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안정헌(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시는 대체로 관념들이나 사건들을 다루는 게 아니라
인간이 관념들이나 사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시들은
아무리 객관적인 시라 할지라도 조심스럽게 검토해보면
실제로 인간 자신에 ‘관한’ 시로서 판명된다.
1.
『늑대 거미』는 이은춘 시인의 처녀시집이다. 시인은 2015년 『월간문학』에 「흑립」이 추천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시집은 2019년에 간행된 그의 첫 시집이다. 이 시집은 50대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등단한 시인의 습작기부터 등단 이후까지 쌓은, 그의 깊이 있는 체험이 시적 표현으로 드러나고 있다.
시집 『늑대 거미』에는 53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져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 작품은 그가 이 시집 첫머리에 붙인 「시인의 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금씩 길이 보이는 듯하다가 / 문득 가파른 계단”을 만날 때의 ‘고투’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2019년 인천문화재단 예술표현활동 지원으로 출판된 이 시집에는 인천을 배경으로 쓴 시들이 눈에 띈다. ‘아암도’가 있는 송도의 해안도로를 묘사하고 있는 「해안도로」, 연수구 동춘동에 소재하고 있는 ‘봉재산’과 그 주변을 그리고 있는 「불면증」, 그리고 「소래염전」, 「나팔꽃 그늘」(모래내 시장), 「십이월의 과수원」(한들마을), 「수인선」, 「주말농장」(수정산」), 「바람에 길을 잃다」(모도), 「창후리」 등의 작품들이 인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들 작품을 중심으로 이은춘의 늑대 거미에서 표상된 인천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2.
1995년 인천이 직할시에서 광역시로 확대되면서 강화군과 옹진군, 그리고 검단지역 등이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그 결과 여러 방면에서 양적 팽창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통합에 의한 팽창 이외에도 인천광역시는 해안매립을 통해 꾸준히 그 면적을 넓혀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연수구의 송도신도시일 것이다.
일제강점기 연수구 옥련동과 동춘동 해안 일대를 일제는 ‘송도’라는 지명으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1937년 수인선을 개통하면서 송도역이 생겼고, 일본인들은 이 지역을 관광지로 개발할 계획을 세웠다. 해안에 모래를 깔고 인공 백사장을 만들어 수문을 통해 바닷물을 유입하여 인공 해수욕장을 조성하기 위해 송도 해안 일대를 매립하였다. 이후 송도의 해안 일대는 198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매립되어 현재 해안도로변에 ‘아암도’만이 이름만의 섬으로 덩그러니 남아 있다.
갯바위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물 때 기다리던 사람도
동죽 가무락도 밀려난 지 오래
포크레인이 들고 뛰고
방파제가 놓이고
모래바람 속 바벨을 꿈꾸며
한바탕 몸살을 앓던
바다, 한쪽을 깔고 앉은 신도시
이 밤에는 북극성도 길을 잃었다
가물가물 섬 하나
하얗게 발목을 적시던 파도
빌딩 외벽마다 멀티플렉스 광고 요란하고
어둔 콘크리트 계단 아래가 늪지처럼 고요하다
갯메꽃 발자국 지워진 가시철망 위
먼 파도소리에 귀 곧추세우던 괭이갈매기 한 마리
날개 파닥이다 센트럴파크 너머 점점이 사라진다
아암도 해당화는 다시 필 수 있을까!
가로등도 꺼지지 않는 팔차선 도로 옆
더 밀리지 않겠다는 듯
저 혼자 남은 갯바위에 키 작은 소나무
펄 속 깊이 다리를 박고 있다
-「해안도로」 전문
1990년 11월 12일 송도 갯벌의 간척사업이 허가‧승인되면서 갯벌을 메운 그곳에는 ‘경제자유구역 송도국제도시’라는 인공의 신도시가 건설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사업은 진행 중이다. 여의도 면적의 17배에 달한다는 송도신도시로 들어가기 위해 조성된 해안도로 변에 위태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암도’가 시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송도신도시가 들어선 동춘동의 동막갯벌은 다양한 생물들의 터전이었다. 이 곳의 갯벌에는 백합, 가무락, 바지락, 동죽 등의 조개류가 풍부하여 조갯골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특히 동죽은 전국 총생산량의 90%를 차지했다고 한다. 또한 동막갯벌은 이들 조개를 먹이로 삼고 있던 철새들의 서식지로도 그 명성이 높았다.
1980년대까지 송도유원지를 찾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썰물 때면 드러나는 갯벌을 따라 아암도까지 걸어갔던 추억을 기억할 것이다. 소나무가 해변을 둘러싸고 있는 작은 섬, 그리고 조개를 잡겠다고 호미로 갯벌을 파헤치던 기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듯하다. 그런데 지금 이곳의 모습은 어떠한가. 갯골을 따라 놓여진 해안도로와 그 너머에 있는 송도신도시는 ‘동죽’, ‘가무락’, ‘갯메꽃’, ‘해당화’와 ‘괭이갈매기’ 등 예전의 주인들을 몰아내고 신도시를 개척했다는 위용(?)을 뽐내고 있다. 이처럼 “문명의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파괴된 자연, 개발에서 소외되어 퇴락한 장소”가 되어 버린 ‘아암도’, 밤새 가로등이 꺼지지 않고, 건너편에는 ‘빌딩 외벽마다 멀티플렉스 광고 요란’한 한가운데 버티고 있는 ‘아암도’는 불면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압도적인 인공의 무시무시한 힘 앞에서 나약한 자연의 모습은 시 「불면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키 재기 경쟁이라도 하는 듯 / 신갈나무보다 높게 쑥쑥 솟아오른 / 그랑블 하이빌 엘지 고층아파트 // 밤새 꺼질 줄 모르는 옥탑 조명등 아래 / 쉬이 잠들지 못 하는 쥐오줌나무 억새밭 // 일백구 미터 봉재산은 오늘밤도 불면증에 시달린다 - 「불면증」 부분.
