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1
맹세시킴을 받고 - 어떤 사건의 재판에 있어 도저히 판결을 내릴 수 없거나, 증인
들을 내세울 수 없게 되면 최종적으로 다툼 또는 판결을 끝맺기 위해(히 6:16) 맹세를
시켰다(Roland; 출 22:11). 예를 들면, 분실된 물건이 우연히 어느 사람의 수중에 있
음이 발견되었을 때 그는 그 물건을 고의로 훔친게 아니라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
세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여타 사람은 그 맹세를 인정해야만 했다. 이것은 오직 맹세
의 대상자가 되시는 진리의 하나님께서 판결할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주의 단 - 성전 안뜰에 있는 '번제단'을 의미한다. 일반 백성들이 만일 성전에서
맹세할 경우에, 그들은 소위 '평미의 제단'인 번제단 앞에서 맹세하였던 것이다(마
5:23, 24).
=====8:32
국문(鞫問)하사 - '국문하사'로 번역된 '솨파트타'(* )는 '재판하다'는 뜻
을 가진 '솨파트'(* )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런데 본래 '솨파트'는 '재판하다'라
는 사법적 의미보다 더 광범위하게 활용된다. 즉 입법.사법.행정이 모두 포함된 통치
행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솨파트타'는 사법적 의미의
'판단'을 수행하는 의미가 짙다. 왜냐하면 선악간을 공정히 가려내셔서 그 행위대로
보응(報應)해 달라는 내용의 맥락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악한 자...의로운 자...갚으시옵소서 - 하나님은 인간의 선악간에 보상과 처벌로
정당히 보응하신다는 사상은 성경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보응
사상은 계약 관계에서 아예 공식화(公式化)되엉 있다(Towner). 즉 하나님 말씀에의 순
종 여하에 따라 저주와 축복의 보응이 임하리라는 것이다(신 28:1, 2). 그런데 이러한
보응은 곧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근거하여 신정 국가의 공의를 올바로 세우고자 하
는 데 목표가 있다. 솔로몬의 특별 간구 내용 중 무엇보다 먼저 등장하는 내용이 백성
들의 맹세의 신실함과 공의로운 보응 사상이다. 이처럼 선민의 공동체 내에서 공의를
이루는 문제는 하나님 앞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레 19:15;신 16:18;33:21;시
35:24;사 61:8등).
=====8:33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 선민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패배하는 것
은 곧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것이었다(레 26:17, 39-42;신 28:25, 48).
주께로 돌아와서...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 본절은 적에게 패배하여 포
로로 끌려간 경우를 말하고 있다. 신정(神政) 국가 이스라엘에게 있어 전쟁의 패배는
곧 하나님의 징계요,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어 자기 땅에서 추방당하는 것
은 곧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했다(Greenberg;호 9:3-5). 따라서 이스라엘이 다시 자
기 땅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징계의 해제요 하나님께로의 귀환이다. 혹자는
본절이 단순히 회개 기도를 의미하고, 포로의 경우는 다음 절(34절)에서나 나온다고
보나(Hammond), 수긍할 수 없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1) 문맥상 33절과 34절은 하나의
주제로 묶여지며, (2) 본절의 "돌아와서"(* , 슈브)가 일단 추방을 전제한 표현
이기 때문이다. 한편, "주의 눈이 주야로 보고 있는"(29절) 성전으로 돌아오는 것은
곧 주께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빌며 간구하는 것'(*
, 히트팔루 웨히트한누)은 자복하는 겸허한 심령으로 간절히 기도하
는 상태를 가리킨다. 사실 간절함이 없는 기도는 진실성이 결여되어 외식으로 흐르기
쉽다(눅 18:1-8).
=====8:34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므로, 비록 포로로 끌
려간 이국 땅에서도 당신의 백서들에게 개입하셔서 그들을 다시 고국으로 귀환시키실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성전에만 제한된 존재라면, 성전의 파괴는 곧 그의 거처의
상실을 의미하게 된다(왕하 25:9).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한 여타 민족신들의 운명처럼
역사의 유물로서나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정한 공간을 초월하여 계
시는 분이시므로, 어느 곳에서든지 당신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초를 감찰하사, 언제라
도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살아계신 전능자인 것이다.
열조(列祖)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 이스라엘에게 있어 땅은 단순히
군사적 점령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
신 기업이다(Williams). 따라서 그 땅에서 추방됨은 이스라엘의 위약(違約)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의 결과이다. 이러므로 조상들에게 선물로 주신 땅, 곧 그들의
기업으로 돌아오는 것은 다시금 계약에의 충실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것
이다.
