된 것이다.
이렇게 자연현상은 모든 생명체의 섭생을 관리하는 밭이듯이 내 시의 이미지들의 재료이면서 동시에 그 용광로이다.
b. 삶의 현장
인간과 뭇 생명의 삶의 현장은 시의 연옥이다. 인간이 없는 자연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인간의 삶이 없는 곳에 시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인 나와 내 삶에 대한 자각은 처음에는 자연현상을 인지하고 부터였다. 인간은 자연의 경이로움으로부터 점점 자기 자신의 파악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이 분야의 시는 환경과 자아의 문제로서 이미저리(한편의 시가 완성되는데 동원된 이미지의 무리)의 폭이 결정된다.
가흥리 소한은 유독 춥다
북풍은 강얼음 타고 더 세게 차겁게 문풍지를 울리고
아내와 아이들은 아랫목에 새둥지를 친다.
그러나 북풍의 진심은 모른다
북풍의 진심이 참된 사랑인지 우린 모른다.
따사한 빛발만큼 큰 사랑임을 모르고 달달 떨기만 한다
돌담아래 김칫독이 맛나게 익어 가는걸
젓갈김치 동치미 무우짠지 익어 가는걸
그렇게 우리 살림이 단단해 지는걸
그렇게 우리 정(情)이 깊어 가는걸
북풍은 그걸 모른다고 밤중에는 더욱 요란스레 고함치는 바람에
나는 늘상 감기에 절절매고
아이들 손발이 꽁꽁얼고
아내는 밤새 탄불 걱정이다. -<소한일기>전문-
소한이라는 추위 속에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1970년대 西川강변에 살던 우리집의 모습이다. 방바닥은 미지근하고 위풍은 심해서 귀가 시릴 지경에다 연탄가스는 밤마다 우리 식구들의 생명을 위협했고 나도 서너 번 가스에 혼이 났다.
소백산을 넘어온 세찬 북풍 속에서 살아 남아야하는 식구들의 삶은 피어나는 생존의 투쟁이지만 이것은 이 시에서 삶의 존엄으로 승화시켜보려고 하였다. 그렇게 될 때 생의 비극의 극복은 가능하였다. 이 시에 동원된 이미지들은 < 가흥리소한 / 북풍 >그리고 식구들과 우리집 살림살이다.
< 소한 / 북풍 / 강얼음 / 문풍지>가 떠 올리는 심상은 추운 겨울이고 이는 우리 식구들의 곤경이다. 이러한 곤경의 모습은 <아랫목 / 새둥지 / 달달떨기 / 감기 >등의 이미지들이 직감의 작용에 따라 적절히 배치되었다. 다음은 < 북풍의 진심 / 따사한 빛발 / 큰사랑 / 김칫독 / 살림이 단단해지는 / 우리 情이 깊어가는 >등의 구체적 이미지들로서 역경을 극복하려는 우리 가족의 의지작용을 표출하고 있다. 결국 북풍에 대한 기존관념을 떨쳐버리고 <북풍의 진심은 / 큰사랑 >이라는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여기에 이 시의 포인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보강하면서 <김치독 / 살림 / 우리 情/ >등의 이미지군이 배치되고 인습과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새로운 지혜와 진실에 도달 하므로서 나의 역경은 극복되는 것이다.
종장
1. 감성의 작용
나는 소위 문명답사라 할까 방학 때마다 상경하여 서울의 변모를 고루고루 살펴보곤 한다. 종로나 광화문의 서점가에 들러 국내외 신간 서적들을 살펴보고 개봉극장가에 들러 영화는 물론 극장 안팎을 읽어보고 명동 거리를 걸어보고 백화점과 유명 쇼핑센타 도 답사하고 뒷골목 주점에 들러 보고 내가 다니던 대학에 들려 노 교수님을 만나 뵙고 요즘 대학생들의 모습도 바라본다 .학문 문화 예술 유행 등 문명에 대한 정보와 변화감각을 나름대로 느끼고 나면 어서 탈피하고픈 서울이다. 금년에도 폭설이 내린 소한추위에도 불구하고 철새처럼 서울을 답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심신이 피로하고 권태로운 상태에서 가까스로 열차에 올랐다. 영주까지 지루한 시간을 가늠하면서 눈을 감는다. 방금 떠나 온 서울의 풍물이 아른거린다. 일천만 인구의 서울 문득 나이든 여성들까지 입은 청바지가 떠오른다. 이것은 커다란 어떤 변혁이다. 무슨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가. 미 해병대가 입던 질긴 바지. 전쟁의 대명사이던 청바지. 그 청바지를 입은 여인에게서 성적 매력만이 강조되고 있는 아이러니가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청바지 문명속에
해작해작 여자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명동거리 쇼윈도 앞에서
여자들의 알뜰한 지갑이 무너지고 있었다.
