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요 서동요와 정읍사, 방장산가, 선운산가, 지리산가 등은 모두 사랑가 일색이다. 화랑도는 얼짱, 몸짱들이 정치를 주름잡았던 본보기이다. 이런 고대의 노래를 모은 향악집성방, 악학괘범, 그리고 조선 연산군때에 고금소총과 어면순 등 유머 골계문학도 정읍에서 만들어졌다. 그 중심인물인 정읍의 유자광은 김종직과 이율곡을 숭상했던 정치파동으로 남원으로 유배되어 후손이 호족으로 인조시대까지 건재했다. 암행어사 성이성의 남원 사랑이야기
조선 인조시대에 암행어사였던 이몽룡은 본명이 성이성(成以性)이며, 조선 시대 남원부사 성안의의 아들이다. 성안의가 남원지역 부사에 재직한 시기는 선조 40년부터 광해 3년까지 5년동안. 그러니까 그 5년동안 그의 아들 성이성도 아버지와 함께 남원에 머물렀었다 .
성안의가 남원을 떠난 것은 광해군 3년, 그러니까 그의 아들 성이성은 13살부터 17살까지 아버지와 함께 남원에 머물다가 열일곱살에 남원을 떠난 것이 된다. 이팔청춘 16세에 춘향을 만나 사랑을 나누던 이몽룡은 이듬해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임명돼 남원을 떠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춘향과 헤어진 이몽룡은 밤낮으로 여러 성현들의 글을 열심히 읽어 과거에 응시, 장원급제를 한다. 성이성이 22살 되던 해에 과거의 예비시험인 생원시에 합격했고, 그의 나이 33세에 암행어사가 된다. 춘향전의 이도령에 비해 무척 늦은 나이다. 아마도 '특별시'에 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성이성이 친필로 적은 기록도 있다. 원래 암행어사들은 암행을 다니는 동안 자신의 행적을 일지로 적게 돼 있었다. 성이성이 암행어사를 한 것은 모두 4번. 그 중에 인조 25년 때의 암행을 기록해 놓은 책 한권 만이 유일하게 전한다. 그 책은 4번의 암행어사에서 유일하게 인조 25년 11월 25일 호남지방만을 기록한 것이다. 성이성은 남원에 들어가 춘향의 소식을 알고자 했으나 암행어사는 본인의 연고지에 갈 수 없었던 탓에 순천에서 어사일정을 마치고 평민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성이성은 그의 < 인조실록 암행일지>에서 11월 5일 모두 9명이 암행 채비를 갖추라는 명을 받았지만, 사흘 뒤에는 이해창과 자신 두명만이 봉서를 받아 떠났다고 적고 있다 .낮 12시 남관왕묘에서 봉서를 연 성이성은, 자신의 목적지가 호남인 것을 비로소 알았고 곧바로 길을 떠났다고 한다. 남대문밖으로 나서서 청파역에서 말을 타고, 동작 고을, 남태령을 넘었다. 이어 성이성은 여산, 전주, 태인, 정읍, 고창 등을 거쳐 하루에 백리정도 씩을 가면서 고을수령의 정치를 탐문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춘향전의 이몽룡 역시 서리와 중방을 데리고 다니며 호남지방 일대를 탐문한다. 그러나 성이성의 호남 암행일지에 남원에서 출도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 기록으로 보아 가는 도중 충청도 진천에서 한번 어사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호남 암행일지에 이런 기록은 없다. 성이성은 암행하고 다니다가 11월 25일 순천에서 부득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이후에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돌아오던 중 12월 1일 남원에 들렀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의심할 것 없이 성이성이 이몽룡의 모델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성몽룡이어야 할텐데 왜 이몽룡이 되었을까? 춘향전에서는 성씨 성을 몽룡이 아니라 춘향에게 붙혀주었다. 성몽룡이 아니라 성춘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춘향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경북 봉화에 있는 성이성의 묘지비문에는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가 귀신이 많이 나오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는 기록만이 있다고 한다. 성이성이 역시 남원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다 .인조25년 남원에 가서 들으니 옛사랑 춘향이 처녀로 자결을 했는데, 그 원혼의 심술로 재앙이 심했다고 듣게된다. 남원사람들은 그것이 춘향이의 한 때문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백지 3장에 춘향제사 위령문을 지어 살풀이굿을 해 가뭄과 흉년을 막았다는 민속설화도 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보면, 정읍사람 유자광의 후손인 남원의 호족이 성안의로 하여금 남원에서 5년 동안이나 무탈하게 근무하게 한 사실을 얻을 수 있다. 춘향전의 원본이 유진한에 의하여 전해진 사실, 광해군의 정읍출신 후궁 개똥이(개시) 실세였을 때에 남원부사 성안의가 일약 동부승지로 승진한 사실을 상고해 보면 알 수 있다. 게다다 성이성이 순행길에 태인, 정읍을 들려서 정읍의 풍속이 된 최치원의 '죽은 처녀귀신 위령제사'를 접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원으로 간 성이성은 춘향이의 죽음을 기생 여진으로부터 듣고 최치원의 글을 모방하여 묘지 제사굿 (지금은 명당굿이라고함)의 긴사연으로 위령문을 지어 위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날밤 최치원의 쌍분기처럼 밤에 성이성(이몽룡)은 숙소에 춘향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는 지도 모른다. 성이성의 위령문과 최치원의 쌍분기 이야기
'쌍분기', 그것은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억울하게 자결한 장씨 자매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위령의 글을 써 기도해준 글이다. 최치원의 당나라 율수현위 와 신라 태산(정읍칠보)태수 시절의 행적과 같다.
