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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파고(波高)
8
그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그날도 중학교 수업이 끝나고 한두 시간 쉬었을까말았을까 그리곤 마을 어귀에 있던 서당으로 달려가 글공부까지 마치고 어둑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마당에 들어서기 바로 한 발 앞서 칠순은 되었음직한 웬 허름한 옷차림의 늙은이가 그의 집엘 찾아왔다. 노인은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몸을 한껏 기댔으나 수척하고 병약해 보여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위태롭게 보였다. 그의 눈에는 행색이 구질구질하여 구걸을 하러온 여느 거지로 비쳐졌다. 그런데 의외로 노인을 맞은 부친은 노인을 알아보고 꽤나 놀란 눈치였다.
“아니, 행님…. 여긴… 우째 알고 찾아왔능교?”
“와, 내가 몬 올 데라도 왔단 말이가?”
“그기 아니고…, 너무 급작스레 찾아와서….”
노인은 바로 곁에서 눈이 휘둥그레진 그를 발견하고 부친에게 물었다.
“야는 누꼬?”
“야는 지 아들이라요.”
노인은 그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는 행색도 그런데다 깡마르고 시커먼 얼굴에 잿빛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눈까지 부리부리한 노인이 무섭게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니, 이름이 뭐꼬?”
“김… 용일인디요? 할부지는… 뉘라요?”
“응, 나? 니한티는 아마 큰할배뻘쯤 안되것냐.”
“큰… 할배요?”
“아이다. 큰할배가 아니라 큰애비다. 내 나이가 많아서 착각 안했나.”
그때 부친은 노인의 팔을 억지로 끌다시피 사랑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어무이요. 저 할배 뉘야요?”
“응, 니한티는 큰아부지 뻘이 될끼다. 근디… 그새 우찌 저리 파싹 늘것다냐.”
모친은 먼 옛일을 회상이라도 하는 듯 허공을 바라보며 쩝 입맛을 다셨다. 무슨 죽을죄를 짓기라도 한 듯 일가가 고향에서 쫓겨나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5년이란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큰아부지요? 그럼 우찌 되는디요?”
“아부지의 이종사촌행님 되는 분인디….”
“이종사촌행님이 뭔디요?”
모친도 안절부절못하는 눈치로 보아 노인이 필시 좋은 사람은 아니라 여겼다. 그렇지만 집에 손님이라고 찾아오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호기심이 부쩍 일수밖에 없었다. 사랑방 문짝에 귀를 바짝 기울이고 들으려 했으나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노인과 얘기하는 중간 중간에 부친의 고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오해라는 소리와 맘대로 하라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건… 오햅니더. 그런 뜻으루다 들으면 섭하지요.”
“그려. 자네 맴대로 그래선 몬 쓰네. 자네도 조상이 있고 또… 일가친척도 있는 게여. 사람이 제 잘나서 제멋대로 생겨난 게 아닐세.”
부친과 노인과의 대화는 거의 두 시간가까이 이어졌다. 그리고 끝내 언성이 높아지더니 노인이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이 워찌 저리 모지노. 지가 연을 끊는다캐서 연이 끊기나 말이다.”
모친은 밤길을 마다않고 막무가내로 훠이훠이 길 떠나겠다는 노인을 겨우 말려 앉힌 다음 늦은 저녁을 차려줬고, 그는 그날 밤 감자와 고구마 따위가 잔뜩 쌓여있는 골방에서 노인과 함께 잤다. 노인의 몸에선 담배에 절은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고약한 냄새가 풍겨왔다. 처음부터 노인이 낯설고 무섭기도 했으나 부친이 그리하라 했으니 거스를 수가 없었다. 노인과 잠을 자면서 노인으로부터 조부가 어떻고 증조부가 어떻고 그 외에 친척들이 어떻다는 얘기를 단편적으로 주워들을 수가 있었다.
“할아부지는 뉘야요?”
“응, 나 말이가?”
“예.”
“음, 난… 니 애비 이종사촌행님인데….”
“이종사촌이 뭔디요?”
