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앞에 조영미님이 올린 글에 실린 사진의 인물에 대해 말합니다.
아주 귀한 사진이 올라와 있네요. 덕암아지매(조태제의 처, 조영미, 조율래, 봉혜, 함래의 모친)에게 물어보니, 맨 위의 이 사진은 도무실 할아버지 조종규(趙鍾奎, 1878-1959년)님의 사진이랍니다.
도무실할아버지는 청동할아버지(조용수鏞壽, 조찬제, 희제, 일제, 욱제, 경제의 부친)와 서욱할아버지(조용삼鏞三, 조태제의 부친, 조영미, 조율래, 봉혜, 함래의 조부), 기산할아버지(조용정鏞正, 조근제의 부친), 조동할아버지(조용성鏞晟, 조은제, 해제의 부친)의 부친이다. 도무실할아버지 조종규(趙鍾奎)님은 저 조성래(정래, 상래)의 증조부(조대규趙大奎)와 사촌 간이고, 조병래(조욱래), 조증래(일래, 중래), 조경래(상래, 재만), 조상균(남준, 동준)님의 증조부(조정규趙廷奎)와 사촌 간이다.
그래서 도무실할아버지는 그동안 제가 많이 들었던 이름이다. 제 부친의 고종사촌 형인 마전아제(이경호,1919년생)가 있다. 그는 어릴 적에 모친을 잃고, 외가인 하림 우리집에 와서 많이 살았다. 그 분이 저에게 도무실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제가 태어난 해에 도무실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도무실할아버지의 산소를 제가 참배했던 적이 있다. 산소는 원래 남계공할아버지 재실(하림 윗 재실) 바로 뒤에 있었다. 그 산소는 제가 본 하림 개인의 산소 중 가장 명당자리로 보였다. 몇 년 전에(2018년쯤) 하림 욋골(외얏골) 선영으로 이장했다. 이장 이유는 그 자리에 산소가 없던 함안조가 제1대조에서 9대조까지의 모든 선조들의 산소를 다 모신다 하여, 이장해주었다. 현재 그 자리에 함안조가 제1대조에서 9대조까지의 모든 선조들의 산소와 비석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족보를 보면, 도무실할아버지 조종규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 놓았다.
鍾奎(종규) 풍의단아(風儀端雅, 풍체가 단아했고,) 행방언원(行方言圓, 품행이 바르고, 언어가 원만했다.) 지절계후(志切啓後, 뜻이 간절하여 후손 및 후학들을 잘 가르쳤고,) 성독봉선(誠篤奉先, 지극한 정성과 돈독한 마음으로 조상(先祖선조)과 선인(先人)들을 잘 떠받들어 섬겼다. 극석사물(克晳事物, 사리에 지극히 밝아서) 일무착천(一無錯舛, 단 한 번도 잘못 본 경우가 없었다.) 舛 어그러질 천
나는 도무실할아버지는 살아 계실 때 함안군 내에서 가장 큰 어른이었다고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82세까지 살았고, 학식도 가장 깊었고, 품행도 발랐고, 사리에도 밝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무실할아버지는 함안향교의 전교(典校, 교장)를 6번이나 지냈다. 전교는 지역유림에서 선출하는 선출직 관직으로서 지방문묘를 수호하는 한편 지역사회의 윤리문화의 창달을 위해 활동하는 향교의 총책임자다. 일정한 보수가 지급된다. 사진에 보이는 도무실할아버지의 풍모가 예사롭지 않지요? 비록 체구는 작고,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양반다리를 하여, 조금도 흔들림 없이 앉아 있는 저 자태를 보십시요. 또 아랫배의 내공을 보십시요. 그 모습에 중심이 잘 잡혀 있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풍모가 잘 드러나 있지요? 함안향교에서 유림회의를 할 때 도무실할아버지께서 "어험 어험" 하며 헛기침 소리만 두어 번 내면,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 했다고 합니다. 1949년경 어느 날 민족청년단들이 떼를 지어 죽창을 들고 빨갱이들을 모두 잡아 죽이겠다고 함안향교로 뛰어 들어왔다. 향교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무서워서 다 도망을 쳤다. 그 당시는 민족청년단들이 사람을 마구 죽이던 시절이다. 1948년에 일어난 제주4.3사건에서는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의 충돌로 2만5천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도무실할아버지는 향교마루에 앉은 채 꼼짝하지 않고 그들에게 호통을 쳐서 내보냈다. 그 당시에는(1930~40년대) 저런 사진을 아무나 못 찍었다. 아주 오래된 옛날 사진이지만 사진 속의 모든 사물이 또렷하게 잘 보이지요? 저 사진은 프로 제1등 사진사가 찍은 사진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분이 아니고서는 저런 모자(진사모)도 함부로 못 썼다. 도무실할아버지와 장남 청동할아버지(조용수)는 하림 골짜기에 살면서 평생 지게를 져본 적이 없는 양반이었다. 그 결과는 어떠했겠는가?
