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은 단순한 휴식공간만은 아니다.
임금과 왕세자가 책을 읽으면서 학문을 연마했다.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과 서향각 등은 왕실 도서관의 용도로 쓰였고,
영화당은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이들 하나하나의 건물도 각각 특색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연출하는 경관이 더 절묘하다.
휴식을 위한 부용정은 연못에 발을 담근 형상이고,
행사가 치러지던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였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다.
-부용정과 부용지-
부용정(芙蓉亭)은 1707년(숙종 33년)에 지은 택수재(澤水齋)이다.
1792년(정조 16)에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이라 했다. 부용정은 후원의 꽃이다.
동쪽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300여평 넓이로
연못을 파 '태액지(太液池)라 하고 이를 중심으로 집을 지었다.
부용(芙蓉)이란 연꽃을 일컫는 말이다.
부용정은 바로 그 이름에 걸맞게 연꽃이 펼쳐진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十'자형을 기본으로 한 독특한 형태의 건물이다.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4칸의 아(亞)자형을 기본으로 하면서
그 남쪽 면의 일부가 돌출되어 있다.
장대석 기단 위에 다듬은 8각형의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우고,
기둥 위에는 주두와 익공 2개를 놓아 굴도리를 받치고 있는 이익공집이다.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정자의 기단 남면과 양측면에 계단을 두어 툇마루로 오르게 되어 있다.
정자 북측에 파놓은 넓은 연못을 향하도록 되어 있다.
북쪽 연못에는 정자의 두리기둥 초석들이 물 속에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툇마루에는 아름다운 평난간을 돌렸다.
부용지는 네모난 모양이고 연못의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다.
이는 신선들이 논다는 삼신선산의 하나인 방장(方丈)이나 봉래(蓬萊)
또는 영주(瀛州)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연못에는 서북쪽 계곡의 물이 용두로 된 석루조를 채우고
넘치는 물은 연못의 동쪽 돌벽에 있는 출수구로 흘러나가도록 되어 있다.
정조 임금이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마치고 돌아 온 후,
이곳 부용지에서 낚시를 하며 만족해 했다고 한다.
정조는 자주 부용정을 찾아 풍류를 즐긴 것으로 전해진다.
정약용의 <부용정시연기>에 나오는 일화이다.
"부용정에 이르러 상(임금)께서는 물가의 난간에 임하여 낚싯대를 드리웠다.
여러 신하들도 연못 주위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낚아서 통 안에 넣었다가는
모두 다시 놓아 주었다.상께서는 또 여러 신하들에게 배를 띄우라고 명하고 배 안에서
시를 지었는 데,정해진 시간 안에 시를 지어 올리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연못 가운데에 있는 조그만 섬에 안치시키기로 하였다.몇 사람이 과연 섬가운데로
귀양갔는 데 곧 풀어주었다.또 음식을 올리게 하여 취하고 배가 부르도록 먹었다."
- 주합루와 어수문.
주합루(宙合樓)는 정조가 즉위한 해인 1776년에 완성한 2층 누각 건물이다.
정조의 지시에 따라 단청은 하되 검소하게 했다.
아래층에서는 왕실 직속 도서관인 규장각을, 위층에는 열람실 겸 누마루를 만들었다.
규장각이란 문장을 담당하는 하늘의 별인 규수가 빛나는 집이란 뜻이다.
주합루란 천지 우주와 통하는 집이란 뜻이다.
체제공, 정약용, 이가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적서(嫡庶)의 구별 없이
다양한 인재들이 여기서 활동하였다.
이곳에서 정조는 열흘마다 시제를 내렸는데,
젊은 학자들이 밤낮으로 학문의 증진에 매달렸다.
그러니까 주합루는 정조 때 왕과 신하들이 정사를 논하였던 학문과 예술의 전당이었다.
주합루라고 쓴 편액은 학문을 부흥하고자 인재를 과감히 등용한 정조의 친필이다.
둥근기둥과 모난 기둥을 알맞게 배열해 놓은 건축 구조는 하늘과 땅의 조화로운 이치를
상징한다. 규장각은 단순히 학문만을 연구하는 기구는 아니였다.
다음해 영조가 죽자 곧바로 정조는 왕이 되었다(1776).
그는 왕이 되자마자 아버지시호를 장헌(莊獻)으로 하고,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포하였다.
그런 와중에 즉위 한 그 해에만 세 번이나 왕을 암살하기 위한 음모가 탄로 났고,
실제로 자객이 왕의 침전 근처까지 도달하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노론의 발호를 막을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던
그는 즉위 초 오로지 스스로 살기 위해 힘을 길렀다.
먼저 홍문관을 대신하여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서얼을 해방시켜
검서관으로 등용하여 문필을 장악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언로를 장악해야 자신의 개혁에 반대하는 여론을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 중에서 규장각을 찾아본다.
정조는 첫사랑이었던 장덕이를 따라 왕의 신분을 감춘 채 노량진 나루 장터로 나들이를 떠나고
그곳에서 유득공, 정약용, 서유구, 이덕무와 같은 서얼 출신의 실학자들을 만나게 된다.
정조 대는 중화주의가 점점 그 기반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경제구조 역시 농경사회에서 상공업사회로 변모되던 시기다.
그리고 정조는 노량진 나루 장터에서 이 변화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의 말대로 당시는 “궁에서는 예론에 묶여 설왕설래 하지만
그 사이 시정에서는 새로운 문물이 싹트고 있었던” 시대인 것이다.
더 이상 정조에게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어두운 트라우마를 찾아볼 수 없다.
관객들은 새로운 학자들과 만나고 세상의 변화를 빠르게 감지한 정조를 보며
조선의 썩은 관절을 닦아 낼 왕이 바로 그이기를 고대한다.
그리고 정조는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정치적 줄서기를 잘못해 길이 막히고,
서자 출신이라 길이 막혔던 유생들에게 도화선 같은 한마디를 던진다.
“우리 모두 규장각에서 만납시다!”라고 말이다.
규장각은 집권초기 정조의 탕평-개혁정치의 산실이었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漁水門)에는 임금을 물에,
신하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게를 함축한 뜻이 담겨 있다.
어수문은 임금이, 그 옆의 작은 문으로는 신하들이 출입했다.
어수문에 대한 다른 의견으로는
<임금을 어(漁)에 신하를 물(水)에 비유> 했다는 말도 있다.
이는 임금을 물에, 신하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 간의 친밀한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 있고,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는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긴 문이다.
이처럼 문 이름 하나만 보아도 정조의 민본정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 영화당
부용지 옆에 영화당(暎花堂)이란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이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영화당이라는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지금 건물은 숙종 18년(1692년)에 재건한 것이라고 하며, 한쪽으로 춘당대 마당을,
또 다른 한쪽으로 부용지를 마주하며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이다.
영화당 앞마당에 해당하는 춘당대는 왕족을 위한 휴식공간이면서도,
친히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를 실시한 곳이다.
이 춘당대에서는 역대 임금이 많은 행사를 베풀었다.
영조는 재위 3년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여 종친 63명을 영화당으로 불러
술을 내리고 활쏘기를 한 다음 상을 내렸다.
영화당에서는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문과와 무과의 시험이 자주
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