“응, 이종사촌이란 말이다. 니 애비의 아부지가 내 아부지랑 한 형제란 말이여.”
“예.”
노인은 부친의 아버지, 즉 내겐 친할아버지 되는 조부가 어떤 사람이었고 또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말해줬으나 부친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 찾아왔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노인은 다음날 새벽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집을 떠났다. 그 이후론 그 노인과 만날 기회도 없었으니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부모가 모두 타계한 뒤론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던 그 알량한 친척들을 잊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부친이 자신의 식솔을 데리고 고향인 밀양을 등진 것은 1932년10월 중순경이었다. 훗날 부친은 자식들에게 자신의 고향은 물론 그 어떤 친인척도 찾을 생각은커녕 오히려 멀리하라는 얘기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치 유언처럼 했었다. 따라서 부친이 어떤 연유로 고향을 등지게 되었고 친인척까지 멀리하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부모 살아생전엔 그런 얘기를 끄집어낸다는 것조차 터부시되었다.
그의 부친이 갓 스물을 넘긴 모친 서완선(徐妧宣)과 세 살, 두 살 연년생인 어린 두 누이 금분, 옥분을 데리고 함안읍으로 흘러들어왔을 땐 추수기를 맞은 일대의 농촌은 한창 일손이 달리던 바쁜 시기였다. 누런 들판을 가로질러가던 그들의 행색이 너무 꾀죄죄하고 꽤나 지친 기색이라 함안읍의 여느 거지나 다를 바 없어 마을사람들 눈엔 그다지 띄지 않았다. 그리고 수확이 다 끝나고 들판이 황량하게 변할 때까지 그들은 어느 구석에 처박혀 뭘 하고 지냈는지 도통 눈에 띄질 않아 마을사람들은 그들의 근황을 알 턱이 없었다.
그즈음 모친이 두 딸을 안고 업고 읍내 한성의원을 찾았을 땐 두 어린 딸 모두 생열이 펄펄 올라 뜨거운 차돌 같았고 얼굴과 온몸에는 붉은 발진이 좁쌀 모양으로 돋아있었다.
“선상님요, 우리 얼라들… 지발 살리주이소.”
모친은 머리가 허연, 그리고 도수 높은 돋보기안경을 쓴 원장 박기태에게 무조건 살려달라며 매달렸다. 보아하니 그녀의 행색이 거렁뱅이나 다를 바 없어 내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어린 두 딸을 의원 대기실 간이의자에 눕혀놓고 살려내라며 의원이 떠나갈듯 절규했다. 거기에 더하여 두 딸은 목이 잔뜩 부었던지 시뻘건 얼굴로 꺽꺽 울어대어 네댓 평밖에 안 되는 대기실은 그것만으로도 아수라장이었다. 당시 일곱 살 난 분(糞)이가 아파 의원에 데리고 왔던 부모 되는 사람이 모친을 알아봤다.
“저 여편네는 누꼬?”
“저 여핀네…, 점번에 보니 웬 키 큰 거지랑 함께 다니던 년 아니던가베?”
“맞네그랴. 안보이더니만, 여그서 다보네.”
“땅딸막한게… 음청 지랄이네.”
“그러게 걸뱅이라도 지 새끼는 귀한 줄 아나부지.”
“생긴거는 얌생 구연데가 있어라. 안그려?”
“글씨…, 약간 띵한데는 있어두 얼굴은 쪼매 구엽구만….”
그들 외에도 의원 대기실 안은 환자들로 늘 붐비기 마련이라 바닥을 나뒹굴며 이마를 찧는 바람에 괜한 초상이라도 날까 두려웠던지 대기환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사람만은 살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40센티도 채 안 되어 보일 작달막한 키에 그 주제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텐데 제법 살이 오른 통통한 몸집하며 나이 또한 채 스물도 안 되어 보이는 앳된 그녀에게 그런 강단이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해보였을 것이다.
인구가 1만도 채 안 되는 시골이라 공연히 인심 사납더라는 소문이라도 퍼질까 걱정되었던지 살집 좋고 머리허연 박 원장이 그녀를 진료실로 불러들였다.
