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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한자) | 안범 (安範) | 본 관 (한자) | 죽산 (竹山) | 자 (한자) | 숙도 (叔度) |
호 (한 자) | 만휴정 (晩休亭) | 생 몰 년 대 | 1460년(세조 6) 4월 24일 ~ 1523년(중종 18) 5월 14일(음력) | ||
출생지 | 전남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마을 | ||||
주 요 경 력 | ●1483년(성종 14) 계묘 식년시(式年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 ●효렴(孝廉)으로 추천을 받아 전함사 별제(典艦司別提)에 임명됨.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이듬해 원종공신에 녹훈됨. ●사축서(司畜署)‧한성부(漢城府)‧예빈시(禮賓寺)의 관직을 두루 역임 ●청안(淸安)‧진안(鎭安)‧예안(禮安) 세 고을의 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안삼안(安三安)’이라는 별칭을 남겼으며,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움.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흉년으로 떠도는 유민(流民)들을 구호하는 등 자선사업에 힘을 써 보성 택촌에 있는 안범의 집 주위에 돌과 흙으로 담을 쌓아 ‘보은장(報恩墻)’이라 불렀고, 그 담으로 둘러 쌓여있는 마을을 ‘담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현재도 ‘담안(墻內) 마을’이라고 부른다. | ||||
출전(出典) 및 주요저서 | ●《보성읍지(寶城邑誌)》 ●《성화 19년 계묘 식 2월일 생원진사 방목(成化十九年癸卯式二月日生員進士榜目)》 ●『교남지(嶠南誌)』 ●안유신(安由愼,1580~1657)의『남파유고(南坡遺槁)』 ●《죽산안씨족보(1994년)》 | ||||
기 타 | 묘소는 전남 보성군 보성읍 쾌상리 척사에 있고, 매년 음력 10월 17일에 척산재에서 후손들에 의해서 향사되고 있음. | ||||
자료제공자 | 19대손 안재중(011-628-5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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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자료)
1. 네이버 한국학 / 조선시대 / 인물 (http://100.naver.com/100.nhn?docid=899356)
안범 [安範, 1460~1523]
요약 :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청안·진안·예안의 현감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어 ‘안삼안(安三安)’이라는 별칭을 남겼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자선 사업에 힘썼다.
본관 죽산(竹山)
호 만휴정(晩休亭)
국적 한국
활동분야 정치
본문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호는 만휴정(晩休亭)이다. 어릴 적 부친을 잃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1483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병으로 귀향하였다. 효렴(孝廉)으로 추천을 받아 전함사 별제(典艦司別提)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이듬해 원종공신에 책록되고, 사축서(司畜署)·한성부(漢城府)·예빈시(禮賓寺)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후 외직으로 나가 청안(淸安)·진안(鎭安)·예안(禮安)의 세 고을 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안삼안(安三安)’이라는 별칭을 남겼으며,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흉년으로 떠도는 유민(流民)들을 구호하는 등 자선사업에 힘썼다.
2. 죽산안씨족보(1994)
자(字) 숙도(淑度)
호(號) 만휴정(晩休亭)
생(生) 세조 경진(庚辰, 세조6, 1460년) 4월 24일
〇癸卯中司馬兩試以學行筮仕除通訓大夫典盤司別提漢城府庶尹叅中廟丙寅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一等歷拜淸安鎭安禮安縣監三邑皆有居思碑解印歸鄕救活流民累千有報恩墻後人名其里曰墻內
성종14년(계묘, 1483) 사마양시에 합격하였고, 학식과 덕행으로 전함사 별제(典艦司別提), 사축서 별제(司畜署別提),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에 두루 임명되었다. 또 중종 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었고, 청안(淸安), 진안(鎭安), 예안(禮安)의 현감(縣監)을 두루 걸치면서, 청백(淸白)한 마음으로 정사를 다스려 여러 가지 치적(治績)을 드러냈다. 병·정년[丙丁年,중종(中宗) 병자(丙子,1516)~정축(丁丑,1517)]의 혹심한 기근을 맞아 집안 창고의 천여 섬의 곡식을 털어 구휼하니 (이로 인해) 온전히 살아남은 자가 매우 많았다. 몇해가 지나 구휼받은 사람들이 모여 (공의) 집 둘레에 담을 쌓고 「보은장(報恩墻)」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그 마을을 「담안(墻內)」이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졸(卒) 중종 계미(癸未, 중종18, 1523년) 5월 14일 享年 64세
배(配) 淑夫人天安全氏父上將有貞祖進仕致生曾祖縣監義天城君文靖公世柱后
숙부인 천안전씨(天安全氏)의 아버지는 상장(上將) 전유정(全有貞), 할아버지는 진사(進仕) 전치생(全致生), 증조부는 현감(縣監) 전의(全義)이고 고려시대 천성군(天城君) 문정공(文靖公) 전세주(全世柱)의 후손이다.
묘(墓) 先兆后同坐雙墳有墓誌
〇東儒錄以德學文章爲世名儒當時淸白淳吏必稱安三安
동유록(東儒錄)에 덕학과 문장으로 이름난 선비이고 당시 청백리로 반드시 安三安[예안, 진안, 청안 세고을의 현감을 지낸 안현감(安縣監)이라는 뜻]을 말했다.
