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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가 뭐죠?
지난 8월 6일 새벽, 2백26명(총 탑승객 2백54명)의 생명을 앗아간 비행기 추락사고가 발생했다. 사고의 구체적인 원인을 알기 위해 2개의 블랙박스를 해독하는 일이 관건이다. 블랙박스의 원리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가. 블랙박스 회수
비행기 추락사고와 같은 대형 참사의 특징은 사고를 일으킨 실체가 거의 소멸돼버려 좀처럼 원인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산산이 부서진 잔해 속에서 사고의 원인을 밝힐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블랙박스다. 커다란 충격이나 화재 속에서도 유일하게 손상되지 않고 사고 직전의 비행기 상황을 알려주는 장치다. 노랗게 빛나는 단단한 상자 - 6천m 해저에서 30일 버텨내는 블랙박스. 비행기 사고현장에서 가장 먼저 서둘러야 할 일은 인명구조작업, 그리고 블랙박스의 회수다. 기체가 산산조각이 난 상황에서 블랙박스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우선 비행기 꼬리 부분을 뒤져야 한다. 블랙박스는 대부분 비행기 꼬리 밑 부분에 설치된다. 비행기가 추락할 때 가장 충격을 적게 받는 부위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오렌지색으로 빛나는 박스를 찾는다. 일반적으로 블랙박스란 말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비밀의 열쇠'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래서 흔히 블랙박스는 검게 칠해진 미스터리한 상자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하지만 정작 비행기에 설치된 블랙박스는 검은 색이 아니다. 사고 현장에서 검은 색 상자가 다른 파편들과 뒤섞였을 때 좀처럼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블랙박스는 형광을 입힌 오렌지색으로 칠해져 있다.
만일 비행기가 바다나 호수 속에 빠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깊은 물 속에서 육안으로 블랙박스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주파수탐지기가 동원된다. 블랙박스 손잡이 옆에는 주파수 발신장치가 설치돼 있다.
만일 이 장치에 물이 접촉하면 내부에서 화학반응이 일어나 고유의 비상용 주파수(37.5kHz)가 30일간 발신된다. 블랙박스가 쉽게 발견됐다 해도 추락할 때의 충격이나 화재로 인해 내부가 손상을 입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블랙박스의 외형은 땅에 떨어지는 순간(6.5m초, 1m초=1/1000초) 자기 무게의 3천4백배를 감당하고, 1천1백℃에서 30분간 견디는 특수 재질로 만들어졌다. 이 정도면 6천m 바닷속에서도 30일을 버틸 수 있다. 자체 배터리 수명은 6년.
나. 조종실 음성기록장치 - 영원히 도는 30분 테이프
블랙박스를 전문적인 항공용어로 표현하면 조종실 음성녹음장치(CVR, Cockpit Voice Recorder)와 비행자료 기록장치(FDR, Flight Data Recorder)로 구분할 수 있다. 즉 비행기에 설치된 블랙박스는 2개다. 이제 블랙박스의 뚜껑을 하나씩 열어보자.
CVR의 핵심 기능은 조종실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리를 저장하는 일이다. 기장, 부기장, 항법사(기관사), 그리고 조종실 내의 소음이 4개의 채널을 통해 각각 기록된다. 각 채널을 구분하는 이유는 사고 당시 누구의 음성이 녹음된 것인지 금방 알기 위해서다. 조종사들 간의 대화나 혼잣말, 그리고 관제탑과의 교신 내용이 저장된다. 또한 엔진 소음이나 기타 기계 소리도 저장되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 소리를 듣고 사고가 일어날 당시의 상황을 판단할 수 있다.
지난 93년 7월 26일 전남 해남군 운거산에 추락, 66명의 사망자를 낸 아시아나 보잉 737 여객기의 사고 원인은 조종사가 과실로 낮은 비행고도를 선택한 것이었다고 최종 확인됐다. 당시 CVR 해독 결과에 따르면 사고기가 추락하기 15초 전 기장이 부기장에게 계속 하강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보아 기장이 활주로를 육안으로 보기 위해 위험한 저공비행을 감행한 것으로 추정됐다.
기장은 부기장에게 "다 지나갔어?"라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진 뒤 "안되겠다. 밑으로, 더 밑으로"라고 다급하게 지시했다. 이에 대해 부기장은 죄송하다는 어조로 "들어온지 얼마 안되 가지고"라고 말했으며, 기장은 "OK, 고도 8백"이라고 말하자마자 "오! 맙(소사)"이라고 다급하게 외쳤다. 이후 8초간 엔진소리가 심하게 들린 뒤 "쾅" 소리와 함께 녹음이 끊겼다.