=====8:35
하늘이 닫히고...주의 벌을 받을 때에 - 가뭄은 이스라엘의 자연 환경에서는 가히
국가적 재난이었다(17:7;18:1). 왜냐하면 팔레스틴은 샘이나 강이 흔치 않아서 가뭄이
한번 들면 아예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 같이 되기 때문이다(Scott). 이처럼 이스라
엘의 농작물은 때를 따라 이른비(가을비)와 늦은비(봄비)가 오느냐 혹은 오지 않느냐
에 절대 달렸다. 때문에 그들은 가나안 족속이 폭풍과 농작물의 신(神)으로 섬기는 바
알(Baal)을 숭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의 길에 빠질
때 하나님께서는 하는 문을 닫고 오히려 비를 내려주지 않음으로 해서, 모든 축복의
제공자는 오직 하나님 당신 뿐이심을 보여 주시고자 했다. 그런고로 당시 이스라엘에
게 있어 가뭄은 그저 자연적 재난이 아니라 그러한 재난을 통해 범죄한 백성을 징계하
시는 하나님의 채찍이었다.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 어떤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바로 그 이름의 권위
에 참여하여 그 대리자로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Abba). 따라서 어떤 이름을 인정
한다는 것은 바로 그 이름을 가진 이의 권위 및 주권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징벌을 당한 이스라엘이 그 곤궁한 처지에서 주의 이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 및 그 보호하에 들어가는 것이요, 모든 우상 숭배에서 떠나 여호와
유일 신아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죄에서 떠나거든 - '떠나다'에 해당하는 '슈브'(* )는 회개에 있어서 인
간편의 행동들을 가장 포괄적으로 요약해 주는 말이다. 회개의 행동은 (1) 죄에서 돌
아서서 (2) 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슈브'에는 바로 이
두 가지 소극적.적극적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떠나다'는 한글
표현이 갖는 소극적 의미에다가, 보다 적극적으로 선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가 '슈
브'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 '슈브'는 포로 귀환을 의미하는 동사로도 자주 활
용된다. 즉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것과 죄의 상태에서 돌이키는 것은 동일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33, 34절).
=====8:36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옵시며 - '가르치다'에 해당하는 '야라'(* )
는 어떤 주체의 독자적이고 지배적인 행동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된다. 즉 '던지다',
'보내다', '(활을)쏘다'등의 의미로 사용된다(출 15:4;시 64:7등). 그런데 본절에서의
'가르침'이란 재난을 겪는 중에 불현듯 임하는 깨우침과 같은 것이다. 즉 자신들이 원
하지도 않던 가르침이 복병이 쏜 화살처럼 예기치 않게 날아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내적 소질 개발과 같은 가르침이 아니
라, 자신 안에서는 결코 그같은 깨달음을 스스로 가질 수 없는 무자격한 자에게 재난
을 통해 강권적으로 임하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인간은 원치 않던 고통을 통해 '마땅
히 행할 선한 길'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8:38
각각...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 여기서 '재앙'(* ,네가)은 이미 그 안에 '징
벌'의 의미가 들어 있는 단어이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벌을 주듯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주신다(삼하 7:14;시 89:32). 그런데 '네가'는 '-에 닿다', '만지다'
란 뜻을 가진 '나가'(* )에서 파생하였다. 이 '나가'는 감동(感動), 즉 하나님
의 손길이 사람의 영혼에 접촉하신다는 의미로 사용된다(삼상 10:26). 한편 '깨닫고'
에 해당하는 기본형은 '알다'란 뜻인 '야다'(* )인데, 본 문맥에서는 '분별하
다'(disinguish)는 의미로 쓰였다. 그러므로 본절은 단순히 재앙이 임했음을 인지(認
知)하는 상태가 아닌, 재앙에 담긴 징계의 의미와 목적을 충분히 분별해 내는 상태를
말한다. 한편, 본절에서 특별히 강조된 사항은 (1) 죄에 대한 개개인의 인식 및 회개
와 (2) 어떤 종교적 의식(儀式) 보다는 마음의 상태, 즉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회
개의 진실성이다. 진정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철저한 죄인식을 통해 마음으로 회개하는
그 진실성과 겸허함을 보고 그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다.
=====8: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 30절 주석 참조
그 모든 행위대로...갚으시옵소서 - 32절 주석 참조.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 성경에서 '마음'(* , 레바브)
은 정서 활동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전 인격적 핵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Dentan). 이 핵(核)으로부터 정서, 지식, 의지의 활동이 일어나고 또한 외적 활동까
지도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18절). 그런데 이 인간의 마음은 오직 그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온전히 분별하시고 그에 따라 판결을 내리실 수 있다(렘 17:9, 10).
=====8:40
그리하시면...항상 주를 경외하리이다. '주를 경외함'은 이스라엘 신앙의 절대적인
가치이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그 자체로서 추구해야 할 절대 가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기도가 응답된 결과로서 '주를 경외함'을 회복하는 것은 마땅한 일
이다(신 31:13).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를 하나님의 사유하심이 성도의 하나님 경외
에 대한 조건부가 된다는 식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아니된다. 여기서 솔로몬의 이 말은
(1) 다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근거하여 그분의 긍휼을 간절히 바랬던 것이며, (2) 또
한 사유(赦宥)하심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시
130:4).
