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목요일이 벌써 성 목요일입니다. 성주간 보내시면서 십자가의 성.바오로의 중심영성이었던 신비적 죽음을 묵상해보시지요. 저희 고난회 수도자들은 성주간 동안 관구연례피정을 하겠습니다. 기도중에 기억해주시구요... 혹시 첨부화일이 안 열리는 분들 위해서 본문을 카피했습니다. 첨부화일로 보내는것은 십자가의 성.바오로 성인의 신비적 죽음을 이해하기 위한 Background 격인 문서들입니다. 하이데거의 기념사는 관상기도의 필요성에 대한 글이고 '들길'은 철학자답지 않게 관상기도의 분위기를 잘 전해주는 글입니다.
희랍 러시아 정교의 영성을 집대성한 philokalia 중 마음에 대한 소논문인 칼리스토웨어 주교의 글들은 성.바오로가 말하는 바 마음의 지성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제일 중요한 배경은 물론 요한네스 타울러 입니다. 영혼속에 탄생하시는 하느님을 설파했던 타울러의 저작과 만난뒤 십자가의 성.바오로는 자신의 신비적 죽음- 거룩한 탄생이란 영성적원리를 성숙시켰으니까요! 무리하지 마시고 시간되는데로만 읽고 즐기시기 바랍니다^0^ 그럼 의미있는 성주간과 부활 맞으시기 바랍니다...
신비적 죽음 - (Morte mistica - divina nativita)
신비적 죽음-거룩한 탄생이란 상징적 표현은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생애를 지배했던 영성 신학적 사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이 이중의 개념은 성인의 영적지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었고 또한 성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했는지, 신앙의 실천방식을 보여준다. 주로 성인이 썼던 편지를 통해 거룩한 탄생과 신비적 죽음이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살펴보자.
다 알다시피 “신비적 죽음 - 거룩한 탄생” 이란 한 쌍의 개념은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창안해낸 것이 아니다. 그것의 근거는 신약성서와 영성신학의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이 개념을 발전시킨 과정
명료한 표현으로 신비적 죽음과 거룩한 탄생이란 원리가 창립자의 편지에 나타난 것은 바오로의 생애에서 비교적 늦은 시기인 1748년(54세) 이후이다. 이 시기는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타울러의 사상을 자신의 가르침에 받아 들였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 영성적 원리와 유사한 원칙들은 그의 삶의 초창기에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그의 일기 중 몇 부분에는 이 영적원리와 일치하는 글이 나타난다. 1720년 11월 25일자 그의 영적일기에는 “마치 나의 마음은 땅에 묻힌 것 같이 기도할 마음이 전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이런 유혹(메마름) 에 만족한다”. 12월 10-13일의 일기에는 “...하느님께서 거룩한 기도를 통해 당신과의 깊은 유대로 이끌고자 하는 영혼은 기도 중에 이런 고통(감각적인 위로를 빼앗기는)을 통과해야만 한다. 12월 31일의 일기에는 “나는 메마르고 혼란스럽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내적인 평화를 즐기고 있다...” 이런 표현과 또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체계적인 설명의 배경에는 죽고-사는 이중성이 있다. 바오로는 그것을 자신의 일기 서문에서 “정화의 과정” 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1720년에 쓴 최초의 회칙서문에서도 우리는 성인이 인생의 후반기에 신비적 죽음이란 말과 연관시켜 썼던 “모든 피조물로 부터의 이탈” 이란 말을 만나게 된다. 실제로 이것은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그의 인생의 초창기부터 이 ‘이탈’이 얼마나 건전한 영성에 중요한 것인지 확실히 자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730년 이전에 쓰인 편지를 신비적 죽음- 거룩한 탄생이란 원리에 비추어 연구해보면 이 원리를 예시하는 사상이나 영성 신학적으로 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씨앗들을 많이 볼 수 있다.
1726년 가에타 근처에서 아직 은수자로 살 때 쓰인 편지에서, 창립자는 “알렐루야”를 천상의 회중과 함께 부르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온당하게 알렐루야를 부르기 위해서는 옛 자아가 벗겨지고 새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를 입어야 한다”.
틀림없이 성인이 고른 “옛” 과 “새로운”이란 성서적 이미지는 그 뿌리를 골로사이서의 “죽고- 사는” 양극성(골로사이 3:0-10) 에 두고 있다. 골로사이서와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편지에서 공통으로 쓰이는 이 은유의 보다 광범위한 의미는 윤리적인 맥락의 것으로 그 목표는 그리스도의 덕을 따르는데 있다.
