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 꿈란
3 년 전, 꿈란의 사해사본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특별전시장에 전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에게도 사해사본이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입니다. 당시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 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던 유적은 사실 요르단 정부가 소장하고 있는 사해사본의 극히 일부인 진본 5점과 그리스도교 10대 유물인 신약 파피루스 등이었습니다. 사해사본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갖고 있습니다.
옛날 옛적, 아니 63년 전입니다. 조금 길지만 그냥 옛날 이야기처럼 생각하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1947년 5월의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습니다. 한 베드윈(Bedouin)족 소년, 무하마드는 염소 떼를 돌보다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염소를 찾고 있었습니다. 사해 서쪽 해안의 절벽 지대의 한 동굴 속에 돌멩이를 던졌다가 항아리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는, 혼자는 무서워서 친구, 아메드를 불러 같이 동굴 속으로 들어 가 보았습니다. 입구는 좁았지만 굴은 들어갈수록 넓어졌습니다. 안은 길이 8.5 m, 너비 3 m, 높이가 3 m 나 되는 꽤 큰 굴이었습니다.
그곳의 한쪽 구석에는 깨진 질그릇 조각들 사이로 항아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높이가 60 ㎝ 가량 되는 큰 항아리들이었습니다. 무하마드와 아메드는 조심조심 항아리 뚜껑을 열어 보았습니다. 뭔가 시커먼 덩어리들이 드러났고, 꺼내보니 얇은 양가죽을 꿰매서 이은 양피지 두루마리였습니다. 너비 44 ㎝에 길이 1 m ~ 8 m 나 되는 그 두루마리들에는 뭔지 모를 글자들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보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골동품상에 가져가면 몇 푼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두 소년은 그것들을 꺼내 들고 동굴을 나왔습니다. 무하마드가 다섯 개, 아메드가 세 개의 두루마리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두 소년은 베두윈 족장에게 알렸고, 족장은 두 소년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아메드는 골동상 한 군데에서 싼값으로 두루마리 세 개를 팔고 돌아갔고, 무하마드와 족장은 돈을 더 받을 욕심에 몇 군데를 더 기웃거렸습니다. 아주 귀한 것이라고 우기는 족장의 말에, 골동품 상인은 알아보고 나서 값을 매기겠다고 하였답니다.
족장과 무하마드는 그 상점에 두루마리 다섯 개를 맡기고 천막으로 돌아갔습니다. 골동상 주인은 그 길로 이스라엘의 성 마르코 수도원으로 사무엘 대주교를 찾아갔습니다. 한동안 두루마리를 살펴보던 대주교는 할 말을 잊은 채 어쩔 줄을 몰라했다고 전합니다. 그의 눈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대주교는 두루마리에 씌어진 글은 히브리 글일 것이라는 말과 함께 5파운드에 사겠다고 했습니다. 세기의 보물이 단 돈 5 파운드에 팔린 것입니다. (나중에 25만 불에 팔게 되지요. 하하.)
사무엘 대주교는 이 두루마리가 어쩌면 구약성서 원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 대주교의 가슴은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히브리 글자로 씌어진 이 두루마리가 구약의 원본이라면, 그것은 보물 중의 가장 큰 보물이지요. 구약의 원본은 발견된 적이 없으니까요. 그는 서둘러 예루살렘에 있는 아메리카 동방 연구소의 트레버 박사를 찾아갔습니다. 확대경으로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던 트레버는 어지러운지 잠시 일손을 놓고 눈을 지그시 감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하느님! 이것이 꿈이 아니기를! 어떤 은총으로 제가 이 귀중한 것을 보게 되었을까요? 사무엘 대주교님, 이것은 틀림없는 구약성서입니다. 아직 증거가 없다 뿐이지 제 생각에는 구약 원본이 틀림없습니다.”
트레버는 한참을 더 살핀 뒤 두루마리 가운데에서 구약성서의 이사야서를 찾아냈습니다. 두 사람은 너무나 기뻐 어찌 할 바를 몰랐다고 합니다. 한참 지나서야 트레버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답니다. “글씨체로 보아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기 전의 것입니다. 어서 사진을 찍어 과학자들에게 보여서 원본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들은 곧 사진 촬영에 들어갔습니다. 두루마리를 잘 다듬어 사진을 찍는 데는 무려 아홉 달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1948년 2월 그 사진은 세계 여러 나라의 유명한 고고학자들에게 보내졌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3월 15일, 사무엘 대주교는 미국 존 홉킨스 대학 고고학 교수 알브라이트 박사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거룩한 경전을 구해서 보내주신 대주교님께 축복과 감사를 드립니다. 이 문서는 구약 사본이며 기원 전 1백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발견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큰 발견이며, 인류 역사에 가장 뛰어난 발견입니다. 부디 나머지 두루마리도 찾아서 구약 39권을 모두 갖추게 되기를 빕니다.”