=====8:41
이스라엘이 속하지 아니한 자...이방인이라도 - 본절의 '이방인'(* , 노크
리)은 이스라엘에 귀화한 자들을 일컫는 체류자(* , 게르)와는 구별된다(민 15:14
이하). 다시 말해 '노크리'는 이스라엘에 일시 방문한 상인이나 여행자들이다
(Hamlin). 예를 들면 스바 여왕이나 나아만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10:1-13;왕하
5:1-19). 또한 정치적 목적으로 입국하는 각국의 사절들도 이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
나 어쨌든 본절이 이방인들을 향해 개방성을 띤다는 점에서 꼭 이스라엘에 내방한 자
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즉 '세상 만민'을 향한 개방성인 것이다(43절). 이처
럼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하는 하나님의 전 우주적 통치, 곧 말씀
(복음)의 전세계주의적 성격은 비록 희미하나마 구약 시대에도 면면이 흐르고 있는 주
요 사상 중 하나이다(창 22:18;출 22:21;민 15:14-16;시 22:27, 28;사 49:6 등). 그러
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사상이 보다 뚜렷히 나타난다(롬 3:29;고전 8:6).
=====8:42
능한 손과...펴신 팔 - 전능하신 하나님의 생생하고도 역동적인(dynamic) 보호, 섭
리, 구원의 행동을 가리키는 의인법적 포현이다(출 6:6;14:8).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 이러한 이방인들의 기도는 아마 어떤 경우에는
단순히 외교 사절로서 그 나라의 민족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정도일 수도 있다
(Montgomery). 혹은 단지 성전의 수려함과 명성 때문에 그 외양이나 일별(一瞥)코자
방문했을 수도 있다(대상 22:5). 그러나 나아만의 경우처럼(왕하 5장) 좀더 절실하게
찾아 오는 이방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8:43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대로 이루사 - 훗날 유대주의를 특징짓는 독선과 배타
성을 감안하면 본절의 이방인에 대한 개방성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지만 원래부터 하
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다(사 11:9, 10;롭
3:29).
땅의 만민...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 이방인의 기도에 응답해
달라고 요청하는 이유가 밝혀진다. 즉 "주의 이름을 알고 이스라엘의 신앙처럼 주를
경외하게 해달라"는 것이다(왕하 5:15-19). 이처럼 이스라엘의 신앙은 일찍부터 세상
만민들에게 개방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바울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열려진 구원을 말함으로써 편협한 유대주의에 반기를 들었을 때, 그것은 구약에 반대
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약을 옳게 증언하려는 것이었다(롬 10:12, 13). 한편 성전을 주
의 이름으로 일컫는다는 사상은 주의 이름을 성전에 두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16,
29절). 여기서 강조점은 '주의 이름'에 있지 '성전'에 있지 않다. 이처럼 '장소의 신
학'이 아닌 '이름의 신학'을 내세움으로써, 솔로몬은 하나님이 특정 장소에 제한당하
는 분이 결코 아님을 밝히 드러내려 했던 것이다(Anderson).
=====8:44
싸우고자 하여 주의 보내신 길로 나갈때 - 이스라엘에게 있어 전쟁은 언제나 하나
님께 속한 일이었다(삼상 17:47). 그러므로 공격적이든 방어적이든 모든 전쟁은 하나
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로 믿었다(Toombs). 그래서 본절과 같이 전쟁터에 종군(從軍)하
는 것을 "주의 보내신 길"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견지에서 전쟁에 임하는
병사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께 봉헌된 전사로 생각하였다(삿 5:2;사 13:3).
전 있는 편을 향하여 - 본절과 48절은 이제까지의 경우들 보다는 훨씬 멀리 떨어진
장소를 시사하다. 즉 전쟁터와 적국에 포로로 잡혀간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단지
그들은 성전이 있는 '방향' 쪽으로만 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멀리 떨
어진 장소에서나마 잊지 않고 방향만이라도 성전 쪽을 향하려는 간절함은 곧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은총과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 내적 열정 그 자체이다(Bahr). 그런고로
솔로몬은 그들이 그처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멸시치 않을 것으로 확신
하고,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던 것이다. 한편, 그런데 이처럼 성전과 예루살렘
을 향하여 바라보고 기도하는 행위는 포로기 이후에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의 관습처
럼 굳어졌다(Bahr;단 6:11).
=====8:45
돌아보옵소서 - '돌아보옵소서'의 기본 어근인 '아사 미쉬파트'(* )
는 원래 '공의를 행하다'란 뜻이다. 이는 전쟁도 단지 인간들끼리의 분쟁에 그치는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개입과 판결을 기다려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 말은 이스라엘이 전쟁에 임함에 있어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한
뚜렷한 명분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할 것과 또한 전쟁 수행 과정에 있어서도 시종 하나
님의 공의에 입각하여야 함을 뜻한다. 자기 민족의 이익을 무조건 편드는 여타 민족신
들의 속성에 비해 오직 공의를 따라 판결을 행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속
성이 잘 나타나 있다.