죽음과 삶이라는 안티테제는 1730년 11월경에 창립자가 이전의 고백신부였던 뚜치나르디에게 그의 새로운 수도회 내에 있는 악의에 대해 말하고 있는 편지에서도 보인다. 바오로는 낙담하지 않고 그것을 견디며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깊게 하려고 한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도록 하느님의 일은 언제나 공격을 받는다. 말하자면 일이 거의 다 망쳐진 것 같이 보일 때 전혀 예상치 못하게 들어 높여 지는 것이다. 하느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 하느님은 지옥에까지 낮추시고 다시 끌어 올리신다(사무엘 상 2:6).”
이것을 보면 창립자는 죽고 사는 것을 단순히 생물학적인 차원에서만 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느님이 삶과 죽음을 관장할 수 있는 힘을 가졌을 뿐 아니라 전능한 창조주요 우주의 보존자로 이해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삶과 죽음이라는 안티테제는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초창기 영적지도에서 그리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지만, 그 개념은 덕행의 실천을 촉구한다든가 그가 지도하는 사람을 도와줄 때 고통이나 역경을 하느님을 신뢰함으로서 극복하라고 가르치는데서 보인다. 바오로는 “신비적 죽음-거룩한 탄생” 이란 온전한 개념을 쓰기 이전의 과정으로서 “죽음 -새로운 삶” 이란 말을 쓰기도 했다. 1734년에 아네스 그라찌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 내 딸아! 자신의 즐거움, 자신의 이해를 벗어버린 영혼은 얼마나 복된가! 그것은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다. 만약에 네가 모든 만족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찾는다면, 하느님 아닌 모든 것에 대해 구세주의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네게 가르치실 것이다”.
그 당시 바오로는 이미 죽음의 이중적인 차원에 주목했던 것이다: 먼저 에고(자기 자신)를 그 최종 목표로 갖는 경향이나 열망에 대해 죽는 것. 둘째 사람을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외적인 것에 대한 관심에 죽는 것. 그는 오로지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십자가로 부터만 충만한 생명과 기쁨, 구원을 찾았다.
이와 같이 바오로는 타울러와 만나기 이전부터 “죽음- 삶” 이란 양극적인 개념을 잘 알았고 적극적으로 활용했었지만, 그의 편지에서 볼 수 있듯이 바오로는 라인 신비학파를 읽음으로서 좀 더 체계적으로 그 사상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1748년경, 54세).
의심할 바 없이 “영혼 속에 탄생하는 하느님” 은 타울러의 중심주제중 하나일뿐더러 아마도 그의 영성적인 가르침 중에서도 중심주제일 것이다. 타울러는 “신비적 죽음” 이란 말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개념적으로 그에 가까운 말은 했었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도 신비적 죽음이란 말을 고안하지 않았다; 그는 이 말을 영적독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아마도 우리는 타울러의 은유인 “신비적 탄생” 이 창립자에게 영감을 주어 “신비적 죽음”을 강조하여 말하게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창립자의 신비적 죽음에 대한 가르침은 타울러의 영적인 가르침과 만남으로서 맺게 된 열매다.
1748년 이후에 쓰인 편지에서 창립자는 비교적 자주 “신비적 죽음” 과 “육화된 말씀 속에서 거듭나는 영혼”을 언급하는데, 창립자가 많은 영적-종교적 체험을 한 인생의 후반기에선 영적지도자의 관점에서 “morte mistica- divina nativita”(신비적 죽음- 거룩한 탄생)를 논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창립자의 인생이 저물어가던 시기에 동료 수도자인 토마스 신부(이전의 토마스 포시)에게 썼던 편지를 보자. 이 편지는 75세의 나이라는 원숙한 관점에서 쓰였으므로 이 원리의 해석을 보다 명료하게 해주며, 편지를 쓰게 된 구체적인 사연을 보면 그 중요성이 더해진다. 성인은 1768년 성탄 직전에 57세로 새로 서품을 받은 토마스 신부에게 축하의 편지를 썼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토마스 포시가 평신도일 때를 포함하여 35년간 알고 지낸 사이이다. 그 편지를 보자.
