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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역사
백제의 건국과 한성 시대
*백제 역사의 기원
*국가를 정비한 고이왕
*영토를 확장한 근초고왕
웅진 시대의 백제
사비 시대의 백제
백제의 건국과 한성 시대
[백제의 근국왕 온조왕 1년(BC 18년)부터~21대 개로왕 21년(AD 475년)까지의 493년간]
백제 역사의 기원
백제의 역사는 기원전 18년부터 시작된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는 온조(溫祚)왕이 백제를 건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건국에 관한 기록은 부여. 고구려. 신라의 건국설화에 비하여 신화적인 요소가 적고, 온조와 비류의 출생이나 성장담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건국 과정에 집중되어 있다.
백제 건국에 관한 기록들은 여러 곳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즉위조와 《삼국유사》 남부여조, 그리고 중국 사서인 《수서》 열전, 동이 백제조와 《북사》 열전, 백제조가 대표적이다. 또한 일본 역사서인 《속 일본기》, 환무천황조에도 백제 태조가 도모대왕(都慕大王)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이 기록들은 백제의 시조를 온조설(溫祚說), 비류설(沸流說), 구대설(仇台說), 도모설(都慕說) 등 각기 다른 전승으로 설명하고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 첫 머리의 본문과 할주(割註)에 전하는 백제 건국설화는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이면서도 내용상 차이점이 보인다. 다만 두 기록은 공통적으로 백제 건국 세력이 부여계 유이민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국호의 변화는 백제의 성장과정을 보여 준다.
즉 처음의 국호 십제(十濟)를 백제(百濟)로 바꾼 시기는 미추홀에 남아 있던 비류세력이 귀속해 오고 마한의 일부인 백제(伯濟) 세력을 정벌해 통합했을 때로, 보다 넓은 의미의 백제(百濟)로 국호를 바꾼 것이다.
그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는데,
돌아올 때 백성들이 즐겁게 따라왔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위의 기록에서 백제 국호의 유래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국호의 변화는 백제가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 집단으로서 토착 세력과 결합하여 국가를 이룸으로써 복합성이 강한 사회의 성격을 띠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국가를 정비한 고이왕(古爾王)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으로서 토착적 기반인 마한 세력을 융합해 백제를 건국한 온조는 시조로서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우리는 제도를 정비해 백제의 고대 국가 체제를 다듬은 고이왕(古爾王)에 주목해야 한다. 고이왕은 백제 제8대 왕으로 시조 온조왕과 다루왕(多婁王) . 기루왕(己婁王). 개루왕(蓋婁王). 초고왕(肖古王) . 구수왕(仇首王) . 사반왕(沙伴王)에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볼 때, 고이왕(재위: 234∼286)이 즉위한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온조왕 이후 즉위한 왕들은 전부 선왕의 맏아들이었다. 그러나 고이왕은 사반왕의 아들이 아니라 5대 왕인 초고왕의 형제였다. 그러나 고이왕은 초고왕과 어머니가 같을 뿐 아버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즉 사반왕의 삼촌이 되는 고이왕은 백제 왕실의 정통을 가진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다. 따라서 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고이왕은 친정 체제를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고이왕은 5년 봄 정월 천지(天地)에 제사 지내면서 고취(鼓吹) 등의 악기를 사용해 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또 재위 10년과 14년 봄에도 큰 제단을 설치하여 천지와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제사라는 것은 하늘 또는 조상으로부터 신성성을 부여받은 일종의 의례였다. 왕들은 이를 통해 체제의 안정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통합에도 노력하였다. 따라서 고대의 제사란 조상이나 천지에 대해 단순한 숭배 이상의 정치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또한 고이왕은 경제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보여 농업 생산력을 증대하기 위해 진펄을 개간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한편 고이왕대에 신라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백제와 신라의 적대적인 관계가 서막을 올리게 되었다. 고이왕은 재위 27년에 이르러 제도 정비를 단행하였다. 이는 백제가 고구려와 신라 등 삼국 가운데 가장 빨리 제도를 정비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록이 실린 《삼국사기》의 신빙성에 의문을 품는 학자도 있으므로, 그 진실성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고이왕이 정비한 제도는 이후 성왕(聖王)대에 일부 개편되었지만, 백제 관직 제도의 시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이왕은 재위 53년 만에 세상을 떴다. 그의 업적은 나라의 기틀을 세운 시조 온조왕의 치적에 버금가는 것으로, 그는 나라의 발판을 마련한 수성(守成)의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영토를 확장한 근초고왕