=====8:4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 이것은 솔로몬이 일곱번째 간구(46-51)와 같은
내용의 기도를 하는 까닭을 설명하는 말이다. 즉 범죄치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결
국 그러한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적국에 포로로 잡혀가는 경우가 생
길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레 26:27-39;신 28:64-68). 이것은
솔로몬이 인간의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는 솔로몬의 지혜가 단순히 국정(國政) 사무나 자
연 현상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본질에까지 심오하게 이르고 잇음을 알 수 있다(욥
15:16;렘 17:9;롬 3:10-18).
붙이시매 - '붙이다'에 해당하는 '나탄'(* )에는 '내버려두다' 또는 '허락하
다'는 뜻이 들어 있다. 좀더 사법적인 의미로는 '대가를 지불토록 어떤것을 넘겨준다'
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창 23:9;신 15:10 등). 그러므로 본절 속에는 (1) 포로가
되는 것은 범죄의 대가를 치루는 것이며, (2) 적에게 패배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하
에, 즉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한 일이라는 믿음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8:47
스스로 깨닫고 - 직역하면 "자신의 심령으로 돌아오고"로 번역할 수 있다. 원래
'죄'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의도하신 제자리를 벗어난 상태이다. 그러므로 회개의 과
정은 참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 '범죄'(* ,하타)는 '목표
에서 빗나감'을 의미하고, '패역'(* , 아와)은 '그릇됨', '어그러지고 구부러짐'
을 의미한다. 그리고 '악을 짓다'(* , 라솨)는 '방종에 빠져 적극적으로 하나님
을 거역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한번 빗나감으로써 점점 심각해지는 죄의 양상
을 점증(漸增)적으로 보여 준다 하겠다. 한편 솔로몬의 이 말은 후일 바벧론 포로 시
절에 경건한 유대인들에 의해 죄를 깊이 통회할 때 그대로 사용되었다(단 9:5;시
106:6).
=====8:48
온 마음과 온 뜻으로 -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기본 자세로, 신명기가 제시하는
규례와 일치한다(신 30:2, 6). 신 6:5 주석 참조.
열조에게 주신 땅 - 34절 주석 참조.
전 있는 편을 향하여 - 44절 주석 참조. 한편 본절에서 우리는 기도할 때의 방향이
땅->성->전으로 점점 좁아져 가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될수 있는 한 간절한 마
음으로 주님을 사모해야 된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8:4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 30절 주석 참조.
기도와 간구 - 28절 주석 참조.
돌아보옵시며 - 이에 해당하는 기본 동사 '미쉬파트'(* )는 '판단하다'란
뜻이다.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간구에 대해 공의와 긍휼로 판단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진실성 여부에 따라 기도에 응답
하실 것이었다. 45절 주석 참조.
=====8:50
허물 - '허물'에 해당하는 '페솨'(* )는 '실수.과오'란 뜻 보다는 더 강한
'반역'의 뜻을 갖고 있다. 즉 하나님께 저지를 패역한 범죄라는 성격과 이로 인해 생
긴 불화까지도 암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익파은 불화에서 생긴 하나님과의 간격이 인
간으로 하여금 온갖 왜곡된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욥 34:6;시 36:1;잠
17:19;29:22 등).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 '불쌍히 여김'에 해당하는 '라하밈'(* )은
'부드러운 자비심'(tender mercy)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서 이스라엘의 적들로 하여금 그러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
다. 여기서 솔로몬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에 국한된 분으로서가 아니라, 이방 통치자의
마음까지도 당신의 뜻대로 지배하실 수 있는 분으로서 신앙하고 있다(시 106:44-46;스
1:1). 한편, 그런데 그렇게 적들의 동정심이 일어나도록 하는 보다 근본적인 동인(動
因)은 바로 하나님의 동정심이다. 즉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회개하는 이스라엘에게
다시금 자비와 용서로 대하시는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불쌍히 여김'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 또 한편 '라하밈'은 '태' 또는 '자궁'으로 번역되는 '레헴'
(* )과 갚은 관련이 있다(3:26). 이는 마치 젖먹이 자식에 대한 어미의 마음처
럼 이스라엘을 향해 지극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갖는 상태를 가리킨다(시 106:44-46).
=====8:51
철 풀무 같은 애굽 - '풀무'(* , 쿠르)는 금속을 제련하는 용광로이다. 그러
나 여기서는 '제련'이란 의미 보다는 철이라도 녹일 정도의 뜨거운'열'이 강조되어,
애굽에서의 생활이 극심한 고통으로 가득했음을 비유로 말하고자 사용되었다. 신 4:20
주석 참조.
