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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림의 가을 비림 전경 비림의 계단과 소맷돌 비림계단의 소맷돌(우) 비림계단의 소맷돌(좌) 우측 소맷돌의 연호
◑ 송광사비림과 계단의 소맷돌
◉ 비 림 송광사 일주문 앞 우측 축대 위 넓게 정돈된 잔디밭에는 고승들의 치열한 삶에 의한 불도의 성취의 과정을 엄숙하게 새겨 놓았다 이곳이 송광사의 “비림”이다 비림은 전국 어느 사찰에서도 보기 드문 말 그대로 비석의 숲이다 특히 석 질이 좋아서 백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하나같이 부식이 없고 새까맣게 윤이 나며 또렷한 글씨는 아름다움과 기품을 더해준다. 이 앞에 서면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머뭇거리게 할지도 모른다. 글씨를 모르면 대수일까? 내용을 모르면 어떤가? 바라보는 모습이 아름답고 천년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을!…
◉ 비림의 연원 송광사의 일주문 앞 우측 약1.5m높이 축대 위 넓게 정돈 된 잔디밭에는 송광사를 대표하는 선승들의 일대를 새긴 17기의 석비들이 숲을 이루어 이곳을 “비림”이라고 부른다 중앙의 가장 뒤편 안쪽에 다른 비들보다 약간 규모가 큰 부휴대선사 비를 기준으로 하여 그 앞에 2열 횡으로 16기의 비들이 줄지어 엄숙하게 서 있다 그래서 송광사를 찾는 사람들은 일주문으로 들어서기 전에 엄숙하게 굽어보고 있는 대선사님들 분신의 숲 앞에서 저도 몰래 마음을 여미게 된다 그렇다면 이 비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숲을 이루기 시작하였을까? 천년의 고찰인 송광사의 역사에 비추어 그 연원이 몹시 궁금하여 근거를 찾아보았으나 명확한 기록이 없어 비문의 내용들과 비림조성에 관해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통해 정리해 본다 송광사에서 부르는 비림의 공식명칭은 “일주문 밖 신성비”(一柱門 外 新成碑)이다 공식명칭인 “新成碑”가 말해주듯이 비림은 “새로 조성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비문들을 조사해 보니 제일먼저 세운비가 일제강점기인 1918년으로 벽담 제운 두월 기봉 이봉 이상 5기이다 그러니까 1918년 5기를 시작으로 비림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송광사의 “일주문 밖 신성비” 조성에 관해 전해 오는 이야기는 맨 처음 5기를 입석할 때에는 현재와 같이 형태를 완전하게 갖춘 모습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림의 터와 축대 조성을 마친 후에 입석을 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터를 다듬어 첫 번째 입석을 마친 다음에 축대조성 등이 차차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당시 이곳에 새로운 비림의 조성을 두고 대중들 사이에는 반대의견이 높았으며 말이 없는 스님들은 거의가 반대의견을 가진 스님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이사업은 송광사를 이끌던 설월스님이 주지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고 송광사 제6중창을 시작하려던 무렵에 그의 강력한 추진력에 의해 시행되었다 대중들이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사중의 재력이 문제이기도 하였지만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지극히 보수적인 전통사찰에서 주지스님의 갑작스러운 밀어붙이기식 일종의 개혁을 스님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는 수 백 년을 내려오는 동안 일주문 앞에 선승(先僧)들의 비를 집단으로 세운 예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한 전통을 깬 갑작스러운 새로운 결정에 스님들이 동의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와 같은 형태는 일본식이라는 것 이었다 당시 송광사 선사들의 비는 