3. 예안공(禮安公) 범(範)
계미년(1523) 5월 14일에 돌아가니 묘소는 척사(尺紗)의 아버지 묘소 뒤 조금 떨어진 경좌원에 있다. 부인 천안전씨는 도총장 유정(有貞)의 따님이요, 판도판서 단(單)의 후손으로 생졸연대는 상세하지 않으며, 묘소는 쌍분으로 되어 있다. 아들 수륜(秀崙)은 의정부 사록(議政府司錄)을 지냈고, 수잠(秀岑)은 전주이씨 화성군(花城君) 감(堪)의 사위이며 진사(進士)로 문과에 합격하여 합천(陜川)군수를 지냈다. 수금(秀嶔)은 전주이씨 덕원군(德源君) 서(曙)의 사위이며 무과에 합격하여 운산(雲山)군수를 지냈다.
【부 록】
○ 눌재(訥齋) 문간공(文簡公) 박상(朴祥)이 일찍이 공을 칭송하였다.
청백하고 순수한 관리요 / 淸白淳吏
문장과 학술이 뛰어나다 / 文章學術
4. 보성문화원 마을의 유래에 소개된 [담안마을의 유래] : 약간 수정보완했음.
[담안(墻內) : 보성읍 우산1리]
우산리는 한때 보성군 용문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유계리, 송산리, 오야리와 옥암면의 주촌리, 택촌리, 현촌리, 용교리, 송현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조선시대 대학자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죽산안씨 11세) 선생이 살았다 하여 우산리라 해서 보성면(읍)에 편입되었다.
담안마을은 읍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조 초엽 중훈대부(中訓大夫)였던 죽산 안씨(安氏)란 분(안민 安民, 죽산안씨6세로 입보성 선조)이 최초로 입촌하였으며 예안현감(禮安縣監)을 지낸 그분의 아드님 안범(安範, 죽산안씨7세)의 후손들이 취락을 형성하여 자작일촌으로 살고 있었다.
朝鮮朝 中宗11年 (1516) 丙子年에 三南地方이 극심(極甚)한 가뭄으로 草木이 말라 죽어 황폐(荒幣)가 되여 굶주림에 허덕이는 농민들이 各處로 흩어져 유랑걸식(流浪乞食) 하였다. 이때 예안현감(禮安縣監)을 지낸 안범(安範 죽산안씨 7세, 현 안진오 교수 + 안태열 교장 집터임)이 관직을 버리고, 둘째아들 합천군수(陜川郡守)를 지낸 안수잠(安秀岑 죽산8세, 현 안삼영 집터임)과 더불어 수만석의 穀食을 풀어 원봉리 장터에 큰 솥을 수십개 걸어놓고 죽이며 밥을 주어 수일을 굶은 사람의 건강을 회복시켰으며, 섬진강 또는 낙동강하류를 향하여 살길를 찾아 떠나가는 사람에게는 떡을 싸주도록 하는 등, 굶주린 많은 사람들의 구재(救災)에 정성을 다하였다.
口傳으로 傳하는말에 "동암다리에 쌀 뜨물이 흐른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굶주린 사람들이 먹을 죽을 쑤기 위해 원봉리장터에서 쌀을 씻는 뜨물이 1km하류 동암다리 하천까지 흘러 내러왔다는 말로써 그만큼 많은 양의 쌀을 씻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그후 아사를 면한 유랑민들이 몇 년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과거의 유민생활중 보성에서 아사를 면하게하여 주었던 安縣監댁에게 은혜(恩惠)를 보답(報答)하기 위해 당시 恩惠를 받았던 사람들이 수 백명이 모여 마을 뒷산에 흙담장(약350m)을 쌓고 출입문을 돌담으로 축조하여 後日에 記念하게 하였다.
後世 사람들이 그 恩惠를 報答한 담이라고하여 보은장(報恩墻)이라 이름하였고, 이 담이 둘러 싸여있는 마을를 담 안에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담안[墻內]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5. 「보은장(報恩墻)의 연혁(沿革)과 실상(實相)」을 읽고
-만휴정(晩休亭) 안범(安範)과 보은장(報恩墻)에 얽힌 작은 역사(歷史)-
- 작성자 : 조선대 안동교(安東敎) 박사
1) 문제제기(問題提起)
역사에는 크고 작은 무수한 사실과 경험들이 축적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과 경험은 문헌에 명백히 드러나 있기도 하고, 입으로 전해오다가 사장(死藏)되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작은 역사적 사실과 경험이라도 문헌에 명백히 드러나 있다면, 우리는 그 문헌들을 정밀하게 분석하여 빠트리거나 왜곡함이 없이 실상(實相)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올바른 역사인식의 태도와도 직결된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과 경험을 획득 가능한 신빙성 있는 문헌에 의존하지 않고, 어떤 문호주의(門戶主義)의 허상(虛像)에 집착하여 자의적(自意的)으로 기술한다면, 이는 올바른 역사인식의 태도에서 일탈된 모습이라 할 것이다.
지난 『보성문화(寶城文化)』 제4호에 실린 「보은장(報恩墻)의 연혁(沿革)과 실상(實相)」이라는 짤막한 한 편의 글은 ‘보은장(報恩墻)’에 얽힌 향토 사료를 발굴하여 소개한 점에서 귀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보은장’은 비록 지방의 한 모퉁이에서 일어난 조그만 역사적 사실과 경험이었지만, 그 조그만 사실과 경험이 담고 있는 내용과 가치는 과거나 현재에 커다란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보성읍 택촌에 소재한 ‘보은장(報恩墻)’은 조선조 중종(中宗) 무렵에 축조되었다. 당시 극심한 기근에 시달린 많은 유민(流民)들에게 ‘박시제중(博施濟衆)’의 가르침을 실천했던 덕망 높은 한 유학자가 있었는데, 후에 그의 구휼을 입은 유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집 주위에 담장을 쌓아 보은(報恩)의 정(情)을 표시한 것이 바로 ‘보은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위의 글을 쓴 필자(筆者, 이봉재 씨(李封載 氏)는 ‘보은장’의 주인공으로 당시 합천군수(陜川郡守)를 지냈던 안수잠(安秀岑)을 들고 있다.