“매일 죽어라 - 너는 이미 죽었고 네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어있다” (코린토 전서 15:31, 골로사이 3:3)”. 첫 문장에서 언급되는 “하느님의 친구들” 이란 말은 확실히 타울러를 상기시킨다. 코린토 전서와 콜로사이서의 복합인용은 성인의 신비적 가르침이 성서적, 신학적, 그리스도론적인 지향 안에 있음을 알게 한다. 마지막으로 논의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 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 이다.
“성체성사의 거행을 통하여 형제는 새로운 신적인 생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듭나게 될 것임을 나는 확신합니다. 형제가 더욱 더 매일 그리스도 안에 신비적으로 죽게 되기를 나는 진정 바랍니다; 마음속을 오가는 그 모든 나비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김으로서, 그 모든 것들을 신성의 심연으로 사라지게 하시오(골로사이 3:3).”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것을 언급한걸 보면 창립자가 성사의 신비를 실존적으로 살았을 뿐 아니라 그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도 알 수 있다. 또한 신비적 죽음이란 말에 쓰인 신비적이란 구절이 성사의 신비에 쓰였던 말과 같은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내면성의 중요성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영을 다른 방향으로 흐트러뜨리게 하려는 시도를 말할 때 나비가 날아다닌다는 은유를 쓰는데, 이것은 신비적 죽음과 올바른 내면화를 동일시하는 것이며 새로운 차원을 이끌어 들이는 것이다. 또한 모든 피조물로 부터의 이탈이란 표현을 쓸 때나 하느님 아닌 모든 것에 죽어야 할 필요성을 언급할 때도 그 의미는 좌절이라든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라리 바오로에게 이 “죽음” 의 의미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자리 잡을 때만 타당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하느님과 더 친밀해지는 것. 이것이 “신비적 죽음”이 지향하는 목적이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신비적 죽음을 말할 때 그 실존적인 심각성이 결여된 개념으로 단지 수덕생활의 전문적인 용어로 썼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창립자가 이 개념을 그 온전한 실존적인 깊이를 갖고 이해했음은 다음의 편지글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여러해 전 나폴리 지역에서 온 병들고 가난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신부님 들어보세요. 나는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물었다 ‘무엇을 생각하는데?’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언제나 나의 죽음을 생각 한답니다’ 내가 대답하기를 ‘참 좋은 일이다’ 그리고는 다른 유익한 충고도 해주었다.”
이 편지를 쓸 때 창립자의 나이는 세상에서의 일을 마무리 하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음을 감안한다면, 신비적 죽음이란 말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실제로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신비적 죽음을 이야기하고 그들이 “순수한 사랑 속에 신비적으로 죽기를” 바랐던 것을 보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다시 1768년 동료 수도자요 친구였던 토마스 포시에게 쓴 편지를 보자.
“친애하는 토마스, 언제나 신비적 죽음을 생각하시오. 누구나 신비적으로 죽은 이는 하느님과 같은 생명을 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그는 위대하고 선하신 하느님 외에는 아무런 것도 원하지 않고 모든 다른 생각을 제쳐놓고 심지어는 좋은 생각도, 제쳐두고 하느님 한분만 남겨둔다오.”
아마도 이 말은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고양된 듯이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을 심리적 관점에서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 문자 그대로 이행되어야 한다면 토마스는 완전히 무기력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의미가 심리적-인식론적 차원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면, 변증법-인격적인 차원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예로서 증명될 수 있다: 다른 사람과 깊은 사랑에 의해 맺어진 사람은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외부의 어떤 영향이나 자극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마음에 보존한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은 항상 그에게 현존하는 것이다. 긴 관점으로 보면 어떤 구체적인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현존에 대한 자각과 같은 일종의 근본적인 상태가 형성되는 것이다. 확실히 사심 없는 사랑은 슬픔이나 기쁨으로 인격의 바로 핵심에 영향을 주고 인생의 모든 국면을 형성하는 힘이 있다.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라든가 하느님으로만 온전히 채워지고자 하는 갈망이 바로 본질적으로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썼던 신비적 죽음이란 말의 뜻이다. 이렇듯 격렬히 하느님과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은 그분의 뜻만을 행하고자 하는 강한 원의를 갖게 된다.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미리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라. 외부에서 오는 모든 것을 끊어버려 하느님의 활동에 장애되는 것이 없도록 하라. 하느님의 활동은 어떤 피조물도 천사도 인간도 들어올 수 없고, 하느님만이 거하시는 은밀한 곳 혹 영혼의 지성소 혹은 마음의 본질이란 깊은 심연에서 일어난다.”