백제사에 있어 고구려 광개토왕과 같은 업적을 남긴 왕이 있다면, 그것은 근초고왕(近肖古王)일 것이다. 근초고왕(346~375년)은 백제의 제13대 왕이며, 비류왕(比流王)의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그는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근초고왕은 재위 24년(369) 고구려 공격을 개시로 영토 확장 전쟁에 나섰다. 고구려가 공습하면서 시작된 전쟁이었지만, 근초고왕은 오히려 근구수(近仇首) 태자를 보내 고구려군을 역습, 격파하였다. 그리고 2년 후인 371년에는 근초고왕이 몸소 태자와 함께 정병 3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근초고왕대에는 영토 확장과 더불어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삼국사기》 근초고왕조의 말미에는 “백제가 나라를 창건한 이래 문자로서 일을 기록한 것이 없었는데, 이때에 와서 박사 고흥(博士 高興)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가 있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서기’가 역사책의 고유 이름인지, 혹은 역사의 기록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인지는 몰라도 근초고왕대에 비로소 문자로 기록된 역사책을 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고구려에서는 제26대 영양왕(嬰陽王) 때 이문진(李文眞)이 《유기(留記: 고구려 역사책》를 정리하였다.
물론 그 이전의 역사 기록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제24대 진흥왕(眞興王) 때, 거칠부(居柒夫)를 시켜 《국사》를 편찬하였다. 역사를 편찬하는 일은 그 이전의 역사를 정리함으로써 자신의 정당화에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근초고왕대의 역사서 편찬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근초고왕은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공격해 온 고구려에게 수곡성(지금의 황해도 신계)을 빼앗겼다. 그 뒤 이를 보복하려고 다시 군사를 일으키려 했지만 흉년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고, 근초고왕은 재위 30년 겨울 11월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백제 21대 개로왕(蓋鹵王, 455~475년)은 한성 시대의 마지막 왕이다. 백제는 개로왕 21년 고구려 20대 장수왕(長壽王)의 공격을 받아 수도를 함락당한 뒤 웅진(熊津)으로 천도(遷都)함으로써 백제사에 있어 가장 큰 고비를 맞게 되었다.
백제 근초고왕에게 고국원왕을 잃은 고구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백제에 대한 복수의 날을 갈았으며, 백제는 고구려 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때 이후 수세에 몰렸다.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재위 15년에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자 그 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고구려는 치밀하게 백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수왕은 476년 백제를 공격하기 이전에 백제에 가서 간첩 노릇을 할 사람을 구했다. 당시 간첩으로 활동하던 인물 가운데는 승려들이 많았다. 이때에도 승려 도림(道琳)이 자원하였다. 이에 장수왕은 도림을 백제로 보냈다. 도림은 개로왕의 마음을 사로잡을 묘책을 가지고 있었다. 개로왕이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개로왕을 만나 신임을 얻게 된 도림은 백제를 위하는 일이라며 몇 가지를 건의하였다. 이웃 나라들이 엿보지 못하도록 굉장한 기세로 호화롭게 성(城)과 궁궐을 수리하고, 선왕의 묘소를 잘 정비해 둑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도림의 계획을 알지 못한 개로왕은 백성을 모두 징발하여 성을 쌓고, 웅장하고 화려한 궁실·누각·정자를 지었다.
이처럼 대규모 역사를 벌임으로써 백제의 국고는 텅 비게 되었고 백성은 곤궁해졌다. 백제는 마치 알을 쌓아놓은 듯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 고구려로 돌아온 도림에게 백제의 상황을 전해들은 장수왕은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때가 개로왕 21년 9월이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개로왕은 고구려의 첩자 도림의 말을 믿은 것을 후회하였다. 그리고는 동생 문주(文周)에게 신라로 가서 왕통을 보전하고 청원군을 요청할 것을 부탁하였다. 개로왕의 말대로 문주는 목협만치(木劦滿致). 조미걸취(祖彌桀取) 등과 함께 남쪽으로 떠났다.