CVR은 크게 마이크로폰 모니터와 기록장치로 구성된다. 마이크로폰 모니터는 조종실의 소리가 입력되는 장치다. 대부분 기장과 부기장 사이 위쪽의 손 닿는 위치에 설치된다.
조종사는 탑승했을 때 시험 스위치를 눌러 이 모니터가 제대로 작동되나 시험한다. 바늘이 움직이거나 등불이 켜지면 정상이다. 만일 녹음된 내용을 지우려면 지움 스위치를 약 10초간 누른다. 물론 비행중에는 인위적으로 지울 수 없도록 설계됐다. 마이크로폰 모니터에 입력된 소리는 기체 뒷부분의 기록장치에서 저장된다. 이번 대한항공 사고기의 경우 기록장치는 테이프형이다. 흔히 사용하는 자기 녹음테이프의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기록장치를 작동시키는 스위치는 별도로 없다. 비행기에 전원이 들어오면 자동으로 작동된다. 테이프는 삭제, 녹음, 모니터로 구성된 3개의 헤드를 가진다. 녹음 시간은 30분. 30분이 지나면 삭제헤드가 테이프의 앞부분을 자동적으로 지운다. 녹음헤드에는 각 채널로부터 입력된 신호가 기록된다. 이 신호는 약 1초 후 모니터헤드에서 증폭된다.
초기의 기록장치는 음파의 변화를 자기장의 연속적인 변화로 표현한 형태(아날로그형)였다. 하지만 아날로그형은 중간에 잡음이 끼어드는 경우가 많아 깨끗한 데이터를 얻기 어렵다. 최근에는 일정한 시간마다 아날로그 신호값을 모으고 이를 2진 형태(0과 1)로 변환시킨 디지털형이 주로 사용된다. 디지털형은 모든 물리량을 2진수로 정확하게 저장하기 때문에 기록을 복원할 때 깨끗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전원이 끊기지 않는 이상 테이프가 계속 돌아가기 때문에 사고직전 조종실의 긴박한 상황을 생생히 전달한다. 대체로 가로 12.4cm, 세로 19.3cm, 길이 32cm 정도 크기의 직육면체 상자에 담겨 있다. 미국의 경우 CVR은 1967년 7월부터 민간항공기에 의무적으로 설치돼 왔다. 최근에는 테이프 대신 컴퓨터 메모리칩을 사용함으로써 녹음 시간을 2시간 이상 대폭 연장한 것도 있다.
다. 비행기록장치 - 통합 데이터 시스템 에이즈의 일부
지난 94년 8월 10일 제주도 공항에 착륙하던 대한항공기가 활주로를 이탈한 사고가 발생했다. 비행기는 활주로 끝을 3백여m 벗어나 공항시설을 들이받고 배수로에 박힌 뒤 멈췄는데,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8월 27일 교통부는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고의 원인은 비행기가 정상적인 속도를 훨씬 초과해 착륙을 시도한 점이었다. 즉 사고기는 정상 접지지점(활주로 끝에서 약 3백m 지점)에서 1천4백여m 벗어난 1천7백73m 지점에서 접지했다.
또 착륙속도가 적정 속도(2백65km/시)를 크게 초과한 속도(3백33km/시)였다. 블랙박스의 하나인 FDR을 해독함으로써 밝혀진 사실이었다. FDR은 비행기 내 각종 기계의 상태를 기록함으로써 사고가 발생한 시점에 비행기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종합적으로 알려주는 장치다. 초기에는 몇가지의 주요 기본 사항(비행기의 고도, 속도, 기수방향, 수직가속도 등)만이 기록됐지만, 비행기가 대형화되고 내부 장치가 복잡해지면서 현재는 3백개 이상의 데이터를 체크하도록 발전했다.
FDR은 비행기 내의 모든 데이터가 수록되는 항공통합 데이터시스템인 에이즈(AIDS, Aircraft Intergrafted Data System)의 일부다. 에이즈는 크게 비행데이터등록계기판(FDEP, Flight Data Entry Panel), 3축가속도계(Three axis accelerometer), 비행데이터습득장치(FDAU, Flight Data Acquisition Unit), 그리고 FDR로 구성된다. 정상적인 비행을 마쳤을 때 항공사는 에이즈에 저장된 모든 데이터를 일상적으로 점검한다. FDEP는 조종실 내에 장치돼 있다. 비행을 시작하기 전 승무원이 비행날짜, 항공회사 식별기호, 비행편명, 이륙할 때 비행기에 가해지는 무게 등을 기록한다.
3축가속도계는 기체 중심부에 부착돼 있다. 상하방향의 수직축, 전후방향의 세로축, 그리고 좌우방향의 가로축을 따라 비행기가 어떤 가속도로 움직이는지를 기록한다. FEDP와 3축가속도계에 기록된 데이터는 FDAU로 전달된다. 이외에도 FDAU는 비행기 곳곳에 설치된 대부분의 기계 장치들과 센서로 연결돼 있어 실질적으로 비행기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기록하는 역할을 맡는다.