이 주장으로 우리는 성인의 신비주의의 핵심인 내면성을 관통한다. 반복하여 창립자는 자신의 편지에서 사람의 “가장 깊은 곳 Innermost", 존재의 중심, 인격의 가장 깊은 차원은 어떤 피조물도 근접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다양한 말로 이 가장 깊은 곳을 묘사한다. 분명히 바오로는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을 인간의 인격에 “장소화” 함으로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오랜 전통 속에 서게 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특히 내면화로의 끊임없는 부름이란 면에서 요한네스 타울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의심할 바 없이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사용하던 비유들 gabinetto intimo(내면의 방) 이나 sanctuario dell'anima(영혼의 성소) 도 타울러의 비유인 “영혼의 근거”(Ground of Being)에 상응한다.
신비적 죽음, 자기-내면화 나 창조물 전체의 상대화 등은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거룩한 탄생”을 위한 토대이다. 이제 성인은 토마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떻게 이 거룩한 탄생에 대해 설명하는지 살펴보자.
“[영혼의 지성소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행동을 주의 깊게 기다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며, 다행스럽게 신비적 죽음이 일어날 때마다 이 거룩한 탄생도 일어난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는 자아의 가장 깊은 곳(gabinetto intimo)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내면적으로 깊은 평온함에 있게 된다. 바로 여기서 기억, 지성, 의지의 힘은 활동적이지도 생산적이지도 않으며 성인이 표현한 바대로 “수동성”, “주의 깊게 대기” 혹은 “기다림”의 상태가 된다. 비록 신비적 죽음이 그 자체 기억, 지성, 의지의 힘과 관계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심리적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의 목적이나 효과는 거룩한 탄생,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은총의 활동(혹은 결과) 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은 거룩한 탄생의 전제인 신비적 죽음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이다. 이 죽음은 인간의 완전한 소외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하느님께로 우리를 더 가까이 이끄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것은 뭔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행하는 사람을 행복으로 이끈다. 바오로는 이것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느꼈으며 쉽게 오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런 주의를 하기도 하였다.
“ 이 편지는 신비주의를 깊이 탐구한 것이므로 영적인 길에서 초보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숙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쉽게 오해되어 잘못을 범할 수 있으므로 주의하여야 한다”. - 토마스 포시에게 보낸 동일한 편지. Martin의 넘버에 의하면 L 1:788
아마도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이 글을 쓸 때 그는 정적주의에서 신비적 죽음이 한 역할을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창립자가 자신의 동료이자 친구였던 토마스 포시에게 쓴 이 한 편지를 연구하므로 서 신비적 죽음과 거룩한 탄생이라는 상징적인 표현에 담긴 뜻을 어느 정도 명료하게 할 수 있었지만 다른 많은 편지에도 이 두 상징적인 표현은 자주 나온다. 이제 창립자의 영적인 가르침 속에서 이 둘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다른 편지를 통해서도 알아보기로 한다.
내면화와 덕행의 실천
신비적 죽음(morte mistica) 과 육화된 말씀의 거듭남(rinascita del Divin Verbo incarnato)이 주는 핵심적인 효과는 -온전한 방식으로- 주님의 거룩한 덕행을 닮는 것이다. 이러한 덕행실천을 강조함으로서 성인의 가르침은 신비적 죽음에 관한 정적주의의 가르침과 차별성을 갖는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영적인 가르침의 특징은 놀라운 균형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내면화, 관상, 내면의 고독으로 들어감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행동이 따르는 믿음”(야고보 2:14-17), 덕행을 실천 하라는 강조가 있다. 이 균형은 마리아 체루비나 브레쉬아니 수녀에게 보낸 편지의 첫 부분에서도 볼 수 있다. 이편지에서 성인은 신비적 죽음과 그리스도안 에서의 생명 그리고 덕행의 닮음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논한다.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수녀님에게 지상에서의 삶을 연장시켜 하느님 아닌 모든 것에 신비적으로 죽음으로서, 모든 피조물로 부터 이탈하여 내적인 고독 속에서 천상의 거룩한 아버지의 가슴에 온전히 숨음으로서, 거룩한 정배와 함께 온전히 십자가에 처형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으로 살지 말고 거룩한 구원자의 덕이 수녀님의 행동에서 광채를 발하도록, 주님의 거룩한 덕행의 달콤한 향기가 내적 외적 겸손과 인내 온유함 고통과 사랑을 통해 드러나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녀님 안에 살게 하십시오”.(1752. 9. 1)
위에서 보듯이 바오로는 무엇보다 먼저 “수동적인 덕행”의 -그 완벽한 표현은 예수 특히 그의 수난에서 보인다 ― 획득을 우선시했다. 바로 이 덕행은 크리스챤적 행동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먼저 성인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제일 염두에 두었다, 신비적 죽음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는 수단으로서 여겨진다. 더욱이 바오로는 쓰기를 신비적으로 죽은 이후에는 더 이상 수녀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녀 안에서 살게 된다고 쓴다. 이것은 분명히 사도 바오로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십니다“(갈라디아 2:19-20).
