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 교우촌 도보 순례
일 시 : 2012. 9. 22. 토요일 맑음
일 정 : 한들공소→판치/넙치교우촌→추동/가래올→ 장재동공소→한들공소
참가자 : 32명
1. 한들공소 출발 : 10:00
○ 어은동 성당 (漁隱洞 聖堂) - 한들공소 관련 부분 발췌
진안 지역에 신도들이 거주한 것은 병인박해 이후였다. 이들은 경기도, 경상도 지방과 같은 곳에서 고산 지방으로 피신하여 살다가 병인박해 이후 다시 이 지역으로 이사한 것이다. 진안지역의 교우들은 대개 고산 지방에서 이사한 사람들이 많았다. 전주의 동남쪽에 위치한 진안, 용담, 장수, 남원, 무주 지역에는 많은 공소들이 산재해 있었으며, 이들 공소는 전주 본당에서 관할하였다. 그래서 전주 본당 신부의 업무가 과중하였다.
뮈텔 주교는 1900년 9월 4일 전주 본당의 보두네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전주 본당의 분리를 제안하였다. 신설 본당을 남원이 어떤지 의향을 물었는데 남원은 신자가 2명뿐이었다. 한국인 신부를 보내주면 장수 전역, 남원, 무주, 진안 공소의 일부를 맡기겠다고 보두네 신부가 제안하여 어은동 본당이 설립되었다.
어은동 본당의 설립은 1900년 9월 22일 전라도 출신으로 두 번째 신부인 김양홍 신부가 서품됨으로서 이루어졌다. 그는 부안 만석동 공소 출신으로, 아버지는 신심 깊기로 유명한 김 루카(덕련) 회장었다. 그는 사제 서품과 동시에 어은동 본당으로 임명받고, 9월 29일 임지를 향하여 서울을 떠나 부친과 친척들을 방문하고 10월에 어은동에 도착했다.
김양홍 신부가 전주 본당의 보두네 신부로부터 인계받은 공소는 11곳이었으나 교우들의 편의를 위하여 18개 공소로 나눴다. 진안의 공소는 고정대, 느랏, 반월리, 어은동 등 4곳이었다.
1915년 6월 7일 김양홍 신부는 제주읍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1918년 2월 25일 이상화(바르톨로메오) 신부가 제2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주교의 명에 의하여 본당을 어은동에서 진안읍으로 옮겼다. 근본적인 이유는 깊은 산골짜기에서는 본당 발전을 기대할 수 없어서였다. 읍내에는 신자집이라야 최봉수 회장 한집뿐이었다. 그러다가 진안군 마령면 덕천리 장재동에 있는 김 복사 (형우, 마르첼리노)와 손 회장(손봉희)의 주선으로 거처를 장재동으로 옮겼다. 장재동은 큰 공소이며 박해를 경험한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던 교우촌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문 것은 잠시였다. 이상화 신부가 새로운 본당을 세울 터를 물색하고 있는 데, 한들 (진안군 마령면 연장리)에 사는 박 참봉 (德和, 다미아노)이 신부를 한들에 모셔다가 본당을 세울 수 있도록 터를 제공하였다. 박덕화는 유명한 박중현 회장의 손자였다. 그는 진안 방각리에서 한들로 이사하여 정착해 살며 교우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여 전답을 나누어주며 교우촌을 이루었다.
그는 애긍시사를 하는 등 애덕 실천에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성당 부지를 매입하여 신부에게 바쳤다. 그때가 1922년 5월이었다. 한들 성당 신축공사에 쓸 목재는 한들에서 40리 떨어진 부귀면 황금리에서 구입하였고, 고윤경 회장과 외교인인 윤경철, 두 사람이 기둥과 장보 등의 재목을 운반하였다. 이들은 힘이 좋아 장사로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성당공사는 12월에 완공되었고, 한옥이지만 밖에서 볼 때는 이층집으로 보이는 건물이었다.
공소로 유지되어 오던 어은동에 본당 신부를 맞이한 것은 1947년 11월이었다. 송남호 신부가 부임해 옴으로서 다시 본당으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1951년 5월 송남호 신부가 떠나자, 한들 본당 소속 공소로 되었고, 오늘날 진안 본당 공소로 유지되고 있다.

