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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
누가복음 2:1-20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 때에 로마제국에 속하는 모든 지역에 호적을 하게 했는데,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첫 번째 시행을 했습니다. 요셉도 다윗의 가문이었기 때문에 호적을 하기 위해 다윗의 고향인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향하여 갈릴리 나사렛을 출발했습니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도 함께 동행하였는데, 마리아는 이미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하였기 때문에 해산할 날이 가까웠습니다. 베들레헴은 그렇게 큰 마을이 아니었기에 호적하러 온 사람들로 붐볐고 여관은 가득 차있었습니다. 아이를 해산할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한 요셉과 마리아는 하는 수 없이 마굿간에서 여장을 풀 수밖에 없었고 마리아는 그곳에서 해산하여 아기를 구유 위에 뉘였습니다. 구유는 다름 아닌 여물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면서 말구유에 누인 것입니다.
1. 예수님의 탄생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2:1-7)
가이사 아구스도의 때에 로마 전역에 호적을 하라고 명령이 내려졌습니다(1절). 아구스도 황제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입니다. 그는 B.C. 27-A.D. 14까지 로마의 황제로 있었고 그후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저의 이름을 따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저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받는' 이란 뜻)라는 칭호를 부여받으며 그후 그는 시저 아우구스투스로 명명되고 최고의 권위자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탁월한 통치 능력과 현명하고 훌륭한 정치 및 행정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점령지에 대한 정책의 일환(一環)으로 점령지의 지방 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도 하며, 점령지의 문화와 종교, 생활 풍습등을 인정해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나라의 법률까지도 로마법에 비추어 무리가 크게 없는 한 인정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 건축 등을 장려하기도 했으며 그 자신이 또한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정책과 통치로 인해 전에 없이 오랜 세월동안 평화가 지속되었고 그는 '자비로운 정치가', '로마의 대부'(代父)로까지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고 승원장 또는 대제사장(Highest Priest)이란 칭호를 받아들여 모든 종교의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피살(被殺)된 자신의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저를 신격화하여 그를 기념하는 사원을 건립하여 그를 신으로 받들도록 명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그는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범하기도 하였습니다. 탁월한 정치 지도자이며 행정가인 그가 자기에게 속한 나라들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고는 로마에 속한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인구조사의 실시로 말미암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가 5:2의 예언을 성취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영’은 황제의 포고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로마제국 전체에 호적을 하라고 칙령을 내렸습니다. 황제의 칙령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실시하는 인구 조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호적'은 '등록하다', '기록하다'(2:3,5; 히 12:23)는 말로 세금 징수를 위한 파피루스로 된 공식기록부를 가리키며, 이 기록부에는 성명, 직업, 재산, 친척관계를 기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인구 조사는 예수님의 탄생을 세계역사의 맥락 속에 넣어 하나님이 그의 섭리를 달성하기 위해서 지상의 통치자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호적을 하라는 칙령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입니다(2절). 구레뇨는 B.C. 12년에 마르마리대를 군사적으로 장악하여 집정관이 된후 갈라디아의 남쪽 접경에 있던 산적떼의 후손인 호모나덴세스족을 정복하였습니다. 그후 그는 A.D.3-4년 가이우스 시저의 고문역을, A.D. 6-9년에는 시리아의 황제 파견관을 역임한 후 A.D.21년에 죽었습니다. 수리아(시리아)는 B.C. 64에 로마제국에 합병되었습니다. A.D.70까지 유대는 별도로 자체의 행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시리아에 복속되어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당시까지만 해도 시리아는 유대 지역까지 포함된 로마제국의 통치령이었습니다.