사도 바오로의 십자가 신학에서 핵심적인 구절인 이 사상은 신비적 죽음을 말하는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다른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루시 불리니 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비적으로 죽는다” 는 것은 “하느님 아닌 모든 것에 죽는다는” 뜻이라고 설명하면서 또한 이것이 “모든 피조물로 부터의 이탈” 이란 말의 배경이라고 한다.
같은 편지의 후반부에 바오로는 위의 내용을 갈라디아서를 인용하면서 부연한다. “루시, 더 이상 네 안에 살지 말고, 하느님-예수가 루시 안에 살도록 또 예수 안에 루시가 살도록 하라. 지금 그런가? 그렇다면 잘된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이 언명은 세례와 율법이라는 사도 바오로 신학 전체의 틀 안에 있다. 사도 바오로는 “세속적인 사람”은 “육”의 욕망에 끌려 “죄에 팔린” 존재이다(로마서 7:14). 십자가의 성. 바오로도 비슷한 방식으로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존재로서 “타락한 본성을 추구” 하는 존재이며 언제나 “이기적인 이득을 찾는” 존재라고 한다. 바오로에게 실제적으로 신비적인 죽음이 가져다주는 은혜 한 가지는 정확히 이기적인 추구로부터 놓여나는 것이다. 그는 이“거룩하고 신비적인 죽음”을 “생명보다 더 귀한” 것으로서 묘사했다. 계속해서 그는 신비적 죽음이란 “무질서한 경향과 정열에 죽는 것” 으로 이루어진다고도 했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그 이유를 "거룩한 관상의 모든 고요함과 안온함“이 방해받지 않도록, 그러므로서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신적인 생명(갈라디아 2: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을 사는데 방해되는 것이 없도록” 하는데 있다고 한다.
사도 바오로나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공통된 목표는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로 결합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신비적 죽음을 통하여 사람들을 바로 이 목표로 인도하고자 했다.
신비적 죽음과 예수의 고난
주님의 고통을 그 중심 영성으로 하는 수도회의 창립자가 신비적 죽음을 말할 때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을 독특한 관점으로 보았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1750년에 쓴 편지에는 고통을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 로 볼 것을 권하며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느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마르코 15:34) 하고 부르짖었음을 상기하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아무런 위안도 없는 적나라한 고통”(il suo nudo patire senza conforto) 이라고 말할 때의 본래 의미이다.
“안팎의 어떤 위안도 없이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머리를 숙이며 ‘아버지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루카 23:46) 하고 말하는 영혼은 얼마나 복된가! 그것은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하느님 아닌 모든 것에 신비적으로 죽는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죽음의 심연까지 내려갔지만 그곳에 머무르지 않고 부활하시어 이전의 영광과 권세를 회복하셨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말하는 신비적 죽음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과정이다.
이 편지에선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성인의 영적인 가르침이 어떻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 잘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인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겨 버리는 것을 하나의 신비적 죽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철저히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겨버리게 되면 그 사람은 내면적으로 주님께 개방되고 일치와 밀접한 소통이 더욱 가능하게 된다. 일치를 위한 내적 잠재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육”이나 자연적인 나의 자기중심적인 의지를 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자신과의 싸움 없이 가능하지 않다.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 올리브 동산의 고뇌를 겪어야 했다(마태 26:36-46). 성인은 우리도 “순수한 영과 신앙과 사랑으로” 예수님과 함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또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하기를 원한다.
“바로 그때 우리는 생명보다 더 귀한 신비적 죽음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영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 네 영혼 안에서 전능하신분이 이루시는 놀라운 사랑을 보라”.