“이 때 기아로 유랑(流浪)한 제주사람들과 인근(隣近)의 기민(飢民)들에게 구휼(救恤)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안수잠(安秀岑)이다. 그는 보성 제일의 호족(豪族)일 뿐만 아니라 수만석(數萬石)직이 거부(巨富)요 또한 지덕가(智德家)였다. … 그 뒤 제주사람들이 주가 되어 육지 사람들과 은혜(恩惠)에 보답(報答)코져 안수잠(安秀岑)의 집 뒷산과 좌우에 토담(담의 규모 未詳)을 쌓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위의 글은 몇가지 문제를 일으킬 요인을 안고 있다. 첫째, 지덕가이며 거부였던 안수잠(安秀岑)이 단독으로 기민들에 대한 구휼활동을 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안수잠이 주체가 되어 구휼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주장하여 그를 ‘보은장’의 주인공으로 기정화(旣定化)하고 있다. 둘째, 필자는 어떤 문헌을 근거로 하여 기정화(旣定化)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가. 과연 필자가 인용하여 제시한 <전거문헌(典據文獻)>들이 어느 정도 신빙성을 확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중에 논자(論者)가 몇가지 신빙성있는 문헌을 통해 이를 반박해 보이겠지만, 오히려 구휼활동의 주체는 안수잠(安秀岑)의 부친으로 예안현감(禮安縣監)을 지낸 만휴정(晩休亭) 안범(安範)이라는 사실이 유력해 보인다. 그러면 안범(安範)은 당시 어떤 인물이었으며, ‘보은장(報恩墻)’과 어떤 인연을 맺고 있는가?
2) 만휴정(晩休亭) 안범(安範)의 생애와 보은장(報恩墻)의 유래
만휴정(晩休亭) 안범(安範)은 세조 경진년(1460) 4월 24일에 죽산안씨 안민(安民)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무과에 합격하여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이었던 부친은 그가 아주 어렸을 적에 북쪽 변방에서 순국하였다. 부친의 얼굴도 채 기억할 수 없었던 그는 편모 보성선씨(寶城宣氏)를 지성으로 봉양하면서 학문에도 심혈을 기울여 24세되던 성종 계묘년(1483)에 생원과 진사시험에 모두 합격하였다. 그는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원대한 꿈을 키웠지만 불행하게도 심한 병이 들어 귀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학식과 덕행을 흠모하던 친구들의 주선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첫번째 관직인 전함사 별제(典艦司別提)에 임명되었다. 그는 천성이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므로 수년간 맡은 바 직책을 청빈하게 열성적으로 수행했다.
안범은 1506년에 일어난 中宗(中宗) 反正(反正)에 참여함으로서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에 기록되었고, 그 공으로 한 품계를 승진하여 사축서(司畜署)·한성부(漢城府)·예빈사(禮賓寺)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 뒤 그는 10년 동안 청안(淸安)·진안(鎭安)·예안(禮安)의 세 고을 현감(縣監)을 지내면서 가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어 ‘안삼안(安三安)’이라는 별칭과 ‘거사비(去思碑)’를 남겼다고 한다. 이 ‘거사비’는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이 갈려간 뒤에 그들을 흠모하여 고을 주민들이 세운 비석이니, 그의 청백리(淸白吏)로서 베푼 선정을 짐작케한다. 큰아들 안수륜(安秀崙)과 돈독한 친분을 맺었던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은 『동유록(東儒錄)』에서 그의 이러한 문행(文行)의 청조(淸操)함을 칭송하여 “덕학(德學)과 문장은 당시의 명유(名儒)이며, 청백하고 순수한 관리로는 반드시 ‘안삼안(安三安)’을 꼽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선조들이 묻힌 묘소와 외롭게 살아가는 가족들을 항상 그리다가 관직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고향으로 홀가분하게 돌아와 버렸다. 그는 귀향한 뒤로도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을 걱정하고 어루만지며 덕을 베풀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천안전씨(天安全氏)로 상장(上將)이었던 전유정(全有貞)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낳았다. 큰아들 수륜(秀崙)은 의정부 사록(議政府司錄)을 지냈고 수잠(秀岑)은 합천군수(陜川郡守)를 지냈으며 수금(秀嶔)은 운산군수(雲山郡守)를 지냈다. 중종 계미년(1523) 5월 14일에 돌아가니 향년이 64세였다.
안범(安範)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던 병자년(1516)과 이듬해 정묘년(1517)은 혹심한 가뭄이 삼남지방과 제주도를 휩쓸던 해였다. 농촌과 섬 곳곳에서 자연재해와 사회경제적인 요인 등으로 인해 생존기반을 잃고 현거주지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된 수많은 유민(流民)들이 사방을 떠돌아 다니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매었다.