제1차 인구 조사는 흔히 예수님의 탄생보다 훨씬 이후인 A.D. 6년경 구레뇨가 통치하던 시기에 실시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행 5:37과 요세푸스의 저서에도 제1차 인구조사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누가가 A.D. 6년에 실시되었던 제1차 인구조사를 그 이전에 실시되었던 것으로 혼동했다고 추측합니다. 그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 두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첫째, 어떤 사본에는 구레뇨가 '두번째'로 '시리아의 총독'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 사본의 내용이 애매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구레뇨는 예수가 태어날 당시와 그 후의 몇 년이 지난 뒤, 곧 두 차례에 걸쳐 시리아의 총독 직위에 있었다는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둘째, '첫 번'의 헬라어 '프로테'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첫 번째의'라고 번역되었지만 그 단어는 그 의미보다 '이전의' 또는 '앞의'를 뜻할 수 있습니다. 만약 '첫 번'이라는 단어가 '이전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본절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이 되기 이전에'라고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기록의 역사성에 대해 회의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만일 이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면 초대의 기독교 논박자들이 이를 지적하지 않았을리 없으며 또한 당대의 교양있는 사람들에게 써보낸 누가의 기록 속에 터무니없는 내용이 수록되었을리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호적을 하러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3절). 인구 조사는 각 사람의 고향에서 실시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불편을 감수하며 자기의 고향까지 가서 호적을 하는 것은 유대의 호적제도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호적제도는 자신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인적 사항만을 기록하는 훨씬 더 간편하고 손쉬운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로마의 손쉬운 호적 제도를 따르지 않고 굳이 번거롭게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자신들의 호적제도를 따르는 것은 이 호적명령이 로마의 명령으로 행해지는 것이지만 자신들의 독자적인 방법과 의사에 의해 행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으로 호적을 하러갔습니다(4절). 평행본문 마 1:6, 16에서도 요셉이 다윗의 후손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거니와 본절에서 다윗의 집 혹은 다윗의 동네라는 말이 거듭 언급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상으로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함과 아울러 다윗 왕가의 후손이자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께서 일개 초라한 시골민의 가정에서 태어남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합니다. 사무엘상 20:6에서 베들레헴은 '다윗 성'이라 불립니다. 다윗은 약 천년전 이곳에서 태어났고, 그가 양떼를 돌보던(삼상 17:15) 곳도 이 마을 근처의 언덕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7.2Km 떨어졌고 나사렛에서는 약 144Km 떨어진 곳이며 그것의 옛 이름은 에브라다이고 라헬이 장사된 곳이기도 합니다(창 35:19). 이 마을 이름의 뜻은 '떡집'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다윗이 자라난 곳이고 미가 5:2에 나타난 대로 메시야가 출생한 곳이라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은 태어난 아기가 다윗성에서 난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요셉이 어느 시기에 베들레헴을 향해서 출발했으며, 또한 그가 왜 마리아를 동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5절). 추측컨대 아마 마리아의 고향에서 마리아에 대한 그릇된 소문이 퍼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며 그 소문으로 인해서 마리아는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았을 것이므로 요셉은 인구 조사를 기회로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을 떠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요셉은 이미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마 1:24). 그러나 그들이 성령으로 잉태한 아이를 낳을 때 까지는 분명히 약혼 관계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정혼'이라는 말을 유대적 배경에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유대적 개념에서 '정혼'은 결혼을 의미하고 절차상으로 신부를 신랑집으로 데려오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혼인서약은 대체로 정혼에 행해졌으며 이 정혼은 항상 공식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후에는 신랑이 그의 신부를 데려가는 일에 있어서 어느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하는 것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산이 임박한 마리아가 그 장거리(약 144Km, 요단을 우회하여 돌아가는길)를 여행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산모와 태아에 치명적인 위험을 줄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여자도 호적해야할 의무가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고향에 가서 호적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물론 함께 동행하는 것은 세인(世人)의 비난을 피하고자 한 요셉의 배려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되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자신의 뜻대로 운행하는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시 136:8-26).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한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찼습니다(6절). 이 표현은 단순히 임신과 출산 사이에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만 아이가 태어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도 무방합니다. 임신 자체는 비록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지만 태중에서 아기가 자라나는 것은 일반적인 과정에 의했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지고 똑같은 성장 과정을 거치며 모든 인류를 대속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출생과 성장과정을 거쳤기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히 4:15).
이 구절에서 '해산할 날'이 현재대로 12월 25일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회에서는 성탄절을 전승에 따라 보통 겨울로 잡습니다. 이것이 3세기부터 문제시되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5월 20일을 제안했습니다. 12월25일을 성탄일로 지킨 것은 336년부터였습니다. 서방에서 이날을 택한 것은 로마신인 '정의의 태양' 탄생일에 대치한 것이나 동방 교회에서는 주현제 즉 동방의 현자들이 도착했다고 하는 날(1월6일)에 예수님의 수세를 기념하다가 4세기부터는 예수님의 탄생도 연결시켰습니다. 그리고 5세기 중엽부터는 동방 교회도 거의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켰으나 예루살렘 교회는 549년까지도 1월 6일을 크리스마스날로 지킵니다.