(몸종 갑돌이 애미 이야기) 도무실할아버지의 배(配, 배필)는 순흥안씨이다. 순흥안씨할머니는 시집올 때 몸종을 한 명 데리고 왔다. 그가 누구냐 하면 갑돌이 애미다. 갑돌이의 누나가 선이다. 그래서 선이 애미라고도 한다. 나도 갑돌이 애미를 기억한다. 갑돌이 애미는 내가 알고 있는 하림에서 유일한 마지막 몸종으로 있다가 돌아간 사람이다. 1894년 갑오경장의 선언에 따라 조선의 신분제도가 철폐되자 조선의 다른 종들은 거의 다 자유의 몸이 되어 주인을 떠나갔다. 하지만 갑돌이 애미는 "평생 진심으로 모셔왔던 주인 곁을 떠날 수 없다"며, 끝까지 주인 곁을 지키다가 하림에서 돌아갔다. 그녀는 비록 종의 신분이지만 평소 주인이 그녀를 인격적으로 잘 대해준 결과였다. 도무실할아버지는 갑돌이 애미에게 따로 살 수 있는 조그만한 집도 하나 마련해주고, 결혼도 시켜주었다. 내가 어린 시절 그녀는 아들 갑돌이와 함께 하림리 5반 또랑가 집에 살았다. 그 집은 수반아제(조범제) 집 입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갑돌이는 간질이 있었고, 노래를 멋들어지게 잘 불렀다. 밤낮없이 노래를 부르며,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35살쯤 죽었다. 그 후 갑돌이 애미는 홀로 그 집에 살다가 1967년쯤 세상을 떠났다. 갑돌이 애미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집에 들어와서 살은 사람이 도무실할아버지의 손부(孫婦, 손자 조찬제의 아내, 상정아지매)의 동생인 강상댁이다. 도무실할머니 순흥안씨는 1909(己酉기유)년 3월에 둘째 아들인 서욱할아버지를 낳고, 그 다음 달(4월 18일)에 갓난아기를 남겨 두고 돌아가셨다. 그래서 서욱할아버지는 몸종으로 따라 온 선이 애미 등 여러 사람의 동냥 젖을 빨고 자랐다. 분유가 없던 시절 이야기이다. 한국에 분유가 들어온 것은 6.25동란 이후다. 미국에서 원조물자를 많이 보내주었는데, 그 중 분유도 들어 있었다. 내가 하림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인 조창제님이 급식빵을 한 아름 안고 교실로 들어와서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그 때 먹은 빵맛을 지금도 못 잊고 나는 가끔 그 빵맛과 비슷한 맛이 나는 부산 옵스 빵집의 식빵을 자주 산다. 미국에서 원조물자로 보내준 분유와 옥수수 가루를 가지고 학교에서 죽을 끓여 밥을 옳게 못 먹고 사는 학생들에게 점심으로 먹였다. 이것은 1960년대의 이야기다. 선이 애미는 서욱할아버지가 태어나기 3개월 전에 선이를 낳은 상태였다. 그래서 선이 애미의 젖을 가장 많이 빨고 자랐다. 서욱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동냥 젖꼭지를 물리어준 선이 애미를 평생 고맙게 생각했다. 그래서 여태껏 서욱할아버지(조율래) 집 차례(茶禮)의 끝머리에 따로 차례상을 하나 더 차리어, 선이 애미의 위패를 모시고 차례를 모셔주고 있다. 율래 동생이 서울로 이사가기 전에 나도 여러 해 그녀의 차례상에 절을 해드렸다. 그 때는 부산 감전동에 있던 우리집에서 차례를 모시고, 모라로 약 30여분 차로 이동하여, 큰 집인 조철래 형님 집의 차례를 모신 뒤 약 10분 거리인 율래 동생 집으로 가서 차례를 모셨다. 세 집을 돌면서 차례를 다 모시고나면, 점심 때가 되고 모두 다 몹시 피곤해 했다. 2,000년 서욱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명절날 나는 율래 동생에게 말했다. "이제는 선이 애미의 차례상은 그만 차려줘도 안 되겠나?" 율래 동생이 답했다. "할아버지께서 해오신 것을 그대로 해드리는 것이 안 좋겠습니까?" 요즘도 율래 동생은 선이 애미의 차례상을 따로 차려, 차례를 모셔주고 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집안 종의 차례상을 차려주고, 거기에 양반 자손이 예의를 다하여 절을 올려드리는 집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서욱할아버지 존함은 조용삼(趙鏞三)이다. 그의 아들은 조태제이고, 손자는 조영미, 조율래, 조봉혜, 조함래이다. 이 중 조봉혜(1963년생)는 2020년 현재 부산대학교치과병원 병원장이다. 인테넷에 조봉혜를 검색하면 나온다. 증손자녀는 율래 밑에 조예랑(여), 조예진(여), 조현우(남)가 있고, 함래 밑에 조현중(남), 조현민(여)이 있다. 조영미 밑에는 전지현(여), 전지혜(여)가 있고, 조봉혜 밑에는 최은진(여), 최성은(여)이가 있다.