부도암북원(보조국사비 사적비 백암비 용운비 묵암비)에 있었다 그러나 5기의 입석으로 신성비 터의 조성이 시작된 뒤에도 논쟁은 계속되었고 그중의 하나가 정통성이나 어떤 기준의 확립이 없는 점 이었다 그래서 2년 뒤인 1920년에 송광사계보의 중조인 부휴대선사 비를 가장 안(위)쪽에 세움으로서 신성비(비림)는 명분과 기틀 그리고 형태를 갖춘 것으로 판단이 된다 이렇게 설월스님이 비림의 축조를 완성하고 나서 1922년 주지의 임기를 만료하였으며 1923년 묵암선사의 비가 일곱 번째로 들어서게 되고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대선사님들의 비가 차례로 자리를 잡아 숲을 이루어 1993년 취봉선사의 비를 세워 현재 17기에 이른 것이다
◉ 비림계단의 소맷돌 송광사의 비림에는 아주 특별한 기물이 하나 있다 이 기물은 거대하거나 화려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그저 작은 돌덩이에 불과하다 다름이 아니라 “일주문 밖 신성비”(비림) 축대로 오르는 계단의 양측상단에 놓여 있는 소맷돌 즉 덮개돌이다 일주문 앞 불일서점과 마주보는 곳에 있는 비림으로 오르는 계단은 잔디밭까지의 높이가 약1.5m 이지만 계단이 있는 축대의 높이는 1.2m이며 지면으로부터 경사진 계단은 길이 2.2m 넓이 1.55m이다 양쪽에 올려 있는 소맷돌(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1.4m 안쪽을 향하고 있는 면의 중앙 폭은 우측 23.5cm 좌측 21cm로 우측이 약간 크며 두께에 해당하는 등의 넓이는 20cm이다 이 소맷돌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일반 암석을 다듬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이전에 비석으로 사용하였던 어떤 비(碑)를 재료로 하여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송광사를 찾는 대부분의 탐방객들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고 마는 이 소맷돌에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관련된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연이 담겨 있는 정말 특별한 기물이기에 함부로 말하기가 어려워 오랜 기간 망설였으나 근간에 이 소맷돌이 알려지면서 겉으로 들어나 있는 형태만을 보고 사실여부와는 관계없이 자의적인 해석과 감성에 치우친 판단으로 일방적 표현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 이로 인해 개인의 역사적 진실과 송광사(승려들)에 대하여 오해를 할 소지가 있다고 생각되어 올바른 판단에 도움을 주고자 비림의 소맷돌이 된 이 비의 주인에 대한 기록과 송광사와 인근에 전해 오는 이 비의 입석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 소맷돌의 형태 사진에서 보듯이 소맷돌(덮개돌)의 모습은 처음부터 목적에 맞게 잘 다듬어진 형태이다 이 소맷돌이 비석이라는 증거는 돌의 외형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좌우 안쪽 면을 보면 비문이 세로로 길게 잘려 반으로 나뉜 글씨가 밑 부분에 남아 있어 두 돌을 마주 붙이면 온전한 비문의 형태가 되도록 나뉘어 있다 그러나 다행히 마주 붙여 보지 않아도 주된 내용의 판별이 가능하도록 우측면에 있는 글씨가 조금 커서 비의 주인 이름이 이면상(李冕相)이고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한 송덕비임을 알 수 있으며 이 비를 입석한 해를 말하는 신묘년 팔월 일(辛卯年八月日)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형태로 보아 본래 이면상이란 사람의 비를 재료로 수준 높은 석공이 정 중앙을 세로로 정성껏 자른 다음 계단의 길이에 맞춰 등을 반달처럼 다듬어 소맷돌로 만들었음을 알 수가 있다
