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임숙녀 전교사님이 쓰신 자서전 <조신부님과 임회장님>입니다. 두 분께서 마지막 봉사를 하셨던 게쎄마니 피정의 집을 지나면서 두 분이 생각났습니다. 두 분의 자취가 남아 있는 피정의 집에서 많은 추억을 떠올렸었지요.
2007년 1월 7일에 작고하신 임숙녀 전교사님께서는 생전에 이 글들을 제 홈페이지에 실어도 좋다고 허락하셨기에 서석성당 친구들 카페에도 소개합니다. 임숙녀 전교사님께서는 자신의 글이 자신을 돋보이려는 자랑의 마음으로 보이지 않을까에 대하여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이 글에 관심을 보이시는 분이 있다면, 그런 취지를 헤아려주시면서 믿음 외의 목적으로 활용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이 글의 원문은 임숙녀 전교사님께서 집필하셨으며, 조 필립보 신부님의 한국전쟁 회상기 '기나긴 겨울'에도 일부 인용된 바 있습니다. 저는 네이버 오픈 백과에 조 필립보 신부님이나 임 숙녀 전교사님 또는 서석천주교회에 관해 몇 편의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 내용들은 임숙녀 전교사님의 이 글을 토대로 하여 쓴 것입니다.
제가 네이버에 올린 글들이 여러 블로그나 카페 등에 옮겨진 것으로 보아서, 하느님께 평생을 봉헌한 두 분의 삶에 대해 감동을 느끼는 분이 많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두 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옮겨간 것에 대해, 저로서는 특별히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글 (이 글을 바탕으로 하여 쓴 저의 글과, 제 글을 옮겨 간 다른 게시판의 글 포함)에 대한 모든 권리는 임숙녀 전교사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신부님의 작은 희생
조신부님께서는 식사는 항상 일정하며 소식으로 드신다. 아침에는 토스트 2장과 계란 1개, 커피 2잔을 드시고, 점심때는 샌드위치와 커피 1잔, 저녁은 반찬이 3가지인 한식이며 후식은 언제나 간단한 것으로 하신다. 아마 인민군에 의해 억류 생활 3년을 거치면서 식사의 양이 적어지신 듯하다.
어느 때인가 식복사가 관절염이 심해져서 치료를 받기 위해 잠시 일을 쉬게 되었다. 신부님께서는 다른 식복사를 구하지 않고, 그 분이 돌아올 때까지 손수 식사를 해드셨다. 나는 요리 기술이 없는지라 설거지 정도만 도와 드렸고, 가끔 신부님께서 바쁘실 때는 저녁 진지만 해드렸다.
그러던 중 야채가 떨어졌기에 밭에서 고들빼기를 캐서 삶아 가지고 케찹에 묻혀 드렸다. 신부님께서는 식탁에 오른 것은 아무 말씀 없이 모두 잡수신다. 어쩌면 고들빼기 요리를 약 드시는 기분으로 잡수셨을 지도 모르겠다. 접시에 국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밥을 한 술 넣어서 깨끗이 닦아가며 잡수신다. 전체적인 양은 적지만 남기시는 일이 없는 것이다.
하얀 쌀밥만 드시면 싱거울 듯해서 영양가를 높일 생각으로 검은콩과 좁쌀 등을 섞어서 진지를 해드렸다.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식사를 하시면서 먼저 콩을 다 골라서 드신 뒤 다른 것을 드시는 것이었다. 나는 신부님께서 콩을 좋아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매일 콩과 좁쌀을 넣어 드렸다.
그로부터 몇개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신부님께서는 찾아오신 손님과 북한에서의 억류 생활에 대해 말씀을 나누셨다. 그 손님이 여쭈어 보았다.
"포로들에게 식사는 어떻게 주었는지요?"
"한 달에 한 번씩 배급을 주면 그것을가지고 포로들이 끓여 먹었습니다."
"주로 무엇을 주었습니까?"