○ 한들 공소 - 진안군 진안읍 대평리
중평마을 - 1531년경 박(朴)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는데 후에 윤(尹)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이 번창했으며1932년 천주교 성당이 설립되면서 크게 번창하였다.
처음엔 "한들" 에 속해 있다가 1800년경부터는 대평리에 속했었다. 1920년 독립마을로서 평지라 부르다가 1972년에 대평리의 세마을 중 중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중평이라 바꿔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평마을 - 1239년경 능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머물면서 마을이 형성됐는데 후에 김(金),박(朴),이(李)씨가 거주하면서 오늘의 마을이 이루어졌다. 처음에 마을 앞 들이 넓다하여 "한들"이라 불렀는데 이때의 "한들"은 지금의 중평과 하평까지 포함한 마을이름이었다.
1800년경"한들"의 글자 뜻을 풀어서 대평리(大平里)라 부르다가 1972년 마을을 분리하면서 대평리의 제일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상평이라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95년부터 1914년까지는 당시 일북면의 면소재지이기도 했다.
하평마을 - 1675년경에 노(魯)씨, 백(白)씨, 이(李)씨 등이 이곳에 정착하게 되면서 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당초에는 "한들"에 속해 있었으며 1800년경에는 대평리에 속해 있다가 독립마을로서 "새터"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1972년 대평리 세 마을 가운데 제일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하평이라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마령면 판치(板峙) 마을 : 10:50
1195년경 김(金)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후에 박(朴), 전(全), 서(徐)씨가 거주하면서 본격적으로 마을이 번창하였다.
마을 뒤에는 부귀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었는데 이 고개를 "널티"라 불렀기 때문에 처음엔 마을이름도
"널티"라 불렀다. 그런데 고개 너머의 부귀면에 "널티"라는 마을이 있어 그곳을 "바깥 널티" 이 마을을"안 널티"라 부르게 됐는데 이것은 지금부터 약 3백60년 전에 정도사가 "널티"라고 지었다는 설화도 있다.
또한 1413년 (조선 태종13년)에 판치로 바꿔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1972년에 마을 이름을 완전히 판치로 개칭하였다.
(판치→참살이 안골식품 간판 좌측→저수지→참살이 안골식품 공장→신동고개)


3. 신동(薪洞) 마을 : 11:45
이 마을은 1238년경 김(金)씨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면서 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그 후 이(李)씨가 함께 정착 거주하게 되면서 마을은 번창하게 되었다.
마을이 형성될 당시 이곳에서는 놋그릇을 만들어 전주등지로 반출하였다고 하여 마을명칭을 "놋점터"라
불렀으나 놋점이 폐지된 후 1800년경부터는 신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마도 옛날에는 놋그릇이 많이 생산되어 "놋점터"라고 했지만 놋점이 폐지된 후에는 산간 오지로서 땔감
나무가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섶 신(薪)자를 따서 신동이라 개칭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신동교회 포탄 탄피 종

4. 추동(楸洞) 마을 : 12:15
면내에서 가장 오지(奧地)이다. 1235년경 한(韓)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그 후
김(金), 남(南)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마을이 형성될 무렵엔 가래나무가 숲속에 쌓여 있다하여 "가래울"이라 부르다가 1800년경부터 "가래울"
을 뜻글자로 붙여서 추동이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
1972년 아랫마을 "장재동"과 추동(楸洞)의 추자와 장재동(長材洞)의 장자를 합해 추장이라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은 옛날에 옹기그릇을 만든 흔적이 있어 조상들의 손길들의 슬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5. 장재동 공소(長材洞 公所) : 12:30 - 진안군 마령면 덕천리 장재 마을
진안군 마령면 덕천리에 위치한 장재동 공소는 1890년에 생겼다. 1882년에 덕천리에 널틔공소, 1883년에 가래올 공소를 리우빌 신부 (세례명 아나톨, 柳達榮, 1885~1893)가 세우고 이곳에서 전교를 하였으며, 1890년에는 보두네 신부 (세례명 프란치스코, 尹沙勿, 1859~1915, 1889~1915까지 전동성당 신부 역임)가 쟝재동 공소를 시작했다. 1920년 경에는 가래올과 장재동을 합하여 장재동 공소라고 불렀으며, 1918년 11월 19일에 드망즈 주교 (세례명 플로리아노, 安世華, 초대 대구 대목구장, 1875~1938) 주례로 공소강당 축복식을 갖고 주보로 성 미카엘을 삼았다. 1921년 10월 31일에 어은동 본당 이상화 발도로메오 신부가 이곳에 와 이듬해 7월 3일까지 거처하였다. 1964년 11월 5일에는 벽돌구조에 함석지붕의 공소건물이 신축되었으며 이사정 신부 재임 때 내부수리를 하고 3년 전에 지붕을 강판 기와로 바꿨다.
※ 동정녀 손 례(혜례나) 가족 납골당 있음 (조카 손상엽)
(공소에서 중식 후 13:25 출발)





6. 대동마을 : 13:50
(추동천변길로 쭈욱 ~ 안방마을 입구지나 → 세동천변길까지)
7. 안방(安坊) 마을 : 14:15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서기 1481년경에 김(金)씨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 하였던 바 후에 정(丁)씨, 이(李)씨 등이 함께 정착 거주하게 되면서 마을은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마을이 형성된 후부터 이 마을 사람들은 마을명칭을 "안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전설에 의하면 약 360년 전 정도사가 이 마을의 지형을 보고 안곡(安谷)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설화가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곳에서 난을 피하던 사람들은 단한사람도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하였다 한다.
그 때부터 이곳은 사람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안방이라고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안방마을 입구→세동천변길→한들공소 보이면 좌회전→인삼제조창 간판 좌측→한들공소)
8. 한들공소 : 15:05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해설사들이 참여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항상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하고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