번쩍거리는 네온 불빛 아래서
부나비는 자유를 노래하고
이브는 뱀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여자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개봉극장 선전그림과 사진 앞에서
그미의 견고한 성(城)이 무너지고 있었다.
사각(四角)으로 굳힌 윤리의 자물쇠가
탄력 있는 청바지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해작해작 열리고 있었다.
무너지는 여자들 속으로
아담이 깊이깊이 추락하고 있었다.
-<군 조.8>전문
이 시는 <청바지/ 여자/지갑/부나비/자유이브/뱀/춤>의 구체어 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여성들의 해방감을 말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통윤리의 해체를 부르짖고 있다. 여기서 <해방감> <전통윤리의 해체>같은 지적은 위의 이미지들이 연합하여 우리의 영감 속에 떠올린 직감력 혹은 상상력에 의한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나의 상상력에 위의 이미지들을 선택하여 유기적인 관계로 조직하고 <여성의 해방감><전통윤리의 해체>라는 형상화 된 이미져리를 획득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의 조직력(이미지조립)은 상상력과 더불어 직감적 활동의 결과다. 제2연에 가서는 청바지 문명 속의 제 이미지들이 한층 더 강화된 의미를 가지게된다. 개봉극장의 선전그림과 영화 속의 선정적인 사진들을 떳떳이 내 걸고 있는 세태 속에 <그미의 견고한 성(城)/사각(四角)으로 굳힌 윤리의 자물쇠>는 여자의 성 즉 정조관념을 말하며 그것이 어우동의 외설적인 모습을 바라보며 탄력있는 청바지 속에서 해작해작 열리고 있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제3연에는 상대적으로 남자의 위신, 가치(여성보다 우위라는 가치, 혹은 가장으로서의 가치)등이 허물어지는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이 시는 전체적으로 청바지 문명속에 여자의 성의 해방 풍조가 일면서 사회 전체가 윤리성의 타락으로 물들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시 한 편의 통일성에 참여한 이미지들의 기계적인 조립은 전술한바 순전히 시인의 직감의 활동에 의해 짜여지는 것이지 조직적인 계획이나 계산에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한편의 시를 구조적으로 분석하여 보면 시에 대한 설계도를 그려낼 수 있을지 모른다.
2. 드레씽
예술에 있어서 <상상력은 일반적으로 이미지를 낳는 정신능력>으로 정의를 내린 이도 있으나 상상력과 직감만으로는 시에 있어서 언어의 예술성을 획득할 수 없다.
예술에 있어서는 이들과 더불어 정감 혹은 감흥의 획득은 절대로 중요하다. 현장에서 얻어지는 정감의 색조가 시에 가미되어야 한다. 섹스피어가 말한 <the Mind'seye>를 정감이라고 보아도 좋다. 정감의 색조는 감성적 색조와 이지적 색조로 나타나며 어떤 시는 전자가 혹은 후자가 강하기도 하고 한편의 시에 이 두 가지 색조가 동시에 나타나 대립, 균형, 조화를 이루며 각각 독특한 맛을 풍겨주는 것이다.
눈 내리는 남한강에 고독이 쌓이고 있다.
빙하기처럼 고요한 강
남극대륙처럼 얼어붙은 강
히말라야 폭풍설처럼
훼-ㅇ한 소한의 회랑을 곤두박질하는 눈보라 속에
서울을 견디지 못하는 나처럼
강촌마을 굴뚝연기는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고
눈 덮히는 남한강에 고독이 쌓이고 있다.
-<눈 내리는 남한강 1>-전문
어느 듯 기차는 폭설이 내리는 남한강을 지난다. 피곤한 서울을 떠나는 나의 심금에 남아있는 서울의 기억들이 한 가닥 아쉬운 이탈의 미련을 가슴에 새기는데 눈보라 휘날리는 남한강은 내 가슴인 듯 서울에서의 내 기억들은 하나하나 차디찬 아픔이 된다. 그러면서 나는 쓸쓸해진다. 왁자지껄하는 열차 속에서 외로워진다.일천만 인구의 구름속에서 떨어져 나가 제각기 흩어지는 눈송이처럼 외로운 내가 된다. 내 고독이 눈발이 되어 몸부림치며 남한강에 쌓이고 있다. 바로 여기에 나의 정감이 <남한강/눈/굴뚝연기의 이미지들을 받아들인 것이다.그리고<소한/히말라야 폭풍설/빙하기/남극대륙/으로 한층 강화되어/고독이라는 관념은 내 감흥의 크기만큼 확대된다. 초장에 논술한바 나에게 있어서는 신비주의나 전설 신화 등이 주제가 된 시에서는 지식에다가 환상적인 상상력이 작용하는 반면 삶의 현장에서는 정감이 이미지를 채집하고 조립하는 큰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