주의 산업 - '산업'(* , 나할라)은 '소유' 또는 '상속 재산'이란 의미이
다. 그런데 여기에는 '영구적인 소유'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주
의 '나할라'라는 말은 그들이 결코 버림받을 수 없는 존재, 곧 하나님의 특별하신 소
유로 주의 보호와 아낌 및 관심의 대상이라는 의미이다. 출 19:5 주석 참조.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비록 불순종으로 징벌을 받더라도 그것은 일시적
인 것이고, 회개하면 마침내 원래의 위치로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언제고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출 34:9;신 4:30, 31;9:26;시 33:12). 그런데 이처럼 이스라엘이 자신
들을 주의 '나할라'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근거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계약'이었다
(출 19:5, 6;렘 11:4). 따라서 이제까지 솔로몬의 모든 기도는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
엘을 상대자로 삼으시고 언약을 맺은 사실에 근거하여 드려졌던 것이다. 솔로몬은 결
코 이스라엘 자신의 미덕이나 공로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호소할 수는 없었다(신
7:6-11).
=====8:52
눈을 들어 - '눈'(* , 아인)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으나(시
119:18;잠 6:17;겔 6:9;마 6:22), '하나님이 눈을 든다'는 표현은 인간을 살피시고 구
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이다(시
33:18;34:15). 반명에 '하나님이 눈을 가리운다'는 표현은 인간의 기도와 요청을 무시
함을 의미한다(사 1:15).
종의 간구함...들으시옵소서 - 기도를 시작할 때 사용된 문구(28, 29절)가 지금 기
도를 마무리짓는 부분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들어달라는 간청으로 앞
뒤가 구성된 솔로몬의 기도는 51, 53절에서 보듯 이스라엘이 주의 산업이라는 점을 이
유로 들어 응답을 요청한 것이다.
=====8:53
주의 종 모세로 말씀하심 같이 - 이는 출 19:3-6의 말씀을 가리킨다.
세상 만민 가운데서 저희를 구별하여 - 이 말은 출 19:6의 '제사장 나라'와 '거룩
한 백성'에 상응한다. 한편 '구별하다'(* , 바달)란 말 속에는 '분리되다', '차
이를 만들다'는 뜻이 있는데, 이 말은 이스라엘이 이방 여러 나라와 특별히 구별되었
다는 문맥에서 자주 등장한다(스 6:21;느 9:2;10:28). 그런데 '거룩'(* ,콰도쉬)
에도 이러한 '구별'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러한 거룩 및 구별에는 단순히 속
된 것에서 분리되는 것 외에도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는 면이 들이 있다
(Eichrodt). 출 19:6의 '제사장 나라'는 바로 그러한 구별의 적극적인 면을 알려 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타민족과는 분리된 선민(選民)인 바 이는 이스라엘로 열방 중
제사장 나라로 봉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출 19:6 주석 참조).
주의 산업 - 51절 주석 참조.
=====8:54
솔로몬이 무릎을 끓고 - 기도할 때 솔로몬이 취한 자세에 관해서는 22절 주석을 참
조하라. 한편, 그런데 무릎을 끓는 자세에는 (1) 탄원(단 6:10;행 7:60;엡 3:15), (2)
복종(왕하 1:13;마 17:14;눅 5:8), (3) 예배(19:18;사 45:23)등의 의미가 들어 있다
(Davies). 일반적으로 무릎 끓는 자세는 직립(直立) 및 겸허함 등을 나타내는 자세이
다(Crawley).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 22절 주석 참조.
기도와 간구 - 28절 주석 참조.
아뢰기를 - '아뢰다'에 해당하는 '팔랄'(* )은 '호소하다', '기도하다'는 뜻
을 갖고 있는데, 여기서 '테필라'(기도)란 말이 파생되어 나왔다(28절). 그런데 '팔
랄'은 '중개자로서 행동하다'는 뜻도 있다(Thomas). 그렇다면 본장의 솔로몬의 기도는
그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솔로몬의 기도는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일종의 중
개자로서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8:55
회중 - '회중'으로 번역된 '카할'(* )은 특히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의 전 국민
적 신앙 집회를 가리키는 데 줄곧 사용한 단어이다(Pope). 즉 특별히 종교적 목적을
지니고 모인 무리를 뜻한다.
축복하며 가로되 - 14절 주석 참조.
=====8:56
이하의 내용(56-61절)은 봉헌 기도 이후에 솔로몬이 백성들에게 주는 일종의 축사
(祝辭)이다. 이에 반해 15-21절은 봉헌 기도에 앞선 인사말이라 볼 수 있다.