“아따, 쫴맨한 예팬네가 뭔 땡깡이 그리 거하요? 돈은 가꼬왔슴메?”
그녀는 웃옷 속 가슴께를 한참 더듬어 찾더니 꼬질꼬질한 손수건을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둘둘 말린 손수건 속에서 뿌연 은가락지 한 개를 집어 들고 박 원장한테 불쑥 내밀었다.
“거시기…, 요걸론 부족하것지요?”
“글씨…, 갖고있능게 이게 다라면 헐수엄쩨. 자 고롬 야들 함 볼까?”
박 원장은 금분이 옥분이 두 애들 입안이며 목 울대부위며 뱃구레를 살펴보고 나서 또 청진기를 가슴이며 자빠뜨려놓고 등이며 갖다 대고 한참 심각한 표정을 짓기에 그녀는 은근히 겁을 집어먹었다.
“괴얀켔능교?”
“흠…, 뭐 그리 놀랄꺼까정 엄꼬.”
“우에 됐능교?”
“쪼매만….”
“……?”
“에… 또, 매슬(苺舌)이나 에… 또…. 반즌(斑疹)으로 보아 류행성 승홍열(猩紅熱)이 틀림없슴메. 그렇타꼬… 마… 죽는 병은 아니니까니 넘 걱정 마시라요.”
“하이고머니…, 우야튼 선상님요 증말로 고맙씸더.”
모친은 천연두가 아닌 것만도 다행이라는 듯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에… 또, 이 약을 아츰즈녁으루다 두 차례 멕이고설랑 찬바람 씌지 말고, 넘 덥게 하지덜 말고 잘 조리하믄, 사나흘 후쯤엔 멀끔히 나을끼라요.”
그때 두 어린 딸의 진료 때문에 의원을 찾은 것이 모친으로서는 마을사람들 눈에 뜨였던 첫 번째 나들이였던 것이다.
분이 어미는 그해가을 끝 무렵 그들 일가가 거죽을 깔고 덜덜 떨던 도항리 고분군 옴팡진 곳을 어찌 알고 찾아왔던지 ‘의원에서 뵌 것도 큰 인연’이라며 부친의 껄끄럽다는 표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넉살좋게 수시로 들락거렸다.
“참헌 샥시가 이거이 뭔 고생이래.”
분이 어미는 처음엔 모친더러 ‘참한색시‘라 호칭했다. 서로 나이를 대조하여 열 살이나 적은 모친에게 아우 삼자고 했고 모친도 그리하자 하여 모친이 별세하기까지 마을사람들 가운데 가장 왕래가 잦았으나 원래 말수가 적은 모친에 비해 수다스런 여자라 마을의 소문은 분이 어미를 통해서 전해 들었다.
“근디…, 바깥양반은 머하는 분이래?”
“그냥… 놀아여.”
“그냥?”
“예.”
“그려도 그렇제. 신수가 훤허니 한 가닥 했것구먼.”
분이 어미는 내심 궁금한 것이 그리 많아 모친에게 꼬치꼬치 캐물었으나 그럴 때마다 모친은 그로인해 공연히 부친의 역정을 들을까 대개 입을 함구하였기에 딱히 얻어듣는 것은 없었다.
“참말로 미련곰탱이들이구먼. 이 추분 날 그려 방 한 칸 얻을 생각도 않고시리 이런 험한디서 떨고 있을게 뭐여?”
분이 어미는 몇 번을 오가면서 지켜봤지만 일가의 가장이란 사람이 아무런 노력도 하려들지 않고 식구들 고생시키는 게 영 탐탁지 않게 보였던지 부친을 쳐다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인물이 아깝구먼.”
누구라도 혀를 끌끌 찰만했다. 부친은 매사 융통성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남의 일에 절대 끼어들려 하지도 않았고 더더구나 남한테 아쉬운 소리는 죽어라 하기 싫어했던 것이다.