◉ 비주(碑主)의 인물 이면상 기록(암행어사 연보)으로 볼 수 있는 이면상은 조선헌종12년(1846) 출생하여 43세가 되던 고종26년(1889) 알성시에 급제하여 파격적으로 승정원우부승지에 임명되어 다음해에 대사간을 거쳐 1892(고종29)년 전라도암행어사로 임명되어 활약하고 같은 해에 영선사의 후신격인 제2대 주진독리로 6개월간 천진에 파견근무를 한 우리나라의 마지막 암행어사를 지낸 사람이다 전라도암행어사시절 백성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는 수령의 임기가 너무 짧으므로 3~6년으로 늘여야한다는 수령구임법(首領久任法)과 계방촌(契房村)의 폐해가 너무 심하므로 이를 혁파하여야 한다고 건의를 하였다는 업적과 그의 과오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몹시 재물을 탐하고 호기롭던 운봉의 향리 출신인 박문달을 잡아 가두고 뇌물(재산)을 빼앗으려고도 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계방촌: 조선시대 궁핍한 지방관청의 제정을 돕기 위해 군역 등을 면제해주는 대신 사적으로 돈이나 물자를 대신 거두는 마을) 한편 그의 1892(고종29 임진)년 윤 6월 11일 암행어사로서의 공식기록인 보고문서 내용을 보면 징벌의 추서로서 전전 광양현감 김두헌 등 17인 있고 찬양으로는 광주목사 등 11인이 이며 전직과 전 전직 그리고 현직, 목사 부사 군수 현감 첨사 찰방 현령 등 두루 균형 있는 감찰활동을 하였다는 행적을 보고서는 보여주고 있다
◉ 이면상 암행어사의 송덕비입석에 관한 증언과 기록 이면상어사 송덕비의 입석시기는 비문에 새겨진 대로 신묘년이므로 1891년이다 그러니까 필자가 태어난 해로부터는 60년 전이다 그래서 필자가 어린 시절에 당시 상황을 보았거나 직접 겪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드러내 놓고 하는 말은 아니었으나 당시의 송덕비에 관한 표현의 요지는 말세적 비판에 가까운 의미가 들어 있었다 당시의 어사송덕비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첫째 암행어사 왈패들이 수 십 명씩 몰려다니며 관민을 괴롭혔다. 둘째 어사가 내려오기도 전에 송광사에 송덕비를 세우라고 하여 어쩔 수없이 부랴부랴 세울 수밖에 없었다. 셋째는 암행어사가 남원운봉의 부자를 잡아가두고 물고를 내어 재물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넷째 어사가 가는 곳마다 관민들은 죽어났다> 이와 같은 내용들이었다 이런 내용들은 필자가 성장을 하여 스스로 판단을 하게 되었을 때도 표현에 약간의 차이를 느꼈을지는 몰라도 모두가 사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좀 더 넓게 이해할 수 있었던 부분은 어사자신의 행동보다는 촌로들이 왈패라고 불렀던 수행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주변사람들에 의해 도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민폐가 자행되었다는 사실이며 그와 같은 당시의 부패한 사회상이 서글프고 비참했던 우리역사의 한 단면이라는 인식이었다 여기에다 덧붙이자면 어사가 전라도암행이 결정되자 출발을 하기도 전부터 그가 들르게 될 모든 장소마다 미리 송덕비를 세우도록 강요하여 시간이 너무 촉박한 곳에서는 미처 석비를 세우지 못해 급하게 목비로라도 세웠다고 하니 그들의 횡포가 어떠하였는지는 짐작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선암사에는 그때의 목비가 있었다고 함) 이것을 증명해주는 근거가 소맷돌에 남아 있는 입석년도다 신묘년(1891)은 이면상이 전라도 암행어사로 왕명을 받고 출도 한 1892년보다 한해 먼저라는 사실이다
◉ 송광사의 이면상 어사송덕비 파비에 관한 추적 이면상어사송덕비가 송광사일주문 입구에 세워진 때가 1891년이라는 사실은 비문이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파비된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고 증언으로도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비림의 축조시기와 계단에 관한 증언, 소맷돌의 형태를 통해서 추정해 내는 수밖에 없다 송광사의 “일주문 밖 신성비”(비림)가 조성된 시기는 1918년이고 비림을 새로 조성할 때 송광사대중들 사이에 있었다는 명분과 찬반의 여론 그리고 진행과정에 대한 옛 스님들로부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최초로 비를 입석할 때는 축대가 현재와 같은 완전한 모습이 아니었고 두 번째 부휴선사의 비를 입석할 때인 1920년경에야 축대를 포함하여 비림의 모든 형태가 현재와 