예수님을 '외아들'이 아닌 '맏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뒤 계속해서 자녀들을 낳았음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님를 낳은 후에 계속해서 동정을 지키며 자녀를 낳지 않았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이야기이며 이는 마리아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와 경외심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여러 형제와 여동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8:19,20; 마 12:46,47; 13:55,56; 막 3:31,32; 요 2:12; 7:3,5,10; 행 1:14).
사관(舍館)은 흔히 '여관'(inn)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최후의 만찬 때에 사용된(22:11) '객실'(guest room)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22:12에는 그 객실이 '다락방'으로 언급되었습니다. 또한 이 단어는 군인들의 숙소나 여관을 포함하여 숙박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데려갔던 '주막'(헬라어에서 대체로 여관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과는 다릅니다(10:34). 그런데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다가왔을 때 그 보잘것없는 가족에게 허락 되었던 장소는 가축우리가 있다고 누가는 담담하게 표현합니다. 그곳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대로 곳간이었을 수도 있으며, 또는 집이나 사관의 일부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구유는 신약에서 누가복음에서만 4회 나온다(7,12,16절; 13:15).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비천한 신분으로 보잘것없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이 세상에 오셨음을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구유는 세상 구속주의 비천한 탄생을 당시 세계의 주관자인 아구스도의 영광과 대조시키며(1,11,14절), 아무데도 머리 둘 곳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자이신 예수님의 겸손과 고난을 상징합니다(9:58). 어쨌든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구유는 갓난아이를 누이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그리고 마굿간밖에 내어 줄 수 없었던 여관 주인은 동정심이 전혀 없어서 그러했다고 보이지 않으며 누가 역시 그러한 각도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 천사가 전한 소식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2:8-12)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자기 양떼를 치고 있었습니다(8절). 당시 유대 사회의 여러 가지 직업들 중에서 목자라는 직업은 아주 천시 되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목자들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목자들이 하는 일이란 유대인의 규례(規例)에 의하면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살펴볼 때 명백한 것은 복음이 맨 먼저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던 사람들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여러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마저 아끼지 않는 선한 목자처럼 인류를 위해 당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어린 양이심을(마 20:18; 요 1:29) 넌지시 암시합니다. 이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여호와께서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언약하는 내용(삼하 7:8)을 상기해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메시야의 선조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나옵니다. 그리고 신구약에서 목자는 하나님 자신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자들을 상징적으로 가리킵니다(시 23:1; 사 40:11; 렘 23:1-4; 히 13:20; 벧전 2:25; 5:2).
목자들은 밤새워 양들을 보호했습니다. 목자들은 밖에서 여러명이 교대로 밤을 새워 도둑이나 다른 들짐승들로부터 양떼를 지키며 보호한 것입니다. 팔레스틴지방에서 목자들은 4월부터 11월까지 이런 식으로 양떼를 밖에서 방목(放牧)하였으며 겨울철에도 날씨가 춥지 않을 때에는 종종 그렇게 했습니다.
그때 목자들 곁에 주의 사자가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 위에 두루 비췄습니다(9절). 주의 영광은 영원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양식 중 하나이며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또한 '영광'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하는 표현 속에서도 흔히 등장합니다(9절; 9:31,32; 행 22:11; 계 15:8).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에 의해 다시 살아나셨으며(롬 6:4), 영광 속으로 올려지셨고(딤전3:16) 지금도 영광의 우편에 계십니다(행 7:55). 또한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지듯이 그에게도 돌려집니다(2:14; 히 13:21). 따라서 그는 영광의 주님이십니다(고전 2:8; 약 2:1). 나아가 우리의 종말론적 소망은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딛 2:13).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들이나, 본 구절에서 그의 출생시에 영광이 드러난 것은 그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진작부터 말해주는 것이며 요한복음에서도 또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요 1:14; 2:11; 11:40). 그리스도께서 영광에 들어가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요 13:31).
