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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고절(雅致高節)속의 선학동 마을
봄이 조금씩 밀려와 관음봉 아랫마을에 아지랑이를 뿌렸다.
하늘은 명징(明澄)한 빛으로 가득하고, 옥색 바다는 숨을 죽이고 살랑거리는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선학동에서 매서운 바람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겨울 볕에 그을려 가는 골목길에는 짙어진 농담과 잿빛 음영이 교차하면서 부드럽고 다정스럽게 붙들며 시름해진 과거를 끄집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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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백 이청준 선생은 어느 봄날, 고요한 마을을 내려다보며「선학동 나그네」를 단숨에 휘갈겼으리라. 희미하게 떠오르는 조각난 그림들을 맞추어가면서 형언키 어려운 한을 꾸역꾸역 풀어내고서야 진한 눈물을 흘렸지 않았을까. 평생을 떠돌이로 살아가는 소리꾼 아버지 유봉과 딸 송화, 그리고 이복 남동생 동호. 앞을 못 보게 된 이복누이와 아버지의 곁을 떠났으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누이를 찾아 헤매다 만나게 된 오라비의 애달파 하는 사랑. 눈을 멀게 한 아비를 용서하며 아비의 유골을 선학동 관음봉 아래 명당에 묻고자 찾아온 송화, 그리고 평생 송화를 사모하는 주막집 용택이의 도움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아버지의 유골을 마을 사람들 몰래 암장하고 떠난 여인의 삶을 어찌 눈물 없이 그려 낼 수 있으랴. 선학동 나그네는 우리들의 삶 속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가는 방식이 진하게 남아 있기에 우리는 천년학이 하늘로 비상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짠 내음마저도 살갑게 느껴지는 선학동.
실핏줄같이 이어진 골목길을 걸으며 말간 볕에 농익은 추억 하나가 눈물로 터져 나올 것 같다. “영감이 꽃상여 타고 떠나 던 날, 앞마당 감나무 감꽃이 유난히 많이 떨어졌다.”라면서, 할머니는 양지바른 마룻장에 앉아 무심하게 떠난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다. 오르막길을 따라 관음봉 아래 양지바른 떼 밭에 영감이 눕던 날을 기억하고선, 긴 한숨을 토하며 하는 말은 단순하고 예리하다. “영감이 하늘나라로 떠날 때, 두 손을 쭉 펴고 한결 편해진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떠나더라.” 라는 할머니의 구성진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할머니는 삶을 뱉어낸 듯하다. 평생을 쫓으며 허덕거렸던 삶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우아한 학 한 마리가 날아오를 것 같은 마을.
산밭에는 언 땅을 헤집고 올라온 유채밭에서 늙은 어미가 호미를 붙들고 잡초를 헤집고 있고, 관음봉 아래 다랑이 밭은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 놓고자 봄을 기다리고 있다. 머지않아 노랑 물감을 뿌려 놓을 것이다. 원두막은 산과 들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검게 마른 기둥에 힘을 주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내어주고자 속을 비워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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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이 끊어진 간척지에 키 작은 청보리가 살랑거린다.
삽 한 자루를 어깨에 멘 늙은 농부의 발걸음에 봄이 잔뜩 묻어난다. 발뒤꿈치에서는 봄바람이 살랑거리고 논고랑에는 봄을 재촉하는 갯바람이 한들거린다. 비탈진 밭둑에는 매화가 아치고절(雅致高節)맑은 향기를 뱉어내고, 가을날 은빛 메밀꽃이 피던 산밭에 겨울바람에 멍이 든 성급한 유채는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올라와 거친 숨 몰아쉬는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기다림만이 삭풍의 갯바람을 견디고 노란 꽃을 피워낸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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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동 사람들은 조용한데 겨울 볕과 바람만 분주하다.
봄볕을 쫓아온 여행자가 산 밑에서 가만히 선학동을 바라보고 있다. 찰칵거리는 기계 속으로 추억이 한 장 한 장 새겨지고,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나고, 가슴 속에는 뜨거운 사랑이 자지러진다. 물길 끊긴 포구 주막집이 평화롭다. 주인 떠난 허름한 주막에는 유봉어른의 구성진 사철가 한 대목과 용택이의 송화 사랑앓이가 스며있고, 뒤편 툇마루에는 동호의 북장단에 송화가 토해낸 심청가 한 대목이 서럽게 돌담을 빠져나간다. 문구멍으로 들여다본 봉놋방에는 걸쭉한 막걸리 냄새와 땀 냄새가 배어있고, 창문 밖 푸른 노송은 언젠가 고고한 자태를 품고 찾아올 천년학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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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동에는 어느새 봄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산물 내려오는 소리가 곱다.
밭둑에 돋아난 해쑥 몇 바구니를 캐내고 나면, 유채밭에서는 행복한 추억을 새길 것이다. 실속 있게 살아온 노부부가 삶을 뒤돌아보며 여유롭게 다녀갈 것이고, 아프고 상처받은 사람은 쓴 물을 토하듯 살아온 삶을 내려놓고 시나브로 치유할 것이고, 경쟁에 뒤처진 청춘도 남몰래 찾아와 부족함을 채워 갈 것이고, 갓난아기를 보듬고 올라온 앳된 부부도 아름다운 삶을 그려 볼 것이다. 선학동 사람들은 화려한 지식보다는 단순한 삶의 지혜를 보듬고 느리게 살아간다. 그래서 선학동에는 곰삭은 사람 냄새가 배어있어서 좋다.
혹여, 뒤틀린 마음으로 찾아와도 괜찮다. 선학동에서는 바르게 펴지며 마음은 투명해질 것이다. 오늘따라 겨울을 다 털어내지 못한 바람이 참 좋다.
(2019. 3 장흥투데이 게재)
유용수
《문예운동》시. 《한울문학》수필등단. 한국문인협회원. 전남문인협회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저서 「암자에서 길을 묻다」
E -mail :ysoyoo@naver. 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