이제 백제의 도읍 한성은 함락되었다. 개로왕(蓋鹵王)은 예전에 죄를 짓고 도망갔던 걸루(桀累)와 만년(萬年) 등 백제 출신의 고구려 장수에 의해 아차성(阿且城) 밑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한성이 함락되고, 왕이 죽었으며, 8천여 명이나 되는 백성이 고구려로 끌려가는 등 백제 전체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 문주(文周)를 비롯한 대신들이 신라에서 구원병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옴으로써 고구려 군대는 물러났고, 백제 왕실은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웅진 시대의 백제
22대 문주왕 1년(475년) 웅진으로 수도를 옮겨서 26대 성왕 16년(538년)에 사비성으로 천도할 때까지 63년간.
백제 제22대 문주왕(文周王, 475~477년)은 개로가 왕위에 오를 때, 그를 보좌하여 상좌평(上佐平)에까지 올랐기 때문에 이미 정치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우유부단하였다. 폐허가 되어 고구려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는 한성에서의 생활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문주왕은 즉위한 해 10월에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웅진은 북으로는 차령산맥과 금강(錦江)으로 외부와 차단되어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가로막고 있어 고구려의 남침을 막을 수 있는 천연적인 방어의 요충지였다. 또한 한강을 대신한 금강은 서해로 통하는 유일의 내륙 수로로 수륙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호남. 내포평야를 끼고 있어 한강 유역을 잃은 백제가 제2의 수도로 정할만한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웅진은 문주왕 원년에 수도로 정해져서 삼근왕·동성왕·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 부여의 사비성으로 천도하기까지 5대 64년간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웅진으로의 천도는 세밀하게 계획된 것이 아니라 난을 피한 갑작스러운 것이었으므로 웅진 도읍기 초기의 정치적 상황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문주왕 이후 즉위한 23대 삼근왕(三斤王)은 해구(解仇)의 반란을 제압한 이듬해에 죽는다.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없으나,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었던 것만은 추측할 수 있다. 16살의 나이에 죽은 삼근왕은 후사가 없었다. 결국 왕위는 24대 동성왕(東城王, 479~500년)에게로 돌아갔다.
동성왕은 문주왕의 아우 곤지(昆支)의 아들이다. 고구려의 침입을 피해 남쪽으로 수도를 옮긴 백제 왕실은 천도 초기의 불안정을 타개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삼근왕대의 정변을 수습하며 즉위한 동성왕은 정치적인 안정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지방의 유력 세력들과 연대를 도모하였다.
실추된 왕권 강화를 위해 재위 12년에는 남조와 통교를 재개하여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고, 15년에는 신라의 이찬(伊湌) 비지(比智)의 딸과 결혼하여 고구려에 대해 나·제 동맹 체제(羅濟同盟體制)를 구축하게 된다. 신라가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시해하기 전까지 두 나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웅진 도읍기 초기 왕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은 동성왕의 적극적인 정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성왕은 점차 정사를 등한시하게 되었다. 백성들을 구제하자는 신하들의 건의는 듣지 않은 채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우고 연회를 즐겼다.
동성왕의 말로는 예견된 것이었다. 재위 23년 11월 사냥을 하던 동성왕은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 위사좌평인 백가(苩加)가 사람을 시켜 왕을 시해하였다. 백가는 좌천되어 가림성으로 파견된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웅진(熊津) 천도 후 왕들의 계속된 죽음으로 인해 정치권은 계속 동요하였다. 이를 탈출할 돌파구가 필요했는데, 그것은 도읍을 옮기는 것이었다. 웅진은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있어 방어하기에는 편리했으나 밖으로 진출해 나가기 어려운 지형이었고, 한 나라의 수도로서도 협소했다.
따라서 중흥을 위한 새로운 역사의 중심지가 필요했다. 동성왕에 이어 즉위한 25대 무령왕(武寧王, 501~523년)과 성왕(聖王, 523~554년)대의 안정을 기반으로 백제는 재도약의 기회를 노릴 수 있었다. 무령왕은 백가에 의해 시해된 동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는데, “신장이 8척이고 성격이 인자하여 백성들의 인심을 얻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무령왕 즉위 후 동성왕을 시해한 백가가 다시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무령왕은 우두성의 한솔(扞率) 해명(解明)을 시켜 백가를 잡아 그의 목을 베어 백강(白江)에 던졌다. 무령왕은 즉위하면서 고구려와 여러 번 충돌하였다. 그러나 재위 21년(521)에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표문을 올려 “여러 번 고구려를 격파하여 비로소 그들과 우호관계를 맺어서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이는 웅진 천도 후의 불안을 어느 정도 수습한 자신에 찬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무령왕은 양『梁>전국시대 위(魏)나라의 별칭』 나라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이란 직함을 받는다. 왕이 재위 23년 만에 죽자 그의 시호는 무령(武寧)이 되었다.