연수구에 소재하고 있는 ‘봉재산’의 지명은 옛날 산의 정상에서 봉화를 피웠다는 설과 산에서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과거에는 해안가와 접해있던 곳으로 군대시설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송도신도시 등 주변의 매립과 개발로 인해 옛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해발 109m밖에 되지 않는 산이지만 해안과 접했을 때에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였을 것이다. 그런데 고층아파트 사이 ‘덩그마니 가운데 앉혀’있는 봉재산의 형상은 산으로서의 존재마저 위태롭게만 느껴진다. 설상가상으로 ‘밤새 꺼질 줄 모르는 옥탑 조명등 아래’에서 ‘불면증에 시달’리는 산이라니 두말하여 무엇하리오.
3.
인천에는 경인철도와 수인선이라는 두 개의 철도가 있다. 경인철도가 배를 타고 인천으로 도착한 사람들을 서울로 이송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면, 수인선은 여주와 이천 등의 상품의 경기미와 소래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을 인천항을 통해 수탈해 가기 위해 일제가 설립한 철도이다. 1994년 협궤열차였던 수인선의 경적 소리를 인천에서 더이상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다만 그 흔적만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가 2012년 복선전철로 바뀌어 다시 개통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수인선 소래철교는 사람들에게 협궤열차에 대한 추억을 소환하고 있다.
끊어진 철교 위 물까마귀
발목까지 차오르는 바다를 부려놓고 있다
폐사역 가시철망 속으로
하얀 찔레꽃들 소금 알갱인 양 점점이 박혀있다
햇볕에 나란히 녹슬어가고 있는 선로
사납게 쏟아지는 붉은 빛
바다는 목이 마르고 잔등이
굽은 삼엽충 한 마리 꿈틀 지나간다
하루 두 번
숭어 망둥이 꽃게
출렁출렁 바닷물 드나들던
수인선
낡은 안내 표지판만 등대처럼 서 있다
-「수인선」 전문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던가. 1995년 12월 31일을 기점으로 인천사람들에 추억으로 남아 있던 꼬마열차(협궤열차의 별칭) 수인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비록 17년 뒤인 2002년에 수인선 전철이 설립되었지만, 꼬마열차였던 수인선의 추억을 되살리지는 못했다. 비록 일제가 수탈을 위해 설립한 철도였지만, 해방 이후 수인선은 교통이 불편했던 주변 사람들에게는 생활의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꼬마열차 덕분에 농촌사람들은 재배한 농산물을 소래역이나 수인역에서 팔고, 돌아가는 길에는 소금, 생선 등 찬거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역으로 손질한 생선을 담은 함지를 머리에 이고, 농촌으로 생선을 팔러 다니던 사람들에게도 꼬마열차는 삶의 현장이었을 것이다.
생활의 현장이었던 수인선이 다양한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해 그 기능을 다하고 다만 ‘낡은 안내 표지판만 등대처럼’ 서 있을 뿐이다. 특히나 기념물이라도 되는 양 남겨놓은 소래철교와 그 곳을 찾는 관광객의 안전을 위해 쳐놓은 ‘가시철망’이 오히려 쓸쓸함을 자아낸다. 관광객들만 오갈뿐인 소래역과 그 근방 염전의 풍경을 ‘폐염전 제방 너머 수인선 전철 지나갈 때마다 / 푸드득 물까마귀 날아가고 / 낯익은 목소리 두런두런 들릴 것 같은 저녁 // 빈 갯벌을 건너 온 마른 바람은 / 여전히 수차의 헛바퀴를 돌리고 / 토판에 바닷물 부딪히는 소리 / 고무래로 소금 끌어 모으는 듯한 소리 // 밑동이 썩어 기울어진 소금창고 위로 / 하루를 견뎌온 시간들만 컴컴하게 쌓이고 있다“(「소래염전」)고 묘사하고 있다. ’들릴 것 같은‘ ’소금 끌어 모으는 듯한 소리‘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현실에서 사라진 소리를 시인은 가슴으로 듣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금밭이었던 염전에는 / 밀물처럼 몰려드는 함초 무리뿐 / 사람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다“고 서술하였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흔적이라도 놓치지 않고 잡으려는 것이 시인의 마음이 아닐는지.
4.
모든 것은 세월을 따라 스러지고 그 자리를 또 다른 무엇인가가 메우는 것이 이치이다. 하지만 스러졌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억하고 기록됨으로써 생명을 이어가고, 기록됨으로써 새롭게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말로 글을 마친다.
<풍경의 발견>은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는 선적(線的)인 역사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왜곡되고 전도된 시간성 위에 존재한다. 이미 풍경에 익숙해진 사람은 이 왜곡을 볼 수 없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