이 때 보성읍 우산리 택촌(宅村)에 살았던 안범(安範)은 수천 섬의 양곡을 털어 유리걸식하던 많은 백성들을 구활(救活)하기로 결심했다. 안범은 지금의 원봉리 ‘장거리’와 보성읍 ‘게거리’ 등지에다 큰 솥을 수십 개 걸게 하고, 죽과 밥 그리고 떡을 만들어서 수일을 굶은 사람에게는 죽을 주었고, 건강이 회복되어가는 사람에게는 밥을 주었으며, 회복되어 살길을 찾아 떠나가는 사람에게는 떡을 싸서 주었다. 이러한 구활(救活)의 노력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유민들의 생명을 아끼려는 정성은 지극하게 펼쳐졌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동암다리에 뜬물이 흐른다.”는 말이 당시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이는 한꺼번에 많은 쌀을 씻다보니 원봉리 장터에서 씻은 뜬물이 1Km 지점인 동암다리 하천까지 흘러내려왔다는 말이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한 유민들은 과거 유리걸식하던 중 안범의 구활(救活)로 아사(餓死)를 면하게 된 것을 잊지 못해, 수백 명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그의 집주위에 흙담을 둘러쌓고 출입문만 돌담으로 축조하여 은혜에 보답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은혜에 보답한 담’이라 하여 ‘보은장(報恩墻)’이라 불렀고, 그 담으로 둘러쌓여 있는 마을을 ‘담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담안(墻內)’이라 일컫게 되었다.
이 ‘보은장’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토담의 기초와 몇 개의 돌이 흙속에 묻혀있을 뿐 원형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480여년전, 보성의 명유(名儒) 안범(安範)이 보여준 헌신적인 ‘백성 사랑하기’와 수많은 유민(流民)들의 자발적인 ‘은혜 보답하기’는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정신으로 새겨져 있다.
3) 보은장(報恩墻)에 관한 문헌적 고찰
안범(安範)과 ‘보은장(報恩墻)’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문헌은 매우 적은 편이지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비교적 신빙성 있는 문헌을 아래에 소개하여 먼저 ‘보은장’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고찰해보기로 하겠다.
(1) 동계(東溪) 박춘장(朴春長)은 『보성군고지(寶城郡古誌)』(1664년 作)에서 “안범(安範)은 …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힘써 덕을 베풀어 수백 명의 유랑민을 구휼하여 살렸다. 유랑민들이 흩어져 돌아가기에 앞서, 모두 힘을 모아 돌을 날라다가 공(안범)의 집 주위에 담을 쌓으니 후대 사람들이 이를 ‘보은장(報恩墻)’이라 불렀다.”고 적었다. 박춘장은 은봉(隱峰) 안방준(安邦俊) 선생(先生)의 문인이며 품성이 강명정직(剛明正直)하고 지절(志節)이 특수했던 선비로 육현사(六賢祠)에 배향된 인물이다. 그는 최초의 군지(郡誌)인 위 책에서 안범이 당시 유민(流民) 구휼활동을 했던 주체이며 ‘보은장’의 주인공임을 간추려 기록함으로서 그 관련성을 명백하게 밝혀 놓은 데 반해, 안수잠(安秀岑)에 대해서는 “수륜(秀崙)의 아우로 진사에 합격하고 문과에 올랐으며, 문장·풍모·재능·행실은 정서천(鄭西川)의 『가언선행록(嘉言善行錄)』에 자세하게 실려있다.”고 하여 ‘보은장’과의 관련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2)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 1665-1748)는 「동애선생행장(桐厓先生行狀)」(1746년 作)에서 “안범(安範)은 …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덕을 베풀기에 힘써, 극심한 흉년에 사방의 유랑민 수백명을 온전히 살리기도 했다. 공의 집 주위의 높은 돌담을 지금까지 ‘보은장(報恩墻)’이라 불러온 것은 곧 유랑민들이 공을 위하여 쌓아준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했다. 박필주도 안범의 증손자인 동애(桐厓) 안중묵(安重黙, 1556-1607)의 행장을 통해 ‘보은장’은 안범을 위해 축조된 것임을 분명하게 적시(摘示)하고 있다. 이 행장은 동애의 외현손인 승지(承旨) 이성조(李聖肇)의 집에 보관되어 오던 초본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 인만큼 상당한 근거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3) 『죽산안씨족보(竹山安氏族譜)』(1935년 作)에서도 “아들 범(範)은 …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유랑민 수천 명을 구활했다. (유랑민들이) ‘보은장(報恩墻)’을 쌓아주었는데 후대 사람들이 그 마을을 ‘墻內(담안)’이라 불렀다.”고 하여 ‘보은장’은 안수잠을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그의 부친 안범을 위해 쌓아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4)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1899-1988)은 「죽산안씨세장천비명병서(竹山安氏世葬阡碑銘竝序)」에서 “만휴정공(晩休亭公) 안범(安範)은 … 병자년(1516)·정축년(1517)의 혹심한 기근을 만나 집안 창고의 천여섬의 곡식을 기울여 구휼하니 많은 사람들이 온전히 살아났다. 몇 년이 흐른 뒤, 구제받은 백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공의) 집 주위에 담을 쌓고 ‘보은장(報恩墻)’이라 불렀다.”고 하여 또한 안범과 ‘보은장’의 관계를 기술하고 있다.