저가 무릇...태평을 주셨으니 - 여기서 '태평'(* , 메누하)은 '안식'이
란 뜻인데, 이 안식에의 약속은 신명기 12:9, 10에서 주어진 것이었다. 비록 여호수아
21:44에서 이 안식이 성취되었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아
직 많은 가나안 족속들이 땅의 도처에 있었고, 영구한 평화의 상징인 성전도 건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 시대의 정복을 거쳐 마침내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성전
이 건축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태평)은 완전 성취되었던 것이다. 솔로몬
은 지금 이러한 사실을 감회스럽게 신앙 고백하고 있다.
허하신 대로 - 이 역시 '다바르'(* )를 번역한 것이다. 24절 주석 참조.
모세를 빙자(憑藉)하여 - '빙자하여'로 번역된 '베야드'(* )는 수단을 나타내
는 전치사 '베'(* )와 '손'이라는 뜻을 가진 '야드'(* )의 결합이다. 따라서 이는
'모세의 손을 빌어' 또는 '모세를 통해'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다. 공동 번역은 "모
세를 시켜"로 번역하였다. 한편, 이처럼 솔로몬이 말하는 근거 구절로 우리는 레위기
26:3-13과 신명기 28:1-14의 내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루지 않음이 없도다 - 여기서 '이루지 않음'에 해당하는 '나팔'(* )은 '떨
어지다', '내던져지다'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는 죽음이나 멸망 또는 방치 등을
지칭하는 데 쓰인다(삿 20:44;애 1:7;대상 20:8). 이처럼 전능자요 선지자인 하나님의
말씀 또는 약속은 호리(毫釐)라도 헛되이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8:57
우리와 함께 계시옵고 - '우리와 함께 있다'(* , 임마누)에 들어있는 전치
사 '임'(* )은 이미 그 개념 안에 '친교와 교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임'으로
수식되는 관계는 고난이든 번영이든 같이 경험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
관계는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함께 동참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
간 사이의 관계가 '임'으로 수식된 것은 곧 인간과 같을 수 없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셔서 수치든 실패이든 공동으로 겪으시는 은총의 관계를 의미하다.
떠나지 마옵시며 - '떠나다'에 해당하는 '아자브'(* )는 '버리다', '포기하
다'는 뜻도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소리치신 말- "엘리 엘리라마 사박다니"-
에서 '샤바크'(사박)란 말이 바로 이 '아자브'에 해당하는 앎어이다(마 27:46). 그러
나 때로 하나님께서 성도를 일시 '아자브'하시는 경우는 (1) 연단을 위한 징계로 고통
과 곤경에 일시 처하게 하시는 경우(시 22:1;37:25;사 41:17), (2) 그리고 인간의 심
중에 있는 것을 알아보기 위한 경우(대하 32:31)등이 있다.
버리지 마옵시고 - '버리다'에 해당하는 '나타쉬'(* )는 '배척하다', '거절
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아자브'에 비해 '나타쉬'는 좀더 거부의 뜻이 강하
다고 할 수 있다.
=====8:58
우리의 마음을...행하게 하옵시며 - 본절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은
혜를 주시도록 솔로몬이 하나님께 간청하는 장면이다. 이처럼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힙입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57절에서 간구한 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곧 본절이 말하고 있는 '순종의 삶'을
가능케 하는 필수 조건이라 하겠다.
명하신 - '명할'(command)에 해당하는 '차와'(* )는 여러 맥락에서 활용되지
만 (룻 2:9;삼상 17:20;삼하 21:14), 특히 하나님이 그 주체인 경우는 다음과 같은 뜻
이 있다. (1) 하나님의 명령은 곧 성취와 완성을 의미한다(시 33:9;사 45:12). (2) 하
나님께서 명령하실 때는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수단도 같이 주신다(출
31:2-6). (3) 하나님의 명령은 곧 진실이다. 그리고 그 진실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
복이 뒤따른다(신 28:8;시 105:8). (4)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수행해야 할 모든 것
을 하나님 편에서 책임진다는 약속이 내포되어 있다(대상 16:15).
계명과 법도와 율례 - '계명'(* ,미츠와)과 '법도'(* ,호크)와 '율례'
(* , 미쉬파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과 명령을 가리키는 중언법(重
言法)적인 표현이다(2:3;신 4:1). 따라서 여기 언급된 세 가지 규례들을 지킨다는 것
은, 곧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삶을 의미한다.
=====8:59
나의 간구한 이 말씀...가까이 있게 하옵시고 - '가까이 있다'에 해당하는 '카라
브'(* )에는 좀더 역동적인 개념이 들어 있다. 즉 아주 가까이 다가가 친밀하게
접촉한다는 개념이 이 말 속에는 들어 있다. 그 예로 성경에서 '카라브'는 가까이 있
어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만질 수 있는' 접촉을 의미하는 데 종종 사용되
었다(출 32:29;36:2;레 10:4;민 9:6). 따라서 본절과 같이 소로몬의 자신의 기도가 하
나님께 '카라브'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에는, 마치 품안에 든 아기에게 기울이는 어
미의 지극한 관심처럼 자신의 기도에 관심을 기울여 달라는 간곡함이 담겨 있는 것이
다.