도무실할아버지는 당시 하림동네에서 연세가 가장 많았던 분 중의 한 분이었다. 그래서 족보에 “향년82(享年八十二, 82세의 수복(壽福)을 누렸다)”라고 기록돼 있다. 1959년 음력 12월 7일에 돌아가셨다. 장사는 6일장으로 하였다. 의령, 합천 등 먼 곳으로부터 수많은 유림의 사람들이 구름 처럼 몰려와 문상을 했다. 큰 돼지를 두 마리나 잡았다. 원래 하림 윗 재실 뒤에 있던 산소는 명당스러운 자리와 석물(石物, 비석, 상석 등)의 품격이나 산소의 규모로 봤을 때 하림 개인의 산소 중 최고의 산소였다.
도무실할아버지의 부친은 조성주(趙性胄)이시고, 그 종손은 자(子) 조용수(趙鏞壽, 청동할배), 손(孫) 조찬제(趙燦濟, 상정아제), 증손(曾孫) 조태래(趙泰來), 고손(高孫) 조현승으로 내려온다.
* 이 글은 다음카페 <함안조가 감찰공파 하림유사>에 조성래(1959년 하림 생)가 써 올린 글입니다. 이 글을 후손들에게 카톡으로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이 카페는 살아있는 족보가 될 것입니다. 자신의 뿌리, 선조를 확인해 보고 싶을 때 휴대폰으로 바로 들어가서 볼 수 있는 그런 족보 말입니다. 회원님들은 집안에 이런 사진을 갖고 있으면 이 카페에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오늘 점심 때 올린 글인데, 벌써 조회수가 110회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카페에 방문한 사람이 162명입니다. 제가 이런 저런 카페를 운영해보지만, 이렇게 반응이 좋은 카페는 처음입니다. 댓글 부탁드립니다. 댓글을 많이 달아주셔야 카페가 더욱 활성화 됩니다. 댓글은 한 문장만 써도 됩니다.
덕암아지매(전춘자, 1938년생, 조태제의 처, 조영미, 율래, 함래, 봉혜의 모친)께서 저에게 댓글로 올려달라고 문자로 보내온 것을 그대로 올립니다.
덕암댁이말한다 더운날씨에수고많다후세들이잘모르는일을찾아서하느라얼마나힘들겠니고맙고존경스럽다공부한보람이있구나아무도생각지도못한일을하니정말자랑스럽다집안에이런사람이있다는게앞으로승승장구하기바란다사랑해
덕암아지매는 우리 집안에 19세에 시집와서 44세에 덕암아제가 위암으로 돌아가신 후 홀로 4남매를 훌륭하게 잘 키우느라 이를 악물고 살아오신 분입니다. 덕분에 아지매 딸 조봉혜는 현재 부산대학교 치과대학병원 병원장을 하고 있습니다. 집안의 자랑거리입니다. 덕암아지매는 양심과 체면을 강하게 가지고 계시고, 경우에 없는 짓은 일체 하지 않으십니다. 아지매는 도무실할아버지 손부이시고, 서욱할아버지 며느리입니다. 1979년경 하림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이후 줄곧 우리 집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사시면서 집안 관계를 많이 해왔습니다. 자주 집안 사람들을 많이 찾고, 집안에 잔치가 있을 때면 몸을 아끼지 않으시고 상을 차려내고, 치우고 하는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아지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힘든 가운데 4남매 다 잘 키워서 시집, 장가 보내시느라. 집안에서 훈장을 주셔야 할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