주의 영광이 ‘두루 비치다’라는 말은 '빛에 완전히 쌓인 상태'를 뜻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한 빛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유대민족들 가운데서는 '세키나'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매우 희고 밝게 빛나는 구름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것으로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출 24:16; 왕상 8:10; 사 6:1-3; 행 7:55). 목자들은 갑작스런 광채와 주의 사자가 선 것을 보고 무서워했습니다. 이런 광경은 아마도 그들 평생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너무도 빛나는 광채는 그들에게 두려움을 줄만 했습니다.
무서워하는 목자들에게 천사는 “무서워 말라”고 말하면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고 말합니다(10절). 온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러나 천사를 통해 전달된 복음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적 울타리를 넘어 세계 만민에게 개방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 백성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이 먼저 전달된 것은 그들을 통해 온인류에게 전해지게끔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은 이 복음의 메시지를 접할 대상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14절)과 '이방'(32절)에로 확대된다는 점을 통해서도 잘 나타납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요? '좋은 소식' 이란 곧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실 자체가 기쁜 소식이며,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곧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입니다(11절). 이스라엘이 그토록 고대하고 소망하던 메시야의 탄생 소식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속하여 주실 메시야가 오시면 이스라엘은 압제 속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게 될 것이라 소망하며 왔습니다. 그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이스라엘은 회복될 것이라고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은 정말 기쁜 소식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 짓눌려 살아온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야 그분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속함을 받고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기뻐할 소식입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동네 곧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리라 예언되었습니다. 여기서 베들레헴을 '다윗의 동네'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메시야의 오심과 관련된 모든 약속들을 기억나게 하고 그와 관련된 예언의 성취를 암시하기 위함입니다. ‘구주’는 신약 성경에서 드물게 나타나며 그것도 누가와 바울에 의해서만 주로 사용된 표현입니다(행 5:31; 엡 5:23; 딤후 1:10). 이는 하나님을 구원자로 표현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바(1:47; 삼하 22:3; 시 49:26), 예수님께서 죄악에 찌들은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뜻합니다.
베들레헴에 나신 분이 그리스도 주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인류 구속의 대사명과 관련되는 주님의 직능적 명칭이며, '주'(퀴리오스)는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예수님은 영원전부터 그리스도와 주로 예정되었으며(엡 1:4; 3:11; 골 4:3), 본체상으로는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육신하셨으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고 천사가 말을 잇습니다(12절). 구주 그리스도로 오신 그분이 구유에 누인 아기이신 예수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는 긴 옷감으로 아기를 포근히 감싸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 태어난 아기를 따뜻하게 하고 병으로 부터 보호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기예수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놓여있다는 것은 특별한 표적이라고 언급됩니다. 그것은 다음 세가지 면에서 표적이 되었습니다. 첫째,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언한 시기의 장소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둘째, 그들에게 전달된 기쁜 소식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기름부음 받은 자 곧 그리스도로서의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기위해 지극히 비천한 자리에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련한 상태에 놓인 이스라엘과 나아가 온 인류를 구원하고 돌보시기 위해 스스로 비천한 자리(구유)에 누이셨던 것입니다.
3. 천군들의 찬송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2:13-14)
천사의 말이 마침과 동시에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을 합니다(13절). 두 세사람의 증거로도 어떤 사실의 진정성을 입증할 수 있었거니와(마 18:16) 여기서는 수많은 천군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천군'은 일군(一群)의 천사들을 가리킵니다(시 103:21). “홀연히”라는 말은 ‘눈 깜짝할 사이’라는 의미로 10만분의 일초 정도의 속도라고 합니다.