그래도 한데서 마냥 떨고 있던 그들 일가가 불쌍타 여겼던지 분이 어미가 비어있던 덕칠네 외양간을 빌릴 수 있게 해줬기에 함안에서 처음 맞이한 그해 겨울 모진 추위를 견뎌낼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골인심이 그리 각박하지 않았고 어떤 일거리라도 주어지면 몸을 아끼지 않고 억척스레 일만했던 모친이 있었기에 일가는 굶주림을 겨우 면할 수 있었다.
그 이듬해인 1933년 봄엔 함안 근교의 조남산 산비탈에 약간의 버려진 땅이 있다기에 그의 일가는 그곳으로 옮겨 정착하게 되었다. 그곳은 사유지가 아닌 일제조선총독부지로서 경작을 할 만한 쓸모 있는 땅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경작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무상으로 불하가 될 것이란 마을 이장의 권유도 있었고 또한 심토(心土)도 깊어보였기에 욕심이 났던 것이다. 가파른 비탈에다 돌멩이가 유독 많아 콩이나 옥수수 따위를 심으려 해도 상당한 노역을 필요로 했으나 천생이 농사꾼의 딸인 모친은 그 정도의 고생은 미리 각오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모친은 시간만 나면 자갈밭을 일궈나갔다. 부친은 처음엔 마지못해 모친을 도와 밭일을 하는 척 했으나 생각은 늘 엉뚱한 곳에 가있었던지 결국엔 모친이 혼자서 밭일을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그렇게 모친이 두 달여 고생하여 어렵사리 이랑을 세우고 콩 파종을 했으며 새벽부터 밤늦도록 밭에 나가 살다시피 했기에 그 결실인양 7월경엔 밭이랑사이로 넘실대듯 녹색물결이 줄을 이었다. 처음치고는 콩 농사가 의외로 잘되었던 것으로 그 고된 밭일에도 전혀 피곤한 줄 몰랐다.
모친은 콩 수확을 며칠 앞두고 밭고랑에 쓰러져 임신 7개월째로 들어선 사내아이를 유산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 허약해진데다 땡볕 아래에서 종일 땀을 흘리다보니 더위를 먹고 쓰러졌던 것이다.
“아부지…, 아부지… 엄마가요.”
네 살짜리 금분이가 움막에서 낮잠 자던 부친에게 모친이 쓰러진 것을 알렸을 때는 그녀가 쓰러진지 30분도 더 지나서였다. 동생 옥분이와 나무그늘에서 놀다보니 모친이 쓰러진 것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부친이 달려갔을 땐 모친이 하혈한 피로 밭고랑이 흥건했다. 부친은 모친을 업고 한달음에 읍내 한성의원을 찾았다.
“산모가 우찌 이지경으루다 되었슴메?"
박 원장은 지난해 초겨울쯤 성홍열을 앓던 어린 두 딸을 데려왔던 모친을 알아봤다. 그땐 행색은 남루했어도 몸은 실하다 여겼었는데 그새 몸이 반쪽으로 줄어든 것에 대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영양이 부실헌데다 에… 또, 악성빈혈까정 있슴메.”
“우리 애기는 어찌 됐능교?”
“아니 이사람, 그거이 지금 말이라고 하남? 산모가 다 죽게생깄구먼.”
“그럼, 애기는… 애기는 죽는단 말인교?”
“애기는 안됐구먼. 마… 꼬춘데 말여.”
“고추라고요?”
사산된 태아가 아들인 것을 확인한 부친의 낙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 보편적이었던 남아선호사상을 떠나 아들을 낳고자했던 갈망은 조부에 이어 부친이 2대 독자라 더했다.
부친은 허약해진 모친을 한동안은 위해주는 척 했으나 그런 마음도 이내 사그라진듯했다. 항상 망연한 시선으로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으나 막상 실천하는 데엔 주저했다. 남들 눈에는 훤칠하고 생각은 많으나 게으르고 우유부단한 것이 부친의 큰 결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라도 누군가는 일을 해야 했지만 잠시라도 놀면 못 배기는 바지런함이 모친 자신을 더욱 가혹하게 몰아갔다.