이상에 열거한 문헌들을 종합해 보면, 안범(安範)은 예안현감(禮安縣監)을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하여 귀향한 바로 그 해에, 혹심한 기근으로 고통받는 유민(流民)들의 참상(慘狀)을 차마 보지 못하고 백방으로 구휼활동을 벌인 것이며, 이러한 구휼 덕택에 생명을 부지한 유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보은장’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마치 안수잠(安秀岑)이 주체가 되어 구휼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주장하여 그를 ‘보은장’의 주인공으로 기정화(旣定化)하고, 안범(安範)을 ‘보은장’의 주인공에서 배제한 필자(이봉재 씨)의 논지는 재고·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논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필자가 인용한 <전거문헌(典據文獻)> 가운데에서 ‘보은장’과 관련된 문헌들이 거의 신빙성이 결여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필자가 제시한 「호남의록(湖南義錄)」은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의병활동을 했던 최경회(崔慶會) 이하 16인의 행적을 서술한 것으로 『은봉전서(隱峰全書)』 권8 ‘기사편(記事篇)’에 나오는데, ‘보은장’과 관련된 내용은 한 구절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는 형식적으로 문헌을 짜맞추어 소개한 대표적 실례(實例)이다. 또 필자가 인용한 「합천군수안공묘표(陜川郡守安公墓表)」(필자는 「안수잠(安秀岑)의 묘갈비문(墓碣碑文)」이라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오기(誤記)인 듯 함)를 보면, “안범(安範)은 …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유랑민 수천명을 구활했는데, 후에 유랑민들이 공을 위하여 집 주위에 담장을 쌓아 ‘보은(報恩)’이라 했고, (공이 살았던) 옛 마을을 또한 ‘墻內(담안)’이라 불렀다.”고 적고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참으로 보았다면 안범과 ‘보은장’의 관계를 어느 정도 인식하였을 것이고, 안범을 제외시킨 채 단지 안수잠(安秀岑)만을 ‘보은장’의 주인공으로 부각시키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6. 한국학중앙연구원 / 인물사전
안범(安範)에 대하여
1460년(세조 6) 4월 24일~1523년(중종 18) 5월 14일.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숙도(叔度)이고, 호는 만휴정(晩休亭)이다. 본관은 죽산(竹山[新])이고, 전라도 보성(寶城) 출신이다.
증조부는 영암군수(靈巖郡守) 안을겸(安乙謙)이며, 조부는 장흥고부직장(長興庫副直長) 안여주(安汝舟)이고, 아버지 안민(安民)은 무과에 올라 훈련원참군(訓練院參軍)으로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순국하였다. 모친은 보성선씨 승훈랑(承訓郞) 선구령(宣龜齡)의 딸로 슬하에서 외아들로 성장하였다. 처부는 천안전씨 전유정(全有貞)이다.
1483년(성종 14) 계묘 식년시(式年試)에 생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병으로 귀향하였다.
효렴(孝廉)으로 추천을 받아 전함사별제(典艦司別提)가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이듬해 원종공신에 책록 되었고, 그 공으로 한 품계를 승진하여 사축서(司畜署)‧한성부(漢城府)‧예빈시(禮賓寺)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후 청안(淸安)‧진안(鎭安)‧예안(禮安) 세 고을의 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안삼안(安三安)’이라는 별칭을 남겼으며,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흉년으로 떠도는 유민(流民)들을 구호하는 등 자선사업에 힘썼다. 그 후 유민들이 자발적으로 보성 택촌에 있는 안범의 집 주위에 돌과 흙으로 담을 쌓아 ‘보은장(報恩墻)’이라 불렀고, 그 담으로 둘러 쌓여있는 마을을 ‘담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현재도 ‘담안(墻內) 마을’이라고 부른다.
장남 안수륜(安秀崙)은 1516년(중종 11)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을 지냈고, 차남 안수잠(安秀岑)은 1522년(중종 17) 문과에 급제하여 합천군수(陜川郡守)를 지냈으며, 3남 안수금(安秀嶔)은 1513년(중종 8) 무과에 급제하여 운산군수(雲山郡守)를 지냈다.
보성 죽산안씨 문중의 재실인 척산재(尺山齋)에서 매년 제향하고 있으며, 묘소는 전남 보성군 보성읍 쾌상리 척사에 있다.
7. 규장각에 소장된《보성읍지》인물 편 기록
民之子。幼而孤。奉母至孝。天性恭儉。篤於學問。中進士。登孝廉薦。歷典三邑。所履政成。有去思碑。解印歸田。以施與爲務。救活流民累百口。流民散歸時幷力負石。環公舍築墻。後人仍稱報恩墻。中廟朝, 丙寅, 參原從錄勲。
안민(安民)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은 후 홀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는 등 천성이 공손·검소하고 학문도 도탑게 하여 진사에 합격한 뒤 효렴(孝廉)으로 천거를 받아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청안(淸安)·진안(鎭安)·예안(禮安)의 세 고을 현감(縣監)을 지내면서 가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어 훗날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힘써 덕을 베풀어 수백 명의 유랑민을 구휼하여 살렸다. 유랑민들이 흩어져 돌아가기에 앞서, 모두 힘을 모아 돌을 날라다가 공(안범)의 집 주위에 담을 쌓으니 후대 사람들이 이를 ‘보은장(報恩墻)’이라 불렀다. 병인년(1506) 중종 반정에 참여하여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에 기록되었다.
