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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들은 어떻게 강화에 정착하게 되었나?
우리민족의 수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역사의 고장 강화 !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며 99Km 의 해안도로가 낭만을 더해준다.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까지 불리우는 강화는 어디든 1m만 파 내려가면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할정도로 인류역사의 발자취를 그대로 공부할 수있는 곳이기도하다. 전 KBS특파원및 SBS 본부장을 역임하신 유자효 시인님의 인류 시작과 강화의 연관성을 차중 강의로 들으며 일찍 덕수궁을 떠나 강화로 출발했다. 인류는 네안데르탈인 멸종 후 연모를 쓴 크로마뇽인이 탄생하고 현생인류 ( 호모사피언스 )의 기원이 아프리카에서 시작된다. 유럽쪽으로 간 ( 포카스족 )은 백인의 조상이되고 동쪽 시베리아로 간 인종들은 몽골리안의 조상이된다. 우리민족의 시원은 담수량이 전 인류를 200년간 먹여 살릴수있다는 바이칼호수에 있는 알혼섬이다. 알혼섬에가면 지금도 무속신앙 (샤머니즘)이 남아 있으며 알혼섬의 원주민은 우리민족과 닮았다. 우리민족이 북에서 온것을 알수 있는 것은 장례문화를 보면 알수가 있다. 사람이 죽으면 칠성판을 덮는데 이것은 북두칠성을 상징하며 북에서 왔다는 이유이고 죽으면 조상이 있는 북으로 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강화는 겨울에도 따뜻하고 뻘이 많아 고대인들이 살기좋았기에 남쪽으로 내려오던 고대인들이 최초로 정착하게 되었고 구석기시대부터 살아 청동기문화를 꽃피웠다. 어느 나라수도이든 강을 끼고 발달하게되는데 서울은 한강과 산들이 많아 천예의 수도 자리인반면 더큰 장점은 강화도가 가까이에 있다는 거다. 우리나라는 평균 50년에 한번꼴로 전쟁을 겪었고 전란때 왕실이 강화로 많이 갔다. 징기스칸이 연해주를 비롯하여 폴란드 , 인도, 러시아까지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것은 살아있는 식량인 말을 이용하여 건조시킨 말고기를 말에 매달고 다니며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죽였는데 몽고가 가장 무서워 한 민족은 고려인이라고 한다. 39년간 몽고와 싸우며 버틸 수 있었던것은 강화도 때문이다. 초원에 강한 몽고인은 물에 특히 약했으며 우리민족의 항몽정신은 자작나무로 만든 팔만대장경을 보면 잘 알수가있다. 글자 한자 한자에 목욕 재개를 하고 부처님께 절을 올린 후 만들었다하니 그 공이 가히 어떠하랴! 이민족의 시련에 여한이 된 고려인들은 천년뒤의 후손들을 위해 평화의시대(미륵의시대)를 위해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갯펄에 자작나무를 묻어 천이백년이지나면 향이 된다고 믿었다.
이것을 매향이라고 하는데 고려초에 묻은 자작나무는 지금으로부터 천년이 된 것이다. 매향리는 천년전에 고려인들이 자작나무를 묻었던 곳이다.
▲고려궁지내 외규장각
매향은 강화인근 갯펄에 많이 발견되고있다. 다시듣는 인류문화사와 강화의 연관성을 들으며 어느덧 강화산성에 다달았다. 강화산성은 대몽항쟁을 위해 고종 19년 도읍을 강화로 옮기고 토성이었던것을 숙종때 석성으로 쌓았다. 남문은 안파루, 북문은 진송루, 동문은 망한루, 서문은 첨화루이다. 몽고가 강화의 성을 모두 부수라고 하여 우리손으로 부순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강화산성안에는 오읍(五泣:다섯가지 소리가 들린다는) 약수터가있다. 조상님들의 한의 피빛인양 단풍은 붉기만한데 우리는 갖은 포즈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조상님께 미안한생각을 하지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것이다.