사비시대(泗沘時代)의 백제
(26대 성왕 16년(538년)부터 27대 위덕왕, 28대 해왕, 29대 법왕, 30대 무왕, 그리고 백제의 마지막 왕인 31대 의자왕 20년(660년)까지의 122년간을 말한다.)
무령왕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명농(明穠)이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성왕(聖王, 523~554년)이다. 성왕은 재위 16년 봄에 사비(泗沘: 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에 해당)로 수도를 옮기고 남부여(南扶餘)로 국호를 개칭하였다. 백제 건국설화에서처럼 백제의 출발점이 부여였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사비(泗沘)로 천도한 것은 22대 문주왕(文周왕) 때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것과는 달랐다. 금강 가에 위치해 산으로 둘러싸인 사비는 방어에도 적합하였을 뿐 아니라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서 호남평야를 경영하고 가야 지방으로 진출하는 데도 유리하였다.
사비 천도는 26대 성왕(聖王) 때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이전의 왕들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다. 성왕은 부소산(扶蘇山) 남쪽에 왕궁을 마련하고 부여의 외곽에 나성(羅城)을 쌓아 본격적인 도성의 모습을 갖추었다. 성왕은 고구려의 공격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그러나 적은 바로 뒤에 있었다. 성왕이 고구려의 남하에 긴장하며 이를 격퇴시키고 있을 때 정작 백제를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다름 아닌 우방 신라였다. 백제 동성왕은 신라 왕실과 혼인을 맺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믿었지만, 백제가 고구려와 접전을 벌이고 있을 때인 성왕 31년 신라는 오히려 동쪽 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이에 성왕은 분노를 감춘 채 딸을 신라에 시집보내 관계를 호전시키고, 신라를 방심시키려 했다. 그리고는 이듬해인 32년 7월 신라를 습격하였다. 성왕은 친히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신라에 이르렀으나, 도리어 숨어 있던 신라의 복병에게 역습을 당하여 관산성(管山城: 지금의 옥천)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비로 천도하면서 새롭게 정치 체제를 정비하고 고구려에 의해 멸망한 부여의 부활을 꿈꾸며 남부여로 국호를 개칭했던 성왕은 중흥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성왕이 관산성에서 죽은 뒤 즉위한 그의 맏아들 위덕왕(威德王, 554~598년)은 신라에 대한 복수를 도모하다가 승하하였다. 그리고 동생 혜왕(惠王, 598~599년)은 즉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혜왕의 아들 법왕(法王, 599~600년)도 왕흥사(王興寺: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를 창립하고 불교를 중흥시키는 등 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였으나 2년 만에 승하하였다. 법왕의 아들로 서동 설화의 주인공인 무왕(武王, 600~641년)은 익산(益山) 경영에 힘쓰면서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무왕(武王, ?~641)의 뒤를 이은 것이 백제의 마지막 왕인 31대 의자왕(義慈王)이다. 의자왕은 그 자질이 출중하여 즉위 초기에는 정사를 잘 운영하였다. 그는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히려 이러한 대담함과 결단성이 독선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한다.
의자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중국과 외교관계를 다졌다.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지방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죄수들을 재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하였다. 이러한 대화합의 분위기 속에서 의자왕은 적극적으로 신라를 공격하였다. 즉위 2년 가을에는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40여 성을 항복시켰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은 의자왕은 다시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신라의 대야성을 쳤다.
대야성(大耶城)의 성주 품석(品釋, ?~ 642(선덕왕 11)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하였으나, 윤충은 그들을 모조리 죽이고 품석의 목을 베어 왕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남녀 포로 8천여 명을 사로잡아 귀향하였다. 이 사건은 신라인의 분노를 일으켰다. 품석의 아내는 바로 신라의 실권자인 김춘추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의자왕의 공격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러자 신라의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의자왕 11년 당나라의 고종은 백제에 내린 조서를 통해 신라와의 전쟁을 중단할 것을 경고하였다. 이러한 당의 엄중한 경고에 의자왕은 전쟁을 그치는 듯하였다.