8.《사마방목(司馬榜目)》의 기록을 보면
안범(安範)
[생원시] 성종(成宗) 14년(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 3등(三等) 2위(32/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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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숙도(叔度)
호 만휴정(晩休亭)
생년 경진(庚辰) 1460년(세조 6)
졸년 계미(癸未) 1523년(중종 18)
합격연령 24세
본관 죽산(竹山[新])
거주지 보성(寶城)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 성명 : 안민(安民)
품계 : 수의부위(修義副尉)
관직 : 훈련원권지참군(訓鍊院權知參軍)
[처부]
성명 : 전유정(全有貞)
본관 : 천안(天安)
[출전]
《성화 19년 계묘 식 2월일 생원진사 방목(成化十九年癸卯式二月日生員進士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K 2291.7 1746 1483])
9. 큰아들 안수륜(安秀崙)의 사마방목과 문과방목
9-1 안수륜(安秀崙) 사마방목
[진사시]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증광시(增廣試) [증광진사] 3등(三等) 26위(56/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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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대림(大臨)
생년 계묘(癸卯) 1483년(성종 14)
졸년 정축(丁丑) 1517년(중종 12)
합격연령 25세
본관 죽산(竹山[新])
거주지 보성(寶城)
[관련정보]
[문과] 중종(中宗) 11년(15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7위(10/33)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
성명 : 안범(安範)
관직 : 전함별좌(典艦別坐)
[처부]
성명 : 신난동(愼蘭同)
본관 : 거창(居昌)
[출전]
《정덕 2년 정묘 춘 증광 사마 방목(正德二年丁卯春增廣司馬榜目)》(계명대학교[(고)349.16 사마정덕])
9-2 안수륜(安秀崙) 문과방목
[문과] 중종(中宗) 11년(15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7위(10/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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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대림(大臨)
생년 계묘(癸卯) 1483년(성종 14)
졸년 정축(丁丑) 1517년(중종 12)
합격연령 34세
본관 죽산(竹山[新])
거주지 보성(寶城)
[관련정보]
[진사시]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증광시(增廣試) [증광진사] 3등(三等) 26위(56/100)
[이력사항]
전력 진사(進士)
관직 사록(司錄)
타과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진사시(進士試)
[가족사항]
[부]
성명 : 안범(安範)
[조부]
성명 : 안민(安民)
[증조부]
성명 : 안여주(安汝舟)
[외조부]
성명 : 전유정(全有貞)
본관 : 천안(天安)
[처부]
성명 : 신난동(愼蘭仝)
본관 : 거창(居昌)
[제]
성명 : 안수잠(安秀岑)
[자]
성명 : 안축(安舳)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10. 둘째 아들 안수잠(安秀岑)
10-1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
안수잠(安秀岑)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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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사위(思危)
생년 1486(성종 17)
졸년 ?(미상)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죽산(竹山[新])
활동분야 문신 > 문신
부 안범(安範)
[관련정보]
[문과] 중종(中宗) 17년(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2위(2/33)
[생원시]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 2등(二等) 5위(10/100)
[진사시]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진사] 3등(三等) 14위(44/100)
[상세내용]
안수잠(安秀岑)에 대하여
1486년(성종 17)∼미상. 본관은 죽산(竹山[新]). 자는 사위(思危).
부친은 안범(安範)이고, 형은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을 지낸 안수륜(安秀崙)이다. 1522년(중종 17)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에 갑과(甲科) 2위로 급제하였고, 관직은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우아한 문장과 재행(才行)으로 당세에 으뜸이었다.
[참고문헌]
朝鮮人名辭書
10-2 안수잠(安秀岑)의 생원시 사마방목
안수잠(安秀岑)
[생원시]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 2등(二等) 5위(10/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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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사위(思危)
생년 병오(丙午) 1486년(성종 17)
합격연령 22세
본관 죽산(竹山[新])
거주지 경(京)
[관련정보]
[사전] 인물 사전
[문과] 중종(中宗) 17년(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2위(2/33)
[진사시]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진사] 3등(三等) 14위(44/100)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타과 중종(中宗) 17년(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양시 양시(兩試)
[가족사항]
[부]
성명 : 안범(安範)
품계 : 조산대부(朝散大夫)
관직 :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
[출전]
《정덕 2년 정묘 9월 초7일 사마 방목(正德二年丁卯九月初七日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K 2291.7 1746 (1507)])
10-3 안수잠(安秀岑)의 진사시 사마방목
안수잠(安秀岑)
[진사시]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진사] 3등(三等) 14위(44/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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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사위(思危)
생년 병오(丙午) 1486년(성종 17)
합격연령 22세
본관 죽산(竹山[新])
거주지 경(京)
[관련정보]
[사전] 인물 사전
[문과] 중종(中宗) 17년(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2위(2/33)
[생원시]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 2등(二等) 5위(10/100)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타과 중종(中宗) 17년(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양시 양시(兩試)
[가족사항]
[부]
성명 : 안범(安範)
품계 : 조산대부(朝散大夫)
관직 :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
[출전]
《정덕 2년 정묘 9월 초7일 사마 방목(正德二年丁卯九月初七日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K 2291.7 1746 (1507)])
10-4 안수잠(安秀岑) 의 문과방목
안수잠(安秀岑)
[문과] 중종(中宗) 17년(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2위(2/3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548C218C7A0B1486X0
자 사위(思危)
생년 병오(丙午) 1486년(성종 17)
합격연령 37세
본관 죽산(竹山[新])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사전
[생원시]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 2등(二等) 5위(10/100)
[진사시]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진사] 3등(三等) 14위(44/100)
[이력사항]
전력 진사(進士)
관직 군수(郡守)
타과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가족사항]
[부]
성명 : 안범(安範)
[형]
성명 : 안수륜(安秀崙)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11. 셋째 아들 안수금(安秀嶔)
11-1 안수금의 무과방목
[무과] 중종(中宗) 8년(151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2위(5/28)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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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탄지(坦之)
본관 죽산(竹山[新])
거주지 경(京)
[관련정보]
[이력사항]
전력 부사맹(副司猛)
부모구존 구경하(俱慶下)
[가족사항]
[부]
성명 : 안범(安範)
품계 : 봉렬대부(奉列大夫)
관직 : 행청안현감(行淸安縣監)
[형제]
성명 : 안수륜(安秀崙)
성명 : 안수잠(安秀岑)
[출전]
《정덕 8년 계유 식년 방목(正德八年癸酉式年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K 2291.7 1748 (1513)])
11-2 안수금의 묘비음기
운산공(雲山公) 안수금(安秀嶔,1488~1542)의 묘비 음기(墓碑陰記)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남파유고]로 검색해서 4번 [南坡遺槁 安由愼 著]의 맨 오른쪽 [원문]을 클릭면 된다.