날마다 당하는대로 - 즉 '매일의 필요한 것을'(with our daily needs, Living
Bible). 출 16:4;마 6:11등의 구절에서 같은 뜻의 말을 찾아 볼 수 있다. 진정 하나님
의 뜻대로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매일의 필요한
은혜를 풍성히 채워주실 것이다.
=====8:60
세상 만민에게...알게 하시기를 - 성전을 봉헌함에 있어, 솔로몬은 (1) 그 성전이
주의 이름과 영광을 보존하고 (2) 나아가 그 성전을 통해 열방에 주의 이름과 영광의
빛이 전달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唯一性)이 온 천하에 밝히 드러나기를 기원하
고 있다(43절).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 여기서의 '하나님'은 '하엘로힘'(* )으
로 정관사 '하'(* )가 들자 있는 '그 하나님'(the God)이다. 즉 살아계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친히 강한 손과 펴신 팔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따라서 진정 '여호와'만이 참되고 유일하신 신(神), 즉
'엘로힘'이신 것이다. 한편 본절은 23절과 함께 신명기적 신앙 고백의 형태를 띤 것이
다(신 4:35, 39).
=====8:61
화합하여 - 본절에서 '화합하여'로 번역된 원어는 전치사 '임'(* )이다. 이
'임'에 담겨있는 본래적 의미를 고려할 때(57절), 본절가 같은 번역이 가능하다. 그리
고 하나님과 '임'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 '화합하는'길이요 또한 '완전케'되는 비결이
다.
완전케 하여...지킬지어다 - '완전하다'[(* , 솰렘)는 어떤 관계가 비뚤어짐
없이 건전하게 조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그렇게 회복된 관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솰렘'에서 '평화'를 의미하는 '솰롬'이 파생되어 나왔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이 '솰롬'(평화)의 관계에 있는 상태를 곧 '솰렘'(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런데 본절에서 보듯 그와 같은 '솰렘'(완전)의 결과 혹은 과정이 곧 '법도를 행하며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완전'을 의미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스'
(* )는 "완전히 성숙함, 그리고 지정된 목적에 도달함"을 의미하고, 라
틴어 '페르펙투스'(perfectus)는 "처음부터 철저히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
(Campbell).
오늘날과 같이 - 성전 봉헌시 왕과 백성들의 마음 상태가 순종과 헌신으로 불타오
르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렇듯 당시에는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서 번영과 평안의 상태를 누렸으나, 후일 왕과 백성들이 가증한 우상 숭배
의 죄악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성도들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깊이 깨달아 늘 깨어 있기를 힘써야 한다(벧전 5:8).
=====8:62
왕과 함께 한 이스라엘 - 성전 낙성식에 참여하고 있는 왕과 백성들 사이에 형성되
어 있는 친밀하고 화합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57, 61절). 여기에도 '화
합', '동행', '친교'의 뜻을 가진 전치사 '임'(* )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하
나님 앞에서' 함께 제사를 드리는 왕과 백성들의 이러한 화목함은 신정(神政) 통치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이스라엘의 신정 통치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백성들은 곧 하나님
의 백성이고 왕은 단지 하나님이 세운 백성의 목자일 뿐이다(삼상 13:14;삼하 5:2).
다 여호와 앞에 희생을 드리니라 - 언약궤 안치식(1-21절)과 솔로몬의 봉헌 기도
(22-61절)가 끝난 후, 마지막으로 거대한 규모의 화목제가 드려짐으로써 성전 봉헌식
은 그 절정에 달하였다. 병해 구절인 대하 7:4-10에는 악기를 동원하여 여호와를 찬양
하는 장면까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당시 여호와께 대한 감사와 헌신, 친교의 표시
는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 사건인 성전
봉헌식을 맞이하여 거대한 규모의 희생제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63절).
=====8:63
화목제의 희생 - 원어로는 '제바흐 쉘라밈'(* )인데, 이 용어는
제사 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제사에만 쓰였다(삼상 1:21;20:29 등). 신 27:7을 보
면 "또 '쉘라밈'(화목제)을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레 7:15에 의하면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
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쉘라밈'을 드리는 동기는 즐거움과 감사인 것을 알 수
있다(Milgrom).
소가 이만 이천이요. 양이 십 이만이라 - 이 숫자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 일부 학자
들은 본절의 기록을 과장 또는 오기(誤記)로 생각하기도 한다(Montgomery, Thenius).