그 무렵, 이름 난 성서학자인 히브리 대학 고고학 교수 수케닉 박사도 옛 두루마리 세 개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른 소년 아메드가 판 두루마리였습니다. 그도 이 두루마리의 일부가 구약 원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두루마리들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것이 구약 원본임을 증명하는 일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때 나머지 두루마리 다섯 개를 사무엘 대주교가 가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사무엘 대주교와 수케닉 교수는 서로 만났습니다.
그들이 서로 만나 두루마리 여덟 개가 합쳐진 날, 그 날은 인류가 잃었던 보물을 되찾은 날, 20 세기 최대의 발견이라는 ‘사해사본’이 빛을 본 날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두 달 동안 두루마리들을 샅샅이 조사하고 나서 기자들을 불러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기자들은 숨을 죽인 채, 수케닉 교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떨리는 목소리를 받아 적었습니다.
“여러분, 이 두루마리에는 구약의 이사야서 원본이 들어 있습니다. 그밖에도 에세네 교파에서 썼던 ‘공동체 계율’, ‘빛의 아들과 어둠의 아들 싸움’, ‘감사 찬미가 모음’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크나큰 기쁨과 행운을 얻는 일이 다시는 올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두루마리의 정체가 기원전 250년에서 기원후 68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당시 가장 오래된 구약 성서 사본이라고 믿었던 알레포사본(925년경 기록)과 레닌그라드사본(1008년 기록)보다 1100년 이상 이전에 쓰여진 히브리어 성서였습니다. 이것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20 세기의 위대한 발견, 사해사본(The Dead Sea Scrolls)입니다.
드 보 신부를 비롯한 고고학자들은 이후 1949년부터 1956년 사이, 총 11개의 동굴에서 약 900편에 가까운 다양한 문헌과 유물들을 발굴해냈습니다.
사해사본들 중 비교적 잘 보존된 두루마리 사본들은 9개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나머지 부분은 사본의 조각들인데 흩어져 있어서 마치 퍼즐을 맞추듯 서로 맞추어 보아야 합니다. 사해사본에는 구약성서 중에서 에스더서만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 책들이 우연히 생략됐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쿰란 공동체가 사용하지 않았는지 분명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문서’은 발견된 순서대로 번호를 붙여 제1동굴에서 제11동굴까지 명명했습니다. 영어로 표시할 때는 번호를 처음에 붙이고 쿰란(Qumran)을 뜻하는 알파벳 ‘Q’를 붙여 1Q, 2Q 등으로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각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동굴들의 명칭에 덧붙여 이름을 붙이거나 숫자를 붙여 표시했습니다.
사해사본에 대한 연구는 구약성서 본문 이해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사해사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구약 성경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고대문서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성경 번역에 끼친 영향력은 놀랄만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특별히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히브리어로 쓰인 사본이 없다는 이유로 유대종교회의에서 정경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그 견해를 따르는 개신교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 제 2 경전 사본들이 이곳에서 발견 되었다는 것입니다.
1949년 중동전쟁이 끝나자 사해 지방은 요르단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던 프랑스 신부 드 브오 (R. De Vaux)가 사해 일대 탐험에 나섰습니다. 브오 신부는 무하마드와 아메드, 그리고 그곳 베두윈들을 데리고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던 벼랑으로 갔습니다. 브오 신부는 그곳에 에세네 교파가 살았던 자취가 반드시 남아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엄청난 보물이 단 한 군데의 동굴에만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는 귀중한 것일수록 만일을 대비하여 여기 저기 흩어 놓는 법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적중했습니다. 과연 브오 신부의 짐작은 맞았습니다. 탐험대는 동굴을 열 개나 더 찾아내었고, 그 안에서는 두루마리가 수백 개나 쏟아져 나왔습니다. 탐험이 계속 될수록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바위 아래 깊은 땅속에는 옛 도시 흔적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두 겹으로 된 성벽 안에는 저수지와 급수시설,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이곳이 요세프스를 비롯한 고대의 역사가들이 언급하고 있는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엣세네(Essene) 집단의 수도원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수도원은 원래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었으며, 이 보다 높은 지점의 계곡에 댐을 건설하여 겨울철의 우기에 흘러내려 오는 빗물이 수로를 따라 수도원의 물 탱크에 자동적으로 저장되었습니다.