"옥수수를 줄 때도 있고, 콩을 줄 때도 있지만 주로 좁쌀을 주었습니다. 이북에는 좁쌀 농사를 많이 하는 것같습니다. 반찬은 소금과 배춧국이고, 쌀은 구경도 못했습니다. 3년 동안 콩과 좁쌀을 많이 먹은 탓인지 지금도 그 음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아찔했다. 얼마나 죄송스러웠는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진작 그 말씀을 하셨으면 안 드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신부님께서는 배고팠던 시절을 생각하시고 식탁에 오른 음식은 무엇이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잡수셨던 것이다.
나는 신부님께서 싫어하는 콩을 먼저 골라 잡수신 까닭을 여쭈어 보았다.
"맛없는 것을 먼저 먹고, 맛있는 것을 나중에 먹으면 입에 맛있는 것이 오래 남습니다. 또, 맛있는 것을 먹는 동안에 맛없는 것을 잊게 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개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데 신부님 생각도 옳은 것 같다. 나는 그런 것을 떠나서 매사에 감사하며 자신을 희생하시는 신부님의 그런 마음을 본받으려고 노력했다.
신부님께서는 바나나, 오렌지, 사과, 배, 딸기 같은 과일을 좋아하신다. 지금은 수입품이 많아져 값이 싸지만 그 때는 값이 비쌌다.
어느 날인가 가게에 바나나가 나왔길래 세 개를 사 가지고 왔다.
"신부님, 바나나가 나왔어요. 첫물이라서인지 한 개에 1.000원씩이네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한 말인데 실수였다. 신부님은 식사 때 후식으로 드린 바나나를 드시지 않았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나니 바나나는상해서 버려야 했다. 나는 이상했다. 그렇게 좋아하시던 바나나가 아니던가.
몇 주일이 지나서 곰곰이 생각한 끝에야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그 때도바나나를 드리면서 말씀드렸다.
"신부님, 바나나가 많이 나왔습니다. 향이 아주 좋은데 굉장히 싸네요. 한 개에 100원이에요."
신부님께서는 그 바나나를 맛있게 드시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가끔씩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했다.
신부님께서는 어쩌다 신자들이 과일을 사오셔도 값이 비싸고 고급 과일이라고 생각되면 사양을 하시는 것이었다.
"본 신부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값이 싸다고 생각되는 것만 잡수신다. 과일뿐만 아니라 고기 같은 부식들을 선물 받으면 이웃을 먼저 생각하시고 나누어 드셨다.
의복도 자주 세탁을 해야하는 속옷, 런닝셔츠, 양말은 5장씩만 두신다. 나머지는 이웃들에게 나눠주셨다. 겨울 내의가 두 벌 이상 되면나머지는 이웃에게 주었다.
침구는 담요 2장뿐이다. 30∼40년을 덮으셔서 털이 빠지고 찢어지고 색이 바랜 것을 여름에는 한 장, 겨울에는 두 장을 덮으신다. 신부님은 이것으로 넉넉하다고 말씀하시면서 누가 이불을 사드리면 신자들이 사용하는 방으로 보내셨다.
신부님께서는 옷이 많거나 물건이 많으면 불편해 하셨다.
"본 신부에게 허락된 돈은 아주 적은 것이기 때문에 가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부님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다. 지금 너무 부자로 사는 것 같아 주님께 죄스럽다는 것이 신부님의 한결같은 마음가짐이셨다
한국을 떠나시며 남긴 말씀
1996년 가을 무렵이었다. 홍천 본당 연령회 회장님과 회원 몇 분이 조신부님이 계시는 <게쎄마니 기도의 집>을 방문했다. 신부님은 손님들과 함께 홍천본당 사목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환담을 나누셨다. 그러다가 이런 말씀도 하셨다.
"본 신부는 한국에서 살아온 세월이 고향 호주에서 생활한 시간보다 더 많습니다. 한국은 저의 제2의 고향입니다. 사후에 한국에 묻히고 싶으니 홍천 성당묘지 산에 자리 하나 남겨주십시오."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셨다. 그런 신부님께서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 새삼스럽게 고국인 호주로 돌아가셨을까? 신부님을 아시는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고 아쉬움을 느끼는 것 같다. 그 연유에 대해 내가 아는 대로 말씀드리겠다.