춘향의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하는 것은 없다 . 다만, 춘향전 안에서만 전해져 올 뿐이다 . 유진한의 책에서 춘향전(춘향연)은 한시의 형태로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유진한은 자신이 이 이야기의 저자가 아니라 전라도 지방을 여행하다가 이야기를 듣고 적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름의 글귀를 칼로 긁어낸 흔적이 있다 . 유진한은 유씨 본관을 밝히지 않는것으로보아 유자광의 상씨인 영광유씨로 보이며 고의로 숨긴것으로 보인다 기생과의 로맨스는 곧 신분이 붕괴되는 과정을 드러낸 것 성씨 집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실제 몇십년 전부터 성이성에 관심을 가졌던 사실이 있으나 밖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성씨 문중에서는 대대로 이몽룡의 모델이 성이성이라는 얘기가 전해져오고 있었다고 한다 . 성도령이 이도령이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호남지방을 돌던 성이성은 11월 22일, 순천에서 부득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암행을 끝낸다. 그리고 12월 1일. 남원엘 들어갔다 .이 날은 눈보라가 크게 일어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날씨가 나빴다고 한다. 그런데 성이성은 굳이 이 비바람을 헤치고 광한루로 향했다. 그리고 무슨 연유에선지 늙은기생 여진이 찾아와 함께 얘기를 나눴다고 적고 있다. 늙은 기생과 얘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과거 기생과의 일을 아는 기생이기 때문에 그 뒷일이 궁금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 성이성은 그 때의 일을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해가 저무니 모든 기생들을 물러나게 하고 작은 동자와 서리와 함께 난간에 앉았다. 눈빛이 뜰에 하얗게 깔려있고 대나무숲이 하앴다...그리고 소년시절의 일을 생각하며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그가 적고 있는 소년사, 소년시절의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남원에는 전통적으로 억울하게 죽은 춘향얘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춘향이 이도령을 위해 수절을 했다는 그 얘기의 근원이 성이성과 맞닿아 있다. 성이성이 춘향을 두고 떠난 뒤에 일어났던 사건을 남원에서는 그렇게 표현했다고 보인다. 성이성과 춘향과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12월 1일 < 광한루 >의 기록에서 그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 당나라 희종(僖宗) 2년 계림인 학자 최치원이 율수현위로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에 공무 때문에 초현관(여관)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때 초현관 앞에 커다란 묘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더니 두 소녀가 묻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최치원은 젊었기 때문에 직접 묘지 앞으로 달려갔다. 쌍녀분의 주인공은 강제 결혼을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씨 자매. 두 자매의 운명을 슬퍼하며 최치원은 위로의 시를 바친다. 이 시를 보고 감동한 두 소녀가 그 날 밤 최치원을 찾아와 즐거운(러브?) 하룻밤을 보낸다. 새벽이 되자 두 소녀는 최치원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며 무덤으로 돌아간다 . 이것이 중국인들에게 대대로 전해져 오는 쌍녀분과 최치원의 실제 체험한 전설이다. "중국의 전설 쌍녀분기의 주인공은 최치원입니다. 이 쌍녀분기는 당나라 시대 이후 송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의 기록에서도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유명한 전설인데요. 그런데 최치원이 지은 글 중에 이 전설과 똑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최치원이 중국에 있을 때 실제로 있었던 러브스토리를 소설로 썼는데 그 소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중국의 전설로 내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쌍녀분기에 의하면 당시 최치원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로서 중국 율수현의 관리였습니다." 이러한 전설을 남긴 최치원이 칠보지역에 태수로 부임하여 와서 생긴 풍속이 있다. 처녀가 죽으면 반드시 길 밑이나 길가에 묻는 풍속이다. 그것은 중국에서 지방관으로 지냈던 최치원이 무당처럼 죽은 영혼에게 위령시를 지어주는 행동을 칠보지역에서 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모두 처녀가 죽으면 길가나 바닥에 매장하여 지나다니는 최치원 같은 남자의 위안을 받고 싶어한다는 신앙이다. 이처럼 죽은 처녀를 길바닥 밑에 묻어 주지 않으면 그 처녀 귀신이 집으로 찾아와 유가족에게 해를 입힌다고 전해진다. 최치원이 쌍묘분에서 글을 쓰고 노래했던 일종의 무당굿 같은 효과를 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길바닥에서 최치원 같은 청년이 지나가면 저절로 처녀귀신이 그 사람을 따라가기에 집에 화가 붙지 않는다는 풍속이다. 중국의 쌍묘분 전설은 정읍지역 신라 화랑들의 장송가 무속신앙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