그러나 전반적인 정황으로 미루어, 이는 가능한 숫자이다(Keil, Bahr). 왜냐하면 (1)
보통의 화목제와 달리 성전 낙성식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위한 제사일 뿐 아니라,
(2) 이 제상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하수까지'의 전 국민(가장
및 대표들)으로 나타나고 있고(65절), (3) 원래의 번제단만으로 감당할 수 없어서 성
전 앞뜰 가운데를 구별해 특별히 사용해야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64절). 그리고 제물
(짐승)을 잡고 준비하는 일은 반드시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의 임무만은 아니었다. 이러
한 일은 제물을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든지 할 수 있었다. 단지 희생 제물에 피
를 번제단 사면에 뿌리는 일만이 제사장의 직무였다(레 1:5, 6;3:2, 8). 한편, 다윗
시대에 30세 이상의 레위인들이 38,000명이었으므로(대사 23:3), 비율에 따라 솔로몬
당시의 제사장들의 수효는 대략 2,000-3,000명 정도였을 것이다(Keil). 그러므로 이러
한 전반적인 상황를 고려한다면, 낙성식 기간의 7일 동안 소 22,000과 양 120,000의
희생 제물을 처리하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을 보면, 네로 황제 당시의 유월절에 양 250,000 마리가 2-3시간 동안에 제물로
드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대기를 비롯한 고대의 모든 역본들의 기록이 본
문의 기록과 일치하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기록과 일치한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숫자를 기록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낙성식을 행하였는데 - 여기서 '낙성식'(落成式)은 '시작하다', '봉헌하다', '창설
하다'란 뜻의 '하나크'(* )에서 파생된 말로, 가옥이나 성전등을 완공한 후 이
를 기념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예식을 의미한다(신 20:5;대하 7:5, 9). 한편, 후
대 유대인들은 '하눅카'(Hanukkah)란 절기를 지켰는데, 이는 '수전절'(修殿節)이란 의
미로 곧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oochus Epiphanes)가 예루살렘 성전을 훼
파하여 더립힌 것을 재건하고 성결케 하여 재봉헌한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레위기 서
론, 히브리 절기와 축제).
=====8:64
거룩히 구별하고 - 53절 주석 참조. 그런데 본절에서 '거룩히 구별하다'란 말은 단
지 한 단어 '카다쉬'(* )를 번역한 것이다. 아마도 '거룩'의 기본 의미가 '구
별'이기 때문에 이처럼 번역한 듯하다. 그런데 본래 사람이든 장소, 물건이든 그 자체
의 거룩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련 및 접촉 때문에 거룩하게 된다(Wood). 한
편 '카다쉬'의 반대어 '홀'(* )은 '속된 것' 또는 '평범한 것'을 의미한다. 여기
서 솔로몬은 여호와의 전 앞뜰, 곧 제사장의 뜰(6:36)을 거룩히 구별하여 임시적인 제
단 장소로 삼았는데, 이는 본래 거룩히 구별된 번제단만으로는 봉헌식 때의 많은 희생
제물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번제와 소제와...화목제 - 레위기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부분을 참조하
라.
=====8:65
칠 일 칠 일 합 십 사 일 - 성전 봉헌 절기 7일과 초막절 7일을 가리킨다(대하
7:8-10).
하맛 어귀 - 하맛(Hamath) 왕국의 남쪽 경계는 곧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였다
(Haldar; 민 13:21;수 13:5;삿 3:3). 이 나라는 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 2세에게 정복
된다.
애굽 하수 - '애굽 하수'(* , 나하르 미츠라임)는 하나님께서 아
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의 남쪽 경계선으로 등장한다(창 15:18).
그리고 여기서 하수(河水)는 바로 나일강을 가리킨다.
=====8:66
제 팔 일에 - 이 날은 절기 '십 사일'중의 '팔 일'이 아니라 첫번째 절기인 성전
봉헌절기 7일이 끝나고 두 번째 절기의 '팔일'째 되는 날, 즉 초막 절기 7일이 끝나고
난 다음 날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성전 봉헌 절기는 7월(에다님 월) 8일부터 14일까
지 7일간 계속되었고, 이어 7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은 초막절(장막절)로 지켜졌
다. 이어 7월 22일, 즉 초막 절기 8일째에는 폐회 축제가 있었으며(레 23:33-39), 결
국 백성들은 폐회 축제가 끝난 저녁 또는 다음 날, 곧 7월 23일에 각각 자신들의 집으
로 돌아갔던 것이다(대하 7:10).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는데 - 원래 '장막'(tent)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이동식 거
처로 이스라엘이 광야 유량 시절에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시대 당시는 가나
안 정착 이후로도 400여년이 지난 때로, 이 때는 이스라엘도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 '장막으로 돌아가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집으로 돌아가
다'라는 의미로 사용된(삼하 20:1;삿7:8) 관습화된 언어 표현일 뿐이다(Keil,
Hammond).
다윗과...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즐거워하였더라 - 성전 봉헌식을 마
루리 짓는 본절에서 솔로몬 대신 특별히 다윗의 이름이 거론된 것은, 성전 건축은 다
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실질적인 성전 건축자는 다윗이었기 때문이다
(Keil, Bahr). 즉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단순히 다윗의 계획과 이상을 실행에 옮기는
역할을 감당했을 뿐이다(Hamm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