1967년 간행된 남파(南坡) 안유신(安由愼,1580~1657)의『남파유고(南坡遺槁)』p.127~129에 안유신(安由愼)이 지은 죽산안씨 8세 운산공(雲山公) 안수금(安秀嶔,1488~1542)의 묘비 음기(墓碑陰記)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죽산안씨 6세 | 7세 | 8세 | 9세 | 10세 | 11세 |
안민(安民) | 안범(安範) 1460~1523 | 안수륜(安秀崙) 1483~1517 | 안축(安舳) 1500~1572 | 안중관(安重寬) 1524~1605 | 안방준(安邦俊) 출계 |
안중홍(安重洪) 1531~1597 | |||||
안중돈(安重敦) 1541~1565 | 系 안방준(安邦俊) 1573~1654 | ||||
안정(安艇) 생졸년 미상 | 系 안중묵(安重默) 1556~1607 | 안유신(安由愼) 1580~1657 | |||
안수잠(安秀岑) 1486~미상 | |||||
안수금(安秀嶔) 1488~1542 | 안의(安艤) | 안중묵(安重默) 출계 |
안유신(安由愼,1580∼165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수초(遂初), 호는 남파(南坡). 아버지는 직장 안중묵(安重默)이며, 어머니는 청풍김씨(淸風金氏)로 김홍한(金弘漢)의 딸이다. 1613년(광해군 5)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폐모반대소로 옹진에 유배되었다가 4년 뒤인 1617년에 풀려났다. 1626년(인조 4) 병마평사(兵馬評事)로 영변에 부임하였고, 1629년에는 제릉참봉(濟陵參奉), 1634년에는 빙고감예관(氷庫監刈官)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상서원직장으로 남한산성까지 호종하였다가 이듬해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1638년에 양천현령(陽川縣令)에 부임하여 3개월 만에 사직하였고, 1639년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낙향, 후진양성에 힘썼다. 저서로는 《남파유고》가 있다.
안수금(安秀嶔) - 안의(安艤) - 안중묵(安重默) - 안유신(安由愼)으로 이어지는 본생(本生) 관계로, 증손자 안유신의 문집에 본생 증조부 안수금의 묘비 음기를 기록을 남겼다.
公諱秀嶔。字坦之。本順興人。七世祖門下侍中元衡。有功高麗。移封竹城君。因籍焉。侍中子勉。祿位崇品。生挺生。挺生生乙謙。乙謙生汝舟。皆顯于世。汝舟生民。乃公之祖也。登武科 爲訓練院參軍。死於施愛之亂。考諱範早孤得長。中癸卯司馬。監淸鎭禮三縣。而終。妣天安全氏。上將軍有貞女。生公于弘治戊申七月癸未。公之昆季。只三人。而長秀崙。中丙子科。次秀岑。登壬午科。公以季。揵癸酉第。天資高雅。剛毅仁恕。忠孝幷著。常以儉約。爲常歲。乙亥擢拜宣傳官。尋調司憲府監察。歷監井邑咸平兩縣。吏畏民懐。副安東。而治理明。令固城。而民生 遂及以非罪 罷還 隼犬娛無意 於仕朝廷遂 薦寧邊虞侯 黽勉往赴 見武昌等 四郡荒廢慨然 有克復之志 獻策于朝未施 而見遞朝著知其賢 卽調都摠都事 (후략)
(번역문)
공의 휘는 수금(秀嶔), 자는 탄지(坦之), 근원(根源)은 순흥인(順興人)이다. 7세조에 문하시중을 지낸 안원형(安元衡)은 고려에 공로가 있어 죽성군(竹城君)에 이봉(移封)됨으로 인해 분적하게 되었다. 시중의 아들 안면(安勉)은 녹위(祿位)가 숭품(崇品)에 이르렀으며 안정생(安挺生)을 낳고, 안정생은 안을겸(安乙謙)을 낳고, 안을겸은 안여주(安汝舟)를 낳았는데, 모두 다 그 시대에 명성이 있었다. 다시 안여주가 안민(安民)을 낳았는데 내공(乃公, 안수금)의 조부가 된다. 무과(武科)에 올라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이 되었으나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순절했다. 아버지는 휘가 안범(安範)인데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혼자되어 외롭게 성장했다. 성종 계묘년(1483)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여 청안(淸安), 진안(鎭安), 예안(禮安)의 현감(縣監)을 두루 지내고 졸했다. 어머니 천안전씨(天安全氏)는 상장군(上將軍) 전유정(全有貞)의 따님인데, 성종 무신년(1488) 7월에 공을 낳았다. 공의 형제는 세 사람이다. 큰 형은 안수륜(安秀崙)으로 중종 병자년(1516) 문과에 급제했고, 둘째 형은 안수잠(安秀岑)인데 중종 임오년(1522) 문과에 급제했다. 공은 막내로 중종 계유년(1513) 무과에 급제했다. 타고난 기품이 고상하고 우아했으며, 강직하여 굴하는 법이 없었고, 마음은 어질고 너그러웠다. 충과 효를 함께 드러냈으며, 항상 검소하고 절약하여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었다. 중종 을해년(1515) 선전관(宣傳官)에 이어서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정읍(井邑)과 함평(咸平) 두 곳의 현감(縣監)을 지낼 때는 아전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백성들을 잘 보살폈으며, 안동부사(安東副使 = 안동판관)일 때는 다스림에 이치가 분명했다. 고성 현령(固城縣令) 때 백성들의 생활을 도왔다. 영변우후(寧邊虞侯 = 평안도우후)에 천거된후 부지런히 힘써 무창 등 4군[조선 세종 때 서북방면의 여진족을 막기위해 압록강 상류에 설치한 국방상의 요지로 압록강 상류인 여연군, 자성군, 무창군, 우예군에 설치한 것으로 4군(四郡)이라고 한다.]이 황폐해진 참상에 대해 극복하려는 뜻을 내어 조정에 계책을 올렸으나 시험해 보지도 못하고 체직(遞職)되었다. 그 후 사복판관(司僕判官), 제용감 첨정(濟用監僉正)을 거쳐, 운산군수(雲山郡守)에 임명되자 올렸던 계책을 실시해 보려고 푹풍한설을 무릅쓰고 가진 노력을 다하다가 병이 들어 중종 임인년(1542) 6월 25일에 숨을 거두었다. 보성군 옥암면 척사의 왼쪽 산기슭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전주이씨로 덕원군(德原君) 이서(李曙)의 따님이다. (후략)
12. 1939년에 출간된『교남지(嶠南誌)』12권 경상도 예안군(禮安郡) / 관안(官案)에 안범(安範)이 보인다.