▲ 강화성 북문 고려궁지는 대몽항쟁을 위해 고종19년 ( 1232년 )에 도읍을 강화로 옮기며 개성의 궁궐모양을 본떠 지었으나 1270년 몽고와 화의하고 개성으로 천도한뒤 불에 타 없어졌고 조선시대에 강화 유수부 동헌이 세워졌다. 이밖에 명위헌이라는 현판은 영조때 백하 윤순이 쓴것이다. 장녕전 , 외규장각등 많은 건물이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임진왜란 전에는 실록을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장군 덕분으로 전주실록만 남아있게 되었다. 전주실록을 마니산 사고터로 옮겨 5개의 복사본으로 만들어 오대산, 태백산, 마리산, 묘향산에 가게되었다. 정족산성의 사고는 양헌수가 지켜 지금 서울대 규장각에있고 묘향산것은 북한으로갔다. 외규장각은 박병선 (여) 현 80세 ) 가 블란서 국립박물관에 사서로 근무하면서 1866년 프랑스가 한달간 강화를 점령시에 도둑질한것을 알게되어 청와대에 보고하게되고 1972년 육영수 여사는 치하의 편지와 금일봉을 하사했다. 박병선이 외규장각을 프랑스 박물관에서 발견하기전까지 우리나라에선 도둑맞은 것조차 몰랐다고한다. 또 1871년 (신미양요 ) 때 광성보를 미군이 파괴하고 어재연 장군기 (가로 4M, 세로 3M )를 찬탈해 갔는데 한동대 교수의 노력으로 10년간 임대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 이건창 생가 명미당 강화 마니산 동쪽 기슬 화도면 사기리에 위치한 명미당(明美堂) 이라 써있는 이건창 대 문장가의 생가를 찾았다. 이건창 (1852-1898) 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대 문장가로 암행어사, 감찰사를 지냈다. 이건창은 최연소 (14세 )애 과거에 합격한 천재시인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 이시원 ( 이조판서 ) 에게서 14살 까지 컸으며 병인 양요때 할아버지 이시원은 동생과 함께 유서 3통을 쓰고 양잿물로 자결하였다. 이 과정을 지켜보고 자란 이건창은 당파싸움으로 인해 나라가 망함을 애절하게 느끼게되어 남다른 역사관을 갖게된다. 허균이 명나라에서 받아들인 주자학의 잘못을 고친 양명학 지행합일 강화학파의 효시인 정재두가 강화 하일리에서 연구하게되고 이시원은 양명학 지행합일의 정신을 하곡 정재두에게서 받아들이게 된다, 정재두는 정몽주의 11대 손으로 강화의 서쪽 끝 양도면 하일리에서 연구하여 실학의 선두 주자로서 박지원 정약용의 원조가 된다. 그의 학문을 존경하여 서울에서 3일씩 달려와 1달씩 머물며 학문을 익혔다한다. 정재두는 80세 이상을 산다. 이건창은 당의 통략이란 당파 싸움을 연구하여 쓴 책이 있으며 400여편의 시 를 남겼다. 2벌 옷, 3 벌 그릇을 갖지 않는다는 지행합일 정신으로 평생을 청백리로 사셨다. 47세에 돌아가셨는데 소박한 묘소는 양도면 건평리에 소재한다. 명미당 이건창 선생의 문학비는 한국 문학비건립동호회회장 이상보 교수님의 주최로 생가 옆 뜰에 서있다. 개성을 6년 사이에 다섯 번 지났지만 부소산과 채하동도 들르지 못했네 자세히 헤아리니 일생동안 벼슬살이에 마음에 맞는 일보다는 몸만 고달팠네 라는 비문이 쓰여있다. 길건너 밭둑가엔 역사의 절박 했음을 강한 가시로 표현한 400년 된 탱자나무가 천연기념물 제 79호로 서있다, 탱자나무는 서로 가시로 찔러 향기를 낸다고 하니 특이하다. 또 탱자나무는 적병이 성벽에 오르지 못하게 심었었다.
▲ 강화성 서문 옆 연무당옛터
강화읍 서문안에 위치한 연무당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즉 강화도조약 (불평등조약 ) 이 체결된 곳이고 일제 36년의 시초가 된 곳 이기도하다, 치외법권이 인정된 조약이 체결시에 강화에 우리군은 모두 170명이었는데 350명의 일경이 무장하고 체결하였다하니 나라의 허약함을 어디에다 호소하랴 ... 박정희 대통령은 연무당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 했다한다,
▲ 이규보 묘
마지막 석양을 바라보며 강화도 허리쯤에 위치한 백운 이규보선생의 묘를 찾았다. 백운은 여주 사람으로 훌륭한 민족 사관과 함께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 주몽편 일대기를 서사시로 썼다. 1900년 경에 무덤을 찾게되었고 동명왕편에 고려는 고구려의 기상을 되살려 수도를 개경으로 옮겨 창건할거라고 쓰여 있다고한다 |
첫댓글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꼼꼼히 공부를 하며 여행을 하시는 서용선님 대단하시네요.
감사합니다. 다시 정리하여 기록하는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