부친이 늘상 빈둥거렸어도 모친의 그런 억척스러움은 그 자갈밭에서 잘 드러났다. 첫해엔 두 가마분의 콩과 약간의 고구마와 감자를 생산해냈으나 그 이듬해인 1934년 가을엔 개간된 밭이 3천 평을 웃돌았고 거기에서 나온 소출이 전년에 비해 3배가 넘었다. 그리고 콩이나 고구마 외에도 옥수수며 호박이며 피마자까지 다양한 작물을 생산했다. 한 뼘이라도 허용된 공간이 있을라치면 뭐든 다 심었다. 그다지 넉넉하다 할 수는 없었지만 남한테 구걸하지 않더라도 굶주림은 면할 수 있었다.
그해 11월엔 그보다 열 살 위인 셋째 누이 수빈을 낳았다. 모친의 배가 불러올수록 ‘이번엔 틀림없이 아들일게야’라는 부친의 기대는 여간 아니었다. 그래서 평소의 부친답지 않게 모친에 대해 여러모로 신경을 썼다.
“밭일이랑 그만 신경 쓰고 몸조리나 혀.”
“지때 걷어들이지 않음 농사 다 망쳐요.”
“내가 알아서 헐테니 그만 좀 쉬라니께.”
수확기에 일손을 구해줘도 모친은 막무가내였다.
“품값 주고나믄 뭐가 남는대?”
“빌걸 다 걱정해쌌네. 품값이 문제여? 님자 몸이나 잘 챙겨.”
막상 출산해서 딸이란 것을 확인했을 때 실망한 기색은 보였어도 모친을 그리 야박하게 닦달하진 않았다. 딸이라도 몸성히 잘 낳은 것만 다행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로써 원치 않는 딸만 셋을 둔 셈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35년10월에도 부친이 그렇게 바라던 사내아이를 낳았으나 석 달을 못 버티고 죽어버렸다. 그 아이는 갓 낳았을 때부터 상태가 이상했다. 젖을 잘 빨지를 못하고 자꾸 보채기만 하는 것이 호흡도 가래가 그렁그렁 끓듯 불규칙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는 자라기는커녕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고 입술이며 온몸이 멍든 것처럼 퍼렇게 변색되어 의원을 찾았으나 끝내 가망 없다는 판정을 받고 그것도 입원 하루 만에 숨을 거둔 것이다. 듣기로는 심장판막증이란 심장계 기형으로 석 달을 버틴 것도 기적이라 했다.
두 번씩이나 아들을 잃은 것에 대해 부친도 그렇지만 모친의 상심도 컸다. 무서워서 더 이상 아이를 낳기 싫다고 했다. 그렇지만 모친은 또다시 아이를 뱄다. 또 딸이면 어쩌나 아니면 또 기형아를 낳게 되면 어쩌나 그런 걱정이 출산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런 걱정과 우려 속에 1937년6월엔 일곱 살 위인 넷째 누이 초희를 낳았다. 딸만 넷을 뒀지만 그래도 기형아가 아니란 것만 다행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우째 머스마는 낳는 쪽쪽 죄다 죽어삐고 가스나만 멀쩡히 살아남는겨. 거 참 신통방통하제.”
그때까지만 해도 인륜으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낳으면 된다고도 생각했다.
“씨는 좋은디 밭이 영 안 좋은가부다.”
부친은 모친더러 들으라고 그런 씨잘 데 없는 농담도 했다. 모친은 부친보다 열네 살이 더 어려 그 둘의 나이차이도 많았지만 그보다 부친을 꽤 어렵게 여겼고 중히 여겼다. 그래서 부친의 얼굴을 감히 마주보지도 못했고 부친 때문에 아무리 언짢은 일이 있더라도 전혀 내색 않고 감내했다. 그리고 온순하고 내성적이라 말수가 적고 참을성이 많은 것도 한몫했다.