같이 온전한 모양을 갖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축대로 오르는 계단도 그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 한다 그 후 1930년대의 비림을 보았다는 노인의 말이 그때도 계단의 모습이 현재와 동일하였다하므로 1930년대 이전에 계단을 만든 것이 사실이므로 1920년도로 추정함에 무리가 없다 그러니까 외압에 의해 이면상 어사의 송덕비가 송광사일주문 앞에 세워진지 29년째 되는 해에 비림의 축대에 계단을 조성하면서 그 비를 거두어 소맷돌의 재료로 사용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 사찰에서 세운 비의 파비 우리나라에서 비는 장기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기록 수단의 하나다 그래서 국토의 곳곳에 수많은 비들이 세워 졌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파괴되어 사라져 버린 것 또한 무수히 많음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의 한 축이었던 사찰에서도 마찬가지다 각 사찰마다 중요한 일들을 비에 새겨 기록으로 남겼으나 파비되어 사라진 것들 또한 많다 세웠던 비가 사라진 예를 크게 나누면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전재지변 등 자연과 시간에 의한 파괴요 둘째는 국난이나 적대세력에 의한 고의적인 파괴이며 마지막은 스스로 파비하여 없애거나 다시세우는 경우이다 이어사의 송덕비는 세 번째에 해당하므로 스스로 파비하는 경우에 대해 살펴보자 사찰에서 비를 세우는 경우는 독립된 종교세계인 그들의 전통과 기준에 의해서 비를 세운다 사찰주변에 서 있는 비의 종류들을 보면 그 사찰과 관련된 창건비 중수비(중창비) 사적비 등이 있고 개인에 대한 비로서는 깨달음과 업적이 큰 스님의 일대를 새긴 비 또는 사부대중의 크고 작은 공덕을 알리는 공덕비 등이다 이러한 비를 세울 때에는 자체에서 사전에 대상뿐만 아이라 자료 내용가지도 엄격한 기준에 따른 심사를 하여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모든 비가 원칙에 합당하게 세워 질수만은 없다 그래서 시간이 지난 뒤에 어떤 비가 입석의 원칙에서 크게 위배된 시실이 발견될 때는 스스로 파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외압에 의해 세운 비 사사로움이 개입되어 비주의 선정에 큰 문제가 있었거나 입석 후에 커다란 잘못이 나타나는 경우, 비문의 내용에 수정이 불가할 정도로 큰 오류가 많은 비 손상이 심하거나 규모 등 새로운 품위로 다시 입석하려는 비 기타 그 사찰의 규정에 어긋난다고 새로운 평가를 받은 비 등 여러 요인들이 있다 송광사에 세웠다 파비한 이면상 어사의 송덕비도 그중의 하나이다
◉ 비림계단의 파비소맷돌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근래 들어 송광사비림계단의 파비소맷돌이 알려지면서 이를 대하는 탐방객들이 징악(懲惡)이라는 일방적인 생각과 그에 따른 자기표현을 공개적으로 하는 분들이 늘고 있다 그와 같은 현상은 소맷돌의 외형을 보며 악의 주인공 탐관오리의 분신인 송덕비를 선을 대표하는 주체가 통쾌하게 부숴 놓은 결과물일 것이라는 연상에서 오는 대리만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소맷돌의 외형만 보고서 두 주인공에 대하여 송광사(스님들)는 선이요 이면상 암행어사는 악이라는 일방적 분별의 대상으로만 보는(느끼는) 것은 당시 그 두 주체의 뜻과 행동에 담겨 있는 진실성에 대한 이해 부족이 오해를 만들어 당사자들에게 누를 끼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비림계단의 파비소맷돌에 대한 탐방객들의 판단을 돕기 위하여 비림의 조성역사와 소맷돌의 주인 이면상어사에 대하여 대략의 설명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이 소맷돌과 관련하여 두 주체에 대한 자존심의 침해까지 생각한다면 좀 더 큰 틀에서 생각하고 이해해야 할 필요와 사실적 근거가 담겨있다 먼저 징악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면상어사 개인의 인물 됨됨이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지만 