바오로의 세례신학이란 틀에서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죄에 죽는 것”(로마 6:2-11) 으로 해석된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기본 영성원리인 그리스도안에서의 신비적 죽음과 거듭남을 좀 더 정확하게 고찰해보면 창립자의 신비적 죽음이란 개념도 죄를 언급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1751년 루씨 불리니에게 쓴 편지에서 성인은 자신의 기본원리들을 명료화 하는데, 그는 신비적 죽음을 “무화”(annichilarsi)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됨- 라고 부른다. 전에 보았듯이 무화(아무것도 아님이 되는 것) 란 말로 성인이 의미하는 바는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상태, 그 죄성과 오류 성으로 말미암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님이다. 그러나 “모든 것” 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어두움과 “죄로 인한 무서울 정도의 무” 로부터 해방시키신다. 그러므로 무화나 아무것도 아님이 되는 것은 신비적 죽음에 상응하는 것이므로, 누구든 신비적으로 죄에 죽은 이는 “거룩한 말씀 속에서 새로운 사랑의 생명으로 매순간 거듭나는 것이다”.
또한 아무것도 아님과 신비적 죽음의 동일시는 창립자의 영적인 가르침에서 사상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겹치는지를 보여준다. 신비가 들이 자신의 체험을 타인들과 나누고자 표현한 용어나 개념들의 뜻을 정확하게 한정짓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신비적 체험을 나누려는 소통의 정당성까지 의심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정의롭지 않으며 피상적이기까지 하다. J.Seyppel 이 말했듯이, 신비주의에선, “체계적인 사고”가 아니라 그에 걸맞은 고유한 문법과 논리 그리고 문학적 표현의 한계까지 내포한 “실존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좀 더 넓은 맥락에서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신비적 죽음과 거룩한 말씀 안에서의 거듭남을 가장 많이 언급했던 맥락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이야기의 주제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감, 내면화 그리고 정확한 내적인 기도일 때 이 상징적인 한 쌍의 말을 가장 많이 언급했다. 성인은 자신의 영적지도를 받는 사람들에게 지치지 않고 잠심과 자기 자신으로 들어가는 것을 권했다. 성인은 그들이 모든 심상(이미지) 으로부터 벗어나 “내적인 고독”(solitudine interiore) 으로 들어가서 순수한 신앙과 거룩한 사랑을 통해 “하느님 안에 빠지기”를 바랐다. 성인이 표현했듯이 “하느님을 향한 내향성”(introversioni in Dio)을 통해 영혼은 “거룩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새로운 사랑의 생명으로 언제나 거듭 태어난다”.
거룩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신비적으로 죽고 거듭나는 것이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영성에서 근본적인 원리임은 위에서도 확실하다. 이것은 “신비적 죽음” 이란 소논문을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썼든 안 썼든 관계없이 확실하다. 이제 우리의 관심을 창립자가 그 소논문을 주었던 수도자에게 쓴 편지에 돌려 보기로 하자. 먼저 창립자는 그 수녀에게 “신비적 죽음에 대한 지시사항”을 거듭 읽으라고 권한다. 다음으로 창립자는 신비적 죽음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체 영적인 가르침의 특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한편으로 창립자는 수녀로 하여금 내적인 잠심과 자기 자신 돌아가기를 실천하여 “사랑과 신앙으로 거룩한 침묵 속에 하느님의 가슴속에 영혼이 온전히 쉬게 되는 그 내적인 사막 거룩한 고독”에 머물도록 권한다. 다른 한편 창립자는 특히 “마음의 겸손, 말없이 인내하는 것, 온유, 사랑” 등 덕행의 실천에 충실하라고 한다. 그런 연후에 창립자는 신비적 죽음이란 주제를 꺼낸다:“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네가 죽고 묻혀야 한다. 그러므로서 하느님은 너를 십자가의 감추어진 성성으로 위대한 성인으로 변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마지막 인용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영적인 가르침 중에서 주요한 원리들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 즉 자신으로 돌아감, 덕행의 실천과 더불어 내면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 모두는 함께 사람을 더 큰 성성으로 더 밀접한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끈다. 확실히 모든 영적인 스승들은 동일한 목표를 지녔다.. 그것은 더 큰 하느님과의 일치이다: 그러나 이 최종 목표로 가는 길은 사뭇 서로 다르다. 예수고난회의 창립자가 따랐던 길 그리고 그가 사람들에게 제시했던 길은 애매모호하지 않고 명백한 길로서 구원사에서 독특한 사실로 인정받았다.
첫댓글 고난회 관구장 신부님께서 보내주신 글을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