다음해인 1938년12월에도 그렇게 바라던 사내아이를 또 낳았다. 기쁨도 잠시 아이는 겉보기엔 별탈이 없음에도 잔병치레가 많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줄곧 의원을 찾았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 아이는 젖을 빨 기운도 찾지 못하고 자꾸 말라갔다. 수저에 젖을 짜서 억지로 먹여도 자꾸 토해냈다.
“선상님, 야가 잘 묵지도 않고 걸핏하믄 토하기만혀요.”
“글쎄…. 마… 기관지가 엄청 허한가봄메. 그라고 내분비선도 원활치 몬허고….”
“그러면 우쩐다요?”
“글쎄…. 큰 병원으로 가야 쓰것구먼….”
박 원장은 부산 쪽의 큰 병원으로 가면 혹 고칠 수 있을 거라 했다. 그렇지만 100엔(円)도 더 될 치료비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도 생각해보라했다. 당시 100엔이란 돈은 상답(上畓) 2마지기에 해당하는 400평을 살 수 있는 금액이며 쌀을 사더라도 햅쌀 600가마는 족히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꿈도 꿀 수없는 돈인 것이다.
모친은 없는 살림에 무당 불러 푸닥거리를 하고 중을 불러 몇날며칠 독경을 해댔어도 효험을 보지 못했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위태위태하게 10개월을 버티는가 싶더니 다음해 8월에 아이는 속절없이 죽어버렸다. 부친은 한동안 끼니를 거른 채 술에 절어 지냈다. 술에 취했을 때마다 모친을 모질게 들볶고 딸들에겐 가리지 않고 몽둥이찜질을 마다않았다.
“어찌 된 집구석이 시집도 몬가고 뒈진 떼거리 손각시 씌운기여? 아님, 가스나들 음기가 넘 쎄서 그런기여? 기집년들은 우찌 디지질 않고 데꺼덕 잘만 살아남는디 우찌된게 머스만 낳기도 무섭게 디지냐 디지긴. 내 이년들… 전부 패 직이뿌야 그년놈들의 잡귀들이 해꼬지 안헐까?”
공교롭게도 죽은 아이 셋이 하나같이 남아였기로 모친 또한 아들에 대한 욕심을 끝내 버릴 수가 없었다. 물론 그의 모친이 그렇게 된 까닭은 부친의 아들에 대한 지나친 욕심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이후에도 사내애를 본다면서 결국엔 계집애를 둘씩이나 더 낳았던 것이다. 1940년6월엔 그보다 네 살 위인 다섯째 누이 말희를 낳았고 1941년10월엔 그보다 세 살 위인 여섯째 누이 종희를 낳았다. 줄줄이 딸만 낳을 때마다 부친의 낙담은 대단했다. 아들을 그토록 바랐건만 딸만 내리 여섯을 낳았으니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여겼다. 그리고 모친한테도 한동안 태기가 없어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겠거니 했다.
그런데 1944년4월14일 마침내 바라고 바라던 아들 용일을 낳았던 것이다. 부친은 날아갈듯 기뻐했다. 원래 아들이 귀한 집안이요 게다가 그를 낳기 전에 이미 세 차례나 아들을 낳고도 모두 한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단명으로 죽어갔으니 아들에 대한 욕심이 유별났던 것이다.
“이 놈이 이래뵈도 우리 삼대독자라요, 삼대독자. 흐흐흐….”
부친은 갓난아이를 어르고 달래가며 중얼거렸다. 세상을 다 얻은 것 마냥 들떠서 지냈다. 그 역시 잔병치레로 몇 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요행히 살아남았기에 그에 대한 부모의 보살핌은 지극정성일수밖에 없었다. 부친은 그의 이름을 짓기까지 상당한 기일을 뜸을 들였다. 그리고 어느 날 꿈에서 조부가 나타나 일러줬다며 그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김… 용… 일….’
물론 부친의 성을 따서 김해 김 씨이며 용 용(龍)자에 넘칠 일(溢)자를 쓰기로 한 것이다.
<200자 원고지 55매>
- 제9회에서 계속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