그러나 의자왕 15년 다시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격파하였다. 신라전에서의 승리에 취한 의자왕은 궁녀들을 데리고 놀며 음란과 향락을 가까이 하였다. 왕을 지켜보던 성충(成忠, ?~656)은 이를 말리다가 오히려 감옥에 갇혔다. 신하들의 충언은 듣지 않고 직언하는 자를 오히려 감옥에 가두게 되자, 왕의 실정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의자왕의 이러한 실정은 백제의 비극적인 운명을 초래하였다. 백제의 혼란을 암시하듯 여러 가지 괴이한 징조들이 나타났다. 어느 날에는 귀신이 대궐 안으로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다가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했더니 거북 한 마리가 발견되었는데, 그 등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었다.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
(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
백제 왕실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당나라 고종은 신라에 조서를 보냈다. 작전 명령이 시작된 것이다. 당은 좌위대장군 소정방( (蘇定方, 592년 ~ 667년) 을 신구방면 행군 대총관으로 삼아 군사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고, 신라왕 김춘추(金春秋, 604~661)를 우이방면 행군 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세력을 합하도록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백제 조정은 나라의 국운을 놓고 회의를 열었다. 의견은 양분되었다.
이때 신라군을 막기 위해 전쟁터에 나간 장군이 계백(階伯)이다.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난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는 파죽의 기세로 공격해 왔다. 계백은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가 싸웠다. 신라군과 네 번을 싸워 모두 이겼으나, 계속되는 신라군의 공격에 힘이 모자라 마침내 패배하고 계백은 죽임을 당하였다. 이어 해로를 따라 상륙한 당의 소정방 부대가 도성에 육박하였다. 의자왕은 성충의 간언을 듣지 않은 것을 한탄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결국 당나라 깃발이 백제 성위에 세워지자 백제는 성문을 열고 모두 항복하였다. 북쪽 변경으로 도망갔던 의자왕과 태자, 왕자 및 대신들과 장사 88명, 주민 1만 2,807명은 당나라로 호송되었다. 의자왕의 실정은 많은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백제 역사에 비극적인 종말을 가져왔다. 의자왕은 결국 낯선 이국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백제인은 마지막까지 백제 부흥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무왕의 조카인 복신(福信, ?~663)은 승려 도침『道琛, 661년(문무왕 1)』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주류성에 웅거하면서 당나라에 항거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왕의 왕자였던 부여 풍(扶餘 豊: 의자왕의 아들)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그러나 둘 사이에 권력다툼이 일어나 복신이 부여 풍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도리어 계책을 눈치 챈 풍이 엄습하여 복신을 죽였다.
백제의 유민들은 고구려. 왜와 손잡고 당에 항거하였으나, 7천 명의 병력으로 당나라의 기세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당나라군과 신라 김법민(金法敏: 훗날 신라 문무왕)이 이끈 육군, 유인궤(劉仁軌: 당나라 무장)와 부여륭(扶餘隆, 615~682)이 이끈 수군이 동시에 공격해 들어오자 부여풍은 도망가고 말았다.
백제 달솔(達率)로서 풍달군(風達郡)의 군장이었던 흑치상지(黑齒常之: 백제 말기의 장군)도 3만여 명의 무리를 모아 소정방에 항거하였으나, 역시 항복하였다. 홀로 남아 대흥임존성(大興任存城: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에 있는 백제의 산성)에서 저항하던 지수신(遲受信: 백제 부흥 운동가)도 고구려로 도망갔다.
백제 부흥 운동은 소규모가 아니라 왕족과 장군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이 함께 한 것으로 고구려. 왜와도 연합된 것이었다. 그러나 지도부의 내분으로 실패하고 만다. 결국 백제는 전쟁터가 되어 집집마다 쇠락해지고 곳곳에 쓰러진 시체가 풀더미처럼 널렸다. 그러나 백제 부흥의 꿈은 부흥군의 좌절로 끝나지 않았다.
892년 견훤(甄萱, 867~936/후백제의 시조)이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한 것이다. 견훤이 국호를 후백제라고 칭한 것은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의 백제 유민에 대한 신라 정부의 차별대우에서 비롯된 반감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백제는 멸망했지만 백제 부흥의 꿈은 이어졌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백제 역사를 들려주고 있다.
[한성백제&웅진백제&사비백제] 천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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