앞에서 적은 대로 신부님께서는 1997년부터 몸이 편찮으셨고, 자주 병원에 가셔야 했다. 시력이 나빠지고, 감기가 드시고, 관절이 약해지면서 거동마저 불편하여 2주일이나 입원 치료를 받으시기도 했다.
입원 치료비가 100여만원이나 들었다. 신부님께서는 치료비가 많이 나왔다면서 걱정하셨다. 그 때부터 깊은 생각에 잠기시더니 어느 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본 신부는 한국을 도와주기 위해서 왔는데 이제는 피해만 끼치고 있으니 안되겠습니다.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말씀드렸다. 의료 보험에서 도와주고 있으니 병원비 부담은 걱정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신부님께서는 의로보험 회사에 미안하다고 하셨다.
"한국 교회에 도움을 줄 수 없으면 돌아가야 합니다."
그 후 신부님의 이런 마음이 굳어지셨다. 나는 여러 말씀을 드리며 신부님을 만류했다.
"신부님께서는 58년간이나 한국 민족과 춘천교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셨습니다. 그런 신부님께서 노인이 되시고 치료비가 많이 든다고 우리나라나 교회가 외면하겠습니까? 신부님의 노후생활을 기쁘게 보살펴 드릴 의무가 저희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말씀도 그 분의 마음을 바꿔 놓지 못했다. 신부님께서는 한국이 좋으시고, 춘천교구의 모든 분들을 사랑하지만 도움을 줄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 돌아가시겠다는 것이다.
신부님께서는 1940년(26세)에 한국의 춘천교구에 오셔서, 1998년(84세) 11월 12일에 우리나라를 떠나셨다.
"그 동안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본 신부 영혼의 반은 한국에 두고 갑니다."
떠나시던 날, 신부님이 남긴 말씀이다.
조신부님께서는 지금 호주 멜본의 골롬본회수도원에 계시고, 매일 미사 때면 한국 특히 춘천교구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신부님의 주소 전화는 다음과 같다.
주소
Father Philip Crosbie St. Columban's P.O.BOX 752
Niddrie D.C..Vic. 3042 AUSTRALIA
전화
011-613-9379-4644
전화기를 들고 여기까지 누르면 교환원이 나와서 영어로 말하는데 대화를 할 필요 없이, 229를 누르면 됩니다.
* 주소와 전화 번호는 조 필립보 신부님 생전의 연락처입니다.
지금은 하느님 옆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고 계시겠지요.
조신부님의 약력
1915년 11월 10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남
1939년 12월 21일 서품
1940년 춘천지목구 홍천본당 보좌신부로 부임
1941년 12월 8일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투옥
1942년 5월 일제에 의해 본국으로 추방
1947년 2월 한국에 돌아온 뒤 홍천본당 주임 신부 (3년 3개월)
1950년 6월 27일 인민군에게 납치, 포로수용소 등에서 억류 생활
1954년 북한에서 석방된 뒤 8월 석방된 뒤 홍천본당 주임신부 (15년 4개월)
1969년 12월 포천본당 주임신부 (5년 9개월)
1975년 8월 간성본당 주임신부 (9년 6개월)
1986년 2월 원통본당 주임신부 (3년 2개월)
1989년 4월 신남준본당 주임신부 (1년 8개월)
1990년 12월 부평 보속을 위한 피정의 집 준비
1993년 5월 <겟세마니 기도의 집> 피정 지도 (6년 6개월)
1998년 11월 12일 본국(호주)으로 귀국
2005년 3월 23일 호주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음
이상으로 조 신부님에 대한 기록은 마침니다.
이어서 조 신부님과 함께 주님의 도구가 되셨던
임숙녀(보나) 전교사님의 전교일지를 연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