공인으로서의 행적을 보면 당시 그의 패거리들에 의해 지방관이나 백성들이 많은 핍박과 고통을 받아 나쁜 탐관으로 원망의 대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의 공식기록은 거의 그의 업적만 기록되어 역사로 남아 있다 그래서 후대가 그를 평가할 때 공인으로서 본인뿐만 아니라 그가 통솔한 모든 사람들의 과실까지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개인을 평가할 때 묵인의 존재와 어디까지를 사회의 책임으로 이해해 주어야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평가의 주체인 기록이라는 정사의 큰 힘이 갖고 있는 모호성이 그 틀 속으로 백성들이 겪은 진실까지 흡수하며 뛰어 넘어 버리는 언젠가는 묻혀버리기도 하는 야사의 한계가 거기에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모순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모순이 존재하듯이 우리나라마지막어사의 공적까지도 소맷돌에 남아 있는 흔적만으로 분별없이 자신의 순간적 감정이 끌리는 데로 선의 편에 서서 악의 대명사로 표현하며 자기만족을 채운다고 하면 정사만을 믿고 있는 그의 후손과는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충돌과 스스로 같은 이론의 모순에 빠지는 결과가 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선의 주체로 삼(보려)는 송광사에 대한 입장이다 탐방객들이 파비소맷돌을 보고 선과 악으로 분별하여 송광사(스님들)를 선의 주체로 놓는 것은 본질도 원함도 아니요 오히려 송광사를 크게 부끄럽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당시스님들의 행동을 악을 악으로 갚는 보복의 행위로 결론지어 생각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선 탐관이라고 생각하는 이면상어사의 비가 부숴 졌다는 측면만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탐방객들이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탐관의 비를 깨부숴버렸다는 파비와 스님들이 파비하여 비림계단의 소맷돌로 사용한 파비와는 부쉈다는 말의 뜻만 같을 뿐 그 본질은 완전히 다름을 이해하여야 한다 앞서 사찰의 파비에서 말한 것처럼 이면상 어사의 송덕비는 송광사의 뜻에 맞지 않게 세워졌기 때문에 파비되었을 뿐 탐방객들이 통쾌하게 느껴야할 이유나 스님들의 보복의 감정은 전혀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구구하지만 파비의 과정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파비(破碑)는 글자의 뜻은 ‘비를 부수다’ 이지만 파(破)의 의미는 부수다가 아니라 비를 거둔다는 말이다 이면상 어사의 송덕비가 사찰의 입석규정에 어긋난 점은 새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언젠가는 당연히 파비가 되어야 할 몸으로 태어났기에 그 조건이 성숙된 때에 파비되었을 뿐인 것이다 물론 입석으로부터 29년 후에 소맷돌로 사용되었으므로 그 해에 파비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찰에서 파비를 하는 경우 비에 따라 조치하는 경우가 다르다 나누어 보면 조건과 경우에 따라서 보관(탁본)하거나 그대로 묻는 경우 부숴 버리는 경우 재활용하는 경우 등이 있다 절에서 재물을 대하는 근본이 극단의 절약인 것처럼 파비도 가능하면 재활용 하는 것이 일상이므로 소맷돌로 재활용되었음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전혀 없다 분만 아니라 파비는 하나의 돌로서 전신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두는 것은 속가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용처에 대해서도 하나의 폐석일 뿐 탐방객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종교적 관점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어사비의 파비시기와 비림계단의 조성시기가 우연히 맞았을 뿐이다 만약 탐방객들의 생각처럼 파비에 보복의 성격이 포함되었다면 당연히 산산이 부숴 버렸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불교의 깊이를 너무 모른 세속중심의 생각이 아닌가 싶다 송광사비림 계단의 소맷돌을 보고 권선징악의 마음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드라도 깊은 뜻을 알지 못해 스스로의 마음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一柱門 밖 新成碑 配置圖