블랙박스 FDR은 FDAU로부터 일부 중요한 데이터를 전달받는다. 엔진이 언제부터 어느 정도로 과열됐는지, 조종사가 랜딩기어를 어느 지점에서 내렸는지, 뒷날개 꼬리 각도는 얼마였는지, 조종사가 자동 장치로 운행했는지와 같이 사고 원인을 알려주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데이터를 기록한다. 이번에 추락한 대한항공기의 FDR에는 42개의 자료가 저장돼 있었다.
흔히 사용되는 기록장치는 디지털 형태로 저장되는 테이프형이다. 수십분의 1초 수준에서 각종 데이터를 기록하며, 25시간이 지나면 앞의 내용을 자동으로 지우고 새로운 내용을 다시 저장한다. 대체로 가로 12.4cm, 세로 19.3cm, 길이 49.8cm의 직육면체 상자에 담겨있다.
미국의 경우 1958년 7월부터 민간항공기에 의무적으로 설치돼 왔다. 최근에는 테이프 대신 컴퓨터 메모리 칩을 이용해 데이터 종류와 저장 시간을 늘리고 있다.
라. 시뮬레이션 이용한 해독 - 누구 책임이 큰지 판단 어려워
이번 사고의 경우 블랙박스를 해독하는 일은 미국의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가 맡았다. 회수한 CVR과 FDR로부터 테이프를 꺼내고 이들에 저장된 기초 데이터(raw data)를 뽑아내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FDR의 경우 디지털 신호로 저장된 데이터를 변환기를 통해 아날로그 형태로 바꾸면 그래프로 나타난다. 즉 각 시간별로 비행기의 고도와 기수방향 등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CVR에 저장된 녹음내용은 이보다 쉽게 재현시킬 수 있다.
다음 단계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다. 블랙박스에서 얻은 기초 데이터를 컴퓨터에 입력한 후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과 사고 순간을 3차원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재현시키는 작업이다. 블랙박스 회수에서 이 단계까지 소요 시간은 길어야 몇주일 정도.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번 사고의 경우 블랙박스의 정체가 완전히 보고서 형태로 공개되기까지 길게는 1년까지 걸릴지 모른다고 전망한다. 왜 그럴까.
비행기가 사고 직전에 어떤 상황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어도 그 직접적인 원인을 단정짓기는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이번 사고의 경우 활주로가 아닌 곳에서 급히 하강한 사실이 확인되더라도 과연 그 원인이 무엇인지, 즉 관제탑의 잘못인지, 비행기 기계의 결함인지, 아니면 조종사의 실수인지를 가려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관련자들이 책임을 지는 정도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한쪽에서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검사과정에 이의를 제기하면 조사는 다시 시작될 수밖에 없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블랙박스는 '그럴듯한 원인'(probable cause)을 제공할 뿐이지 만능의 해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FDR에서 얻은 데이터가 실제로 그렇게 깨끗한 형태로 보존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또 사고가 발생했을 때 CVR의 전원장치가 계속 작동함으로써 녹음내용이 모두 지워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블랙박스의 '한계'는 단지 기술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블랙박스 내용이 사람들에게 많은 혼란을 준다고 판단될 경우 조사단이 의도적으로 공개를 늦추거나 기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CVR의 경우 녹음 내용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라도 다양한 해석을 시도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국 의회는 연방교통안전위원회로 하여금 CVR의 기록 내용을 공개하지 말도록 요구할 수 있다. 연방교통안전위원회로서는 결과에 대한 논란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을 확보하려고 애쓸 것이다. 블랙박스 내용을 조작해 왜곡시킬 가능성은 없을까. 지난 83년 9월 1일 사할린 해상에 추락한 대한항공 007기 사건은 이런 의혹을 떠올리게 한다.
최근 러시아 일간지 '투르드'는 한 제보자의 말을 인용해 "소련공군이 격추시켰다고 공식발표한 비행기는 대한항공기가 아닌 미국 무인첩보기"이며 "대한항공기 블랙박스기록은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당시 소련 공군기가 대한항공기에 비상신호를 보냈지만 CVR에는 그런 신호를 받았다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또 소련공군의 레이다에 기록된 대한항공기 격추 시간 약간 후에 대한항공기 조종사가 일본 관제소와 '무사히' 교신한 음성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 제보자는 당시 소련측이 대한항공기의 CVR 내용과 미국 무인첩보기의 FDR 내용을 합친 뒤 이를 대한항공기 블랙박스 내용으로 조작했을 것이라 추측했다. |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