한 주간 중 평일에는 근처의 수많은 동굴 속에서 기거하던 엣세네 수도자들이 안식일에는 이곳으로 내려와 물로 씻는 정결 예식과 성서 연구를 하였고 공동의 식사를 위한 대형 식당과 주방, 성서를 베끼는 필사실 등이 이곳에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키르바트 쿰란 (Khirbat Qumran)이라고 불리는 수도원 건물도 있었습니다. 수도원 방 안에는 나무로 만든 큰 책상과 걸상이 먼지에 덮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잉크병과 붓까지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그동안 발견된 문서들은 모두 그 방에서 쓰여졌음이 분명했습니다. 뒷날 과학적으로 실험하여 보니, 잉크병의 잉크와 두루마리 글씨의 잉크는 같다고 밝혀졌습니다
브오 신부의 탐험으로 밝혀진 사해 동굴의 옛 유적에 얽힌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이 사해 바닷가를 거닐기 전에 이미 이곳 동굴들에서는 에세네 (Essenes)파로 불리는 한 무리가 종교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리사이파나 사두가이파와 마찬가지로 유태교의 한 종파였습니다. ‘정의의 스승(Teacher of Righteousness)’ 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종파를 이끌었으며,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가 율법과 제사 등 형식과 권위에 치우친데 비해, 신비주의와 금욕 생활을 내세웠습니다. 에세네파 신자들은 재산과 예배, 독서와 식사 등을 모두 함께 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마지막에 이르면, 그들 ‘빛의 아들들’이 ‘어두움의 아들들’을 물리치고 하느님의 나라를 세울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0년 동안 에세네파 교인들은 금욕, 기도, 하느님의 말씀 읽기를 계속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던 세상의 종말은 끝내 오지 않았고, 대신 서기 68년이 되자 그들은 로마군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만 했습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무참히 짓밟고, 끝까지 항거하는 마사다 요새를 무너뜨렸습니다. 사해동굴의 문서들은 이때 로마군을 피해 동굴 속에 감추어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의의 스승’이 세례자 요한일 것이라고 하고, 지금 그곳에서 보여주는 꿈란 공동체의 하루 일상을 그린 영상도 그런 추정을 바탕으로 요한이 등장하지만 뚜렷한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 광야에서 활동했던 세례자 요한이나 근처의 요르단 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간 단식기도했던 예수님도 이 공동체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정할 수는 있습니다.
저희가 순례한 곳은 사해사본박물관이지만 실제 사해사본이 있는 곳은 아닙니다. 가이드가 일부는 있다고 안내하지만 저는 안 믿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인류 최대 보물을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그곳에 두겠습니까? 다만 유적지 안에 세워진 사해사본박물관은 이 사본을 만들었던 이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곳입니다. 우선 박물관에 들어선 사람들은 사본을 만들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그린 영화를 보는 것으로 관람을 시작합니다. 입체영화로 우리말로도 더빙되어 있습니다.
박물관에 두루마리의 일부 (제 생각에 가짜)를 전시해 놓았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사본 곳곳에 글자가 아닌 ‘……’라는 기호가 있는데, ‘야훼(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쓰는 것도 함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만약에 야훼라는 글자를 부득히 적어야 하면, 먼저 정결례로 목욕제계를 하고나서 한 글자를 쓰고, 다시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감히 입에 올릴 수 없었던 야훼 하느님을 예수님께서는 당시 쓰시던 아람어로 아주 친근하게 부르는 Abba, 우리말로 아빠라고 했으니,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지요.
박물관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흔적을 모형과 일부 발굴된 유물로 알려줍니다. 공동체의 규모와 당시의 생활상을 재현한 박물관에는 주거지, 회당, 공동 식당, ‘미크베’라는 정결 목욕의식이 행해지던 장소, 저수고 등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특히 종교의식을 거행하기 전에 몸을 씻었던 ‘미크베’는 초대 교회의 세례의식으로 고스란히 이어졌고 합니다. 박물관을 나오면 실제 공동체가 생활했던 유적지를 둘러보게 됩니다. 거기서 사해 문서가 발견된 여러 동굴을 건너다보는 것이지요. 사해도 아주 잘 보이는 곳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