http://nmh.gsnu.ac.kr/VIEWER/viewer_rel.jsp?nodeid=GAJ3_ZZZM_KNJ101_AV012_01_011&type=03(59페이지)
卞壅 太祖朝 鄭肖成路蔡顥李文命 定宗朝 權踐吳淑 太宗朝 尹興義成揜成守良朴原禮高士原羅尙久朴好生姜友德鄭介保庾珚閔好禮曺範 世宗朝 李永茂朴潔鄭斯仁趙夏宋繼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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愼言崔士老丁續宗權倦文汝衡趙增 文廟 鄭係權景行 廟端 崔資 世祖朝 曺變興安億壽鄭孝恭崔漢伯盧敬信許斯孝 睿廟 金貴知 成廟 李持韓伋李義根李管林金銓 民立生祠 盧允釐 燕山朝 裵季厚李陲劉永貞 中廟 韓休洪義孫金濬崔決申樽趙守忠 安範鄭公徵洪胤昌郭瑋朴仁範金自湖金守雍金世憲任鼐臣 仁宗朝 趙應卿 明廟 李秀枝李鳳壽 柳輬魚叔義梁成海郭趪 爲置易東書院學田又出官店良賤以(屬宣)廟 鄭惟一孫英濟柳夢鼎羅藎國李俊宗李軸金夢熊高應陟郭瑾鄭士信鄭應台申之悌
13.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중에서
1) 中宗 8卷, 4年(1509 己巳 / 명 정덕(正德) 4年) 3月 6日(戊戌) 2번째기사
○臺諫啓洪景舟事, 且曰: “韓恂已受其家直, 又欲奪人折受家基, 貪欲莫甚, 當依法罪之。” 諫院啓曰: “藝文館檢閱鄭鍠, 前在承文院, 被譴僚中, 議越薦狀, 所失甚大。 今藝文館敢薦, 是汚史官也。 請遞鄭鍠, 且推藝文館。南平縣監安範, 性本依阿善事人, 且在廢朝, 爲監役, 多行不法, 請幷遞。” 憲府啓曰: “陸閑事, 義禁府不詳究推閱, 以赦前事論斷。 更令推考。” 傳曰: “鄭鍠及推考事依啓, 餘不允。”
2) 中宗 8卷, 4年(1509 己巳 / 명 정덕(正德) 4年) 3月 7日(己亥) 2번째기사
○御朝講。 持平朴以寬、正言柳沃, 以洪景舟、韓恂、陸閑、安範等事論啓, 不允。
3) 中宗 8卷, 4年(1509 己巳 / 명 정덕(正德) 4年) 3月 11日(癸卯) 1번째기사
○癸卯/御朝講。 大司憲安瑭, 啓洪景舟、韓恂事, 司諫尹耕, 啓洪景舟、安範事, 侍讀官安處誠曰: “近以原從功臣項鎖事, 欲推憲府。 臺諫持一時公議, 而以此小失推考, 則無優待之意。” 上曰: “不關言路, 故欲推考耳。” 處誠曰: “憲府所爲, 雖或差錯, 固當優容。 且原從功臣於國家, 何關焉? 不可與親功臣, 一般待之。” 領事成希顔曰: “原從功臣不項鎖, 其來久矣。 但不可信其所言, 故考(錄卷)〔錄券〕間項鎖耳。 臺諫雖有差誤, 固當優容。 臺諫行呼唱於道路, 使人截然不可犯者, 培養鯁直之氣也。 處誠之啓, 欲上優待也。” 上曰: “韓恂, 功臣且宰相也。 推考已知其非, 何必治罪?”
4) 中宗 8卷, 4年(1509 己巳 / 명 정덕(正德) 4年) 7月 22日(壬子) 1번째기사
○壬子/命召臺諫就職曰: “所論等事, 不可聽則已, 李自堅、尹衡、安範竝遞之。 其餘久遠之事, 雖久廢事, 不可從也。” 臺諫啓曰: “廢事臣等亦知之, 欲革萬世之弊, 何暇計一時之弊? 論啓旣久, 而但遞三四人, 豈從諫之實乎? 臣等所論, 皆大事, 而此三四人則不關。 臣等豈以此就職乎?” 遂辭職而退。
14. 보성 죽산안씨 재실 : 척산재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