①
부휴대선사비 (浮休大禪師碑)
② ③ ④ ⑤ ⑥ ⑦ ⑧ ⑨ ⑩
취봉대선사비 이봉대선사비 기봉대선사비 두월대종사비 묵암대선사비 제운대선사비 벽담대종사비 금용일섭불모비 향봉대선사비 (翠峰大禪師) (离峯大禪師) (奇峰大禪師) (斗月大宗師) (黙庵大禪師) (霽雲大禪師) (碧潭大宗師) (金蓉日燮佛母) (香峰大禪師)
⑪ ⑫ ⑬ ⑭ ⑮ ⑯ ⑰
금명대종사비 용호대선사비 대우대선사비 용운대종사비 환해대선사비 기산대종사비 율암대종사비 (錦溟大宗師) (龍湖大禪師) (大愚大禪師) (龍雲大宗師) (幻海大禪師) (綺山大宗師) (栗庵大宗師)
◈ 碑主 略歷 (❶ 법호. ❷ 법휘. ❸ 생몰. ❹ 세수 ❺ 법랍.❻ 출생지. ❼ 속 성명. ❽ 입석.) 1. ❶ 浮休 ❷ 善修 ❸ 1543.2.3.~1615.11.1 ❹ 73 ❺ 57 ❻ 남원 오수 ❼ 金(**) ❽1920. 4 2. ❶ 翠峰 ❷ 昌燮 ❸ 1898.8.29~1983.6.28 ❹ 86 ❺ 70 ❻ 하동 화개 ❼ 林昌燮 ❽ 1993. 3 3. ❶ 离峯 ❷ 樂玹 ❸ 1804~1890.2.12 ❹ 87 ❺ 74 ❻ 나주 ❼ 金(**) ❽ 1918 4. ❶ 奇峰 ❷ 藏旿 ❸ 1776.10.2~1853.8.16 ❹ 78 ❺ 62 ❻ 남원(전주,화순) ❼ 崔(**) ❽ 1918 5. ❶ 斗月 ❷ 禹洪 ❸ 1744.3.5~1816.11.21 ❹ 73 ❺ 58 ❻ 순천 송광 장안 ❼ 金(광산) ❽ 1918 6. ❶ 黙庵 ❷ 最訥 ❸ 1717.4.18~1790.4.27 ❹ 73 ❺ 54 ❻ 고흥 대서 ❼ 朴(밀양) ❽ 1923. 봄 7. ❶ 霽雲 ❷ 海澄 ❸ 1719.10.13~1804.10.6 ❹ 86 ❺ 69 ❻ 순천 송광 내오 ❼ 諸(칠원) ❽ 1918 8 ❶ 碧潭 ❷ 幸仁 ❸ 1721.2.16~1798.9.29 ❹ 78 ❺ 65 ❻ 경남가지면 삼거리 ❼ 張(**) ❽ 1918 9. ❶ 金蓉 ❷ 日燮 ❸ 1900.12.18~1975.3.27 ❹ 75 ❺ 51 ❻ 보성 문덕 덕치 ❼ 金甲炳 ❽ 1991.9.15 10 ❶ 香峰 ❷ - ❸ 1905.5.16~ 1983.5.31 ❹ 83 ❺ 44 ❻ 보성 조성 축내 ❼ 任普極 ❽ 1995.4.19 11 ❶ 錦溟 ❷ 寶鼎 ❸ 1861.1.19~1930.2.13 ❹ 70 ❺ 55 ❻ 순천 주암 비룡 ❼ 金(김해) ❽ 1942. 2 12 ❶ 龍湖 ❷ 德云 ❸ ❹ ❺ ❻ ❼ 宋德云 ❽ 1935. 4. 13 ❶ 大愚 ❷ 錦秋 ❸ 1875.6.20~1949.6.13 ❹ 72 ❺ 56 ❻ 고흥 과역 분천 ❼ 林(**) ❽ 1919 - 14 ❶ 龍雲 ❷ 處益 ❸ 1813.10.7~1888.5.5 ❹ 76 ❺ 61 ❻ 곡성 통명리 ❼ 李(완산) ❽ 1924 15 ❶ 幻海 ❷ 法璘 ❸ 1749~ 1820.5.2 ❹ 72 ❺56 ❻ 고흥 분천리 ❼ 林(**) ❽ 1919 16 ❶ 綺山 ❷ 錫珍 ❸ 1892.5.19~1968.5.15 ❹ 77 ❺ 65 ❻ 순천 송광 장안 ❼ 임(나주) ❽ 1973. 4. 17 ❶ 栗庵 ❷ 贊儀 ❸ 1867.10.4~1929.4.29 ❹ 63 ❺ 48 ❻ 여천 율촌 ❼ 金(김해) ❽
<참고: 비문 송광사지 송광사박물관장 고경스님 외송마을 최성희어르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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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날이갈수록 어록들이 쌓여가는 울 연구소가 너무나 자랑스럽고 행복 합니다...^^*
한글 한글 모두다 의미를 두어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글자도 버릴게없으며 우리나라 어디에도 없는 순수 창작한 연구자료 이기에 더욱 기쁨이 넘치옵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저기 우리 고조할아버지 비도 보입니다
11번째입니다
정말 감사하게 자료 읽었습니다^^*
송광사 선암사에 관한 자료 내용이 너무 좋습니다