허다한 천군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라고 찬송합니다(14절). 메시야의 탄생은 성부 하나님의 만세전의 계획입니다. 타락한 아담과 그 후손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성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으시고 심판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때가 차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없으신 몸으로 여인의 후손으로 오시기 위하여 동정녀 탄생을 하셔야 했습니다. 다윗의 가문의 마리아가 이일을 위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 일을 성취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이시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등장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첫째 하나님의 영윈하신 신성과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거하고 또한 그를 통해 확연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요 1:14).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요 14:9). 둘째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찬양과 경배로써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 1:20). 셋째는 하나님이 그 영원하신 섭리에 따라 인생과 세상 만물을 향해 이루고자하신 계획을 그리스도를 통해 완수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천군은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양합니다(14절).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즉 하나님의 택정하심을 입어 구원받기로 예정한 사람들 중의 평화를 말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인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으니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진정한 평화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인 것은, 첫째 그리스도의 중재와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막혔던 장벽이 제거되고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엡 2:14).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서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있으므로 늘 불화의 다툼의 수렁에서 허덕이지만, 하나님과의 근본적 화해를 이룬 사람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평강을 선물로 소유하게 됩니다(요 14:27). 둘째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죄악이 제거되고 사람들간에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엡 2:16-18). 여기 언급된 평화는 메시아의 도래와 관련된 총체적 축복과 구원을 지칭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서(히 7:2), 당신의 공생애를 백성들의 평강을 위해 보내셨으며(7:50; 8:48) 그 평강을 위한 사역은 십자가상에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4. 목자들이 전한 소식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2:15-20)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이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루어진 일을 보자”라고 말하고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갔습니다(15절). 누가는 천사들이 단순히 사라졌다고 언급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합니다. 이는 공간적인 이동을 자세히 묘사한 누가의 독특한 표현입니다(24:51; 행 1:10). 물론 우리는 본절을 문자적인 의미로만 해석하여 수직 상승의 뜻으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의 처소 곧 하늘나라는 이 우주속의 그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의 승천장면에 대한 묘사와 마찬가지로, 지각 가능 상태로부터 지각 초월 상태에로 변화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을 만난 후 엘리사벳을 찾아 나선 것처럼(1:39), 목자들은 자신들이 돌보던 양떼를 두고 마리아처럼 서둘러 찾아 나섭니다(16절). 목자들이 양떼를 다른 동료 목자들에게 맡기고 갔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보존에 맡겼는지 알 수가 없으나, 아무튼 목자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아기 예수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양떼를 뒤로했습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에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우리도 목자들과 같이 순수한 믿음과 겸손하고 완전한 섬김으로써 주를 찾을 때에 주께서는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인도자 되실 것입니다.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계속해서 찾아다녔으며, 그렇게 노력하여 찾던 끝에 정말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평강의 왕 아기 예수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들은 요셉과 마리아와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했습니다(17절).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처해 있었던 이 목자들이 최초로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이었고 또 최초로 복음을 전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그 아기에 관한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전해 주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 외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마굿간에 모여 있었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고, 목자들이 이웃 사람들에게 가서 그 이야기를 전했다고도 짐작됩니다. 요셉과 다른 이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기이히 여기다’는 말은 '이상히 여기다', '놀라다'는 뜻 외에 '찬양하다'는 뜻도 내포합니다. 즉 이 말은 초자연적적인 혹은 신적인 사건과 접한 자의 외경스러운 감동을 말합니다. 물론 요셉도 마리아와 정혼한 상태에서 그녀가 아이를 가진 것을 알고 고민하다가 가만히 끊고자 하였으나,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서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막상 목자들이 천사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천군의 찬송하는 광경을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했습니다(19절). 마리아는 사건 전반을 기도하는 마음과 자세로 계속해서 생각하여 그 의미를 되새겼을 것입니다. 예수 탄생을 전후하여 천사로부터 전해진 메시지들이나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사실 등은 마리아로 하여금 아기 예수의 신분과 사명에 대해 거듭 상고해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처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서 자기에게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말을 듣고 놀란 일과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의 일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자기와 같이 비천한 자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주시어 메시야를 낳게 하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의 이야기와 천군들의 찬송을 부르던 광경 등을 모두 이야기하고 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습니다(20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라는 표현이 누가복음에 자주 쓰입니다(5:25; 7:16; 13:17; 15:18,43; 23:47). 목자들은 그들이 천사들로부터 들은 바와 실제로 본 것이 똑같음을 알고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립니다. 사실 아기의 탄생 자체는 평범한 보통의 사건으로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기 예수는 그 비슷한 시간에 태어난 많은 아기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는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성육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적용: 우리가 전해야할 기쁜 소식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야기는 유대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탄생하여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의 조용하고 비천한 배경의 소박한 이야기처럼 들려집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이나 천군들의 찬송을 부르는 광경은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대조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비천한 모습으로 갈릴리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의 구속계획 가운데 성육신하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를 택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케 하시어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 땅에서 태어나리라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예언의 성취 이야기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으로 오신 비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시는 복된 이야기이기에 이 이야기는 항상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